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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소녀 쟈지
레몽 크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간 번역한 소설책 읽으며 주인공인 척하는 작가가 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를 대단한 작품으로 소개하는 바람에 2008년에 간행해서 아직도 팔리고 있는 초판 1쇄를 정가 다 주고 사 읽었다. 초판을 찍은 다음에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쇄를 살 수 있는 소설이라면, 다른 건 다 몰라도 하여간 이 작품이 우리나라 독자들한테는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도마뱀출판사의 매력적인 희극 <바보들의 결탁>은 아직도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 <지하철....>은 그러하지 못하니까.
쟈지라는 소녀. 어느 날 쟈지가 집에 들어가니까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사랑스런 딸을 끌어안고 여기저기 얼굴에다 뽀뽀를 해대더니 갑자기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절대로 안 된다고 아빠한테 말하니 술에 잔뜩 취한 아빠는 문 쪽으로 뛰어가 열쇠로 잠그고 영화에서처럼 눈알을 굴리며 하하하하 웃어젖히는 거였다. 그러더니 추잡하게도, 널 망쳐버리고 말겠어, 라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입가엔 거품까지 조금 물려 있었다. 아빠를 피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고주망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문만 잠겨있지 않으면 냅다 도망을 치겠는데 좁은 집 안이라 결국을 잡혀버렸고, 다시 온몸을 주무르고 있던 순간, 현관문이 살며시 열리며, 볼이 불그스름한 돼지고기 장수 조르주 씨가 미리 날을 세워놓은 도끼를 든 엄마가 들어오더니 사정없이 아빠의 머리통에 도끼날을 박아 넣었다. 조르주 씨는 엄마의 애인이었으며, 딸을 보호하기 위해 (하필 바로 전날 애인 조르주 씨가 날을 새파랗게 세운 도끼로 머리통을 내리쳐)남편을 살해한 엄마 잔 랄로셰르는 입심 좋은 변호사를 만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끔찍한 사건을 읽는 모든 분들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이건 쟈지가 한 이야기. 정말 그리 되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설의 작가 레몽 크노조차 모를 확률이 높다.
애인이 생기면 가족, 하나밖에 없는 딸 같은 건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쟈지가 말하는 엄마 잔은 애인과 2박 3일의 연애를 위해 딸을 파리에 사는 외삼촌 가브리엘에 맡기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거구와 몸집에 어울리는 완력의 소유자 외삼촌 가브리엘은 게이 클럽에서 뭉실뭉실한 허벅지의 털을 싹 면도하고 발레복을 입은 채 <빈사의 백조>를 춤으로써 클럽에 모인 모든 호모들에게 포복절도한 웃음을 주는 걸 직업으로 하는 선량한 사람. 역시 총명하고 유순한 마르슬린 외숙모와 자식은 없지만 순탄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그냥 보통의 파리 시민이다. 친한 친구로 택시 운전을 하는 샤를이 있으며, 샤를은 아파트 일층에 있는 식당의 종업원 마들렌과 책의 뒷부분에서 약혼을 한다. 식당의 주인이자 건물주이기도 한 투란도트 씨는 가브리엘의 슬하에 아이가 없어서 집을 빌려주었는데 발랑 까진 쟈지가 며칠이긴 하지만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이 못내 마땅하지 못한 상태.
제목이 지하철 소녀 쟈지인 만큼 시골 출신 쟈지는 파리에 가면 반드시 지하철을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아쉽게도 파리에선 지하철과 일부 공용 버스가 파업을 하고 있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65세까지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꼬마.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언제나 쉬지 않고 줄지어 입학하는 꼬마 학생들을 괴롭혀주고 싶어, 장래희망을 초등학교 교사로 정해버린 악동. 정확한 나이는 끝까지 밝히지 않는데 대강 보면 만 9세에서 10세 가량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저질 지방 주간지 <선데이 파리>, <주간 피가로>, <빨간 르몽드> 같은 걸 탐독하여 남녀관계 및 유사행위를 숱하게 포함한 패관문학에 심오한 견해를 밝힐 수 있을 만큼의 재주를 보유했다. 이 아이가 세계의 수도라 일컫는 파리에 와서 좌충우돌을 일삼는다.
그럼 쟈지를 중심으로 하는 코미디냐고? 아닌 거 같다. 쟈지의 돌출행동을 빌미로 하는 숱한 언어의 변화와 중의, 기타 등등이 깔려 있어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면 동의하지 못할 코드가 범벅이 된 듯하다. 발문을 보면 역자 정혜용이 이 책을 대표적인 “번역불가”의 관을 쓴 작품이라 설명하고 있는 바, 정말 읽어봐도 역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막 책을 다 읽고 덮었는데, 한 마디로 소감을 말하자면 이렇다.
“대략 난감.”
1959년에 출간한 일종의 희극 작품이지만, 신기하게도 ‘재미있으나 결코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