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3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옥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 년 여 전에 아디치에의 <아메리카나>를 읽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아체베의 ‘21세기의 딸’은 아니다.”라고 독후감을 썼다. 그때 했던 말을 이제 취소한다. 아디치에는 아체베의 ‘21세기의 딸’이다. <태양은 노랗게 떠오른다. Half of a Yellow Sun>은 1960년 영국에 의한 식민지를 종식하고 이후 10년 동안 벌어진 나이지리아의 혼란상태를 그린 소설이다. 치누아 아체베가 식민지 시절을 겪으며 어떻게 나이지리아, 또는 아프리카의 순결한 문화와 정신과 자원과 원주민들이 수탈을 당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1977년 생으로 2003년에 처녀작을 간행한 아디치에는 해방 후 정치, 경제, 문화, 교육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식민 상태에 준하는 제3세계에서 혼란한 시절을 보낸 신생독립국의 이야기를 쏟아냈으니, 아체베의 21세기의 딸이란 평가가 어색하지 않다는 뜻이다. 만일 <태양은……>을 먼저 읽었더라면 <아메리카나>의 독후감을 그리 용감하게 단정하는 것으로 끝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게다가 아디치에는 아체베와 마찬가지로 이보Igbo족 출신이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와 비교하면 그리 특별한 편은 아니지만, 매우 독특한 현대사를 가지고 있다. 1960년에 해방을 맞아 정부를 수립한 신생독립국에서 쿠데타가 한 번 쯤 발생하는 건 그리 어색하지 않다. 나이지리아에서도 이보족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발생했는데, 이보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재에 밝아 국부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다른 주요 부족인 하우사족, 요루바족 등과 반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직 영연방의 일원이었던 나이지리아에서 호의적인 기후 덕택에 영국이 더 선호했던 북쪽 지역에 기반을 둔 하우사족이 다시 한 번 쿠데타를 터뜨려 이보족을 학살해버리는 사건이 터진다. 이 책에 장면이 상세하게 등장한다. 나이지리아 동부에 기반을 두고 살았던 이보족은 이에 반발해 자기 부족의 땅에 줄을 긋고, 학살당한 이보족을 가리키는 빨강, 그들을 추모하는 검정, 미래를 상징하는 초록, 그리고 지평선에 떠오르는 태양을 묘사하는 노란 태양의 반쪽을 국기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비아프라”라고 한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책에 다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에 21세기를 사는 문명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그까짓 땅이 문제가 아니다. 이보-하우사-요루바 세 부족이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이혼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으나, 이보족이 터를 잡고 독립을 선언한 비아프라에는 석유가 무진장 나오는 유전지대라는 것. 무진장이 도대체 얼마큼이냐고? 세계 7위에 빛나는 매장량이다. 기존의 나이지리아 입장에서는 그런 땅 위에서라면 이보족이 비아프라가 아니라 다른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그들의 독립을 용인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모르고, 혹은 알기 때문에 만일 독립만 된다면 자기들끼리 호의호식할 수 있을 거란 계산속이 있어서, 분리 독립을 위해 3년이란 세월을 내전에 쏟아 부었는데, 이때 치누아 아체베가 비아프라의 대사로 임명되어 나이지리아에 의한 봉쇄작전으로 근 100만 명에 달하는 전사와 아사의 참담한 광경을 전 세계에 토로해 구호물자를 보내달라고 호소한 전력이 있다. (아체베 작, <사바나의 모래언덕> 앞날개 참조.)
