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RCH72E-1C - 대(大) 단본 무색인 - 보급판, 가톨릭용
대한성서공회 편집부 엮음 / 대한성서공회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7년에 최초로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한 것은, “20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기독교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 큰 일”이었다고 이 책의 머리말에 쓰여 있다. 그 전에는 구교용 성서와 신교용 성서가 있었다는 뜻일 터이다. 그래 같은 하느님을 모시면서 다른 성서를 써온 것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공동으로 번역하기로 했는데, 책표지 아래쪽에 보면 괄호 열고 ‘가톨릭 용’ 괄호 닫고, 이리 표기가 되어있다. 그러니까 1977년에 어찌됐든 공동으로 번역을 했지만 신교 쪽에서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들만의 ‘성경’을 따로 사용하는 바람에 ‘공동번역 성서’는 가톨릭용으로만 쓰인다는 의미, 라고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한테 들었다. 나는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주며, 1977년에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한 일은 너희들,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을 믿는 너희한테는 모르지만 ‘너희들을 제외한 인류 전체’에겐 전혀 깊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고 발언하는 것으로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공동번역 성서> 가운데 애초부터 신약에는 흥미가 있지 못해 구약만 읽기로, 읽기는 읽는데 단 한 글자로 빼놓지 않고 모두 읽기로 작정을 하고 이제 막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두 읽기를 마친 지금, 과연 성서를 읽고 나서도 독후감을 쓰는 게 옳은지 걱정부터 앞선다. 원래 <공동번역 성서>의 구약을 읽을 자리(순서)에 갑자기 다른 책을 끼워 읽고 독후감을 썼다가 야훼의 불칼을 맞은 바 있어, 다른 책도 아니고 ‘구약성서’의 독후감을 쓰기가 오금이 다 저리다. 책 자체가 진리인 성서/성경을 읽었으면 그냥 진리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감히 ‘읽은 느낌’이 이러니저러니 나댄다고, 전 세계는 그만두고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신도들한테, 예수가 세리들에게, 야훼가 애굽인들에게 했듯, 귀싸대기 한 대씩만 맞는다고 쳐도, 최하가 중상일 테니.
 그러나 이교도도 아니고 무신론이자 유물론자인 내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성서>를 ‘그냥 책’으로 인식을 하고 읽었으니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처럼 <성서>의 내용이 어찌됐든 그냥 쓰여 있는 대로 알아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분명 느낌이 있었으며, 그걸 속으로만 가지고 있는 대신 글로 써두어, 나중에 내가 <성서>의 구약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었구나, 알 수 있게, 이를 기념한다는데 누가 까탈을 잡으랴. 또 까탈이 잡혀 내 독후감을 읽은 기독교도들이나 다른 종교인한테 한 번 더 불칼, 이번엔 조금 더 해서 불창, 불총, 불대포를 받더라도 이를 어이하랴. 할 수 없는 일이지. 내가 쓴 독후감이 어찌 됐든 내가 책임진다. 어째 좀 비장하지? 독후감의 대상이 되는 책도 그렇고, 야훼의 불칼 맛이 어떤지 몇 주 전에 경험을 해 조금은 알 듯해서 더욱 그러는 듯. 어쩌랴,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 싶고, 썼으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이런 짓하다 가끔 얻어터지기도 하고, 욕도 먹고, 말로는 안 해도 실망스러워 하기도 하고. 그게 인생이지.
 <구약성서>를 읽어보기로 결심을 한 건, 어느 책에서든가 기억나지는 않지만(솔직히 이거 아니면 저건데, 섣불리 하나 찍었다가 아니면 창피하잖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가 구약의 시편이라는 거. 그래 여주인공이 늘 시편을 읽는 장면이 인상 깊어서였다. 그거 말고도 숱하게 창작의 재료가 되어왔던 창세기와 출애굽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판관 삼손의 머리카락, 솔로몬의 지혜, 홀로페르네스의 대가리를 잘라온 유디트, 흔히 ‘느브갓네살’ 또는 ‘나부코’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한 바빌론 유수, 기타 등등. 또 있다. 황석영이 썼다고 했다가 나중에 양아치 출신(진짜 양아치 출신이다) 제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이 쓴 소설로 밝혀진 <어둠의 자식들>에서 ‘범털’이 아니라 ‘개털’로 감옥에 간 이동철이 구약성서를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바로 “이스라엘 삼국지.” 다분히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의 역사서라고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다가, 죽는 줄 알았다. 물론 재미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아이고 머리야, 한 얘기 또 하고, 그 얘기 한 번 더 하고, 한 번 더 한 얘기 또 하고, 그리하여 n번쯤 반복하는 데야 어떻게 견딜 방법이 없더라. 시편도 진심으로 기독교를 믿는 신자/신도들이면 감동 감화 가득해서 마음을 울리며 읽겠지만 애초부터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꽉 들어찬 불쌍한 인간은 도대체 이걸 감사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집단에 경의를 표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름다워? 그건 선생님들이나 그런 거고.
 시편에 이어지는 잠언도 뭐 별로. 가까운 사이에선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솔직한 말을 해줘야 한다는데, 아이고 랍비님, 경험상 말씀드리는 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되는 사람한테 일수록 솔직한 말 해주면 ‘가까운 사이’가 결딴나더라. 이건 그냥 예를 하나 든 바이며, 구약성서니까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가 막 생기기 시작할 당시에 기록한 율법과 바른 행동양식, 미풍양속, 기타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되살려 너도 나도, 젊거나 늙었거나, 여자들은 빼고 남자들만, 새삼스레 할례를 받을 수도 없는 거고 말씀이지. 적어도 구약에 의하면 할례를 받지 않으면 사형이다. 지금이야 가정의학과, 비뇨기과, 심지어 피부과에서도 할례를 해주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예언자 또는 선견자들 또는 레위의 후손들만 할례를 베풀 수 있었는데 도대체 유대인들은 귀두포피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그까짓 껍데기에 목을 맬까? 궁금하시지? 글쎄 기독교도도 아니며 모든 종교에 관심도 없는 인간이 처음 구약을 읽으며 든 생각인데, 할례는 단순히 위생적 측면에서 귀두포피를 잘라내는 의료행위라기 보다 야훼를 믿는 집단의 정화의식이라고 봐야할 거 같다. 중간 너머 읽어 가다보면, 가슴에 또는 머리에 할례를 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봐 그렇다는 말이다. 많이 아시는 기독교인 계시면 무슨 엉뚱한 이야기를 하느냐 지탄하실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생각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다. 당신이 기독교도/기독교인이라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만일 기독교는 믿지 않지만 나처럼 ‘살면서 한 번 읽어봐야 할 책’ 정도로 가톨릭 용 <성서>나 개신교용 <성경>을 꼽는 분이 있다면, 강력하게 권하니, 재고해보시라. 무엇보다 과하게 장황하다. 1,474 페이지. 한 페이지에 양면 분할 인쇄. 그래서 읽어야 할 면은 1,474 x 2 = 2,548 면이다. ‘습자지’라고 하면 젊은 분들은 무슨 야한 얘기가 나올 거라 기대할 수 있겠으나 습자지는 1970년대 붓글씨 쓰던 얇은 종이를 칭하는 것으로, 습자지만큼 얇은 종이로 1,474 페이지, 737 장을 넘기는데,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그냥 그 자리를 읽고 있는 듯한 지루함은 진짜 읽어봐야 안다. 위에서 얘기한 양아치 출신 지체장애인 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이 쓴 작품의 주인공 이동철(작가 자신은 나중에 자신이 정말로 목사가 되지만)은, 성경을 감방 안에서 한 장씩 찢어 몰래 담배를 말아 피우는 목적으로 애용하기도 한다. 이젠 담배 피우는 인종은 야만인으로 대접받는 냉혹한 현실에서 비 기독교인에게 성서의 용도는 점차 좁아지기만 할 뿐이다. 성서에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야훼의 관점으로 극단적인 왜곡을 당하고 있으며, 그게 한 사건 당 수십 차례 되풀이 되며 믿음 없는 독자를 콱 질리게 만든다. 기독교도들은 시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라고 했으나, 나는 읽으면서 정말로, 시각에서 비롯하는 육체적 멀미를 느껴야 했다. 비기독교도로 나처럼 <성서>를 교양의 대상으로 섣불리 겪으려는 분들, 다시 말씀드리오니, 신중하게 재고해보시라.
 독후감 다 썼다. 돌 던지실 분은 지금부터 던지시면 된다. 단, 나는 야훼의 돌보심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종임을 감안해주시면서 팔매질을 하시기 바랄 뿐이다.

