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스토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11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총 29부로 구성되어 있는 장편. 29부를 모두 조그마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로 마감했으니 독립된 짧은 이야기로 볼 수 있겠지만, 29부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한 편의 작품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리 써놓으면 직접 책을 읽지 않고는 어떤 것을 설명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잉고 슐체의 작품으로 세 번째 책인데 처음에는 주인공 한 명의 시선으로 쓴 서간체 소설 <새로운 인생>, 두 번째가 동서 통일의 와중에서 동쪽에 머물고자 하는 남자와 서쪽에서 빛나는 새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여자 사이의 갈등을 참 맛있게 쓴 <아담과 에블린>이었다. 이 책 <심플 스토리>를 열면서 제발 <아담과 에블린>과 같은 류의 작품이기를 바랐다. 바란 대로 세상일이 되면 그게 인생인가. 잉고 슐체는 이번엔 긴밀히 연결은 됐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누가 누구인지, 이번 등장인물이 몇 번째 출현인지 감도 잡히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독자는 책 옆에다 공책과 펜을 준비하고 각 부의 등장인물과 주요 스토리를 적어가면서 읽는 것이 좋겠으나, 누가 그러라고 가르쳐주지 않은 초독의 경우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어찌 그런 것까지 준비를 하겠는가. 하물며 작가 자신이 각 부 제목 아래 자그마한 글씨로 등장인물과 주요 행위를 짧지만 적어둔 바에야.
 예를 들어 1부 “제우스” 편을 보면, 작은 고딕 글씨체로 이렇게 써놓았다.


 “레나테 모이러가 1990년 2월에 관광버스로 여행을 갔던 일을 이야기한다. 결혼 20주년을 맞아 모이러 부부가 난생처음 서쪽 진영으로, 난생처음 이탈리아로 갔던 것이다. 아시시에 도착하기 직전 버스 사고로 승객들이 모두 내려 기다려야 했을 때, 동승자였던 디터 슈베르트가 절망적인 행동을 감행하게 된다. 모두 함께 추억담을 나누고 도시락을 나눠 먹는다.”

 

 주어와 술어만 보면, “레나테 모이러가 이야기한다.” 라고 했다. 그래서 1부는 모이러 여사의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등장인물은? 당연히 레나테 모이라 여사와 에른스트 모이라 선생. 그리고 디터 슈베르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덩달아 치안이 불안해짐에 따라 동독인들의 허파와 간도 날이 갈수록 커져간다. 이때 한 여행사에서 이탈리아 여행을 기획하는데, 놀라워라, 아직 동독 여권을 소지하고 이탈리아 비자를 받기가 쉽지 않아, 이들은 버스를 타고 뮌헨에 잠깐 들러 전원이 가짜 여권에 자기 사진을 붙이고 가명으로 국경을 넘어, 베네치아, 피렌체, 아시시를 관광하고 돌아올 계획을 짠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한다. 모이라 여사의 경우는 결혼 20주년 기념이니까 한 번 저지를 만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칙주의자인 남편 에른스트가 이 여행에 동의할 줄은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1부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디터 슈베르트 선생. 백발이 성성한 중늙은이인데 한쪽에 유리로 만든 의안을 끼고 다니며, 주피터, 혹 산악인이란 별호를 갖고 있다. 버스가 피렌체를 떠나 아시시로 향하던 중, 작은 도시에서 버스가 퍼져버려 저 발 아래로 보이는 아시시에 가지 못하고 눈이 폴폴 내리는 도시에서 멈추게 된다. 이때, 별로 크지도 않고 멋지지도 않은 성당의 5미터 정도 높이 담 돌출부를 딛고 양말만 신은 디터 슈베르트 씨가 바짝 붙어 아슬아슬한 광경을 만들어낸다. 이 사건은 저 뒤에 나올 에피소드에 다시 등장해서, 당시 학교 교장이었던 모이러 씨, 즉 에른스트 모이러가 자신을 해고해버린 일에 앙심을 품고 엉뚱하게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깽판을 치는 장면으로 밝혀진다.
 책을 한참 넘기면 레나테 모이러 여사의 첫아들이자 에른스트 모이러의 양아들인 마르틴 모이러가 등장한다. 에른스트 모이러 씨는 89년, 90년 해빙의 시기에 기관의 강압에 의해 민주화 운동에 반대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게 이르는데, 나중에 이걸 빌미로 지역에서 완전히 왕따를 당하는 모습이 나오는 반면, 친아버지는 10부에서 1969년 3월 아내와 이혼을 한 후 서독으로 거처와 직장을 옮기고, 심지어 이름도 모이라에서 라인하르트로 바꾸어 박사학위를 취득해 교수를 하다가, 에구머니, 당뇨성 뇌졸중 증상 한방으로 반신불수까지 갔다가 조금씩 회복중인 모습으로 아들을 24년 만에 만나게 된다. 그간 편지왕래가 간혹 있었으며 그때마다 라인하르트 박사께선 아들에게 100마르크 정도를 송금해주고는 했단다.
 이런 식으로 처음 몇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꾸 자기 복제를 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바람에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느 영화의 주인공처럼 화성에 혼자 떨어진 것만큼 황당한 처지로 몰리기 딱 좋다. 그래 위에서 내가 공책과 연필을 옆에 놓고 책을 읽는 것이 좋다고 설레발을 쳤던 거다. 레나테 모이라와 라인하르트 선생 사이의 아들 마르틴 모이러가 친부를 만나던 시기를 계산하면 대략 24년의 시간 격차가 난다. 등장인물도 모이라 가족만 나오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서로 친척, 친구, 이웃, 동창, 직장 등 온갖 형태로 어지러이 섞여 복잡한 구성이 되는데, 책 뒤에 쓰인 역자해설을 보면, 작가 잉고 슐체가 레이먼드 카버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숏컷>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한다. 이런 작품을 흔히 모자이크 기법이라고도 하지 않나? 하여간 모자이크라고 한다면, <심플 라이프>만큼 심플하지 않은 모자이크도 없을 듯하다. 색다른 구성을 소설 양식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 적극 권할 만하다.
 역시 잉고 슐체다. 처음엔 "잉고 슐체"라는 이름이 멋있어서 읽기 시작했으나, 읽어볼수록 괜찮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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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23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 서점에서 만지작 거리다가 결국
사지 못한 책이었네요.

이렇게 재밌는 책이라면 샀어야 했는데...
항상 타이밍은 그렇게 흘러 가네요.

Falstaff 2019-07-24 09:3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인생이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