 분리 독립은 애초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니 기존 국가조직을 가지고 있던 나이지리아에 비해 기초체력이 형편없었고, 나이지리아 못지않게 부패한데다가 체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집단이 외부의 지원 없이 어찌 전쟁을 함부로 벌일 수 있었을까. 유럽과 아메리카 역시 석유를 가운데 두고 괜히 비아프라를 지원해서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영국과 소련의 무기와 심지어 폭격기까지 지원을 받은 나이지리아 정부군에 의하여 3년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거덜이 나버리는 비아프라. 거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보족에 의한 비아프라 독립은 허망한 한 바탕의 꿈으로 끝나버리고, 그러나 나이지리아는 이후에도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쿠데타와 군사정권의 혼돈 속에 석유 하나만 가지고도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어이없게도 완전히 탕진한 채 오늘에 이른다.
 이 책은 보스턴 소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교수직에 갓 임용된 여성 ‘올란나’, 그의 애인이자 같은 학교 수학 교수이자 무신론자이자 사회주의자인 오데니그보의 하인 ‘으그우’, 올란나의 이란성 쌍둥이 카이네네의 영국출신 백인 애인 ‘리처드’, 이렇게 세 명의 주인공의 시각을 주로 진행한다. 이보족 부르주아 인텔리겐챠 올란나, 이보족 청소년 프롤레타리아 으그우, 이보족의 애인인 (백인)영국인 남자 리처드. 아디치에 본인이 코네티컷 주립대, 존스 홉킨스 대, 예일 대에서 의약학, 언론정보학, 정치학, 문예창작학, 아프리카학을 공부한 박사님이니 작품의 가장 큰 무대를 자신과 비슷한 계급의 영역으로 설정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래 등장인물의 거의 대부분은 영관급 장교, 사업가, 권력자, 교수 등과 이들의 친척, 하인이며, 피란지에서 기근과 굶주림으로 인한 단백질 결핍으로 픽픽 쓰러져 죽는 와중에도 주인공의 주변인들은 연줄이 받쳐줘 충분하지는 않지만 극한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책에 의하면, 당시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월등한 군사력을 지녔음에도 어쩐 일인지 단번에 적국인 비아프라를 점령해버리지 않는 것처럼 읽힌다. 3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물론 전쟁도 하지만 주로 봉쇄 전략을 사용하여 이보족 민간인들까지 수없이 굶어 죽게 만든 건 진실이다. 이런 점에서 나이지리아 정부군을 변호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족만큼 영악하고 이기적인 종족도 없었을 것이다. 국부의 거의 대부분인 유전지역을 자기들이 독점하겠다는데 그걸 어찌 보겠는가 말이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건 거의 언제나 승리한 자의 것이 아니다. 기록한 자의 것이지. 이보족이 비아프라 공화국을 만들었다가 쌍코피가 터졌지만, 아체베와 아디치에가 자신들의 기록을 남겨 그들은 후세에 길이길이 애꿎은 피해만 본 불쌍한 종족으로 기억되리라. 불쌍한 아프리카 백성들. 교육받은 상류계급은 자기들끼리의 권력투쟁과 부의 집중에 정신을 놓는 동안 국민들은 땅 속에 묻힌 황금 덩어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검은 대륙에 머물고 있으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7-2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이 책이 바로 <비아프라 내전>을 그린
책이로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게다가 아체베의 책 <사바나>까지 곁들여서
읽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네요.

