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을 위한 우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5
빌헬름 게나치노 지음, 박교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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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학을 직업으로 하거나 소수의 독자만을 위한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 읽고 나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등의 불평을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약한 강박관념이 든다. 근데 <이날을 위한 우산>은 내가 말한 ‘이런 책’들의 범위에 듦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나가다가 드디어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이제는 소위 지구촌 시대라서 비단 무대를 독일에 국한해 말할 것도 없이, 룸펜 인텔리겐치아 또는 루저들 집단의 디테일을 어찌도 이리 섬세하게 찾아낼 수 있었는지 감탄이 먼저 터져버렸다. 역자가 쓴 책의 해설을 보면 게나치노의 출세작이랄 수 있는 삼부작 <압샤펠>, <불안의 근절> 그리고 <거짓된 세월>에서 일하기 싫어하는 평범한 회사원의 고독한 내면세계를 다루어 70년대 독일 소시민 계층의 세계와 자기소외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면 오늘 읽은 2001년 작 <이날을 위한 우산>의 주인공 마흔여섯 살의 ‘나’는 젊은 시절 삼부작의 주인공 압샤펠과 동료들, 196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니고 70년대에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 80년대 중후반에 해고를 당하고, 갑작스러운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는 인종들이 가끔 그러하듯이 이혼까지 당하거나 애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아 점점 인간 루저의 상태로 접어든 인물일 수 있겠다.
 ‘나’는 애인/연금생활자 리자와 몇 년간 동거하다 버림을 받았는데 리자야말로 날개 없는 천사 비슷한 성품을 가져 헤어지면서 그녀가 받은 연금을 모아놓은 통장의 돈을 ‘나’가 사용할 수 있게 조치해놓고 떠나버렸다. ‘나’가 아껴 쓰기만 하면 한 2년 반 정도는 견딜 수 있는 정도의 돈이라니 리자가 천사가 아니라면 적어도 성녀인 건 확실하다. 물론 ‘나’ 역시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수제화를 만드는 회사에 계약직 비슷하게 다니는데, 업무는 구두를 신고 하염없이 ‘걸어서’ 돌아다니며 구두의 착용감, 내구성, 편의성 등에 관하여 다방면의 보고서를 써내는 것으로 한 켤레 당 200마르크의 수당을 받는다. 때는 1990년대. 세계는 바야흐로 미국 발發 신자유주의가 동서를 불문하고 불어 닥쳐 수제화 회사의 영업소장 하베당크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수당을 한 켤레, 즉 보고서 한 장 당 현재 200마르크에서 50마르크로 삭감을 하며 대신에 신고 걸어 다닌 중고 고급 수제화는 ‘나’의 소유로 하기로 일방적 통보를 해버렸다. 뒤에 가면 ‘나’는 중고품시장에 좌판을 벌여 수제화 한 켤레에 80마르크에 판매를 하니 사실 그가 얻을 수 있는 수당은 켤레 당 130마르크. 애초 맑은 하늘을 언감생심이고 그나마 이슬비 뿌리던 ‘나’와 ‘나’를 둘러싼 인생에 점점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한다.
 무대가 독일의 작은 도시인 것 같다. 주인공 ‘나’는 이 소도시에서 학교도 다니고 직장생활도 하고, 해고당해 교사 출신 리자가 월마다 받는 연금으로 생활도 하다 버림을 받고, 거리에만 나갔다 하면 곳곳에서 아는 얼굴들이 줄지어 다닌다. 5층 건물 옥상에서 돌 던지면 ‘나’가 아는 사람이 맞을 정도다. ‘나’는 두 주일에 한 번 정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걸 습관으로 하고 있는데, 작은 미용실의 주인이자 미용사인 마르고트가 ‘나’의 머리를 깎은 다음에 문을 닫고 ‘나’와 함께 내실로 들어가 뜨거운 한 순간을 보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마흔여섯 살 먹은 남자는 마르고트가 원할 때마다 성공적으로 엑스터시를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마르고트 역시 이를 충분히 이해할 정도의 연식이라 그저 무난한 섹슈얼 라이프를 이어간다. 정말? ‘나’와 마르고트 사이엔 아무런 애정관계가 없어, 또는 없는 것으로 착각해 마르고트가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것도 질투는 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가 알고 있는 사진사 힘멜스바흐. 워낙 판이 좁은 도시라도 힘멜스바흐는 ‘나’가 마르고트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줄 모르고 신문사에 자기 사진을 팔 수 있도록 신문사 고위직에 있는 대학친구에게 말 좀 잘 해 달라 부탁을 한다. 마음이 약한 ‘나’는 또 밸도 없이 말 많은 대학친구를 찾아 신문사에 가서 힘멜스바흐에게 선처를 당부하는데, ‘나’의 글 솜씨를 익히 알고 있는 친구는 난데없이 ‘나’의 채용을 권한다. 이런 얽히고설키는 자잘한 일화가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차는 과정에서 독자는 독일의 소도시 사람들의 소외된 삶을 감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데, 그것도 수사법을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건조한 문장들의 나열을 통해 그렇다. 물론 대화의 경우는 제외하고.
