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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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두 명의 영국남자가 있다. 찰스 디킨스하고 서머싯 몸. 이들의 공통점은? 얘기 하나는 진짜 재미있게 만든다는 거. 오늘은 몸에 관한 이야기니까 후자에 국한해서 얘기하자. 아, 여기서 몸은 body가 아니라 William Somerset Maugham을 일컫는다. 이하 몸도 마찬가지.
 영문학자 동무님한테 들었는데, 몸이 자칭 “최고의 2류 작가”란다. 전적으로 동의. 최고의 2류면, 웬만한 1류는 그냥 찜 쪄 먹는다는 거 아냐? 여기서 몸이 말하는 1류는 뭘까? <신곡>이나 <파우스트> 또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작가들을 지칭하는 거 아닐까? 스스로 그들과 비교하기 좀 뭐하니까 조금 낮춰서 “최고의” 2류라고 선언함으로써, 나름대로 가오를 세웠으리라. 시선을 영국문학으로만 돌려보면, 몸은 자신을 최고의 2류라고 함으로써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셰익스피어는 모르겠고, 어쨌든 그이 다음으론 내가 최고다!” 사실 몸의 작품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는 것들을 보면, <인생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 <면도날>, 그리고 이번에 읽은 <인생의 베일> 정도. 뭐 검색해보면 다른 작품들도 몇 개 더 있긴 하지만. 몸의 팬 또는 지지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씀이긴 하나, 이 작품들을 위에서 거론한 <신곡>, <파우스트> 등과 어깨를 견준다고 얘기하긴 조금, 아주 조금, 그렇지 않나? 아, 오해 마시라. 난 <신곡>과 <파우스트>를 위대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다시는 읽지 않을 책으로 일찌감치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몸의 소설들은 그렇지 않다. 새털 같은 여생 중에 하필 심심한 날이 있으면 기꺼이 책장에서 다시 꺼내 읽어볼 만하니까.
 이 책도 재미 측면에선 시작부터 보통이 아니다.
 두 영국인, 한 명은 ‘키티’라는 이름의 스물여섯 먹은 새댁. 또 한 명은 마흔 살의 건장하고 멋지게 생긴 찰스 타운센드. 현재 직함이 영국령 홍콩의 부총독. 못하는 운동이 없고, 진정한 춤꾼에다가 능수능란한 화술을 겸비한 최고의 남자, 라고 흔히들 여자가 오해하는 멋쟁이 신사. 두 남녀의 공통점은 영국의 자본주의가 만든 최고의 속물들이란 거. 한낮의 키티의 침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몸body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가, 엑스터시의 변곡점에서 그만 키티가 누군가에 의하여 닫힌 방문의 손잡이가 움직이는 소리 비슷한 걸 듣는 것으로 흥미진진한 소설은 시작한다. 누구지? 몸body의 대화는 이쯤에서 저절로 식어버리고 키티의 남편이자 세균학자인 월터가 아닐까 의심이 들지만, 이 시간에 그는 언제나 연구실에 박혀 현미경에 두 눈을 대고 있을 터.
 키티가 처음부터 남편 월터를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다. 어릴 적에 그래도 조금은 대단한 가문의 돈 많은 집안의 총각한테 시집가기 위해 일찌감치 사교계에 데뷔를 했으나, 욕심 많은 엄마 가스틴 부인의 눈부신 치맛바람 덕에 두 눈이 정수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처음엔 최고의 상대를 만나기 위해 조건을 따지느라 결혼을 늦췄지만, 어느새 너무 나이를 먹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상태가 됐을 때, 못생긴 외모 때문에 가스틴 부인의 눈 밖에 났던 동생 도리스가 먼저 준남작의 아들과 약혼을 한다. 그리하여 동생보다 늦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쓸데없는 오기가 생겼을 때, 딱 맞춤하게 나타난 이가 바로 지금 남편 월터 페인이었던 거다. 역시 인생에서는 타이밍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할 때가 종종 있다.
 월터 페인은 아내 키티가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자기가 아내를 숭배할 정도로 사랑하기 때문에 살면서 점점 좋아지리라는 희망으로 아내에게 친절하고 예절바르게 대한다. 무슨 뜻이냐고? 키티 입장에선 진짜 재미없는 남자라는 말. 이들은 결혼하고 곧바로 남편의 직장이 있는 홍콩으로 떠나 키티는 그곳 사교계에서 새로이 등장한 별이 되고, 키 크고 잘생기고, 운동 잘하고, 덩치 좋고, 권력까지 있는 찰스 타운센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약간의 망설임, 정말 약간의 망설임 끝에 기꺼이 불륜의 꿀통에 빠져버린다. 문제는 상대인 찰스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 그래서 차라리 대낮의 밀회를 남편에게 들킨 일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는 일. 자연스럽게 남편한테 이혼당하면, 찰스 역시, 이름도 후진 여자 도로시(그래,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도로시야, 도로시가!)와 이혼을 감행해 남은 인생, 둘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어느 날, 월터가 키티에게, 키티와 찰스를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선언한다. 1920년대 홍콩엔 간통죄가 있었나보다. 월터 여보, 남자가 돼서 그러지 말고 깨끗하게 이혼해주면 안 될까? 여태 산 정을 봐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영국의 천한 부르주아의 의견은 그랬다. 월터가 픽 웃으면서, 조건을 하나 제시한다.