<아메리카나>는 읽다 말았는데 미국물이 들
어서 그런지 어쩐지 다른 책들보다 못하다는
느낌이더군요.

Falstaff 2019-07-29 20:13   좋아요 0 | URL
옙. 당시 얼마나 굶주렸는지, 아직도 나이지리아 벽지에 가면 아스팔트 길가에서 소년소녀들이 쥐 꼬치를 비싸게 팔고 있다....는 EBS 다큐멘터리를 본 게 한 10년 전인 거 같습니다. 참, 한비야의 책에서도 나오더군요.
정말 잠재력이 있던 아프리카 여러나라, 에티오피아, 콩고, 나이지리아 등을 보면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식민지의 불운이 참 안타깝습니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솔시선(솔의 시인) 3
허만하 지음 / 솔출판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알지 못했던 시인. 이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가 1999년에 찍은 그의 두 번째 시집. 처녀시집 <해조海藻>가 1969년 간행이니 30년 동안 시집을 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름이 낯설 수밖에. 그동안 허만하는 시인이 아니라 병리학 전공 의학박사로 지내며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허만하의 시집을 넘기고 처음 몇 편의 시를 읽으며 든 느낌은, 이 시인의 주제는 46억년에 이르는 지구의 나이에 비하여 인간이란 종이 얼마나 왜소하고 허망한 것인지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다. 처음 실린 시를 읽어보자.



