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의 여인 1 창비세계문학 60
알베르 코엔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찌 여태 알베르 코엔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을까. 이토록 화려하고, 장려하고, 장황하지만 아름다운 넋두리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둘만의 사랑’이라는 감옥과, 한 인간의 고결함을 천상에서 지옥으로 순식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질투와, 결국엔 땅 속 나무 상자 안의 바싹 마른 뼈밖에 남지 않을 풍만한 아름다움의 허무와, 야훼가 선택한 자신의 민족을 향해 서서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의 숨 막힘을 어느 인류가 있어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장려한 불륜 이야기.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써야하는 쏠랄. 주네브 리츠 호텔의 무도회장에서 위로 휘어지는 눈썹을 가진 아름다운 ‘아리안’을 발견해 단박에 사랑에 빠진 이이는 어느 날 늙어 송곳니 두 개를 남기고 전부 이가 빠진 늙은 유대인으로 변장, 다회茶會를 연 아리안의 남편 됨 씨의 집 커튼 뒤에 숨어 그녀를 기다린다. 다회가 끝나자 자기 방에 든 아리안은 갑자기 자기 앞에 나선 흉측한 모습의 유대인 늙은이가 난데없이 자신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듣고 대경실색을 하는데, 아 한 번인들 생각이나 해봤을까, 어떤 작가가 그토록 장황하고 화려한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옮겨본다.

 

 “그날 리츠에서의 저녁, 그 운명의 저녁에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비천한 인간들 틈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고귀했고,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그녀와 나뿐이었습니다, 그 떠들썩한 사람들, 성공에 혈안이 되고 더 큰 힘을 향한 탐욕에 가득 찬, 이전의 나와 같은 그 사람들 틈에서 우리 둘만 유배된 자들이었습니다. 오직 그녀만이 나와 같았습니다, 그녀는 나처럼 슬펐고, 도도한 표정으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벗 삼은 채,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눈까풀이 한번 깜박이던 순간, 그 첫 순간에 난 그녀를 알아보았습니다. 바로 그녀, 예기치 않게 나타난, 하지만 내가 계속 기다려왔던 여인, 그 운명의 밤에 내가 선택한 여인, 끝이 휘어 올라간 그녀의 긴 속눈썹이 처음 깜박이던 그 순간 내가 선택해버린 여인, 그녀, 성스러운 부하라, 행복한 사마르칸트, 고결한 그림이 수놓인  자수, 그녀가 바로 당신입니다.”  (1권 52쪽)

 

