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의 여인 1 창비세계문학 60
알베르 코엔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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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여태 알베르 코엔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을까. 이토록 화려하고, 장려하고, 장황하지만 아름다운 넋두리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둘만의 사랑’이라는 감옥과, 한 인간의 고결함을 천상에서 지옥으로 순식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질투와, 결국엔 땅 속 나무 상자 안의 바싹 마른 뼈밖에 남지 않을 풍만한 아름다움의 허무와, 야훼가 선택한 자신의 민족을 향해 서서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의 숨 막힘을 어느 인류가 있어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장려한 불륜 이야기.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써야하는 쏠랄. 주네브 리츠 호텔의 무도회장에서 위로 휘어지는 눈썹을 가진 아름다운 ‘아리안’을 발견해 단박에 사랑에 빠진 이이는 어느 날 늙어 송곳니 두 개를 남기고 전부 이가 빠진 늙은 유대인으로 변장, 다회茶會를 연 아리안의 남편 됨 씨의 집 커튼 뒤에 숨어 그녀를 기다린다. 다회가 끝나자 자기 방에 든 아리안은 갑자기 자기 앞에 나선 흉측한 모습의 유대인 늙은이가 난데없이 자신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듣고 대경실색을 하는데, 아 한 번인들 생각이나 해봤을까, 어떤 작가가 그토록 장황하고 화려한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옮겨본다.

 

 “그날 리츠에서의 저녁, 그 운명의 저녁에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비천한 인간들 틈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고귀했고,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그녀와 나뿐이었습니다, 그 떠들썩한 사람들, 성공에 혈안이 되고 더 큰 힘을 향한 탐욕에 가득 찬, 이전의 나와 같은 그 사람들 틈에서 우리 둘만 유배된 자들이었습니다. 오직 그녀만이 나와 같았습니다, 그녀는 나처럼 슬펐고, 도도한 표정으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벗 삼은 채,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눈까풀이 한번 깜박이던 순간, 그 첫 순간에 난 그녀를 알아보았습니다. 바로 그녀, 예기치 않게 나타난, 하지만 내가 계속 기다려왔던 여인, 그 운명의 밤에 내가 선택한 여인, 끝이 휘어 올라간 그녀의 긴 속눈썹이 처음 깜박이던 그 순간 내가 선택해버린 여인, 그녀, 성스러운 부하라, 행복한 사마르칸트, 고결한 그림이 수놓인  자수, 그녀가 바로 당신입니다.”  (1권 52쪽)

 

 다시 말하건대 극히 일부분이다. 이런 사랑의 고백이 수 페이지에 걸쳐, 문단 변환 없이 구구절절 이어지는 걸 처음 경험하는, 경악, 경이. 오, 놀라워라. 나는 이 부분을 읽자마자 주저 없이 알베르 코엔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았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수필집밖에 없다. 이 작품 <주군의 여인>은 주인공 쏠랄과 쏠랄의 가문을 둘러싼 네 편의 소설, 차례대로 <쏠랄>(1930), <망주끌루>(1938), <주군의 여인>(1968), <용자들>(1969) 가운데 세 번째 작품에 해당한단다. 나머지 세 편은 언제나 번역을 해 나로 하여금 읽는 즐거움과 또 다른 경이를 안겨줄까. <주군의 여인>에서도 괴팍하고 재치가 번뜩이는 언변을 자랑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망주끌루와 다른 네 명을 더한 ‘용자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불륜 이야기라고는 위에서 이야기했다. 주인공 쏠랄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앞으로 유사한 비극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협약기구인 ‘국제연맹’에 사무차장의 직위에 있는 프랑스 국적의 유대인이다. 국제연맹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든 국제연합과 달리 토론과 결의에 의한 제재나 군대의 동원 같은 물리력을 사용할 권한이 없어 사실상 강대국들의 사교집단에 불과했으나 당시 부르주아와 그때까지 작위를 유지했던 (그래서 촌스러웠던) 귀족들에게는 상당히 명예로운 직업이었던 모양이다. 무능한 국제기구라서 사무처장(국제연합에서의 ‘사무총장’과 비슷한 자리), 부처장副處長은 주로 국제연맹에서 지급하는 급여와 판공비로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다른 이들이 마련한 야회에 참여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했고, 실제적인 일은 세 명의 사무차장들이 맡았다고 하는 바, 우리의 잘생기고 키 큰 주인공 쏠랄이 세 명 가운에서 가장 중요하고 능력 있는 차장으로 설정되어 있다.
