그랜드 호텔 대산세계문학총서 145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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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빈의 부르주아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나 잘 자란 작가 비키 바움. 오케스트라의 하피스트로 활약하며 독일로 이주해 음악활동을 계속 했단다. susanbkason.com에 의하면, 아이들을 재운 다음에야 조금씩 글을 써서 발표했다고 한다. 바로 이 책 <그랜드 호텔>을 써서 세계적인 스타덤에 할리우드에 진출을 했으며, 거기서 정말로 미합중국을 사랑하게 되어 가족 전부를 불러와, 결과적으로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에서 가족을 구하게 됐다고 한다. <그랜드 호텔>의 원래 제목은 "Menschen im Hotel" 즉 “호텔 사람들” 정도이겠지만 영어권에서도 제목을 <그랜드 호텔>로 했다. 이 정도면 작가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적당하겠다. 여러 권의 책을 냈으나 한국어 번역본은 <그랜드 호텔> 하나만 눈에 보인다. 책 앞날개 보면, 하필이면 늙고 좀 추레하게 나온 사진을 실었다. 이런. 젊어서 찍은 사진 소개한다. 출처는 susanbkason.com 이다.

 

 

 책을 한 마디로 하면, 재미있다. 첫 페이지를 열면, ‘젠프’라는 이름의 노련하고 정중한 도어맨이 전화실電話室에서 나온다. 전화실이 무엇인가 하면, 1920년대 베를린의 최고급 호텔 안에 마치 공중전화 부스 비슷하게 몇 개를 두어, 숙박인을 찾는 전화가 왔는데 전화를 받을 숙박인이 객실이 아니라 로비 등에 있을 경우,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작은 공간이다.
 그럼 왜 젠프가 전화실에서 나왔느냐.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아이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인 젠프는 아내의 출산이란 사적인 일에 전문직으로의 명성을 흐리지 않기 위해 능숙하고 친절한 손님 접대에 응한다. 호텔엔 젠프처럼 프로 의식으로 무장한 호텔리어들이 몇 명 있다. 리셉션 총책은 슐레지엔의 로나 백작 가문 태생으로 장교로 참전하고 전역한 전형적인 귀족이지만 다른 귀족들을 접대하기 위해 자신을 낮출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서먹함, 서걱거림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거대 호텔 체인의 사장 아들 게오르기 역시 훗날 자신이 거대 호텔체인을 경영하기 위하여 경험상 일을 하고 있음에도 호텔의 하급 일을 하는 젠프의 조수를 하면서 충실하게 일을 배우고 있다. 호텔 전속 수사관 필츠하임은 중요한 사건일 경우 새벽에도 출동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한다. 그러나 호텔의 주인공은 이들 (좋은 말로)호텔리어, (그냥 말하자면)종업원들이 아니라 거의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숙박인일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베를린의 최고급 호텔에서는 갖가지 비즈니스 계약을 위해 점잖고, 매너 넘치고, 때론 위협적이며 비열하기도 하며 가끔가다간 거짓과 사기가 판을 치는 협상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한편, 하루도 빠짐없이(현충일만 빼고) 무도회가 벌어져 청춘들의 교통사고를 장려하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르주아 숙박인의 호주머니를 노린 사기꾼과 고급도둑들이 눈알을 함부로 굴리고 있기도 하다. 가끔가다가 시골에서 올라온 시골부자들이 최고급이란 타이틀 하나만 염두에 두고 호텔방이 좋은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비싼 돈을 주고 묵기도 한다. 이들이  (당시 법률에 의하여)자신의 주소와 직업을 숙박계에 적는 순간 동등한 ‘숙박인’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오터른슐라크 박사. 의사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플랑드르 전투 중 얼굴 바로 옆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얼굴 반쪽은 잘 생긴 모습 그대로인데 반하여 다른 반쪽은 온통 꿰맨 자국과 의안으로 뭉개진 인물. 그는 언제나 로비의 소파에 앉아 코냑 한 잔을 소파 손잡이 위에 올려놓은 채, 또는 코냑 잔을 빙빙 돌리며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한 시간에 두 번 가량 도어맨 젠프에게 다가와 묻는다. “내게 편지 온 거 없나?” 젠프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걸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빼지 않고 뒤를 돌아 확인 차 편지통을 들여다본 다음 대답한다. “오늘은 아직까지 온 것이 없습니다, 박사님.” “나를 찾아온 사람은 없었나?” “없습니다, 박사님.” “전보는?” “오늘은 없습니다, 박사님.” 어렵게 구한 모르핀을 날마다 하나씩 투약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오터른슐라크 박사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굴까? 혹시 고도?
