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 아이 XXX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4
멍징후이 지음, 장희재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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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제목 <워 아이 XXX>가 뭘까? 한자로 하면 我愛XXX, 즉 “나는 XXX를 사랑한다.”라는 뜻.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희곡이라면 당연히 등장인물을 소개해야 하고, 무대 장치 및 배경을 설정해야 하는데, 아니, 여태 그런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이런 것부터 나온다. 처음 열 줄만 인용한다.

 


              제1부분 다짜고짜 하는 말
 나는 빛을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빛이 생겨났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네가 생겨났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내가 생겨났다

 

 나는 1990년을 사랑한다
 나는 1990년의 신년 종소리를 사랑한다“

 

 

 희곡은 연극의 대본을 일컫는 말이다. 요새 연극이니까 무대 설정은 필요 없다 치자. 그래도 배우가 등장해서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니 적어도 다음과 같아야 하리라.

 

 호레이쇼 : 나는 빛을 사랑한다
 요릭 :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빛이 생겨났다

 

 이런 거 아닌가? 분명히 대사는 있는데, 대사를 하는 배우는 보이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 대사라고는 아아아~, 어어어~, 으으으~ 만 있던 연극 <산씻김>을 본 적 있다. 대사는 대단히 간단하지만 아이고, 배우들 연기하려면 숨넘어가겠더라. 온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또 누웠다가,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고, 막 내리는 대신 암전으로 끝나고 인사하는데 보니까 여배우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뭐 좋다. 먼저 읽어보고 얘기하자 싶어서 읽었다. 금세 읽는다. 아홉 개의 부록까지 합쳐서 70쪽도 안 된다. 여기까지 읽고 느낀 것.
 “근데 뭐?”
 그래서 해설을 봤다. 이렇게 씌어있다.

 

 “<워 아이 XXX>는 스토리의 해체와 말하기에 대한 강박이 드러난다. 대사들 사이에 스토리는 없다. 멍징후이는 스토리를 해체한 대신, 못 다한 말을 쏟아낸다. ‘나는 XXX를 사랑한다’라는 동일한 문장 구조 속에 반복, 치환, 삭제, 삽입의 방법으로 어휘를 배치하여 절묘한 리금감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그는 음성언어, 침묵의 언어(자막), 수화, 신체언어 등 다양한 언어형식과 말하기(speaking), 속삭이기(whispering), 외치기(shouting), 혼자 말하기, 함께 말하기, 이어 말하기, 끼어들어 말하기, 등 다양한 발화방식을 사용한다.”

 

