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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ㅣ 솔시선(솔의 시인) 3
허만하 지음 / 솔출판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알지 못했던 시인. 이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가 1999년에 찍은 그의 두 번째 시집. 처녀시집 <해조海藻>가 1969년 간행이니 30년 동안 시집을 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름이 낯설 수밖에. 그동안 허만하는 시인이 아니라 병리학 전공 의학박사로 지내며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허만하의 시집을 넘기고 처음 몇 편의 시를 읽으며 든 느낌은, 이 시인의 주제는 46억년에 이르는 지구의 나이에 비하여 인간이란 종이 얼마나 왜소하고 허망한 것인지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다. 처음 실린 시를 읽어보자.
지층
연대기란 원래 없는 것이다. 짓밟히고 만 고유한 목숨의 꿈이 있었을 따름이다. 수직으로 잘린 산자락이 속살처럼 드러낸 지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총 저수면적 7.83평방킬로미터의 시퍼런 깊이에 잠긴 마을과 들녘은 보이지 않았으나 묻힌 야산 위 키 큰 한 그루 미루나무 가지 끝이 가을 햇살처럼 눈부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라져라, 사라져라, 흔적도 없이 정갈하게 사라져라. 시간의 기슭을 걷고 있는 나그네요. 애절한 목소리는 차오르는 수위에 묻혀가고 있었다. (13쪽. 전문)
시인은 수직으로 잘린 산자락을 보고 있다. 거기엔 산자락의 지층이 마치 속살처럼 드러났다. 지층, 속살 같은 지층은 ‘짓밟히고 만 고유한 목숨의 꿈’이었을 뿐이란다. 이후 저수지에 묻힌 마을과 들과 미루나무에 관한 기억을 더듬고는 있지만 그것들이 시에 영향을 주는 것은, 시간의 기슭에 잠시 거닐다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 즉, 사람이 정착해 한 마을을 이루고 번성하다 점점 쇠락해져 끝내 저수지 물속에 잠기는 연대기 따위는 처음부터 수직으로 잘린 지층에 비하면 아예 없는 것과 같다. 시인이 생각하는 자연, 자연의 누적으로 지질학적 시간은 이렇게 인간에 대하여 비정하다. 두 번째 실린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위의 적의
길은 산자락을 따라 시내처럼 흐르고 있었다. 벼랑은 잘린 언덕줄기의 속살이었다. 통곡의 벽을 바라보듯 나는 벼랑 앞에 섰다. 흑표범의 눈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는 지층. 바위는 조용히 기억하고 있었다. 쓰러지는 양치식물의 숲. 아우성치는 맘모스의 마지막 울음 소리. 쌓인 시간의 무게 밑에서 목숨은 진한 원유로 일렁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바위의 적의를 느꼈다. 바위는 기다리고 있다. 인류의 멸망을. 찢어진 바위틈에서 갈맷빛 물이 솟구쳐 바다가 되고 부스러진 스스로의 피부에서 다시 풀밭이 일어서서 눈부신 고함소리를 지르며 연둣빛 바람을 흔드는 부활의 순간을. (14쪽. 전문)
이 시 속에도 벼랑은 언덕줄기의 속살이다. 허만하가 우리가 아는 시인들과 결정적으로 차별이 되는 것은, 많은 시인들은 벼랑 ‘위’에 서서 삶의 위기와 절망과 고독과 추락을 노래하는 반면, 이이는 벼랑을 바라보면서 자기 ‘앞’에 선 것이 애초에 산자락이었던 언덕줄기의 속살, 부드럽지는 않지만 속을 이루고 있던 살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자연은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게 만든 인류를 향한 바위(지층)의 적의를 느끼고 있다. 바위는 인류가 하루빨리 멸망하기를 원하고 있단다. 그리하여 먼 먼 미래의 어느 날, 지구의 땅에는 다시 물이 솟구쳐 바다가 되고, 다시 풀밭이 일어서 눈부신 고함을 지르며 연둣빛 바람이 흔들지만, 인간은 없다. 그때쯤이면 인간은 저 지층 아래 한 켠, 한 틈에서 기껏 새까맣고 점성이 진한 원유로나 존재하리라. 인류가 원유로 존재하는 곳은 다시 지층의 한 틈. 이 ‘틈’은 다시 세 번째 시가 된다.
틈
틈을 주무른다.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더듬는 알몸의 포옹이 만드는 캄캄한 틈. 멀어져가고 있는 지구의 쓸쓸한 등이 거느리고 있는 짙은 그늘. 진화론과 상호부조론 사이를 철벅거리며 건너는 순록 무리들의 예니세이 강. 설원에 쓰러지는 노을. 겨울나무 잔가지 끝 언저리. 푸근하고도 썰렁한 낙탓빛 하늘 언저리. 안개와 하늘의 틈.
지층 속에서 원유처럼 일렁이고 있는 쓰러진 나자식물 시체들의 해맑은 고함소리. 바위의 단단한 틈. 뼈와 살의 틈. 영혼과 육신의 틈. 빵과 꿈의 아득한 틈. 낯선 도시에서 마시는 우울한 원둣빛 향내와 정액빛 밀크 사이의 틈. 외로운 액체를 젓는 스푼.
존재는 틈이다. 손이 쑥쑥 들어가는 적막한 틈이다. (15쪽. 전문)
이쯤 읽으면 독자는 시인 허만하를 가이아Gaia의 셋째아들 정도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세 번째 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의 모습이 그나마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저 거대한 시간이 만들어놓은 지구의 속살, 지층이 서로를 알몸으로 더듬는 작은 틈 사이에서. 이후 시는 광활한 대륙과 사막 등지를 넘나들며 사고의 폭을 확장시켜나가기 시작한다. 확실히 새로운 시선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나는 시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로, 혹시 이런 경향은 이 시집을 내기 전에 무려 30년 동안 시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가, 라고 의문을 품었다.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이리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허만하의 시가 다 이렇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하찮은 것에 관한 애정 어린 시선도 들어 있다. 그래도 그런 시조차 요즘 시인들과는 격이 조금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소개하면서 독후감을 마친다. 이 시에 대한 내 감상은 당신들의 온전한 느낌을 위해 생략한다.
二加里 뒷길
닭장 곁에서 맨드라미꽃이 까만 씨앗을 품고 있는 정오. 비닐 대야 밑바닥에는 지친 면 러닝 셔츠 두 벌 구정물처럼 구겨져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그물처럼 널려 있는 바닷가
초록빛 갯내가
기진한 나팔꽃 덩굴처럼
돌담에 붙어 있을 뿐
꿈에서 본 적이 있는
바로 그 빈 마을이었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