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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링조르를 찾아서 1
호르헤 볼피 지음, 박규호 옮김 / 들녘 / 2006년 3월
평점 :
유클리드 공간 안에서 직선 위에 찍을 수 있는 점의 수. 한 특정 정수整數와 같지 않은 정수들의 집합의 수. 이런 것들을 우린 ‘무한’이라고 부른다. 평행한 두 직선은? 언젠가는 만난다. 비 유클리드 공간에서. 즉 평행한 직선이 휘어있는 공간 안에 그려져 있다면, 공간이 변형됨에 따라 우리가 한때 평행선이라고 칭했던 것들, 불변의 진리라고 여겨왔던 것, 지들이 언젠가는 안 만나고 배겨? 뉴턴 역학 안에서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질량이라는 것이 20세기에 와서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시간도 아인슈타인이란 한 포인트를 거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들도 이젠 굉장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물리학, 화학은 경계가 거의 무너졌다. 제일 앞에서 말한 ‘무한’을 분모로 하면, 분자가 아무리 큰 양과 음의 자연수라 하더라도 이는 영zero으로 수렴하는 수가 되며, 물리학, 화학에서 이런 경계를 다룬 것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설명하는 ‘양자 역학’이 들어 있다. 그런데, 나는 유클리드 공간, 뉴턴 역학 밖에서 일어나는 수학적, 물리학적 현상에 관해서는 완전 절벽이다. 이 책을 읽으며 수도 없이 쏟아지는 양자역학과 비 유클리드 수학에 관한 이야기는, 그래서 눈으로 따라가기만 해야 했다. 그것들을 다 이해하는 소수의 독자들에게 축복 있기를.
이 책에 등장하는 무수한 천재들. 얼핏 예를 들더라도 그들의 공적은 뭐 전혀 모르겠고, 이름만 플랑크, 칸토어, 아인슈타인, 보어, 슈뢰딩거, 폰 노이만, 하이젠베르크 등등이 진짜 실존 인물이다. 실존 인물인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평생 연구한 내용들도 간략하게나마 소개를 했다. 작가의 끈질긴 탐색이 대단하달밖에. 여기에 이들에 미치진 못하겠지만 두 명의 영재급 (허구의) 등장인물, 미국인 이론물리학자 프랜시스 P. 베이컨과, 화자話者이자 독일인 수학자 구스타프 링스가 등장해 책의 제목처럼 ‘클링조르’를 찾아 독일의 현대 과학사를 뒤지기 시작한다. 책은 구스타프 링스가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1권 150쪽까지 펼쳐지는 미 해군 중위 프랜시스 베이컨이 유럽 전선에 오기까지의 내력과, 그와 일정 기간을 함께 활동하면서 그로부터 들은 내용, 또는 일인칭 (반쯤)전지적 시점으로 여겨도 무리가 없을 관점으로 쓴 두 권짜리 장편소설. 프랜시스 베이컨 중위는 스콧 핏제럴드와 프린스턴 동문으로 양전자를 전공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쿠르트 괴델, 존 폰 노이만 같은 당대 세계 최고들이 포진한 고등연구소에 폰 노이만의 제자로 들어간다. 물리학자가 수학자의 제자? 고수들의 세계에서는 별로 상관이 없는 얘기. 베이컨은 불친절한 폰 노이만 교수로부터 뜻밖의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며, 백인 부르주아의 따님과 약혼 상태를 유지하는 동시에 흑인 여성과 내연의 관계를 갖고 있다가, 꼬리가 길어서 자기 침대 위에 흑인 아가씨가 누워 있는 걸 약혼녀에게 제대로 들키는 바람에 고등연구소에서 미 해군 정보부로 자리를 옮겨 유럽으로 들어오게 된 것. 약혼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의 강연회에 들이닥쳐, 베이컨 나와(우리 말로 하면 '삼겹살 줘'?), 네 침대에 흑인 창녀가 누워 있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바로 봤단 말이야, 아우성을 쳐대는데 사건의 당사자를 연구원 자리에 그냥 둘 수 있겠어?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의 고등연구소에서 말이지.