 아이, 나 같은 연극 문외한이 처음부터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 해설은 책의 뒤편에 싣는 대신 머리말 비슷하게 앞에다 배치했으면 좋을 뻔했다. 한 방에 알아듣겠다.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소통방식으로 하여간 대사를 관객한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러다보면 대화의 운율에 따라, 더구나 중국어는 사성이 있으니 한국어에 비하면 더욱 효과적인 음악적 표현이 될 수도 있고, 수화나 화면의 자막을 통한 시청각에 호소할 수도 있는 것.
 그러려면 희곡만큼이나 연출이 중요하겠구나. 흠. 나 같으면 어떻게 연출을 할까. 이거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잘 하면 재밌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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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안뜰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4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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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편의 중, 단편이 실린 선집. 표제작 <저주받은 안뜰>이 책 본문의 절반을 넘게 차지한다. 표제작을 비롯한 모두 다섯 편이 수도원의 사제 ‘페타르 수사修士’가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직접 이야기하거나, 수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풀어낸 것들이다.
 한겨울. 세상이 함빡 내린 눈에 싸여 흰 빛을 발할 때, 어제 죽은 페타르 수사를 묻고 이제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살아생전 수사가, 수사의 젊은 시절 이스탄불 출장길에 애꿎은 혐의를 쓰고 구치소에 두어 달 간 구금되었던 당시의 강렬했던 추억/기억을 두서없이 얘기한 것들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쓴 것이 표제작 <저주받은 안뜰>이다. 이스탄불 교외 한갓진 곳에 자리 잡은 ‘데포시토(창고)’란 이름의 구치소엔 검은 악마라는 뜻의 별명 “카라조즈”로 잘 알려진 머리 좋은 악당이 소장으로 있었다. 구치소를 자꾸 증축을 하면서 이상하고도 커다랗게 변형된 교도소는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안뜰 역시 지극히 비정상적인 운동장으로 변했는데, 운동장을 포함한 데포시토 전부를 구치당한 죄인들은 “저주받은 안뜰”이라고 불렀다 한다. 페타르 수사의 경우, 이 저주받은 안뜰에 겨우 두세 달 있으면서 경험한 바를 평생에 걸쳐 후배 수사들에게 조금씩 살을 붙여 이야기를 했겠지만 사실 수사의 구금기간 동안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터키의 수용시설답게 각종 범죄자들과, 적지 않은 수의 정치범이 늘 수용되어 있으며, 잡범들은 은근히 정치범과 선을 긋는 것도, 정치범 가운데 적어도 두어 달에 한 명 정도는 골로 보내는 것도, 당시가 양차대전이 다 끝난 상태임에도 터키를 떠올리면 그리 이상하지 않다. 1481년 정복자로 이름을 날리던 메메드 2세가 아무 준비도 없이 전쟁터에서 갑자기 사망을 하자 노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바예지드와 귀족 출신의 다른 여인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젬은 왕권을 놓고 경쟁을 하게 된다. 다툼에서 패한 동생 젬은 이집트를 거쳐 프랑스로, 다시 이탈리아로 전전하면서 결국 1499년 유골이 되어 터키로 돌아오는데, 역사를 공부하면서 평생 형에 대한 반란을 골몰하던 한 불우한 파샤의 아들이 젬에 대하여 연구했다는 죄목으로 저주받은 안뜰에서 행방불명 됐다는 걸 중점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런 건 터키에서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거 같다.
 하지만 이 중편소설 <저주받은 안뜰>을 누가 썼는가. 바로 이보 안드리치다. 일찍이 <드리나 강의 다리>와 <제파 강의 다리>를 통해 필력을 과시한 작가. 이이의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안드리치의 문장 속으로 흠뻑 빠져드는 경험을 한다. 사색적이면서도 하고 있는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그림 그리듯 떠올려지는 듯한 아름다운 글. 이 작품에서도 문장 하나하나가 개인과 개인, 특정인과 과거의 역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후반에 무려 50쪽에 달하는 해설과 작가 연표를 포함한다. 이 정도면 해설이라기보다 작은 논문 수준이다. 좀 과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는 이 책을 안드리치의 문장을 즐기면서 읽었다. 더구나 오랜 세월 내가 참 좋아해온 출판사 을유문화사에서 찍은 책이니 읽는 즐거움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을 숨길 필요 없으리. 하지만 그게 아니다. 을유문화사가 그 사이에 좀 바뀐 거 같다. 한 시절, 오탈자 없는 책을 자랑하던 회사가 아니다. 여러 말 말고 예를 들어보자.


 “끝도 없이 묘한 그의 유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는 마치 단 한 번도 어느 누구를 믿어 보지 않은 것처럼 범죄자나 증인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믿지 않은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그에게 범인의 자백은 유일한 것이었고 모든 인간이 유죄로 재판받아야 할 존재인 이 세상에서 그럭저럭 공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소나마 신뢰성 있고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자백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저주받은 안뜰” 34쪽)