 시대는 3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일 두체, 뭇소리니, 스페인의 프랑코가 등장해 유럽의 하늘 아래 파시즘의 암울한 검은 기운을 두르기 시작했고, 특히나 독일 안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노골적으로 펼쳐져, 이런 반유대주의 기운이 독일을 중심으로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그리스, 심지어 로스차일드를 배출한 영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글쎄, 히틀러한테도 배워야 할 게 있단 말이야!) 스위스에서도 프랑스에서도, 흰 백묵으로 쓴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란 벽서가 곳곳에서 눈에 띄기는 하나 누구도 이 비정한 흰 벽서를 지우려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감잡히시지? 쏠랄은 스스로 유대인으로,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듯이)독일에서 조만간 인종 학살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희망하는 사람은 자유로이 유럽의 다른 국가로 이주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국제연맹에 상정하려 준비하다가, 벼락을 맞아, 긴급하게 열린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조금의 시간적 유예도 없이 즉각 사임을 당한다. 서양인들에게 사임이란 건, 참관인 입회하에 자기 사무실에서 자신이 쓰던 개인 소유물을 박스에 담아 20분 안에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쏠랄은 그동안 사무차장으로 많은 급여를 고스란히 모아 놓았으며, 민족의 DNA에 들어있는 똘똘한 지능과 돈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밑바탕으로 한 번 해본 주식투자가 대박이 나서 죽을 때까지 주네브 최고 호텔인 칼츠의 스위트룸에서 먹고 잘 수 있는 그거, 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천생 부르주아랄 밖에.
 불행은 언제나 혼자 오는 법이 없다. 사무차장의 직위에서 쫓겨나자마자 파리 법정은 쏠랄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기 전에 프랑스 영토 내에서 살아온 기간이 규정보다 짧음에도 불구하고 공문서에 허위로 기재해 불법으로 국적을 얻었다고 판단, 프랑스 국적도 몰수해버린다. 여권과 공민증을 압수당하고 대신 체류확인증을 발급받은 쏠랄은 이제 본격적인 방황하는 유대인의 대열의 일원이 될 수밖에. 일찍이 유대인 노인으로 변장을 하고 스위스 유부녀 ‘아리안’(어째 이름이 그렇다. 독일 민족이 아리안 족 아냐?)의 방에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토로했지만 흉한 외모 덕택에 그리도 유려한 말빨에도 불구하고 단칼에 거절당한 쏠랄은, 사무차장 직을 잃기 전에 이미 자신의 칼츠 호텔 스위트룸에 부부를 초대하고, 이 과정에서 아리안 됨 여사를 소파에 쓰러뜨리는데 성공, 그녀 인생 최초의 깊은 키스를 퍼붓는다. 아, 지금도 삼삼하다. 아리안이 남편 됨 씨와의 부부생활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지루하고, 피곤하고, 난감한 일인지 떠올리는 장면. 상상도 하지 못한 신체의 일부를 사용하는 깊은 키스가 얼마나 이색적이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성적이고, 사람을 함몰시키며, 사랑의 행위의 심도를 더 깊게 만들고 싶어지게 하고, 진정한 사랑은 서로 가장 깨끗한 곳을 부딪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저분한 곳을 맞대는 행위(내가 지금 만든 말이다. 구강은 인간의 몸에서 별의별 세균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란다.)라는 이 모든 느낌을 떠올리는 장면. 정말 알베르 코엔, 읽으면 읽을수록 신기한 작가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자기 부하직원의 아내를 꼬여내 매일 밤 아홉 시부터 새벽까지 불타는 밤을 지내온 쏠랄. 이제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아리안의 남편 됨 씨를 진급시켜놓고 유럽 각국, 북아프리카와 중동지방까지 장기 출장을 보내 그동안 실컷 재미 본 쏠랄과 아리안. 그새 쏠랄도 국제연맹에서 쫓겨나고 프랑스에서 국적을 박탈당하느라 며칠 출장을 갔는데, 일정이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쪽박 깨진 사연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하기도 쪽팔린바 작지 않아 연락도 하지 못해, 그새 사랑의 안달이 난 아리안 여사. 그녀 스스로 고백한다. 쏠.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 순결한 처녀였답니다. 그대를 알고 난 다음에야, 그대하고 같이 잔 다음에야 희열을 알았으니까요. 요 지랄을 했건만 잠자리의 희열을 줄 ‘나의 주인의 여자’, ‘주군의 여인’을 이토록 애가 끊어지게 만드시나요. 이 상태에서 쏠랄에게 전보가 온다. 9월 1일 오후 아홉시에 당신 집으로 가겠노라고. 그러나 아내에게 깜짝 선물, 이른바 서프라이즈를 선사하기 위해 아무 연락도 하지 않고 쏠랄보다 딱 2분 먼저 도착하는 남편 됨 씨. 어떻게 되느냐고? 가르쳐드리지. 다음날 새벽, 쏠랄은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 <용자들>을 통해 아리안 됨 여사를, 글쎄 이거 뭐라 해야 하나, 납치도 아니고, 유괴도 아니고, 하여간 여사를 모셔오게 해, 그날로 주네브를 떠나버린다.