 지층


 연대기란 원래 없는 것이다. 짓밟히고 만 고유한 목숨의 꿈이 있었을 따름이다. 수직으로 잘린 산자락이 속살처럼 드러낸 지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총 저수면적 7.83평방킬로미터의 시퍼런 깊이에 잠긴 마을과 들녘은 보이지 않았으나 묻힌 야산 위 키 큰 한 그루 미루나무 가지 끝이 가을 햇살처럼 눈부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라져라, 사라져라, 흔적도 없이 정갈하게 사라져라. 시간의 기슭을 걷고 있는 나그네요. 애절한 목소리는 차오르는 수위에 묻혀가고 있었다. (13쪽. 전문)



 시인은 수직으로 잘린 산자락을 보고 있다. 거기엔 산자락의 지층이 마치 속살처럼 드러났다. 지층, 속살 같은 지층은 ‘짓밟히고 만 고유한 목숨의 꿈’이었을 뿐이란다. 이후 저수지에 묻힌 마을과 들과 미루나무에 관한 기억을 더듬고는 있지만 그것들이 시에 영향을 주는 것은, 시간의 기슭에 잠시 거닐다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 즉, 사람이 정착해 한 마을을 이루고 번성하다 점점 쇠락해져 끝내 저수지 물속에 잠기는 연대기 따위는 처음부터 수직으로 잘린 지층에 비하면 아예 없는 것과 같다. 시인이 생각하는 자연, 자연의 누적으로 지질학적 시간은 이렇게 인간에 대하여 비정하다. 두 번째 실린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위의 적의


 길은 산자락을 따라 시내처럼 흐르고 있었다. 벼랑은 잘린 언덕줄기의 속살이었다. 통곡의 벽을 바라보듯 나는 벼랑 앞에 섰다. 흑표범의 눈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는 지층. 바위는 조용히 기억하고 있었다. 쓰러지는 양치식물의 숲. 아우성치는 맘모스의 마지막 울음 소리. 쌓인 시간의 무게 밑에서 목숨은 진한 원유로 일렁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바위의 적의를 느꼈다. 바위는 기다리고 있다. 인류의 멸망을. 찢어진 바위틈에서 갈맷빛 물이 솟구쳐 바다가 되고 부스러진 스스로의 피부에서 다시 풀밭이 일어서서 눈부신 고함소리를 지르며 연둣빛 바람을 흔드는 부활의 순간을.  (14쪽. 전문)



 이 시 속에도 벼랑은 언덕줄기의 속살이다. 허만하가 우리가 아는 시인들과 결정적으로 차별이 되는 것은, 많은 시인들은 벼랑 ‘위’에 서서 삶의 위기와 절망과 고독과 추락을 노래하는 반면, 이이는 벼랑을 바라보면서 자기 ‘앞’에 선 것이 애초에 산자락이었던 언덕줄기의 속살, 부드럽지는 않지만 속을 이루고 있던 살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자연은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게 만든 인류를 향한 바위(지층)의 적의를 느끼고 있다. 바위는 인류가 하루빨리 멸망하기를 원하고 있단다. 그리하여 먼 먼 미래의 어느 날, 지구의 땅에는 다시 물이 솟구쳐 바다가 되고, 다시 풀밭이 일어서 눈부신 고함을 지르며 연둣빛 바람이 흔들지만, 인간은 없다. 그때쯤이면 인간은 저 지층 아래 한 켠, 한 틈에서 기껏 새까맣고 점성이 진한 원유로나 존재하리라. 인류가 원유로 존재하는 곳은 다시 지층의 한 틈. 이 ‘틈’은 다시 세 번째 시가 된다.