 위는 새로운 문단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이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수바람. 무슨 뜻인지는 앞 문단과 연결해서 읽어야 알 수 있다. 물론 원문과 가장 가깝게 번역하기 위해 이렇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 비록 원문에는 없었을지라도, 앞 문단과 이 문단을 연결시켜주는 접속사나 짧은 구句를 포함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머리 안 좋은 내 경우를 말씀드리면, 도무지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열댓 번을 읽었다. 그래도 도통 깜깜이라 페이지를 통째로 다시 읽으니 그때야 감이 왔다.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주어와 술어를 찾는 것. 주어와 술어만 써보면 문장은 이렇다.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자백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장이 “∼ 때문이었다.”로 끝나기 때문에, “때문이었다.”로 끝나게 하는 원인이 한 문장에 나와 주어야 한다. 아니면 바로 앞 문장이든지. 근데 이게 문단의 첫 문장이란 말이지. 이 문장에서 가장 근접한 “때문에”의 원인은 제일 앞에 나오는 “끝도 없이 묘한 그의 유희”이지만 그건 쉼표 앞에서 독립적으로 씌어있어서 문장을 이해하는 걸 아주 효과적으로 방해한다. 먼저 나오는 “때문에”는  “그에게 범인의 자백은 유일한 것이었고”로 이미 설명이 된 사안. 그러면 뒤에 나오는 새로운 “때문이었다.”의 또 다른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저주받은 안뜰의 소장 검은 악마가 어떻게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고, 자백이 아무리 사소해도 잊는 법 없이 자백한 자를 재량껏 도와주거나 형을 경감해주는 이유, 즉 수용소장 카라조즈의 “끝도 없이 묘한 그의 유희”다. 문제의 구절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쉼표 앞에서 이미 종결사항처럼 쓰여 있다는 점.
 책 읽으며 문장 하나 가지고 이리 해골 복잡하게 만드는 거, 정말 싫다.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언젠가 성자(聖者)의 얼굴을 한 여행객이 올루야크 사람들에 대해 평한 말은 이랬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을 함께 선사하셨다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이 성자의 얼굴을 한 사람의 말이 단 한 번도 거슬리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올류야크 마을” 161쪽)


 문단의 마지막도 대단히 까다로운 문장이다.

 문장을 이렇게 바꿔보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을 함께 선사하셨다"는 말이 단 한 번도 거슬리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술어 쪽만 보자.

 1. 말이 ~ 거슬린 일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지 않은" 일

 2. 거슬리지 않은 일

  "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신" 일

 3. 거슬리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신" 일이 일어났다.

 4. 거슬리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즉, 이 문장을 알아듣기 쉽게 다시 써보면 이렇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을 함께 선사하셨다'는 말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즉 올류야크 마을 사람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은 절대 생기지 않을, 다시 말하면 가난하지만 불행하지도 않을 거란 얘기. 작가가 주장하는 바와 정확하게 반대 방향이다.
 맞는가? 나도 모르겠다. 이번엔 술어의 문제. 문장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꼭 이 지랄을 해야겠어? 책을 이런 식으로 뜯어서 읽는 나도 알고 보면 참 불쌍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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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08-03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길에 저도 옮겨주신 문장 3번쯤 읽었네요 ^^; 원문이 저렇게까지 난해할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의 문제일까요.

Falstaff 2018-08-03 09:07   좋아요 1 | URL
글쎄요.
번역한 사람은 틀림없이 ˝원문을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다보니, 운운˝ 할 겁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명도 아닌걸요. 다만 을유문화사가 이번에 펴내는 세계문학전집의 ˝한글 텍스트˝ 품질이 몇십 년 전 것보다 못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정말 좋아했던 출판산데 아쉽습니다. 시리즈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책에서 마땅하지 못한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더군요.
최근에 읽은 DH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도 그렇고 불레스와프 프루스의 <인형>도 좋은 문장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지요.
날 더운데 에휴, 고생하십시요. ^^;

레삭매냐 2018-08-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보 안드리치 책들은 몇 권 컬렉션해두긴
했는데 당최 손이 가질 않는군요.

그런데 역자가 번역을 하시면서 문장을 좀
끊어서 번역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문장이 너무 길어서 정말 헷갈리네요.

그나저나 <드리나 강>부터 읽어야겠다는.