 “타운센드 부인이 그녀의 남편과 이혼하겠다는 확답을 내게 주고, 법원으로부터 두 사람의 이혼 확정 명령이 내려지고 나서 일주일 안에 그가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내게 서면 동의를 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는 산골 오지로 나와 함께 가주셔야겠어.
 키티가 당장 부총독 사무실로 쫓아가 아이고 영감, 나 이제 큰일이오. 제발 어서 빨리 각서 한 장 써주셔야겠소. 하며 사정을 설명한다. 근데 세상의 바람피는 남자들, 진짜 상대를 사랑해서 여차직하면 가정 때려 치고 연인 또는 정부와 새살림 차릴 인간들은 거의 없다. 부총독께서도 이하동문이라, 자기가 비록 키티를 환장하게 사랑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다른 건 하나도 없고 그놈의 자식들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단다. 아, 월터한테는 “넌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하나도 몰라!”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각서를 받아올 것처럼 얘기했는데 이제 쪽팔려 어떻게 하나, 이따위를 생각할 여력도 없다. 자신의 진짜 사랑을 배신당한 순간이라서. 코가 쭉 빠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퉁퉁 부어버린 눈두덩을 하고 집에 오니, 이미 남편이 콜레라 지대로 향하는 마누라 짐도 싸놓은 상태. 멍청이인줄 알았더니 남편 월터는 총명하고, (자기 눈으로 볼 때만 빼고 남이 보면) 괜찮게 생겼고, 성실하고, 부드럽고, 어느 면으로 보나 존경할만한 인격체였던 거다.
 이리하여 키티는 결혼생활도 망가져, 애인한테 버림받아, 그것도 모자라 언제 죽을지도 모를 콜레라 창궐지역으로 자발적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닫게 된다.
 스토리는 여기까지.
 몸의 작품들을 읽어보신 분은, 그의 작품을 절대로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실 듯하다. 스스로 최고 신분이자 최고의 인격자인줄 알고 사는 천박한 의식을 가진 집단들. 그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고난을 다 겪어내며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천박한 짐승 같았는지를 인식하게 되고, 그런 인식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향상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게 쉬워? 아무리 도를 닦아도 비슷한 실수를 다시 겪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살이. 여기에 서머싯 몸의 진수가 있다. 그의 가차 없는 시각과 인간, 인간의 날것에 대한 지적. 이런 것들을 재미있고 즐겁게 감상하면서 스스로가 말한 “최고의 2류”라는 표현이 왜 나왔는지,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었는지, 적어도 감을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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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2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독서모임 책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모옴 선생의 대표작인 <달과 6펜스>보다도
훨배 좋더라는.

나오미 캠블이 키티로 나오는 영화가 있다고
도 들었는데 아직 못보고 있네요.

Falstaff 2018-07-12 16:09   좋아요 1 | URL
1934년 버전엔 무려 그레타 가르보가 키티를 했답니다. 근데 상상이 안 가요. 가르보가 키티라니....
나오미 와츠의 키티는 좀 어울릴 거 같습니다만, 영화를 보지 못해서요. ㅠㅠ

coolcat329 2020-07-13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쩜 책보다 폴스타프님 글이 더 재밌을까요! 저도 이 책 이번에 진짜 재밌게 읽었습니다. 달과 6펜스 지금 다시 읽고 있지만, 그 보다 훨씬 좋고 주변에 막 추천하고 싶네요.

아, 저는 유투*로 영화 조금 봤는데 나오미 와츠 너무 잘 어울리더라구요..

Falstaff 2020-07-13 20:48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에이, 언감생심이지요, 제가 어찌 몸 선생보다 ㅋㅋㅋㅋ 우짰든 고맙습니다.
하여간 재미에 관한 한 독보적인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