 틈


 틈을 주무른다.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더듬는 알몸의 포옹이 만드는 캄캄한 틈. 멀어져가고 있는 지구의 쓸쓸한 등이 거느리고 있는 짙은 그늘. 진화론과 상호부조론 사이를 철벅거리며 건너는 순록 무리들의 예니세이 강. 설원에 쓰러지는 노을. 겨울나무 잔가지 끝 언저리. 푸근하고도 썰렁한 낙탓빛 하늘 언저리. 안개와 하늘의 틈.


 지층 속에서 원유처럼 일렁이고 있는 쓰러진 나자식물 시체들의 해맑은 고함소리. 바위의 단단한 틈. 뼈와 살의 틈. 영혼과 육신의 틈. 빵과 꿈의 아득한 틈. 낯선 도시에서 마시는 우울한 원둣빛 향내와 정액빛 밀크 사이의 틈. 외로운 액체를 젓는 스푼.


 존재는 틈이다. 손이 쑥쑥 들어가는 적막한 틈이다.  (15쪽. 전문)



 이쯤 읽으면 독자는 시인 허만하를 가이아Gaia의 셋째아들 정도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세 번째 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의 모습이 그나마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저 거대한 시간이 만들어놓은 지구의 속살, 지층이 서로를 알몸으로 더듬는 작은 틈 사이에서. 이후 시는 광활한 대륙과 사막 등지를 넘나들며 사고의 폭을 확장시켜나가기 시작한다. 확실히 새로운 시선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나는 시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로, 혹시 이런 경향은 이 시집을 내기 전에 무려 30년 동안 시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가, 라고 의문을 품었다.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이리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허만하의 시가 다 이렇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하찮은 것에 관한 애정 어린 시선도 들어 있다. 그래도 그런 시조차 요즘 시인들과는 격이 조금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소개하면서 독후감을 마친다. 이 시에 대한 내 감상은 당신들의 온전한 느낌을 위해 생략한다.



 二加里 뒷길



 닭장 곁에서 맨드라미꽃이 까만 씨앗을 품고 있는 정오. 비닐 대야 밑바닥에는 지친 면 러닝 셔츠 두 벌 구정물처럼 구겨져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그물처럼 널려 있는 바닷가
 초록빛 갯내가
 기진한 나팔꽃 덩굴처럼
 돌담에 붙어 있을 뿐


 꿈에서 본 적이 있는
 바로 그 빈 마을이었다.  (전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9-07-26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 살 때, 도서관 시 코너를 아무 의미없이 뱅뱅 돌다가 슥 뽑아들었던 게 허만하였어요. 교과서 바깥에서 제가 최초로 만난 시집이었는데, 그게 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이게 시구나, 하며 열라 충격받았던 까마득히 여린 청춘의 제가 떠오릅니다.....

Falstaff 2019-07-26 12:41   좋아요 0 | URL
저도 대학에 입학하고나서야 알았던 시들한테 제대로 뒤통수 맞은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김수영, 신경림, 황명걸, 조태일, 신동엽 등등, 그리고 한 번 더 쇼크를 받는데요, 군대 마치고 복학생되며 읽은 시들에게 한 방 더 맞습니다. 황지우, 최승자, 이성복 들한테 말입니다. ㅎㅎㅎ 군역 시절을 경계로 해서 앞엔 창비, 뒤론 문지, 사이 좋습니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민음사 모던 클래식 29
알레산드로 보파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들어보는 작가. 책을 읽기에 앞서 앞날개에 달린 작가 프로필을 먼저 읽었다. 그랬더니, 확 깨더라.
 1955년 러시아 모스크바 출생. 이탈리아에서 생물학 공부, 2년 동안 동물유전학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개구리와 쥐를 흥분시켜 알과 정액을 얻어야 하는 연구실 일에 염증을 느껴 인간 뇌에 관한 공부 다시 시작. “생각에 대한 생각”에 빠져 슬럼프를 겪을 무렵, 갖고 있던 주식이 대박을 쳐 다 때려치우고 11년 동안 휴가 행각. 1년은 미국, 10년은 아시아. 태국에선 보석을 공부하고, 방갈로나 레스토랑도 운영하다 심심해서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냄. 엽서를 받은 한 친구가 좀 더 긴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 글쓰기란 사람들을 행복의 절정으로 도달하게 하는 카마수트라처럼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첫 소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를 집필, 간행. 인간의 동물적 욕망을 희비극적으로 풍자해내며 이탈리아의 천재작가로 떠올랐단다. 천재작가? 하여튼 출판사 광고문 보면 세상에 천재가 한 5분마다 한 명씩은 나오는 거 같다.