Falstaff 2018-08-03 10:26   좋아요 0 | URL
<드리나 강의 다리>는 정말 좋아요!
제가 2016년이던가에 읽었는데, 그 해에 가장 좋게 읽은 책으로 <드리나 강의 다리>를 꼽았던 적이 있습니다.
우습게도 <저주받은 안뜰>과 같은 역자군요. ㅋㅋㅋㅋ
날 더운데 살살 읽으셔요. ^^
 
지하철 소녀 쟈지
레몽 크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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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간 번역한 소설책 읽으며 주인공인 척하는 작가가 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를 대단한 작품으로 소개하는 바람에 2008년에 간행해서 아직도 팔리고 있는 초판 1쇄를 정가 다 주고 사 읽었다. 초판을 찍은 다음에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쇄를 살 수 있는 소설이라면, 다른 건 다 몰라도 하여간 이 작품이 우리나라 독자들한테는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도마뱀출판사의 매력적인 희극 <바보들의 결탁>은 아직도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 <지하철....>은 그러하지 못하니까.
 쟈지라는 소녀. 어느 날 쟈지가 집에 들어가니까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사랑스런 딸을 끌어안고 여기저기 얼굴에다 뽀뽀를 해대더니 갑자기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절대로 안 된다고 아빠한테 말하니 술에 잔뜩 취한 아빠는 문 쪽으로 뛰어가 열쇠로 잠그고 영화에서처럼 눈알을 굴리며 하하하하 웃어젖히는 거였다. 그러더니 추잡하게도, 널 망쳐버리고 말겠어, 라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입가엔 거품까지 조금 물려 있었다. 아빠를 피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고주망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문만 잠겨있지 않으면 냅다 도망을 치겠는데 좁은 집 안이라 결국을 잡혀버렸고, 다시 온몸을 주무르고 있던 순간, 현관문이 살며시 열리며, 볼이 불그스름한 돼지고기 장수 조르주 씨가 미리 날을 세워놓은 도끼를 든 엄마가 들어오더니 사정없이 아빠의 머리통에 도끼날을 박아 넣었다. 조르주 씨는 엄마의 애인이었으며, 딸을 보호하기 위해 (하필 바로 전날 애인 조르주 씨가 날을 새파랗게 세운 도끼로 머리통을 내리쳐)남편을 살해한 엄마 잔 랄로셰르는 입심 좋은 변호사를 만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끔찍한 사건을 읽는 모든 분들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이건 쟈지가 한 이야기. 정말 그리 되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설의 작가 레몽 크노조차 모를 확률이 높다.
 애인이 생기면 가족, 하나밖에 없는 딸 같은 건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쟈지가 말하는 엄마 잔은 애인과 2박 3일의 연애를 위해 딸을 파리에 사는 외삼촌 가브리엘에 맡기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거구와 몸집에 어울리는 완력의 소유자 외삼촌 가브리엘은 게이 클럽에서 뭉실뭉실한 허벅지의 털을 싹 면도하고 발레복을 입은 채 <빈사의 백조>를 춤으로써 클럽에 모인 모든 호모들에게 포복절도한 웃음을 주는 걸 직업으로 하는 선량한 사람. 역시 총명하고 유순한 마르슬린 외숙모와 자식은 없지만 순탄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그냥 보통의 파리 시민이다. 친한 친구로 택시 운전을 하는 샤를이 있으며, 샤를은 아파트 일층에 있는 식당의 종업원 마들렌과 책의 뒷부분에서 약혼을 한다. 식당의 주인이자 건물주이기도 한 투란도트 씨는 가브리엘의 슬하에 아이가 없어서 집을 빌려주었는데 발랑 까진 쟈지가 며칠이긴 하지만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이 못내 마땅하지 못한 상태.
 제목이 지하철 소녀 쟈지인 만큼 시골 출신 쟈지는 파리에 가면 반드시 지하철을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아쉽게도 파리에선 지하철과 일부 공용 버스가 파업을 하고 있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65세까지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꼬마.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언제나 쉬지 않고 줄지어 입학하는 꼬마 학생들을 괴롭혀주고 싶어, 장래희망을 초등학교 교사로 정해버린 악동. 정확한 나이는 끝까지 밝히지 않는데 대강 보면 만 9세에서 10세 가량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저질 지방 주간지 <선데이 파리>, <주간 피가로>, <빨간 르몽드> 같은 걸 탐독하여 남녀관계 및 유사행위를 숱하게 포함한 패관문학에 심오한 견해를 밝힐 수 있을 만큼의 재주를 보유했다. 이 아이가 세계의 수도라 일컫는 파리에 와서 좌충우돌을 일삼는다.
 그럼 쟈지를 중심으로 하는 코미디냐고? 아닌 거 같다. 쟈지의 돌출행동을 빌미로 하는 숱한 언어의 변화와 중의, 기타 등등이 깔려 있어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면 동의하지 못할 코드가 범벅이 된 듯하다. 발문을 보면 역자 정혜용이 이 책을 대표적인 “번역불가”의 관을 쓴 작품이라 설명하고 있는 바, 정말 읽어봐도 역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막 책을 다 읽고 덮었는데, 한 마디로 소감을 말하자면 이렇다.
 “대략 난감.”
 1959년에 출간한 일종의 희극 작품이지만, 신기하게도 ‘재미있으나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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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 민음의 시 210
심언주 지음 / 민음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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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는 게릴라처럼