 다시 말하건대 극히 일부분이다. 이런 사랑의 고백이 수 페이지에 걸쳐, 문단 변환 없이 구구절절 이어지는 걸 처음 경험하는, 경악, 경이. 오, 놀라워라. 나는 이 부분을 읽자마자 주저 없이 알베르 코엔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았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수필집밖에 없다. 이 작품 <주군의 여인>은 주인공 쏠랄과 쏠랄의 가문을 둘러싼 네 편의 소설, 차례대로 <쏠랄>(1930), <망주끌루>(1938), <주군의 여인>(1968), <용자들>(1969) 가운데 세 번째 작품에 해당한단다. 나머지 세 편은 언제나 번역을 해 나로 하여금 읽는 즐거움과 또 다른 경이를 안겨줄까. <주군의 여인>에서도 괴팍하고 재치가 번뜩이는 언변을 자랑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망주끌루와 다른 네 명을 더한 ‘용자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불륜 이야기라고는 위에서 이야기했다. 주인공 쏠랄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앞으로 유사한 비극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협약기구인 ‘국제연맹’에 사무차장의 직위에 있는 프랑스 국적의 유대인이다. 국제연맹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든 국제연합과 달리 토론과 결의에 의한 제재나 군대의 동원 같은 물리력을 사용할 권한이 없어 사실상 강대국들의 사교집단에 불과했으나 당시 부르주아와 그때까지 작위를 유지했던 (그래서 촌스러웠던) 귀족들에게는 상당히 명예로운 직업이었던 모양이다. 무능한 국제기구라서 사무처장(국제연합에서의 ‘사무총장’과 비슷한 자리), 부처장副處長은 주로 국제연맹에서 지급하는 급여와 판공비로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다른 이들이 마련한 야회에 참여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했고, 실제적인 일은 세 명의 사무차장들이 맡았다고 하는 바, 우리의 잘생기고 키 큰 주인공 쏠랄이 세 명 가운에서 가장 중요하고 능력 있는 차장으로 설정되어 있다.
 시대는 3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일 두체, 뭇소리니, 스페인의 프랑코가 등장해 유럽의 하늘 아래 파시즘의 암울한 검은 기운을 두르기 시작했고, 특히나 독일 안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노골적으로 펼쳐져, 이런 반유대주의 기운이 독일을 중심으로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그리스, 심지어 로스차일드를 배출한 영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글쎄, 히틀러한테도 배워야 할 게 있단 말이야!) 스위스에서도 프랑스에서도, 흰 백묵으로 쓴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란 벽서가 곳곳에서 눈에 띄기는 하나 누구도 이 비정한 흰 벽서를 지우려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감잡히시지? 쏠랄은 스스로 유대인으로,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듯이)독일에서 조만간 인종 학살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희망하는 사람은 자유로이 유럽의 다른 국가로 이주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국제연맹에 상정하려 준비하다가, 벼락을 맞아, 긴급하게 열린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조금의 시간적 유예도 없이 즉각 사임을 당한다. 서양인들에게 사임이란 건, 참관인 입회하에 자기 사무실에서 자신이 쓰던 개인 소유물을 박스에 담아 20분 안에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쏠랄은 그동안 사무차장으로 많은 급여를 고스란히 모아 놓았으며, 민족의 DNA에 들어있는 똘똘한 지능과 돈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밑바탕으로 한 번 해본 주식투자가 대박이 나서 죽을 때까지 주네브 최고 호텔인 칼츠의 스위트룸에서 먹고 잘 수 있는 그거, 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천생 부르주아랄 밖에.
 불행은 언제나 혼자 오는 법이 없다. 사무차장의 직위에서 쫓겨나자마자 파리 법정은 쏠랄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기 전에 프랑스 영토 내에서 살아온 기간이 규정보다 짧음에도 불구하고 공문서에 허위로 기재해 불법으로 국적을 얻었다고 판단, 프랑스 국적도 몰수해버린다. 여권과 공민증을 압수당하고 대신 체류확인증을 발급받은 쏠랄은 이제 본격적인 방황하는 유대인의 대열의 일원이 될 수밖에. 일찍이 유대인 노인으로 변장을 하고 스위스 유부녀 ‘아리안’(어째 이름이 그렇다. 독일 민족이 아리안 족 아냐?)의 방에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토로했지만 흉한 외모 덕택에 그리도 유려한 말빨에도 불구하고 단칼에 거절당한 쏠랄은, 사무차장 직을 잃기 전에 이미 자신의 칼츠 호텔 스위트룸에 부부를 초대하고, 이 과정에서 아리안 됨 여사를 소파에 쓰러뜨리는데 성공, 그녀 인생 최초의 깊은 키스를 퍼붓는다. 