 이젠 세상에서 딱 둘 만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것. 부르주아와 귀족계급의 모든 사람들은 아리안과 쏠랄의 불륜과 도피를 알게 되고, 비난을 퍼붓는데 어찌 또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을까. 마르세유 근방으로 떠난 이들과 우연히 마주친, 예전 같으면 쏠랄이 아는 척도 하지 않았을 미미한 계층의 인간들마저 쏠랄-아리안 커플을 벌레 보듯. 그걸 넘어 우리의 주인공 커플이 얼마나 재수 없고, 불결하고, 건방진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사랑이란 이름의 둘 만의 감옥. 사랑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애정이 커지는 만큼 욕정은 줄어들고, 욕정이 줄어드는 것을 여자, 아리안은 사랑의 농도가 흐려지는 것으로 짐작하는 과정, 이른바 권태가 틈입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드디어 그녀가 은밀한 욕망을 털어놓았다! 하루에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지긋지긋한 연인을 벗어나는 것, 매일같이 실내복을 바꿔 입어가며 집안을 돌아다니던 연인이 드디어 밖으로 나가는 것! 사실 그녀가 옳다. 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로를 보는 것, 늘 놀라울 정도로 사랑한다고 서로에게 말하는 것, 모두 진정으로 숨 막히는 일이다.” (2권 481쪽)

 

 위의 인용 마지막에 “진정으로 숨 막히는 일”은 숨 막히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숨 막힘, 즉 공기 내 산소가 부족한 경우 느끼는 감정을 의미한다. 1935년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된 유럽에서 유대 제사장의 적장자 쏠랄. 사고무친의 부유한 상속녀 아리안. 이들의 사랑은 맺어지는 순간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으며, 아메리카나 아시아로 떠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이들의 유럽문화에 의한 예속은 결정적 파국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권태와 질투라는 훌륭한 감미료까지. 이들은 점점 다가오는 검은 화차 앞에서 어떤 사랑의 노래를 부를까.

 

 

 당신이 이 작품과 궁합이 맞기만 하면, 두 권, 1,300쪽이 넘는 한 편의 장편소설 덕에 적어도 일주일은 흥미진진하게 보낼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조심하시라, 길고 긴 장황한 사설에 나가떨어질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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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7
에벌린 워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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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치가 넘치는 영국작가 에벌린 워Evelyn Waugh. 이이의 작품 가운데 한국어로 번역되어 팔리고 있는 것이 같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시리즈로 나와 있는 <한 줌의 먼지>, 딱 하나 더 있다. <한 줌의 먼지>에서 영국의 부르주아 계급 안에서 벌어지는 분탕질을 송곳 같은 해학으로 확 비틀어버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웃음이 비질비질 나오게 만든 바 있어, 이번에 다시 민음사에서 신간이 나오자마자 찾아 읽었다.
 워Waugh가 1903년 태어나 영국인으로 세상을 살면서 특이하게도 스물일곱 살 때인 1930년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다. 거기다가 더 특이하게도 가톨릭으로 개종한 다음에 에벌린은 아내 '에벌린 가드너'와 이혼을 해버리는데 이거 교회법으로 가능한가? (지금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한테 전화해봤다. 가능하단다. 혼배성사를 하지 않은 배우자하고는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이거 하나 가르쳐주고 술 사라 한다. 가톨릭은 이게 문제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 거.) 하여간 이렇게 에벌린과 이혼한 에벌린은 위에서 얘기한 <한 줌의 먼지>처럼 주머니 속에 든 송곳 같은 유머 코드를 점점 지워내기 시작한단다. 그래 풍자와 송곳 유머가 절묘하게 섞은 작품을 썼던 시기를 “초기의 에벌린”으로, 가톨릭 개종 후 아마도 1940년대에 들어선 시기부터는 “후기의, 진지한 에벌린 워”라고 일컫는다고 작품해설에 쓰여 있다. 작품해설은 당연히 책을 팔기 위해 좋은 얘기만 해야 하니까 좀 감안해서 읽는다면, 초기와 진지한 에벌린을 구분하는 시점, 또는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 <다시 찾은 브라이드헤드>라고, 이게 진지한 에벌린의 첫 작품 비슷하다는 말을 한다. 그거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아무 상관없다. 독자는 그냥 읽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앞 부분엔 <한 줌의 먼지> 비슷한 풍자 코드가 깔려 있어 그 양반 참 뭘 아는 인간일세, 감탄 돋게 만들지만, 본문만 566쪽의 장편이 뒤로 갈수록 점점 진지 모드로 디크레센토 되면서, 심지어 마지막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로 “로만 가톨릭 만세!”
 프롤로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향토방위군 중대장 ‘나’가 서른아홉의 나이로 영토 방위훈련을 하던 도중에 브라이즈헤드 성 근처에 도착하는 걸로 시작한다. 이 향토방위군의 장면은 저 뒤에 에필로그에 다시 나와 이제 브라이즈헤드 저택 안으로 직접 들어가 지난날의 회오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럼 본문은? 작가 에벌린 워와 생년 생월이 같은 ‘나’ 찰스 라이더가 옥스퍼드에 입학하여 참으로 개성 있는 악동친구 서배스천(‘세바스찬’의 멋 부린 국어표현)을 알게 되고, 이 친구의 런던 저택과 더불어 지방에 있는 브라이즈헤드를 방문해 서배스천의 어머니, 형, 두 여동생과 안면을 익히고, 좋은, 좋아도 너무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어느날 서배스천의 어머니로부터 “어쩜 사람이 이렇게 천연덕스레 악랄할 수가 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구나. 네가 그토록 많은 점에서 그렇게 다정했으면서 그다음에는 어찌 그리 무심하게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라는 말을 들으면서 이 가정과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문제는 '나'가 서배스천의 음주에 관대한 때문이었다.
