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수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7
이광수 지음, 이경훈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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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원. 진정한 애증의 인물. <무정>과 <사랑>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작품 <흙>. 당연히 심훈의 <상록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계몽적 브나로드 계열. 1932년부터 33년까지 연재한 신문소설로 춘원 자신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던 시절에 안창호 선생의 영향을 받아 귀농운동을 독려하기 위하여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온다. 황군입대를 독려하는 등의 부일행위는, 절대로 잊지도 용서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이 독후감에선 거론하지 않겠다.
 그런데, 춘원의 부일행위를 빼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가, 결국엔 다 지워버렸다. 부일행위를 빼고는 도무지 춘원과 그의 작품을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흙>에서 작가가 줄창 주장하고 있는 것이 조선적인 것의 아름다움. 그걸 지켜나가는 사업으로 협동조합, 야학, 유치원 등의 교육 등의 농민운동이다. 반면에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부르주아들의 신문물에서 비롯하는 경박한 행동양식을 힐난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특정 한 장면을 곱게 봐줄 수가 없었다. 본문만 760쪽에 육박하는지라 다시 찾아보기도 힘든데 마침 작품해설에도 딱 그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만주사변 이후 본격화된 중일전쟁에 징집되어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군인들을 보는 주인공 허숭.
 “송영하는 군중이나 송영받는 장졸이나 다 피가 끓는 듯하였다. 이 긴장한 애국심의 극적 광경에 숭은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의 싸움터로 가는 젊은이들, 그들을 맞고 보내며 열광하는 이들, 거기는 평시에 보지 못할 애국, 희생, 용감, 통쾌, 눈물겨움이 있었다. 숭은 모든 조선 사람에게 이러한 감격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사지에 임하는 군인들의 긴장한 애국심. 이런 군국주의적 일본정신을 모든 조선 사람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는다면 오버인가? 이광수의 의식 속에서는, 한 커뮤니티(책 속에선 농촌무대인 ‘살여울’)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농민운동 역시 이런 ‘긴장한 애국심’에 입각해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애초부터 작가는 조선적인 건 순응과 자제, 신독 같은 수동적 미덕 정도로 대표하였으며, 그러면서도 낙후하고, 미개하고, 더럽고, 초라하고, 관습적으로 수탈당해온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로 지정해버렸다. 토지와 집을 저당으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에게 살여울에 사는 거의 모든 조선 농민이 돈을 얻어 잔치를 하고, 술과 고기를 먹고, 노름을 하다 ‘순식간에’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설정은 참. 하여간 그리하여 특히 조선의 농촌은 새로 개량되어야 하는 지역이어서 주인공 허숭으로 하여금 공동작업, 협동조합, 유치원 등을 건설하게 하지만, 1930년대 당시 독자들은 이 책 또는 신문연재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 것이 세계 최고’라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의 기본인식이 일본 군인들의 긴장한 애국심을 조선 사람들에게도 같은 감격으로 느낄 기회를 주고 싶었으니까.
 작품 자체에 대한 독후감은 별로 쓸 것이 없다.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한 것이니 계몽주의 소설일 것이고, 당대의 문호 이광수의 작품이라 당연히 남녀상열지사가 포함되었을 터이며, 30년대 장편소설들이 그렇듯이 등장인물들은 정형화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는 다들 짐작하실 것이다. 무엇보다 거의 무오류한 주인공 허숭이 등장하고, 한 사건을 기점으로 천하제일의 악당이 순식간에 그리도 혐오하던 농촌운동에 전 재산을 다 바쳐 투신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개차반 귀족 자제가 난데없이 조선에서도 제일 열악한 검불랑에서 적수 허숭과 같은 농촌운동을 벌여야 했는지도 ‘의문 없이’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은 비록 농촌운동을 주제로 하지만, 읽는 이에 따라서 1930년대 당시 서울에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이 즐기던 방탕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다. 이 책으로 이광수는 더 읽지 않으리라 새삼 작정한다. 그러나 이광수, 이 사람이 애증의 이광수라서 작정한 것을 잊고 언제 또 춘원의 장편을 내키지 않는 손길로 한 권 골라 읽을 지도 모른다. 내 경우만 그런가, 참 나. 이광수, 지긋지긋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진짜 애증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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