아, 지금도 삼삼하다. 아리안이 남편 됨 씨와의 부부생활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지루하고, 피곤하고, 난감한 일인지 떠올리는 장면. 상상도 하지 못한 신체의 일부를 사용하는 깊은 키스가 얼마나 이색적이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성적이고, 사람을 함몰시키며, 사랑의 행위의 심도를 더 깊게 만들고 싶어지게 하고, 진정한 사랑은 서로 가장 깨끗한 곳을 부딪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저분한 곳을 맞대는 행위(내가 지금 만든 말이다. 구강은 인간의 몸에서 별의별 세균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란다.)라는 이 모든 느낌을 떠올리는 장면. 정말 알베르 코엔, 읽으면 읽을수록 신기한 작가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자기 부하직원의 아내를 꼬여내 매일 밤 아홉 시부터 새벽까지 불타는 밤을 지내온 쏠랄. 이제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아리안의 남편 됨 씨를 진급시켜놓고 유럽 각국, 북아프리카와 중동지방까지 장기 출장을 보내 그동안 실컷 재미 본 쏠랄과 아리안. 그새 쏠랄도 국제연맹에서 쫓겨나고 프랑스에서 국적을 박탈당하느라 며칠 출장을 갔는데, 일정이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쪽박 깨진 사연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하기도 쪽팔린바 작지 않아 연락도 하지 못해, 그새 사랑의 안달이 난 아리안 여사. 그녀 스스로 고백한다. 쏠.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 순결한 처녀였답니다. 그대를 알고 난 다음에야, 그대하고 같이 잔 다음에야 희열을 알았으니까요. 요 지랄을 했건만 잠자리의 희열을 줄 ‘나의 주인의 여자’, ‘주군의 여인’을 이토록 애가 끊어지게 만드시나요. 이 상태에서 쏠랄에게 전보가 온다. 9월 1일 오후 아홉시에 당신 집으로 가겠노라고. 그러나 아내에게 깜짝 선물, 이른바 서프라이즈를 선사하기 위해 아무 연락도 하지 않고 쏠랄보다 딱 2분 먼저 도착하는 남편 됨 씨. 어떻게 되느냐고? 가르쳐드리지. 다음날 새벽, 쏠랄은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 <용자들>을 통해 아리안 됨 여사를, 글쎄 이거 뭐라 해야 하나, 납치도 아니고, 유괴도 아니고, 하여간 여사를 모셔오게 해, 그날로 주네브를 떠나버린다.
 이젠 세상에서 딱 둘 만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것. 부르주아와 귀족계급의 모든 사람들은 아리안과 쏠랄의 불륜과 도피를 알게 되고, 비난을 퍼붓는데 어찌 또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을까. 마르세유 근방으로 떠난 이들과 우연히 마주친, 예전 같으면 쏠랄이 아는 척도 하지 않았을 미미한 계층의 인간들마저 쏠랄-아리안 커플을 벌레 보듯. 그걸 넘어 우리의 주인공 커플이 얼마나 재수 없고, 불결하고, 건방진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사랑이란 이름의 둘 만의 감옥. 사랑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애정이 커지는 만큼 욕정은 줄어들고, 욕정이 줄어드는 것을 여자, 아리안은 사랑의 농도가 흐려지는 것으로 짐작하는 과정, 이른바 권태가 틈입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드디어 그녀가 은밀한 욕망을 털어놓았다! 하루에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지긋지긋한 연인을 벗어나는 것, 매일같이 실내복을 바꿔 입어가며 집안을 돌아다니던 연인이 드디어 밖으로 나가는 것! 사실 그녀가 옳다. 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로를 보는 것, 늘 놀라울 정도로 사랑한다고 서로에게 말하는 것, 모두 진정으로 숨 막히는 일이다.” (2권 481쪽)

 

 위의 인용 마지막에 “진정으로 숨 막히는 일”은 숨 막히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숨 막힘, 즉 공기 내 산소가 부족한 경우 느끼는 감정을 의미한다. 1935년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된 유럽에서 유대 제사장의 적장자 쏠랄. 사고무친의 부유한 상속녀 아리안. 이들의 사랑은 맺어지는 순간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으며, 아메리카나 아시아로 떠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이들의 유럽문화에 의한 예속은 결정적 파국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권태와 질투라는 훌륭한 감미료까지. 이들은 점점 다가오는 검은 화차 앞에서 어떤 사랑의 노래를 부를까.

 

 

 당신이 이 작품과 궁합이 맞기만 하면, 두 권, 1,300쪽이 넘는 한 편의 장편소설 덕에 적어도 일주일은 흥미진진하게 보낼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조심하시라, 길고 긴 장황한 사설에 나가떨어질 수도 있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