 젊은 서배스천은 천생 자유의 별자리를 타고 세상에 떨쳐졌던 것. 어머니의 가톨릭 적인 엄격과 규율과 기타 등등은 모든 속박으로부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서배스천에게 한도 끝도 없는 술을 들이켜게 만들었다. 일찌감치 알코올중독에 빠져든 것. 서배스천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승리를 거두고, 귀국해서 영광을 누리는 대신 따뜻하고 풍광 좋은 이탈리아에 말뚝을 박아버리고, 말뚝을 박은 김에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성과 살림을 차려버렸다. 아버지는 왜 아내의 주변을 박차고 나와버린 것일까.
 소설은 앞부분에서 옥스퍼드 일, 이학년 학창시절의 젊음과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젊음의 낭비 같은 것으로 시작해 가문의 몰락, 글쎄 몰락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과격하겠지만 영국특유의 한사상속(한사상속이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참고하시압.)이 끝난 첫 세대에서 마치멘 가문이 대가 끊기는 약 20년간을 그리고 있다. 학창시절의 젊음, 청춘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괴로운지 참 공감할 수 있는 유머 코드를 섞어 서술하고 있으며, 이건 결혼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물론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비록 내가 쥐뿔도 아는 게 없지만) 훌륭한 소설임에는 틀림이 없는 거 같은데, 뒤로 갈수록 특히 한 죽음을 앞에 두고 점점 엄숙, 진지해져가는 것이 (단연코 한 아마추어의 개인적 감상으로는) 안타까웠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역자 백지민으로 말하자면, 이름으로 봐서, 또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운운하는 걸로 봐서 여성 같아서, 요새 시절이 어느 시절이라고 여자 남자를 가리겠느냐만,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주변에 있는 남자한테 감수를 한 번 쯤 받는 것이 좋을 듯싶다. 난데없이 중대장의 “종복”이 나온다. 종복從僕은 남자 종, 즉 노예를 의미하는 바, 참 좋지 않은 단어. 요새는 그런 거 말고 ‘당번병’이라고 쓰고, 군인들끼리는 그냥 ‘따까리’로 호칭한다. 난 번역과 오역을 판정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아 번역의 질 같은 건 건너뛰고, 한국어 문장이 읽기에 아주 좋은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작가 에벌린 워의 문장이 긴 편이라서 그런 듯 보였지만 그래도 역자는 좀 더 한국어 문장에 힘을 써야 할 듯. 네가 뭔데 이따위 지적질이냐 한다면, 난 소비자이자 독자로, 내가 읽기에 역자가 퇴고에 충분한 힘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그게 참 아쉽다고 말하겠다.
 쓰고 다시 읽어보니 좀 야박하게 쓴 거 같은데, 그리 쓴 것처럼 읽힐 수 있는데, 분명하게 말하노니, 재미있는 소설이며,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을 선택하기 쉽지 않을 정도의 품질을 갖추었으며, 역자의 한국말 문장 역시 요새 출간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서는 결코 안 좋은 수준이 아니다.
 작가 연표를 보면 초기에 <모략>, <92일>, <특종> 같은 책이 보인다. 이런 것들도 얼른 번역서가 나왔으면 좋겠다. 에벌린 워. 요새 말로 “흥미 돋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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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1-2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 이 작품은 개인 취향 꽤 탈 작품 같아요. 폴스타프 님 처럼 재미나게 읽으실 분들도 있곘지만 ‘이게 뭐냐!‘ 할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듯합니다. 지나치게 장황항 느낌이었어요. 암튼 저는 이 책 절반쯤 읽다가 끝내 포기하고 도서관에 반납했거든요. (책 샀으면 엄청 후회했을 거 같아서 다른 분들도 참고하라고 댓글 남깁니다....)

Falstaff 2018-11-21 11:06   좋아요 1 | URL
앗, 그러셨습니까.
작품 구조가 서배스천, 줄리아 등의 가족, ‘나‘의 직업과 아내와의 관계, 서배스쳔의 아버지, 이렇게 독립될 수도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 권에 담으려 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저도 장황하다는데는 동의합지요.
이 양반은 초기 작들이 더 매력적이라고 하더군요. 이건 중/후기 정도고요. 본문 마지막에 얘기한 <모략> <92일> <특종>이 전부 초기 작품인 이유입니다.
 
- 이광수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7
이광수 지음, 이경훈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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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원. 진정한 애증의 인물. <무정>과 <사랑>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작품 <흙>. 당연히 심훈의 <상록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계몽적 브나로드 계열. 1932년부터 33년까지 연재한 신문소설로 춘원 자신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던 시절에 안창호 선생의 영향을 받아 귀농운동을 독려하기 위하여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온다. 황군입대를 독려하는 등의 부일행위는, 절대로 잊지도 용서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이 독후감에선 거론하지 않겠다.
 그런데, 춘원의 부일행위를 빼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가, 결국엔 다 지워버렸다. 부일행위를 빼고는 도무지 춘원과 그의 작품을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흙>에서 작가가 줄창 주장하고 있는 것이 조선적인 것의 아름다움. 그걸 지켜나가는 사업으로 협동조합, 야학, 유치원 등의 교육 등의 농민운동이다. 반면에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부르주아들의 신문물에서 비롯하는 경박한 행동양식을 힐난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특정 한 장면을 곱게 봐줄 수가 없었다. 본문만 760쪽에 육박하는지라 다시 찾아보기도 힘든데 마침 작품해설에도 딱 그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만주사변 이후 본격화된 중일전쟁에 징집되어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군인들을 보는 주인공 허숭.