 

작가 알레산드로 보파

 책을 살 때 나는, 비스코비츠란 인간을 등장시켜 엉뚱하고 난처한 행각 또는 습관을 관찰해 인간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존재라고 결론을 내리는 소설일 것으로 생각했다. 쉽게 말해 별로 기대하지 않고 구입했다는 얘기. 그래도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 작품이니 혹시 숨어있는 원석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바람마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목차를 보면 프롤로그와 모두 스무 편의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제목이 “요즘 사는 게 어때, 비스코비츠?”, 2장은 “섹스 생각날 때 없니, 비스코비치?” 등등. 흠. 재미있겠군. 하고 드디어 본문을 열면, 1장의 주인공 비스코비츠가 누구, 혹은 무엇인가 하면, ‘겨울잠쥐’다. 다람쥐처럼 생겼으나 야행성인 설치류, 즉 쥐다. 일본 특산종이며 1년에 6개월 동안 동면한단다. 이렇게 생겼다.

 

 

 2장에서의 비스코비츠는? 가끔 섹스 생각이 나는 비스코비츠는? 궁금하시지? 등에 자기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불완전 자웅동체인 달팽이다. 달팽이는 몸속에 양성을 다 가지고 있지만 여간해선 처녀생식을 하지 않으며, 다른 짝과 만나 상대를 임신시키기 위해 난리를 벌인단다. 이쯤 되면 작가 알레산드로 보파의 십여 년 전 직업, 동물유전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한 경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겨울잠쥐와 달팽이 말고도 등장하는 동물을 보면 돼지, 꿀벌, 사자, 기생충, 개, 박테리아까지 다양한 비스코비츠들이 있다. 작가는 갖가지 비스코비츠들에게 인격과 사람의 지능을 부여하여 인간이 하고 있는 별의 별 짓을 다 하게 만든다. 성형수술,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포식동물, 백만장자 돼지, 독재자 개미 등등.
 근데 재미있느냐고? 글쎄. 기대한 거에 비해서는 별로다. 오히려 작가의 생애가 소설보다 더 재미있고 심지어 질투난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아,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아시아 구석에 들어가 하고 싶은 농땡이란 농땡이는 다 치면서 살던 광경을 조금 과장을 섞어 버무렸으면 훨씬 더 재미있는 소설이 될 거 같았다. 하긴, 십 몇 년 만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이런 글을 쓰겠다는데 그걸 누가 말려. 그래도 이이가 소위 ‘천재’는 아니잖아? 혹시 모르지 요샌 천재 타이틀도 대형 마트에서 세일 하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플 스토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11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총 29부로 구성되어 있는 장편. 29부를 모두 조그마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로 마감했으니 독립된 짧은 이야기로 볼 수 있겠지만, 29부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한 편의 작품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리 써놓으면 직접 책을 읽지 않고는 어떤 것을 설명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잉고 슐체의 작품으로 세 번째 책인데 처음에는 주인공 한 명의 시선으로 쓴 서간체 소설 <새로운 인생>, 두 번째가 동서 통일의 와중에서 동쪽에 머물고자 하는 남자와 서쪽에서 빛나는 새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여자 사이의 갈등을 참 맛있게 쓴 <아담과 에블린>이었다. 이 책 <심플 스토리>를 열면서 제발 <아담과 에블린>과 같은 류의 작품이기를 바랐다. 바란 대로 세상일이 되면 그게 인생인가. 잉고 슐체는 이번엔 긴밀히 연결은 됐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누가 누구인지, 이번 등장인물이 몇 번째 출현인지 감도 잡히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독자는 책 옆에다 공책과 펜을 준비하고 각 부의 등장인물과 주요 스토리를 적어가면서 읽는 것이 좋겠으나, 누가 그러라고 가르쳐주지 않은 초독의 경우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어찌 그런 것까지 준비를 하겠는가. 하물며 작가 자신이 각 부 제목 아래 자그마한 글씨로 등장인물과 주요 행위를 짧지만 적어둔 바에야.
 예를 들어 1부 “제우스” 편을 보면, 작은 고딕 글씨체로 이렇게 써놓았다.