 

 

 한 마디 더. 쾰른 대성당, 파리 노트르담 성당, 로마 대서당,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이런 건축물을 (비행기 타고 가서 직접 본 게 아니라 TV를 통해)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미의 태중에 있을 때 낙태 당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불행한 운명을 견디는 동안에 분명히 하느님은 자신을 위한 이런 웅대하고, 거창하고, 화려하고, 눈부신 전당을 짓는 걸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왔다. 난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출애굽기에서부터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자신의 성막聖幕과 제사장을 위해 에봇이란 초호화판 의상을 입히는 등, 당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치와 의상을 요구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최초의 성전 역시 당시 기술로 최고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요란난만하게 지었으며, 성전 준공식에는 황소 이만 이천 마리, 양 십이만 마리를 도살해 불에 태웠다. 이른바 번제.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는 소와 양이 타면서 하늘로 치솟던 초미세먼지를 흠향하고 있었던 거다. 수소 22,000 마리라고 하니까 실감이 안 나시지? 이게 돈 가치의 하락 때문이다. 수소 마리당 꼬리 빼고 코끝부터 엉덩이뼈까지 길이가 2미터라고 가정하면 이 수소들을 한 줄로 늘어세우면 얼마나 되는 줄 아시나? 44,000미터. 44킬로미터. 화곡동에서 천호동 가는 거리다. 양 십이만 마리. 한 마리에 1미터로 계산하면 120킬로미터. 검색해보시라. 한 줄로 세우면 서울 시청에서 원주시청까지 가고도 십 킬로미터 더 간다. 이거 말고도 각종 번제와 십분의 일 세금 등등은, 그만 하자.
 성전의 화려함은 또 말도 못해서, 거의 대부분이 금과 은으로 도금되었다고 하는데, 전기도금 장치가 없던 시절이라 금과 은을 얇게 펴 바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 상상도 못하게 많은 진짜 금과 은을 성전 짓는데 소비해야 했다. 그러니 내가 틀렸다. 쾰른, 노트르담, 로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은 종교권력을 형성했던 인간들이 자신들의 허영과 권위와 집권욕과 과시욕, 그리고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건축물이 아니라, 야훼 스스로가 말했듯 질투의 하느님, 복수의 하느님이 다른 신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뻑적지근하게 자신이 얼마나 숭앙받고 있는지 과시하고자 하는 천부의 랜드 마크였다.
 기독교 신자/신도께선 용서하시라. 위의 모든 것은, 한 불쌍한 유물론자가 감히 구약을 읽고 헛소리 한 것에 불과할지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