 “송영하는 군중이나 송영받는 장졸이나 다 피가 끓는 듯하였다. 이 긴장한 애국심의 극적 광경에 숭은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의 싸움터로 가는 젊은이들, 그들을 맞고 보내며 열광하는 이들, 거기는 평시에 보지 못할 애국, 희생, 용감, 통쾌, 눈물겨움이 있었다. 숭은 모든 조선 사람에게 이러한 감격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사지에 임하는 군인들의 긴장한 애국심. 이런 군국주의적 일본정신을 모든 조선 사람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는다면 오버인가? 이광수의 의식 속에서는, 한 커뮤니티(책 속에선 농촌무대인 ‘살여울’)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농민운동 역시 이런 ‘긴장한 애국심’에 입각해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애초부터 작가는 조선적인 건 순응과 자제, 신독 같은 수동적 미덕 정도로 대표하였으며, 그러면서도 낙후하고, 미개하고, 더럽고, 초라하고, 관습적으로 수탈당해온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로 지정해버렸다. 토지와 집을 저당으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에게 살여울에 사는 거의 모든 조선 농민이 돈을 얻어 잔치를 하고, 술과 고기를 먹고, 노름을 하다 ‘순식간에’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설정은 참. 하여간 그리하여 특히 조선의 농촌은 새로 개량되어야 하는 지역이어서 주인공 허숭으로 하여금 공동작업, 협동조합, 유치원 등을 건설하게 하지만, 1930년대 당시 독자들은 이 책 또는 신문연재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 것이 세계 최고’라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의 기본인식이 일본 군인들의 긴장한 애국심을 조선 사람들에게도 같은 감격으로 느낄 기회를 주고 싶었으니까.
 작품 자체에 대한 독후감은 별로 쓸 것이 없다.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한 것이니 계몽주의 소설일 것이고, 당대의 문호 이광수의 작품이라 당연히 남녀상열지사가 포함되었을 터이며, 30년대 장편소설들이 그렇듯이 등장인물들은 정형화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는 다들 짐작하실 것이다. 무엇보다 거의 무오류한 주인공 허숭이 등장하고, 한 사건을 기점으로 천하제일의 악당이 순식간에 그리도 혐오하던 농촌운동에 전 재산을 다 바쳐 투신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개차반 귀족 자제가 난데없이 조선에서도 제일 열악한 검불랑에서 적수 허숭과 같은 농촌운동을 벌여야 했는지도 ‘의문 없이’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은 비록 농촌운동을 주제로 하지만, 읽는 이에 따라서 1930년대 당시 서울에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이 즐기던 방탕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다. 이 책으로 이광수는 더 읽지 않으리라 새삼 작정한다. 그러나 이광수, 이 사람이 애증의 이광수라서 작정한 것을 잊고 언제 또 춘원의 장편을 내키지 않는 손길로 한 권 골라 읽을 지도 모른다. 내 경우만 그런가, 참 나. 이광수, 지긋지긋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진짜 애증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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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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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소제목이 붙은, 본문만 735쪽에 달하는 장편소설. 읽어보면 이 책은 소설과 철학 사이의 기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화두는 질質. “꾸미지 아니한 본연 그대로의 성질”이 사전적 의미인데, 당연히 책에서는 사전적 의미만 포함하지 않는다. 소제목처럼 질은 “가치”와 대단히 가까이 자리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희랍시대 철학자에 의하여 발견되고, 의미가 축소된 “비범함”, 희랍어로 “아레테”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예술의 본질은 쾌락이다”라는 건 아무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비범한 존재들, 아레테를 보유한 소수의 인간들에게만 허여된 쾌락인 것.
 주인공 파이드로스가 대학에서 수사학 전임강사로 일 할 무렵, 학과장은 학생들에게 ‘질質 적인 강의’를 하라고 주문한다. 여기서 처음 “질”이란 테마가 등장한다. 학과장에게 질이 무엇인지 묻자 그녀는 자기 전공이 아니란다. 한 번 화두를 잡으면 죽기 살기로 용맹 정진하는 체질의 파이드로스는 “질”이란 것을 더 공부, 연구하여 정체를 밝히기 위해 탐색해본 바, 시카고 대학의 “개념분석과 방법론 연구”라는 위원회가 있는 걸 발견했다. 이 위원회는 고대 희랍을 전공한 위원장과 영문학, 철학, 중문학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일종의 통섭학문 과정이다. 그래 우리나라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결정, 먹고 살만한 전임강사가 시카고 대학의 학부에 입학을 한다. 그러나 고루한 위원장은 그의 전공이 수사학이란 걸 알자마자 위원회 대신 철학과에 들어가도록 조치를 해버린다. 파이드로스는 기본적으로 대단한 철학적, 수사학적 소양을 지니고 있던 학생. 거기다가 질, 아레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의 철학이라 주장한 변증법의 시녀로 전락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과,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소피스트들까지 몽땅 연구한다. 그리하여 천하무적의 신공을 지니게 된 파이드로스는 강의 중 토론을 통해 철학 교수를 격파하고, 철학 교수 대신 강의를 이어받는 “개념분석과 방법론 연구” 위원장마저 일도양단, 파이드로스가 결론을 낸 2:0의 스코어로 작살을 내버린다.