 

 


 풀잎에 나뭇가지에
 눈알을 매달고 우글거리지.

 

 봄비는
 떼거리로
 묵은 플라타너스 잎을 에워싸지.

 

 무거워지는 플라타너스의 명분과
 빗소리와
 시간,

 

 나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양철 지붕의 투덜거림을 세지.
 숱 많은 봄비의 머리카락을 세지.

 

 봄비는 한랭전선마다
 비누 냄새를 널어놓지.

 

 봄비는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고
 나는 민들레 곁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지.

 

 여승이 쪼그리고
 거울에 뒤통수를 비춰 보다가 웅덩이를 보다가

 

 한 솥 가득 끓고 있는 봄비.

 

 내 실핏줄이 터지고 있지. (전문)



 이 시가 시집 가운데 가장 좋아서 전문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시집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에서 유일하게 시를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시이기 때문이다. 첫 연부터 봄비가 풀잎에, 얇은 나뭇가지에 떨어져 방울방울 맺혀있는 장면이다. 그걸 시인은 “눈알을 매달고 우글거리지”라고 표현한다. 나름대로 참신한 시어다. 플라타너스는 잎이 널찍하다. 빗물이 눈알처럼 오글거리며 매달려 있지 않다. 빗물에 적셔져 있는 모습을 “봄비는 / 떼거리로 / 묵은 플라타너스 잎을 에워”싼다고 말한다. 이하는 읽는 분이 직접 상상해보시라.
 이 시 말고는 오리무중. 난감한 시어들이 넘실대 시인이 “시”의 옷을 입혀 주장하고 있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 도무지 추리할 수 없다. 이럴 때 시적 조예가 가비야운 독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우린 평론가라고 부른다. 이 책 뒤편에 ‘김수이’라는 이름의 문학평론가가 “질문만이 존재의 가능하고 유일한 화법?”이란 제목으로 일반 독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심언주의 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 부분 부터 역시 문학평론가라는 이름은 그냥 얻은 게 아님을 증명한다.
 “어떻게 하면, 언어의 안에서 또 밖에서 의미의 공회전을 멈출 수 있을까. 의미 없는 것,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것, 의미가 모호한 것 들을 언어화하려는 가망 없는 작업을 의미에 대한 강박 없이 수행할 수 있을까. 언어 속에서 말할 때나 언어의 밖에서 침묵할 때, 의미 없는, 의미 아닌, 의미를 넘어선, 또 그 밖의 모든 언어를 우리가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 한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을까.” (87쪽)
 라고 하면서, 의미의 언어화를 직업으로 삼는 시인 심언주의 첫 번째 시집 가운데 <시뮬레이션 - 새>라는 시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나는 부서져 내린 언어의 등에 불을 지핀다. 부서진 언어들이 도르르 말린다. 번데기처럼 웅크린다.” (88쪽)
 나는 양 팔을 번쩍 들었다. 쏘지 마! 항복!
 백기투항이다.
 2004년에 등단해, 2007년 45세의 나이로 처녀시집 <4월아, 미안하다>를 펴낸 범띠 시인의 관심사는 이렇단다. (물론 시인 본인이 아니라 평론가의 의견이지만) 의미 없는 것,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것, 의미가 모호한 것들을 언어화하려는 시도. 과거에도 이런 시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긴 하나, 의미가 없는, 심지어 의미가 있다고 우길 수도 없는 것, 의미가 모호한 것들을, 언어화하여 기호로 표시하려는 높은 단계의 시적 실험에 나는 독자라는 이름의 관객으로 참여하고 싶지 않다. 의미 없는 것들은 “의미 없음”의 상태로 의미가 있으니 그걸 기호화 했겠지. 그러나 결과는 기호화한 문자들의 나열은 또다시 “의미 없음”으로 읽힌다는 것. 적어도 내가 읽기에 그랬다. 대표적인 시를 하나 인용한다.