 다시 저 위로 올라가서, 분명한 스토리가 돌출되는 전형적 소설은 아니다. 특별한 주장이나 서사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소설인데 그게 어떤 매력이냐고 묻는다면 또 단번에 말하기 쉽지 않다. 그건 그렇고 인생에 빗줄기가 거세진다는데 그럼 책의 제목에서‘우산’은 또 뭐냐고?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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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9-06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 이 책 너무 지루해서 절반쯤 읽다가 포기하고 고이 모셔둔 지 몇 년 째인데, 조만간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ㅋㅋㅋ

Falstaff 2019-09-06 10:33   좋아요 1 | URL
이게 그렇다니까요. 그래 첫 대가리에 제가 쓰길, 소수의 독자만을 위해... 운운했던 겁니다. 첫 부분이 힘들더라고요.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어서 위안이 되네요. ㅋㅋㅋ
 
세피아빛 초상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00년 작으로 소위 아옌데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삼부작을 간행한 시기별로 보면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이 각각 1982년, 1999년, 2000년이지만, 내용으로 순서를 매기자면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 그리고 <영혼의 집>이 된다. 그러니 만일 이 매력적인 아옌데 삼부작을 아직 읽지 않으셨으면 발표 시기 말고 내용상 순서에 입각해 감상하시는 편이 훨씬 좋을 듯하다.
 이 책의 독후감을 쓰면서 <운명의 딸>에 관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운명의 딸>에는 두 명의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칠레 출신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가 초감각적인 사업능력을 발휘해 거대도시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부유한 거부 집단의 우두머리로 성장하는 여인 ‘파울리나 델 바예’와 비누상자에 담겨 자기가 싸 놓은 똥에 범벅이 된 갓 낳은 흑백 혼혈 아이 ‘엘리사 소머즈’. 자식이 셋이나 달린 이탈리아 출신 유부남 테너와 바람이 난 것이 소문이 나서 도망치듯 칠레로 이민 온 로즈 소머즈 집안에 개구멍받이로 들어왔는데, 사실 알고 보면 (<세피아빛 초상>에서) 소머즈 가문의 가장이자 로즈의 친오빠 존 소머즈 선장의 사생아로 밝혀진다.
 파울리나 여사는 샌프란시스코가 겨울일 때 칠레는 여름이라는 점을 착안해 복숭아 등의 열대 과일을 남극 빙하 위에 올려놓고 적도를 통과해 수입해옴으로써 하늘에서 쏟아지는 현금다발에 눌려 숨을 못 쉴 정도가 되는 천재적 발상을 보여주었고, 엘리사 양은 찌질한 총각 하나와 불같은 연애를 해 덜컥 임신을 해버리지만 황금의 꿈을 안고 엘도라도의 땅 캘리포니아로 훌쩍 떠나버린 애인을 잊지 못해 아이를 사산한 다음에 나무 물통에 몸을 숨기고 세계의 반을 돌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현명한 중국인 타오 치엔을 만난다. <세피아 빛 초상>에서는 기름지고 단 음식의 유혹에 굴복해버려 거대한 몸집으로 변한 파울리나와, 중국 의원 타오 치엔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현명하고 만족하며 살고 있는 엘리사가 다시 등장해 훌륭하고도 중요한 조연을 맡는다.