베이컨 중위의 역할은 1930년대 나치 치하 이후 전쟁이 끝나기까지 독일 과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어 온 과학적 자료를 분석, 종합하는 일이었다가, 정말로 전쟁이 끝나자 핵무기 제조에 관련이 있는 과학자들이 소련으로 유입되어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기 전에 그들을 체포, 연합국의 손 안에 쥐는 것으로 바뀌었다. 중위는 정말로 이 과학자들 가운데 우두머리 격이었던 하이젠베르크를 자택에서 체포하여 이송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과학자들을 취조하는 과정에 연합국 측은 히틀러의 측근에 있으면서 과학과 신무기 제조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과학자가 있었지만 누구도 실제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며 과학자들 사이에 그냥 ‘클링조르’라는 이름으로 암약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클링조르가 누구인지 밝혀내고, 나아가 체포하는 임무가 새롭게 베이컨 중위, 초급장교에게 부여된다. 미국에서 유망한 물리학자이며 박사라는 이유 하나로, 구상유취口尙乳臭, 아직 입에서 젖내 나는 젊은이를. 이이가 혼자 독일 과학계를 두루두루 꿰찰 수는 없어서, 독일 출신 수학자 구스타프 링스로부터 도움을 받아 ‘클링조르’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의 모든 소설 독자 가운데 나 한 명에 국한되는 이야기겠지만, 이런 추리, 음모, 스파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이 있는 건 아무래도 남녀상열지사. 호르헤 볼피 역시 내 생각에 맞춰주느라 엘리자베스-비비안-프랜시스, 마리안네-나탈리아-구스타프의 트라이앵글이 등장하고, 비비안-프랜시스, 나탈리아-구스타프, 잉에-베이컨의 연애 장면도 연출한다. 여기까지 얘기하니까 비 유클리드 수학과 비 뉴턴 물리학, 과학자들의 연구, 클링조르를 색출하는 스파이전, 이런 것들로 다소 딱딱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책은 상당히 재미있는 문장과 구성으로 만들어졌다. 독일인 조언자 구스타프 링스가 누구인가 하면, 1944년 7월에 실제로 있었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미국 배우 톰 크루즈가 주인공 클라우스 폰 슈타펜베르크를 연기한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가상)인물로, 자기 전공인 수학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확률로 인해 벌어진, 유죄 판결로 총살형을 받을 것이 분명한 재판 도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지붕이 무너져 내려 재판장이 앉은 자리에서 머리가 쪼개져 죽는 바람에 판결이 무기한 연기되어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다. 그래 이 책은 자연스럽게 영재 과학자(였던) 베이컨 중위의 생애와 연애담, 링스의 생애와 연애담과 우정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20세기 중반까지 물리학과 수학의 발전, 원자탄 개발을 둘러싼 독일과 연합국의 경쟁, 과학자들 사이의 음모와 이합집산 등이 아주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럼 ‘클링조르’가 누구인가. 크레티엥 드 트루아의 <페르스발>,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팔>에서 악당으로 나오는 등장인물인데,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바그너의 <파르지팔>에 와서라고 1권 228쪽에 링스 교수가 설명한다. 먼저, 주의하라고 일러드리고 싶은 건, 이 재미난 책 <클링조르를 찾아서>를 읽고 클링조르가 등장하는 <파르지팔> 역시 재미있는 작품이라 여겨 무심코 <파르지팔>의 음반이나 DVD 같은 매체를 구입하지는 마시라는 것. <파르지팔>은 바그너가 가장 아꼈던 작품이라고 하고, 당연히 말기 작품인데,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웬만큼 경력이 쌓여야 들을 수 있을 만큼 심오하고, 엄숙하고, 진지하고,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며, 무엇보다, 지루한 작품이라는 뜻이다. 물론 작지만 그래도 열린 공간인 알라딘 서재에서 감히 바그너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바그너 광신교도들로부터 집중적인 기총소사를 받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듣기에 그렇다는데 뭐. 작품의 내용은 책에 아주 자세히, 내가 여태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자세히 나오기 때문에 생략한다. 나는 <파르지팔> 전곡 음반을 총 아홉 가지로 가지고 있는데, 그래봐야 가장 최근에 전곡을 들은 것이 한 5년 전쯤 되는 관계로 어떤 음반이 좋더라, 라고 품평을 할 처지는 못 된다. 얼핏 들으니 제임스 레바인이 바이로이트 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한 판과, 역시 레바인 지휘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관현악단이 연주한 판이 제일 훌륭하고, 제일 지루하다고 한다. 기어이 듣고자 하시는 분 있으면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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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바이로이트, 오른쪽이 메트 연주판이다.
책을 읽어가는 중에 내 관심은 클링조르보다 누가 쿤드리, 또는 꽃의 정령 역할을 하는 여자일까를 밝히는 일이었다. 극적 반전은 없지만 재미있는 작품. 추리 스파이 소설이라고 꼭 극적인 반전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