 하 이거 참, 세상에 이런 무협지가 또 있나. 좀 어리벙벙한 부잣집 아드님이 중원을 떠도는 고수한테 부모님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집안도 거덜이 나서, 숲속에 은거하고 있던 초절정 도사를 찾아가 갖은 죽을 고생을 해 무예를 연마, 드디어 중원의 고수에게 복수를 하는 것만 무협지가 아니다. 평생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해온 위원장에게 대항하기 위해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집중력을 쏟아 탐구한 다음 벌이는 일기필마의 진검승부. 철학에 관한 논의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진짜 무협지 아니냐!
 여러 번 얘기한 것 같은데, 내가 철학하고 친해지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같은 말을 어렵게 하려고 기를 쓰는 철학자들의 문장을 해석하는 일이 너무 힘겹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소피스트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저 후대의 칸트, 흄을 비롯해 무수한 철학자들을 인용하며 질質과 가치, 또는 탁월함(아레테)를 설명하는데도 오직 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피어시그가 써서 주장한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글을 읽어가면서 흥미를 느꼈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올 때마다 동의를 했거나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으며, 심지어 재미까지 있었으니, 내가 그동안 철학을 멀리했던 가장 큰 문제는 그동안의 철학자들이 쓴 수사법아니었을까. 나도 얼마든지 철학적 논의에 끼어들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하긴 뭐, 철학자들이 밥 먹고 죽자사자 용맹정진해 깨달으려고 하는 게 인간살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파이드로스가 “개념분석과 방법론 연구”의 위원장을 상대로 철학적 육박전 끝에 2:0으로 이기는 게 다냐고? 천만의 말씀. 하루에 네 시간만 자고 거의 모든 나머지 시간을 공부하는데 쏟은 그는 이후 네 시간이 두 시간으로 되고, 두 시간에서 전혀 잠을 자지 않는 인간으로 변하고, 하루 종일 침실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쉬운 얘기로 미쳐버렸다.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 그것도 지금은 절대 금지된 치료방법, 일찍이 켄 키지가 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인공 맥 머피처럼 전두엽 근처에 전기충격을 가해 과거의 많은 부분을 잊어버리게 된 상태에서 퇴원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이 되는 바, 새롭게 만들어진 인간이 화자 ‘나’가 된다.
 책은 화자 ‘나’가 열한 살짜리 아들 크리스를 모터사이클에 태우고 미국 중부를 출발해 서부까지 휴가여행을 감행하는 과정을 써나간다. ‘나’는 기계공학 또는 기계수리에도 일가견이 있어 모터사이클을 수시로 분해 조립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보유했다. 화자 ‘나’가 파이드로스라는 사실을 왜 이야기하느냐 하면, 책을 읽으면 50쪽에 이르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 수 있으니 굳이 독후감에서 언급하지 않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이다. 처음엔 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이웃 부부와 함께 출발했다가 몬태나 주에 있는 ‘나’의 친구 집에서 ‘나’와 크리스는 등산을 하기로 하고 드러머 부부는 귀가를 한다. 부자가 고생고생을 하며 등산을 마치자 곧바로 또다시 길을 떠나 캘리포니아를 향해 가며 갈등을 겪기도 하고 당연히 화해도 해가며, 사실은 아빠가 정신이상이었다는 고백까지 곁들여 이야기가 자꾸 복잡해지기도 한다.
 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하나는 로드 무비, 모터사이클을 타고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과 모터사이클과 기계공학과 수리에 관한 실제적 사색 또는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나’가 파이드로스 시절에 벌였던 철학적 오디세이아, 이렇게 구성이 된다.