 축구공이 날아가는 동안


 

 

 

 아침에 안 일어나면
 살았나 죽었나
 당신은 꽁치를 뒤집는다
 전복을 좋아하는 당신
 뒤집힌 옷을 뒤집어 세탁 바구니에 던지며
 겉과 속이 뒤집힐 때
 항복을 좋아하는 당신
 당신과 구운 생선의 눈동자를 흘깃거리며
 바둑을 두어도 괜찮을까
 뒤집어 놓은 풍뎅이가 날아갈 확률을 점치며
 축구공을 몰아도 괜찮을까
 흑, 백, 흑, 백이 견해를 바꿔 가며 날아가는 동안
 맨 앞에 선 사람부터 맨 뒤 달리는 사람까지
 발등과
 발바닥과
 눈동자는
 몇 번이나 뒤집힐까
 공이 골문에 다다르는 순간
 공은 당신의 눈치를 살핀다 (전문)



 평론가 ‘님’ 김수이는 이 시를 해설하며, “심언주는, 소통의 진정한 의미는 소통의 달성 여부가 아니라 소통의 열망과 실행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 소통의 완성도와 순도로 말한다면, ‘당신’도 ‘나’도 용맹 정진하기에는 안팎의 여건이 녹록지 않다”(98쪽)고 말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당신도 평론가 ‘님’처럼 시를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불통, 소통을 위한 용맹정진도 불허하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겠나. 평론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이 확실하게 증명된다. 나는 진정한 창작은 시나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고, 작가가 쓴 시나 소설을 읽고 그걸 온갖 방식의 이야기로 재창조하는 평론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혹시 모른다. 날이 하도 더워 내가 미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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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1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47
리온 포이히트방거 지음, 문광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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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18세기 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유대인 작가 포이히트방거는 책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18세기 말 무렵 서유럽의 거의 모든 곳에서 중세는 말살되었다.”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에서는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아메리카 합중국이 독립선언을 했으며, 인권에 대한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뜬 파리 시민들은 위대한 대혁명을 완수하여 공화정을 수립했다. 기존 가치의 급격한 몰락을 발견한 영국의 부르주아들은 보다 굳게 결속하여 혁명사상의 침투를 경계하면서, 왕국의 몰락을 우려하는 합스부르크와 로마노프 왕가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고립을 꾀하였으나, 혁명 후 프랑스에는 키 작은 코르시카 사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제1 통령으로 임명되면서 군사독재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책의 무대인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절과 비교하여 별 차이 없는 “완고한 중세가 계속 이어졌다.” 매우 부유한 종교재판소는 성경과 다르다는 이유로, 악마적이란 주관적 판결만 가지고, 때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한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간혹 왕실과 힘겨루기를 위한 목적으로 종교재판을 열었으며, 무죄판결은 거의 없는 반면에 심심치 않게 진보적이거나 선량한 사람을 산 채로 태워 죽이고는 했다. “군중은 이단자의 화형식을 열광하며 구경했는데, 그 열광은 투우의 황홀감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죄인이 유죄 판결 후에 뉘우치게 되면, 그래서 교살되어 불태워지지 않게 되면, 군중들은 투덜거렸다. 그러한 ‘신앙 행위’는 즐거운 시간들, 예를 들면 왕의 즉위식이나 혼례식, 아니면 왕세자의 출생 같은 일을 축하하기 위해 자주 거행되었다.”(209쪽)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선왕이 죽고 아직 즉위하지 않은 필리페 2세의 대관식 날을 잡아 하필이면 대규모의 화형식을 거행하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화형은 스페인 왕가와 귀족, 백성 모두에게 축제였던 거다.
