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47
리온 포이히트방거 지음, 문광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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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18세기 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유대인 작가 포이히트방거는 책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18세기 말 무렵 서유럽의 거의 모든 곳에서 중세는 말살되었다.”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에서는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아메리카 합중국이 독립선언을 했으며, 인권에 대한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뜬 파리 시민들은 위대한 대혁명을 완수하여 공화정을 수립했다. 기존 가치의 급격한 몰락을 발견한 영국의 부르주아들은 보다 굳게 결속하여 혁명사상의 침투를 경계하면서, 왕국의 몰락을 우려하는 합스부르크와 로마노프 왕가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고립을 꾀하였으나, 혁명 후 프랑스에는 키 작은 코르시카 사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제1 통령으로 임명되면서 군사독재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책의 무대인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절과 비교하여 별 차이 없는 “완고한 중세가 계속 이어졌다.” 매우 부유한 종교재판소는 성경과 다르다는 이유로, 악마적이란 주관적 판결만 가지고, 때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한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간혹 왕실과 힘겨루기를 위한 목적으로 종교재판을 열었으며, 무죄판결은 거의 없는 반면에 심심치 않게 진보적이거나 선량한 사람을 산 채로 태워 죽이고는 했다. “군중은 이단자의 화형식을 열광하며 구경했는데, 그 열광은 투우의 황홀감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죄인이 유죄 판결 후에 뉘우치게 되면, 그래서 교살되어 불태워지지 않게 되면, 군중들은 투덜거렸다. 그러한 ‘신앙 행위’는 즐거운 시간들, 예를 들면 왕의 즉위식이나 혼례식, 아니면 왕세자의 출생 같은 일을 축하하기 위해 자주 거행되었다.”(209쪽)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선왕이 죽고 아직 즉위하지 않은 필리페 2세의 대관식 날을 잡아 하필이면 대규모의 화형식을 거행하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화형은 스페인 왕가와 귀족, 백성 모두에게 축제였던 거다.
 여기에 후손 없이 죽어 비어있는 왕좌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루이 14세의 손자가 차지해 카를로스 3세라 했는데, 작 중에서는 그의 아들 카를로스 4세 치하다. 멍청하고 무능하고,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에다 간혹 사냥을 즐기는 거구의 귀여운 왕을 대신해, 욕심 많고 음란한 아내 도냐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정부 마누엘 고도이가 격랑 속 낡고 큰 배, 스페인의 키를 쥐고 항해하고 있었다. 도냐 마리아 루이사는 파르마 대공국의 공주 출신이고, 마누엘 고도이는 포르투갈 태생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이들은 스페인의 이익과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금, 은, 보석과 자기 후손의 번영과, 더 높은 곳으로의 출세를 위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과 협상을 맺으며, 종교재판관과 주고받기 식 흥정을 도맡는다. 왕가와 최고위 귀족들의 번영을 위하여 스페인 백성에 대해 저질러지는 폭압으로 국민들은 오직 신만이 “끝날 줄 모르는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구원해줄지도 몰랐다.” (656쪽)
 아메리카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은 필연적으로 이웃 국가들의 진보적 귀족, 지식인들에게 인권과, 자유, 평등, 박애에 관한 개념을 새로이 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인물 가스파르 호베아노스, 솔라나 후작부인, 마누엘의 악의적인 추천으로 사심 없이 총리직을 맡는 유능한 돈 마리아노 루이스 데 우르키호 등을 등장시켜 진보적 지식인의 대표선수로 활약하게 한다. 부패한 권력 아래, 더구나 권력이 왕에 의한 것이라면 진보 지식인은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그리하여 호베아노스는 파리에서 돌아와 몇 년 만에 새로 간행한 출판물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체의 종이와 펜을 지급하지 않은 채 구금당하고, 우르키호 총리 역시 자신을 추천한 전 총리 마누엘에 의해 타당하지 않은 혐의로 창문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렇게 전반적인 사회를 개관하는 것은, 프란시스 고야와 그의 의식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4세의 궁정수석화가가 됨으로서 궁정의 모든 왕가와 부패한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들의 초상화로 대표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아직도 중세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페인답게 고전적 양식을 띨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결혼이란 거의 대부분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비록 십계명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는 서로 노골적인 정부를 두었다. 고야에게도 나이 어린 과부 정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돈 마누엘이 그를 찾아와 과부 페피타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는다. 그러지 않아도 이제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한 정부를 자연스럽게 정리할 기회를 준비 중이던 고야는 기꺼이 그렇게 하고, 서양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서로 사이좋게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고야에게도 높은 신분의 새로운 정부가 생기는 등 귀족사회의 어지러운 성적 이합집산 과정을 통해 고야도, 마누엘로 시골농부의 아들이 점점 스페인 최고의 자리를 향해 올라가는 것.