 이 책에 대해선, 사실 여태 쓴 독후감이 아무 필요가 없다. 책 읽으면서 독후감에 인용하거나 하여간 써먹으려고 포스트잇 몇 장 붙여놨었다가 그냥 다 떼버렸다. 이건 읽어봐야 안다. 정말이다.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한 가장 쉬운 말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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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성서 RCH72E-1C - 대(大) 단본 무색인 - 보급판, 가톨릭용
대한성서공회 편집부 엮음 / 대한성서공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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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에 최초로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한 것은, “20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기독교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 큰 일”이었다고 이 책의 머리말에 쓰여 있다. 그 전에는 구교용 성서와 신교용 성서가 있었다는 뜻일 터이다. 그래 같은 하느님을 모시면서 다른 성서를 써온 것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공동으로 번역하기로 했는데, 책표지 아래쪽에 보면 괄호 열고 ‘가톨릭 용’ 괄호 닫고, 이리 표기가 되어있다. 그러니까 1977년에 어찌됐든 공동으로 번역을 했지만 신교 쪽에서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들만의 ‘성경’을 따로 사용하는 바람에 ‘공동번역 성서’는 가톨릭용으로만 쓰인다는 의미, 라고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한테 들었다. 나는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주며, 1977년에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한 일은 너희들,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을 믿는 너희한테는 모르지만 ‘너희들을 제외한 인류 전체’에겐 전혀 깊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고 발언하는 것으로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공동번역 성서> 가운데 애초부터 신약에는 흥미가 있지 못해 구약만 읽기로, 읽기는 읽는데 단 한 글자로 빼놓지 않고 모두 읽기로 작정을 하고 이제 막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두 읽기를 마친 지금, 과연 성서를 읽고 나서도 독후감을 쓰는 게 옳은지 걱정부터 앞선다. 원래 <공동번역 성서>의 구약을 읽을 자리(순서)에 갑자기 다른 책을 끼워 읽고 독후감을 썼다가 야훼의 불칼을 맞은 바 있어, 다른 책도 아니고 ‘구약성서’의 독후감을 쓰기가 오금이 다 저리다. 책 자체가 진리인 성서/성경을 읽었으면 그냥 진리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감히 ‘읽은 느낌’이 이러니저러니 나댄다고, 전 세계는 그만두고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신도들한테, 예수가 세리들에게, 야훼가 애굽인들에게 했듯, 귀싸대기 한 대씩만 맞는다고 쳐도, 최하가 중상일 테니.
 그러나 이교도도 아니고 무신론이자 유물론자인 내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성서>를 ‘그냥 책’으로 인식을 하고 읽었으니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처럼 <성서>의 내용이 어찌됐든 그냥 쓰여 있는 대로 알아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분명 느낌이 있었으며, 그걸 속으로만 가지고 있는 대신 글로 써두어, 나중에 내가 <성서>의 구약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었구나, 알 수 있게, 이를 기념한다는데 누가 까탈을 잡으랴. 또 까탈이 잡혀 내 독후감을 읽은 기독교도들이나 다른 종교인한테 한 번 더 불칼, 이번엔 조금 더 해서 불창, 불총, 불대포를 받더라도 이를 어이하랴. 할 수 없는 일이지. 내가 쓴 독후감이 어찌 됐든 내가 책임진다. 어째 좀 비장하지? 독후감의 대상이 되는 책도 그렇고, 야훼의 불칼 맛이 어떤지 몇 주 전에 경험을 해 조금은 알 듯해서 더욱 그러는 듯. 어쩌랴,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 싶고, 썼으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이런 짓하다 가끔 얻어터지기도 하고, 욕도 먹고, 말로는 안 해도 실망스러워 하기도 하고. 그게 인생이지.
 <구약성서>를 읽어보기로 결심을 한 건, 어느 책에서든가 기억나지는 않지만(솔직히 이거 아니면 저건데, 섣불리 하나 찍었다가 아니면 창피하잖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가 구약의 시편이라는 거. 그래 여주인공이 늘 시편을 읽는 장면이 인상 깊어서였다. 그거 말고도 숱하게 창작의 재료가 되어왔던 창세기와 출애굽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판관 삼손의 머리카락, 솔로몬의 지혜, 홀로페르네스의 대가리를 잘라온 유디트, 흔히 ‘느브갓네살’ 또는 ‘나부코’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한 바빌론 유수, 기타 등등. 또 있다. 황석영이 썼다고 했다가 나중에 양아치 출신(진짜 양아치 출신이다) 제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이 쓴 소설로 밝혀진 <어둠의 자식들>에서 ‘범털’이 아니라 ‘개털’로 감옥에 간 이동철이 구약성서를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바로 “이스라엘 삼국지.” 다분히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의 역사서라고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다가, 죽는 줄 알았다. 물론 재미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아이고 머리야, 한 얘기 또 하고, 그 얘기 한 번 더 하고, 한 번 더 한 얘기 또 하고, 그리하여 n번쯤 반복하는 데야 어떻게 견딜 방법이 없더라. 시편도 진심으로 기독교를 믿는 신자/신도들이면 감동 감화 가득해서 마음을 울리며 읽겠지만 애초부터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꽉 들어찬 불쌍한 인간은 도대체 이걸 감사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집단에 경의를 표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름다워? 그건 선생님들이나 그런 거고.
