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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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소제목이 붙은, 본문만 735쪽에 달하는 장편소설. 읽어보면 이 책은 소설과 철학 사이의 기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화두는 질質. “꾸미지 아니한 본연 그대로의 성질”이 사전적 의미인데, 당연히 책에서는 사전적 의미만 포함하지 않는다. 소제목처럼 질은 “가치”와 대단히 가까이 자리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희랍시대 철학자에 의하여 발견되고, 의미가 축소된 “비범함”, 희랍어로 “아레테”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예술의 본질은 쾌락이다”라는 건 아무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비범한 존재들, 아레테를 보유한 소수의 인간들에게만 허여된 쾌락인 것.
 주인공 파이드로스가 대학에서 수사학 전임강사로 일 할 무렵, 학과장은 학생들에게 ‘질質 적인 강의’를 하라고 주문한다. 여기서 처음 “질”이란 테마가 등장한다. 학과장에게 질이 무엇인지 묻자 그녀는 자기 전공이 아니란다. 한 번 화두를 잡으면 죽기 살기로 용맹 정진하는 체질의 파이드로스는 “질”이란 것을 더 공부, 연구하여 정체를 밝히기 위해 탐색해본 바, 시카고 대학의 “개념분석과 방법론 연구”라는 위원회가 있는 걸 발견했다. 이 위원회는 고대 희랍을 전공한 위원장과 영문학, 철학, 중문학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일종의 통섭학문 과정이다. 그래 우리나라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결정, 먹고 살만한 전임강사가 시카고 대학의 학부에 입학을 한다. 그러나 고루한 위원장은 그의 전공이 수사학이란 걸 알자마자 위원회 대신 철학과에 들어가도록 조치를 해버린다. 파이드로스는 기본적으로 대단한 철학적, 수사학적 소양을 지니고 있던 학생. 거기다가 질, 아레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의 철학이라 주장한 변증법의 시녀로 전락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과,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소피스트들까지 몽땅 연구한다. 그리하여 천하무적의 신공을 지니게 된 파이드로스는 강의 중 토론을 통해 철학 교수를 격파하고, 철학 교수 대신 강의를 이어받는 “개념분석과 방법론 연구” 위원장마저 일도양단, 파이드로스가 결론을 낸 2:0의 스코어로 작살을 내버린다.
 하 이거 참, 세상에 이런 무협지가 또 있나. 좀 어리벙벙한 부잣집 아드님이 중원을 떠도는 고수한테 부모님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집안도 거덜이 나서, 숲속에 은거하고 있던 초절정 도사를 찾아가 갖은 죽을 고생을 해 무예를 연마, 드디어 중원의 고수에게 복수를 하는 것만 무협지가 아니다. 평생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해온 위원장에게 대항하기 위해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집중력을 쏟아 탐구한 다음 벌이는 일기필마의 진검승부. 철학에 관한 논의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진짜 무협지 아니냐!
 여러 번 얘기한 것 같은데, 내가 철학하고 친해지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같은 말을 어렵게 하려고 기를 쓰는 철학자들의 문장을 해석하는 일이 너무 힘겹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소피스트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저 후대의 칸트, 흄을 비롯해 무수한 철학자들을 인용하며 질質과 가치, 또는 탁월함(아레테)를 설명하는데도 오직 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피어시그가 써서 주장한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글을 읽어가면서 흥미를 느꼈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올 때마다 동의를 했거나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으며, 심지어 재미까지 있었으니, 내가 그동안 철학을 멀리했던 가장 큰 문제는 그동안의 철학자들이 쓴 수사법아니었을까. 나도 얼마든지 철학적 논의에 끼어들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하긴 뭐, 철학자들이 밥 먹고 죽자사자 용맹정진해 깨달으려고 하는 게 인간살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파이드로스가 “개념분석과 방법론 연구”의 위원장을 상대로 철학적 육박전 끝에 2:0으로 이기는 게 다냐고? 천만의 말씀. 하루에 네 시간만 자고 거의 모든 나머지 시간을 공부하는데 쏟은 그는 이후 네 시간이 두 시간으로 되고, 두 시간에서 전혀 잠을 자지 않는 인간으로 변하고, 하루 종일 침실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쉬운 얘기로 미쳐버렸다.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 그것도 지금은 절대 금지된 치료방법, 일찍이 켄 키지가 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인공 맥 머피처럼 전두엽 근처에 전기충격을 가해 과거의 많은 부분을 잊어버리게 된 상태에서 퇴원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이 되는 바, 새롭게 만들어진 인간이 화자 ‘나’가 된다.
 책은 화자 ‘나’가 열한 살짜리 아들 크리스를 모터사이클에 태우고 미국 중부를 출발해 서부까지 휴가여행을 감행하는 과정을 써나간다. ‘나’는 기계공학 또는 기계수리에도 일가견이 있어 모터사이클을 수시로 분해 조립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보유했다. 화자 ‘나’가 파이드로스라는 사실을 왜 이야기하느냐 하면, 책을 읽으면 50쪽에 이르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 수 있으니 굳이 독후감에서 언급하지 않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이다. 처음엔 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이웃 부부와 함께 출발했다가 몬태나 주에 있는 ‘나’의 친구 집에서 ‘나’와 크리스는 등산을 하기로 하고 드러머 부부는 귀가를 한다. 부자가 고생고생을 하며 등산을 마치자 곧바로 또다시 길을 떠나 캘리포니아를 향해 가며 갈등을 겪기도 하고 당연히 화해도 해가며, 사실은 아빠가 정신이상이었다는 고백까지 곁들여 이야기가 자꾸 복잡해지기도 한다.
 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하나는 로드 무비, 모터사이클을 타고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과 모터사이클과 기계공학과 수리에 관한 실제적 사색 또는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나’가 파이드로스 시절에 벌였던 철학적 오디세이아, 이렇게 구성이 된다.
 이 책에 대해선, 사실 여태 쓴 독후감이 아무 필요가 없다. 책 읽으면서 독후감에 인용하거나 하여간 써먹으려고 포스트잇 몇 장 붙여놨었다가 그냥 다 떼버렸다. 이건 읽어봐야 안다. 정말이다.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한 가장 쉬운 말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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