 “레나테 모이러가 1990년 2월에 관광버스로 여행을 갔던 일을 이야기한다. 결혼 20주년을 맞아 모이러 부부가 난생처음 서쪽 진영으로, 난생처음 이탈리아로 갔던 것이다. 아시시에 도착하기 직전 버스 사고로 승객들이 모두 내려 기다려야 했을 때, 동승자였던 디터 슈베르트가 절망적인 행동을 감행하게 된다. 모두 함께 추억담을 나누고 도시락을 나눠 먹는다.”

 

 주어와 술어만 보면, “레나테 모이러가 이야기한다.” 라고 했다. 그래서 1부는 모이러 여사의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등장인물은? 당연히 레나테 모이라 여사와 에른스트 모이라 선생. 그리고 디터 슈베르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덩달아 치안이 불안해짐에 따라 동독인들의 허파와 간도 날이 갈수록 커져간다. 이때 한 여행사에서 이탈리아 여행을 기획하는데, 놀라워라, 아직 동독 여권을 소지하고 이탈리아 비자를 받기가 쉽지 않아, 이들은 버스를 타고 뮌헨에 잠깐 들러 전원이 가짜 여권에 자기 사진을 붙이고 가명으로 국경을 넘어, 베네치아, 피렌체, 아시시를 관광하고 돌아올 계획을 짠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한다. 모이라 여사의 경우는 결혼 20주년 기념이니까 한 번 저지를 만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칙주의자인 남편 에른스트가 이 여행에 동의할 줄은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1부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디터 슈베르트 선생. 백발이 성성한 중늙은이인데 한쪽에 유리로 만든 의안을 끼고 다니며, 주피터, 혹 산악인이란 별호를 갖고 있다. 버스가 피렌체를 떠나 아시시로 향하던 중, 작은 도시에서 버스가 퍼져버려 저 발 아래로 보이는 아시시에 가지 못하고 눈이 폴폴 내리는 도시에서 멈추게 된다. 이때, 별로 크지도 않고 멋지지도 않은 성당의 5미터 정도 높이 담 돌출부를 딛고 양말만 신은 디터 슈베르트 씨가 바짝 붙어 아슬아슬한 광경을 만들어낸다. 이 사건은 저 뒤에 나올 에피소드에 다시 등장해서, 당시 학교 교장이었던 모이러 씨, 즉 에른스트 모이러가 자신을 해고해버린 일에 앙심을 품고 엉뚱하게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깽판을 치는 장면으로 밝혀진다.
 책을 한참 넘기면 레나테 모이러 여사의 첫아들이자 에른스트 모이러의 양아들인 마르틴 모이러가 등장한다. 에른스트 모이러 씨는 89년, 90년 해빙의 시기에 기관의 강압에 의해 민주화 운동에 반대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게 이르는데, 나중에 이걸 빌미로 지역에서 완전히 왕따를 당하는 모습이 나오는 반면, 친아버지는 10부에서 1969년 3월 아내와 이혼을 한 후 서독으로 거처와 직장을 옮기고, 심지어 이름도 모이라에서 라인하르트로 바꾸어 박사학위를 취득해 교수를 하다가, 에구머니, 당뇨성 뇌졸중 증상 한방으로 반신불수까지 갔다가 조금씩 회복중인 모습으로 아들을 24년 만에 만나게 된다. 그간 편지왕래가 간혹 있었으며 그때마다 라인하르트 박사께선 아들에게 100마르크 정도를 송금해주고는 했단다.
 이런 식으로 처음 몇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꾸 자기 복제를 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바람에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느 영화의 주인공처럼 화성에 혼자 떨어진 것만큼 황당한 처지로 몰리기 딱 좋다. 그래 위에서 내가 공책과 연필을 옆에 놓고 책을 읽는 것이 좋다고 설레발을 쳤던 거다. 레나테 모이라와 라인하르트 선생 사이의 아들 마르틴 모이러가 친부를 만나던 시기를 계산하면 대략 24년의 시간 격차가 난다. 등장인물도 모이라 가족만 나오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서로 친척, 친구, 이웃, 동창, 직장 등 온갖 형태로 어지러이 섞여 복잡한 구성이 되는데, 책 뒤에 쓰인 역자해설을 보면, 작가 잉고 슐체가 레이먼드 카버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숏컷>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한다. 이런 작품을 흔히 모자이크 기법이라고도 하지 않나? 하여간 모자이크라고 한다면, <심플 라이프>만큼 심플하지 않은 모자이크도 없을 듯하다. 색다른 구성을 소설 양식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 적극 권할 만하다.
 역시 잉고 슐체다. 처음엔 "잉고 슐체"라는 이름이 멋있어서 읽기 시작했으나, 읽어볼수록 괜찮은 작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7-23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 서점에서 만지작 거리다가 결국
사지 못한 책이었네요.