 여기에 후손 없이 죽어 비어있는 왕좌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루이 14세의 손자가 차지해 카를로스 3세라 했는데, 작 중에서는 그의 아들 카를로스 4세 치하다. 멍청하고 무능하고,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에다 간혹 사냥을 즐기는 거구의 귀여운 왕을 대신해, 욕심 많고 음란한 아내 도냐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정부 마누엘 고도이가 격랑 속 낡고 큰 배, 스페인의 키를 쥐고 항해하고 있었다. 도냐 마리아 루이사는 파르마 대공국의 공주 출신이고, 마누엘 고도이는 포르투갈 태생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이들은 스페인의 이익과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금, 은, 보석과 자기 후손의 번영과, 더 높은 곳으로의 출세를 위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과 협상을 맺으며, 종교재판관과 주고받기 식 흥정을 도맡는다. 왕가와 최고위 귀족들의 번영을 위하여 스페인 백성에 대해 저질러지는 폭압으로 국민들은 오직 신만이 “끝날 줄 모르는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구원해줄지도 몰랐다.” (656쪽)
 아메리카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은 필연적으로 이웃 국가들의 진보적 귀족, 지식인들에게 인권과, 자유, 평등, 박애에 관한 개념을 새로이 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인물 가스파르 호베아노스, 솔라나 후작부인, 마누엘의 악의적인 추천으로 사심 없이 총리직을 맡는 유능한 돈 마리아노 루이스 데 우르키호 등을 등장시켜 진보적 지식인의 대표선수로 활약하게 한다. 부패한 권력 아래, 더구나 권력이 왕에 의한 것이라면 진보 지식인은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그리하여 호베아노스는 파리에서 돌아와 몇 년 만에 새로 간행한 출판물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체의 종이와 펜을 지급하지 않은 채 구금당하고, 우르키호 총리 역시 자신을 추천한 전 총리 마누엘에 의해 타당하지 않은 혐의로 창문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렇게 전반적인 사회를 개관하는 것은, 프란시스 고야와 그의 의식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4세의 궁정수석화가가 됨으로서 궁정의 모든 왕가와 부패한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들의 초상화로 대표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아직도 중세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페인답게 고전적 양식을 띨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결혼이란 거의 대부분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비록 십계명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는 서로 노골적인 정부를 두었다. 고야에게도 나이 어린 과부 정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돈 마누엘이 그를 찾아와 과부 페피타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는다. 그러지 않아도 이제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한 정부를 자연스럽게 정리할 기회를 준비 중이던 고야는 기꺼이 그렇게 하고, 서양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서로 사이좋게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고야에게도 높은 신분의 새로운 정부가 생기는 등 귀족사회의 어지러운 성적 이합집산 과정을 통해 고야도, 마누엘로 시골농부의 아들이 점점 스페인 최고의 자리를 향해 올라가는 것.
 그러나 한편, 고야는 진보적 인사들과 의견을 같이하며 종교재판소가 보면 기꺼워하지 않을 그림만 잔뜩 그려놓는다. 책에서는 고야의 정부인 알바 공작비를 모델로 했다고 하고, 백과사전에서는 전 정부였던 페피타를 모델로 그렸다는 <누드 마하>를 비롯하여, 왕권신수설을 거의 완전히 부정하는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종교재판관의 시각으로는 악마주의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에칭 판화 작품 <변덕>등. 책에선 <누드 마하>로 인해 기어이 종교재판을 받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원래 작가가 고야 시리즈를 두 편의 작품으로 구상하고 정말로 2권을 조금 쓰기도 한 바, 종교재판은 나중에 마누엘이 실각당하고 그가 소유하던 작품이 다중에 공개된 후인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에서 마누엘은 최후까지 스페인의 최고 권력자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이렇게 잔뜩 써놓은 것은, 고야의 주변이 부패한 왕가와 귀족들, 소수의 진보적 귀족이자 지식인, 그리고 농민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보고 배우고 몸에 익힌 서민적 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화가로 출세하고자 아득바득 공부하면서 당대 궁중수석화가였던 바예우의 여동생과 결혼한 다음에 궁중 태피스트리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들어간다. 