 시편에 이어지는 잠언도 뭐 별로. 가까운 사이에선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솔직한 말을 해줘야 한다는데, 아이고 랍비님, 경험상 말씀드리는 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되는 사람한테 일수록 솔직한 말 해주면 ‘가까운 사이’가 결딴나더라. 이건 그냥 예를 하나 든 바이며, 구약성서니까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가 막 생기기 시작할 당시에 기록한 율법과 바른 행동양식, 미풍양속, 기타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되살려 너도 나도, 젊거나 늙었거나, 여자들은 빼고 남자들만, 새삼스레 할례를 받을 수도 없는 거고 말씀이지. 적어도 구약에 의하면 할례를 받지 않으면 사형이다. 지금이야 가정의학과, 비뇨기과, 심지어 피부과에서도 할례를 해주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예언자 또는 선견자들 또는 레위의 후손들만 할례를 베풀 수 있었는데 도대체 유대인들은 귀두포피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그까짓 껍데기에 목을 맬까? 궁금하시지? 글쎄 기독교도도 아니며 모든 종교에 관심도 없는 인간이 처음 구약을 읽으며 든 생각인데, 할례는 단순히 위생적 측면에서 귀두포피를 잘라내는 의료행위라기 보다 야훼를 믿는 집단의 정화의식이라고 봐야할 거 같다. 중간 너머 읽어 가다보면, 가슴에 또는 머리에 할례를 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봐 그렇다는 말이다. 많이 아시는 기독교인 계시면 무슨 엉뚱한 이야기를 하느냐 지탄하실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생각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다. 당신이 기독교도/기독교인이라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만일 기독교는 믿지 않지만 나처럼 ‘살면서 한 번 읽어봐야 할 책’ 정도로 가톨릭 용 <성서>나 개신교용 <성경>을 꼽는 분이 있다면, 강력하게 권하니, 재고해보시라. 무엇보다 과하게 장황하다. 1,474 페이지. 한 페이지에 양면 분할 인쇄. 그래서 읽어야 할 면은 1,474 x 2 = 2,548 면이다. ‘습자지’라고 하면 젊은 분들은 무슨 야한 얘기가 나올 거라 기대할 수 있겠으나 습자지는 1970년대 붓글씨 쓰던 얇은 종이를 칭하는 것으로, 습자지만큼 얇은 종이로 1,474 페이지, 737 장을 넘기는데,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그냥 그 자리를 읽고 있는 듯한 지루함은 진짜 읽어봐야 안다. 위에서 얘기한 양아치 출신 지체장애인 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이 쓴 작품의 주인공 이동철(작가 자신은 나중에 자신이 정말로 목사가 되지만)은, 성경을 감방 안에서 한 장씩 찢어 몰래 담배를 말아 피우는 목적으로 애용하기도 한다. 이젠 담배 피우는 인종은 야만인으로 대접받는 냉혹한 현실에서 비 기독교인에게 성서의 용도는 점차 좁아지기만 할 뿐이다. 성서에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야훼의 관점으로 극단적인 왜곡을 당하고 있으며, 그게 한 사건 당 수십 차례 되풀이 되며 믿음 없는 독자를 콱 질리게 만든다. 기독교도들은 시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라고 했으나, 나는 읽으면서 정말로, 시각에서 비롯하는 육체적 멀미를 느껴야 했다. 비기독교도로 나처럼 <성서>를 교양의 대상으로 섣불리 겪으려는 분들, 다시 말씀드리오니, 신중하게 재고해보시라.
 독후감 다 썼다. 돌 던지실 분은 지금부터 던지시면 된다. 단, 나는 야훼의 돌보심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종임을 감안해주시면서 팔매질을 하시기 바랄 뿐이다.

 

 

 한 마디 더. 쾰른 대성당, 파리 노트르담 성당, 로마 대서당,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이런 건축물을 (비행기 타고 가서 직접 본 게 아니라 TV를 통해)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미의 태중에 있을 때 낙태 당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불행한 운명을 견디는 동안에 분명히 하느님은 자신을 위한 이런 웅대하고, 거창하고, 화려하고, 눈부신 전당을 짓는 걸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왔다. 난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출애굽기에서부터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자신의 성막聖幕과 제사장을 위해 에봇이란 초호화판 의상을 입히는 등, 당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치와 의상을 요구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최초의 성전 역시 당시 기술로 최고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요란난만하게 지었으며, 성전 준공식에는 황소 이만 이천 마리, 양 십이만 마리를 도살해 불에 태웠다. 이른바 번제.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는 소와 양이 타면서 하늘로 치솟던 초미세먼지를 흠향하고 있었던 거다. 수소 22,000 마리라고 하니까 실감이 안 나시지? 이게 돈 가치의 하락 때문이다. 수소 마리당 꼬리 빼고 코끝부터 엉덩이뼈까지 길이가 2미터라고 가정하면 이 수소들을 한 줄로 늘어세우면 얼마나 되는 줄 아시나? 44,000미터. 44킬로미터. 화곡동에서 천호동 가는 거리다. 양 십이만 마리. 한 마리에 1미터로 계산하면 120킬로미터. 검색해보시라. 한 줄로 세우면 서울 시청에서 원주시청까지 가고도 십 킬로미터 더 간다. 이거 말고도 각종 번제와 십분의 일 세금 등등은, 그만 하자.
 성전의 화려함은 또 말도 못해서, 거의 대부분이 금과 은으로 도금되었다고 하는데, 전기도금 장치가 없던 시절이라 금과 은을 얇게 펴 바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 상상도 못하게 많은 진짜 금과 은을 성전 짓는데 소비해야 했다. 그러니 내가 틀렸다. 쾰른, 노트르담, 로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은 종교권력을 형성했던 인간들이 자신들의 허영과 권위와 집권욕과 과시욕, 그리고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건축물이 아니라, 야훼 스스로가 말했듯 질투의 하느님, 복수의 하느님이 다른 신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뻑적지근하게 자신이 얼마나 숭앙받고 있는지 과시하고자 하는 천부의 랜드 마크였다.
 기독교 신자/신도께선 용서하시라. 위의 모든 것은, 한 불쌍한 유물론자가 감히 구약을 읽고 헛소리 한 것에 불과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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