 약간 작은 키이지만 세련된 외모와 의상, 무엇보다도 놀라울 정도로 잘 생긴 얼굴과 체격에다가 놀라운 춤 솜씨까지 겸비한 가이거른 남작. 사교에 능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여 아주 쉽게 사람을 사귀는 경향이 있는 이 남자의 턱 주위에 눈에 잘 보이지 않기는 하지만 깊은 상처자국이 나 있다. 이것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작지 않은 부상이었다. 나중에 밝혀지는바 군의관 오터른슐라크 박사가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에도 정성껏 꿰매 최소한의 흉터만 남기고 잘 아물었던 것. 비록 나중에 박사 자신은 돌팔이 의사임이 분명한 아무나가 그냥 마구 얼굴에 난 상처들을 꿰매버려 엉망이 됐을지언정. 젊은 나이에 삶의 목표를 전쟁터에 남기고 돌아와 아무 하는 일 없이 최고급 호텔의 가장 비싼 방에서 호의호식하는 삶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남작. 삶의 질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잘 생긴 남작이 할 수 있었던 오직 하나는?
 평생을 경리보조로 근근이 먹고 살던 작센 주 방직공장의 말단 봉급쟁이 오토 크링엘라인 씨. 도저히 베를린 최고급 호텔에 어울리지 않는 두텁고 낡은 외투와 자신의 발보다 적어도 두 수치 큰 진흙 뭍은 신발을 신고, 험하게 낡고 투박한 인조가죽 트렁크 가득 짐을 담은 채 외투 주머니에서 버터 바른 바짝 마른 빵이 로비 바닥에 툭 떨어진 걸 얼른 주워 다시 호주머니에 넣는 소시민. 위암에 걸려 위를 통째로 잘라내고 이제 남은 생이 몇 주밖에 남지 않아, 자신이 평생 번(벌어 마누라 모르게 꼬불쳐 둔) 돈과 생각지도 못한 고모에게 상속받은 약간의 돈을 몽땅 털어, 죽기 전에 회사의 프라이징 총회장이 베를린에 올 때마다 묵는 호텔의 가장 좋은 방에서 한 번 자봐야겠다고 작심한 이.
 정말로 프라이징 총회장은 바로 그날, 이 그랜드 호텔에 짐을 풀고 동종업계 경쟁사이기도 한 켐니츠 사와 합병을 위한 협상을 진행한다. 원래 크링엘라인 씨가 다니는 회사의 말단 직원이었던 프라이징 총각은 당시 회장이었던 영감의 딸과 눈이 맞아 졸지에 고속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신분상승에 성공했으나, 약혼 하루 전까지 크링엘라인 씨의 장인에게 단돈 몇 마르크 씩을 꾸어 쓰고는 했던 것. 천성이 무식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돈 무서운 줄 잘 아는 이 구두쇠가 비즈니스 협상을 하려는데 온갖 것이 전부 다 자신을 방해하기 위해 몰려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기만 하던 차, 정작 협상 테이블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받은 전보의 내용과 완전히, 180도 다른 내용으로 뻥, 새빨간 거짓말 대포를 터뜨림으로써 협상안에 상대의 늙고 노회한 회장의 서명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좋은 일엔 거의 언제나 더 좋은 일이 이어지는 법. 베를린에서 급하게 구한 일회용 속기, 타이피스트 겸용 비서가 완전히 연예인 급이라, 거짓말 대포를 수습하기 위해 떠나야 하는 영국의 맨체스터에 그녀를 동행하기에 이른다. 조건은 1,000 마르크와 영국에서 옷 한 벌.