그조차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화가의 동생과 결혼했다는 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궁중에 들어간 다음엔 온갖 천박한 왕족과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주문대로 초상화를 그려야했고, 궁중수석화가가 된 다음에 비로소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이 변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의식이 먼저 변해야 하는 것. 책의 제목을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로 한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림도 변하게 할 수 있도록, 화가 자신의 의식 또는 인식이 변해가는 과정, 길을 그리고 있어서이다. 작품 속에 고야는 초상화로 대변하는 고전주의에서,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 볼 수 있는 추함의 적나라한 묘사와 화려한 색의 대비를 거쳐, <누드 마하>의 철저하게 금기시됐고, 심하면 화형에 처해질 수 있는 가리지 않은 전면누드의 반 율법적 실험에 이어, 왕족과 귀족들을 악의적으로 사정없이 괴물로 만들어버린 에칭판화집 <변덕>까지 시대적 혹독한 길 또는 진보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꺼운 독일 소설이 그렇듯, 읽으면서 처음부터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나처럼 회화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나는 한 100쪽 읽고 나서 다시 첫 페이지부터 시작했다. 앞에 노트북을 켜놓고 고야의 그림들을 함빡 올려놓고,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 어느 것인지 꼽아가며 읽었다. 그러니 좀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 스페인 왕의 누나가 얼마나 추하게 그려졌는지, 그러나 추한 모습이 또한 얼마나 재미나는지 발견하는 건 참 재미난 경험이었다. 한편으론 페터 바이스가 그의 책 <저항의 미학>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가며 작품의 미학적 관점을 설파했던 <5월 3일의 학살>이 등장하지 않아 아쉬웠다. <5월 3일의 학살>은 책이 진행하는 과정 이후의 역사, 기어코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해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필리페 7세를 퇴위시키고 나폴레옹의 형 조세프가 왕위를 차지한 후 벌어진 소위 ‘반도전쟁’ 중이었으니 2부를 썼으면 그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책을 읽으며 묘사하는 그림을 인터넷 서핑을 하며 찾아보는 일. 책 읽기에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린다. 그러나 한 작가의 그림에 집중하며 화가의 인식이 변화하는 혹독한 길을 함께 가는 일이라면 심지어 재미있기도 하다.
 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이 책을 비록 한 생을 살면서 읽어볼만한 책으로 꼽을지언정 작가 포이히트방거가 <고야>의 2부를 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나를 다행스럽게 만들었는지....




* 카를로스 4세의 누이 마리아 호세파의 얼굴을 보시려면 (뿐만 아니라 고야가 왕가 사람들의 모습을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그렸는지 보시려면) 클릭하세요. 옷만 화려하지 생긴 건 멍청하고, 욕심덩어리고, 고집불통의 인간들.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IV_of_Spain_and_His_Family#/media/File:La_familia_de_Carlos_IV.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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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3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 쉽지 않아 보여서 도전할 엄두가 안 나던데, 역시 쉽지 않은 책이군요-

Falstaff 2018-07-31 14:39   좋아요 0 | URL
쉽지 않다...라기 보다는 읽는데 참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책이더군요.
특히 (위에서 얘기했듯) 미술에 별 조예가 없는 제 경우엔 말입니다.
날은 덥지 진도는 안 나가지, 책 읽으면서 고야 검색해 무슨 그림을 얘기하고 있는지 확인해야지,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