이렇게 재밌는 책이라면 샀어야 했는데...
항상 타이밍은 그렇게 흘러 가네요.

Falstaff 2019-07-24 09:3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인생이지요 뭐.
 
말로센 말로센 1
다니엘 페나크 지음, 진인혜 옮김 / 책세상 / 1998년 5월
평점 :
절판


 

 허무맹랑한 잔혹극. 며칠 전, 나는 잔혹한 것이 싫다, 라고 선언한 바 있다. 단, 처음부터 허풍의 옷을 입힌다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메튜 본이 연출한 영화 <킹스맨>에서 엘가의 위풍당당한 행진곡에 맞춰 사분의사박자로 머리통이 펑펑 터져 날아가는 거 같은 장면. 다니엘 페차크가 쓴 말로센 시리즈도 바로 이 단서조항의 전형이다. 한 번 그대로 옮겨볼까?
 “시트로앵 15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집어넣으려고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등졌을 때, 그는 차가운 칼날의 공격에 의해 척수가 바로 다섯 번째 경부추골 윗부분까지 절단되는 것을 느꼈다. 형사는 순식간에 팔과 다리를 사용할 수 없었고,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뒤이어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전혀 의식이 없었다. 그는 최후의 일격을 당하고 자기 자동차위 트렁크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자동차를, 그가 결코 빌려주겠다고 동의하지 않았을 낯선 사람이 다소 난폭하게 운전하고 있었다.” (623쪽)
 위 인용만 읽어보면 왜 이게 허풍의 옷을 입혔다는 것인지 짐작하지 못할 수 있다. 그게 말로센 시리즈의 매력이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충만한 농담으로 꽉 차 있어서, 저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더 독한 장면을 묘사를 해 독자로 하여금 잠깐 눈살을 찌푸리게는 하지만, 곧 다시 새로운 농담과 허풍과 어이없음과, 심지어 허탈할 정도의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까지 아무런 스스럼없이 해대는 바람에 저까짓 잔혹 따위가 어찌 심각하리오, 라고 그저 한 번 픽, 웃을 수 있다. 이런 시리즈는 순서에 크게 상관없이 읽어도 괜찮다. 어차피 킬링타임 용으로 읽히는 걸 막을 수 없으니까. 페나크가 <몸의 일기> 같은 의미 있는 작품을 썼다고 해서 코믹 잔혹극을 쓰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작가는 무죄다. 이 <말로센 말로센>이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면 내가 읽은 순서는 2-1-4가 되고, 마지막이자 다섯 번째 <정열의 열매들>을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읽을 것 같으니 세 번째 <기병총 요정들>만 남겨놓았다. 물론 안 읽어도 상관이 없다. 순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어디서고 읽기를 끝내도 괜찮다는 말과 같다는 말. 근데 <정열의 열매들>은 몇 번 얘기한 적 있던 작가 김운비가 번역을 해서 고르지 않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뿐이다. 세 번째 <기병총 요정들>을 읽을까, 말까 지금 궁리중인데, 시리즈에서 딱 하나 남은 거, 올해 안에 읽을 거 같긴 하다. 그러니 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께선, 부담 갖지 말고 한 권 정도 시간 죽일 용도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세상이 언제나 진지하고 근엄한 건 아니니까.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엄마의 무릎 아래엔, 장남이자 시리즈의 주인공인 뱅자맹 말로센을 비롯해 모두 일곱 명의 형제, 자매가 산다. 사랑이 넘치는 엄마. 넘치고 넘쳐 넘실넘실 흘러 넘어 일곱 명의 형제자매들이 전부 다른 아빠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뱅자맹은 대가족의 장남으로 기꺼이 여섯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교육까지 시키며, 시집보내고(비록 곧바로 과부가 되긴 하지만), 심지어 자라서 과부가 될 동생 클라라가 태어날 때는 자기 손으로 받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고금동서를 통틀어 이리 어진 장남을 찾는 것이 어찌 가당키나 할 손가. 여기까지도 아니고 간질 증세가 활발하게 나타나는 대형견 쥘리우스와 클라라의 아들 세퇴낭주에다 자기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여주인공 쥘리까지 모두 함께 산다. 이 구성원들은 시리즈가 진행하며 보태지기도 하고 죽어서 빠져나가기도 한다. 물론 일곱 형제자매와 쥘리우스는 변하지 않지만.
 엣다 모르겠다. 직구.
 이번에 읽은 <말로센 말로센>은 원래 작가가 의도한 시리즈 네 편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었으며, 종결부분을 보면 충분히 그럴 자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으로 시리즈가 마쳤으면 더 좋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인종이다. 왜냐하면, 페낙 같은 유명 작가가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힘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이번 책의 특히 앞부분은 시리즈의 다른 책과 비교해 ‘재미없었다’가 아니라 ‘덜 재미있었다’. 본문만 737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비전문가인 내가 이렇게 얘기할 자격도 없고 주제 넘는 꼴이지만, 500쪽 안쪽으로 줄여놓았으면 더 긴박하고 재미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2권으로 넘어가 1권하고 비교할 수 없는 속도감으로 휙휙 넘쳐나는 노골적인 거짓말과 과장과 허풍과 장난기가 등장해야 비로소 이제야 말로센을 읽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이런 장난과 허풍을 삭제하고 책을 읽으면 이게 무슨 소설이며 산문인가, 비난할 수밖에 없다. 페낙은 소설가이면서도 소설보다 아동문학 작품이 훨씬 많은 작가다. 그래서 나는 이 시리즈를 페낙(혹은 페나크)이 어른들을 위해 철없는 이야기를 만들기로 작정을 한 결과물이라고 단정한다. 혹시 진짜 이 시리즈를 읽어보실 분을 위하여 말씀드리오니, 문학적 엄숙주의는 잠시 뒷간에 눠버리고 오심이 좋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