 그러나 한편, 고야는 진보적 인사들과 의견을 같이하며 종교재판소가 보면 기꺼워하지 않을 그림만 잔뜩 그려놓는다. 책에서는 고야의 정부인 알바 공작비를 모델로 했다고 하고, 백과사전에서는 전 정부였던 페피타를 모델로 그렸다는 <누드 마하>를 비롯하여, 왕권신수설을 거의 완전히 부정하는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종교재판관의 시각으로는 악마주의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에칭 판화 작품 <변덕>등. 책에선 <누드 마하>로 인해 기어이 종교재판을 받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원래 작가가 고야 시리즈를 두 편의 작품으로 구상하고 정말로 2권을 조금 쓰기도 한 바, 종교재판은 나중에 마누엘이 실각당하고 그가 소유하던 작품이 다중에 공개된 후인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에서 마누엘은 최후까지 스페인의 최고 권력자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이렇게 잔뜩 써놓은 것은, 고야의 주변이 부패한 왕가와 귀족들, 소수의 진보적 귀족이자 지식인, 그리고 농민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보고 배우고 몸에 익힌 서민적 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화가로 출세하고자 아득바득 공부하면서 당대 궁중수석화가였던 바예우의 여동생과 결혼한 다음에 궁중 태피스트리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들어간다. 그조차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화가의 동생과 결혼했다는 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궁중에 들어간 다음엔 온갖 천박한 왕족과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주문대로 초상화를 그려야했고, 궁중수석화가가 된 다음에 비로소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이 변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의식이 먼저 변해야 하는 것. 책의 제목을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로 한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림도 변하게 할 수 있도록, 화가 자신의 의식 또는 인식이 변해가는 과정, 길을 그리고 있어서이다. 작품 속에 고야는 초상화로 대변하는 고전주의에서,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 볼 수 있는 추함의 적나라한 묘사와 화려한 색의 대비를 거쳐, <누드 마하>의 철저하게 금기시됐고, 심하면 화형에 처해질 수 있는 가리지 않은 전면누드의 반 율법적 실험에 이어, 왕족과 귀족들을 악의적으로 사정없이 괴물로 만들어버린 에칭판화집 <변덕>까지 시대적 혹독한 길 또는 진보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꺼운 독일 소설이 그렇듯, 읽으면서 처음부터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나처럼 회화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나는 한 100쪽 읽고 나서 다시 첫 페이지부터 시작했다. 앞에 노트북을 켜놓고 고야의 그림들을 함빡 올려놓고,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 어느 것인지 꼽아가며 읽었다. 그러니 좀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 스페인 왕의 누나가 얼마나 추하게 그려졌는지, 그러나 추한 모습이 또한 얼마나 재미나는지 발견하는 건 참 재미난 경험이었다. 한편으론 페터 바이스가 그의 책 <저항의 미학>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가며 작품의 미학적 관점을 설파했던 <5월 3일의 학살>이 등장하지 않아 아쉬웠다. <5월 3일의 학살>은 책이 진행하는 과정 이후의 역사, 기어코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해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필리페 7세를 퇴위시키고 나폴레옹의 형 조세프가 왕위를 차지한 후 벌어진 소위 ‘반도전쟁’ 중이었으니 2부를 썼으면 그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책을 읽으며 묘사하는 그림을 인터넷 서핑을 하며 찾아보는 일. 책 읽기에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린다. 그러나 한 작가의 그림에 집중하며 화가의 인식이 변화하는 혹독한 길을 함께 가는 일이라면 심지어 재미있기도 하다.
 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이 책을 비록 한 생을 살면서 읽어볼만한 책으로 꼽을지언정 작가 포이히트방거가 <고야>의 2부를 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나를 다행스럽게 만들었는지....




* 카를로스 4세의 누이 마리아 호세파의 얼굴을 보시려면 (뿐만 아니라 고야가 왕가 사람들의 모습을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그렸는지 보시려면) 클릭하세요. 옷만 화려하지 생긴 건 멍청하고, 욕심덩어리고, 고집불통의 인간들.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IV_of_Spain_and_His_Family#/media/File:La_familia_de_Carlos_IV.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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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3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 쉽지 않아 보여서 도전할 엄두가 안 나던데, 역시 쉽지 않은 책이군요-

Falstaff 2018-07-31 14:39   좋아요 0 | URL
쉽지 않다...라기 보다는 읽는데 참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책이더군요.
특히 (위에서 얘기했듯) 미술에 별 조예가 없는 제 경우엔 말입니다.
날은 덥지 진도는 안 나가지, 책 읽으면서 고야 검색해 무슨 그림을 얘기하고 있는지 확인해야지,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