 하지만 인생이 마음대로 돼? 하필이면 프라이징 총회장, 호텔방에서 사랑하는 애인하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똑, 두드리고, 회장은 직장에서의 버릇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했다. 그게 누군가하면 26년 동안 방직공장의 경리보조로 청춘을 바쳤으나 아직도 사택의 보일러를 회사에서 제때에 고쳐주지 않아 마누라로부터 숨 쉬는 데 고통스럽다는 편지를 받아야 하는 우리의 크링엘라인 씨. 이제 자신에게 남은 인생은 몇 주에 불과한 이 사람은 애인 앞에서 프라이징 회장의 구질구질한 과거사를 몽땅 까발리고, 그것도 모자라 울퉁불퉁 살이 찐 저 인간이 얼마나 악랄한 악질 기업가인지를 성토해버리니 협상을 잘 마무리 짓고 예쁜 아가씨와 하룻밤을 지낸 프라이징 씨가 아주 제대로 체면을 구겨버리고 만다. 그랬겠지?
 이렇게 남자들만 나오는 건 아니라서, 일찍이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사랑을 받아 지구에서 가장 최고급 진주 목걸이와 진주 귀고리, 진주 반지를 선물 받은 발레리나 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그루진스카야. 근데 그건 옛 이야기. 지금은 비록 16세 때와 똑같은 몸무게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벌써 손자까지 둔 늙은이. 춤을 춘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공연 전마다 무대공포증에 의한 히스테리 현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지독한 깽판을 부리는 공포스런 주인공. 그러나 아직도 무대가 끝나면 몇 번의 커튼콜을 받는지, 관객이 앙콜을 요구하는지 아닌지, 갈채의 데시벨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척도이기 때문. 어느 날, 자신은 당연히 모르지만, 자기를 짝사랑하는 크링엘라인 씨가 특별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밤, 1부를 마치고 관객이 거의 없어 썰렁하기 그지없는 무대에서 프로다운 혼신의 공연을 마쳤으나 겨우 한 번의 커튼콜을 받고 숙소로 도망쳐, 수면제 두 알을 먹은 상태에서, 진한 차에 다시 수면제 한 통을 다 넣어 잘 섞은 다음 탁자 앞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마지막으로 베를린 시내의 야경을 바라보려 베란다 문을 여는 순간, 난데없이 다가온 아도니스. 그게 누구? 안 알려줌.
 모든 사람은 회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회전문을 열든지 아니면 뒷문의 시멘트 계단을 통해서든지 밖으로 나가는 곳. 그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인생의 요지경. 그리고 희한하게 연결되는 인간들의 끈. 이걸 영화로 만들었다니, 영화도 정말 재미있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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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18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 안 읽었는데, 비키 바움 젊은 시절 외모가 한 미모하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책 앞날개에 있는 사진으로는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외모랄까... ㅎㅎ 늙음이 뭔지 원... 저도 다 읽고 나서 별 다섯 개 중 왜 한 개를 빼셨을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18-07-18 16:23   좋아요 1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
근데, 독일 유대인 집안에서 하피스트로 오케스트라에서 활약할 정도 부르주아인데요, 이이가 글쎄 베를린의 유명 호텔 두곳에서 객실 정리 담당 메이드 일도 했다는 겁니다. 그때 경험하면서 주워 들은 이야기를 모아모아 책을 썼다네요.
이해 안 가는 것이, 메이드는 당시엔 상당히 천한 직업인데, 오케스트라의 다른 악기도 아니고 하피스트라.... 그죠? 책 쓰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ㅎㅎㅎㅎ 읽으신 다음에 백자평 말고 꼭 서평을 올려주세요!

Falstaff 2018-07-18 16:27   좋아요 0 | URL
아, 또 있습니다.
<그랜드 호텔>이란 제목으로 이 책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거든요. 그게 무려 1932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고 해요. 전 영화를 보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루진스카야 역을 글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레타 가르보가 했다는 겁니다.
실제 책을 보면 가르보보다 체격이 훨씬 작아야 할 거 같지만, 분위기가 가르보하고 아주 딱! 떨어집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