 이 두 여자 사이엔 뭐가 그리 질긴 인연이 있는지 파울리나의 잘생긴 맏아들 마티아스 로드리게스 데 산타 크루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이자 엘리사의 딸인 린 소머즈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사생아이자, 주인공이자, 작품의 화자 ‘나’인 아우로라 델 바예가 태어난다. 자기 혼자 사랑해 결국 아우로라의 탄생의 침상에서 과다출혈로 생을 마감하는 린과, 애초부터 결혼은 꿈에도 꾸지 않아 도피하듯 유럽으로 날아버리는 퇴폐주의자 마티아스. 마티아스는 처음부터 린 소머즈가 천사처럼 아름답지만 머릿속은 거의 공백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애초에 일회성 유희 목적으로 유혹을 했던 것. 그런데 졸지에 사생아를 임신한 린, 그녀의 부모 타오 치엔. 이때 엘리사 앞에 나타난 남자가 있었으니 파울리나의 조카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해 수련 중이던 세베로 델 바예. 엉뚱하게도 세베로 델 바예가 임신 중인 린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해서 <세피아 빛 초상>의 주인공 아우로라가 졸지에 사생아란 딱지를 떼고 아우로라 델 바예가 되지만, 세베로는 말 그대로 숫총각 상태에서 곧바로 홀아비로 신분이 바뀌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담. 이 때가 1880년. 책은 1862년부터 아우로라, 한문으로 쓰면 여명黎明, 즉 새벽, 중국발음으로는 ‘리밍’이 서른 살이 되는 1910년까지를 시간적 무대로 하고 있다.
 너무 복잡해서 뭔 얘기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시지? 원래 대하소설이 그런 법이다. 이 책은 대하소설까지는 아니어도 세 편 다섯 권을 서로 엮어 놓으면 대하소설 비슷해지니 이해해주시라.
 하이고, 좀 쉬었다 하자. 손목이 욱씬거린다.
 책의 스토리를 이리 줄줄 내리 엮어도 이제 겨우 주인공 아우로라 또는 리밍이 온통 양수에 불고 주름진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다.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불쌍한 새신랑이자 갑작스런 홀아비이자 진짜 착한 남자 세베로 델 바예는 애초에 약혼 비슷하게 했던 여성참정권자이자 사촌이자 천생 다산성의 여신인 니베아 델 바예와 결혼을 해 자식 열다섯 명을 낳고 이중에 여덟이 성인으로 자라는데, 여덟 가운데 클라라라는 이름의 딸도 있어서, 이 아이가 점점 자라 놀라운 심령의 능력을 가지게 되며 심지어는 18년 전에 출간해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던 <영혼의 집>에서 주인공을 먹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옌데 삼부작이라고 하지만 <세피아 빛 초상>과 <운명의 딸>은 상당한 수준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영혼의 집>과는 연결고리가 그리 크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세피아 빛 초상>에서는 볼리비아와 페루가 한 편을 먹고 칠레와 벌였던 태평양 전쟁과 칠레 내부의 혁명과 군부들 간의 투쟁이란 점에서는 또 <영혼의 집>에서 작가의 실제 삼촌인 살바도르 아옌데의 선거혁명과 쿠데타 등의 내전을 다루었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세피아sepia가 무슨 뜻인가 궁금해서 네이버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니 오징어 먹물 색, 짙은 암갈색이란다. 1862년에 시작해 1910년까지 주인공이자 화자인 아우로라 델 바예 또는 리밍의 복잡한 가족사를, 아우로라가 서른 살이 되어 가족과 자신의 기억, 그리고 자신의 밥벌이인 사진을 통한 기록에 대해 작가가 하는 얘기다. 기억은 좋았거나 슬펐거나 어쨌건 강렬했던 것들이 상당한 형태로 변형되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린 서른 살의 인생 이야기는 결국 짙은 암갈색에서 특정한 모습들을 그렸다는 의미다.
 아옌데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어찌 그리 재미있게 소설을 쓰는지. 진작 이 책을 읽지 않고 뭐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왕 아옌데 삼부작을 시작하시려면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 그리고 <영혼의 집>을 다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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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냐가 열린책들 세계문학 101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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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작가 마이크 레즈닉에 대해. 원래 이름은 마이클 다이아몬드 레즈닉 Michael Diamond Resnick. 1942년생. 아래 첨부사진은 2005년에 찍은 것으로 보시다시피 놀랍게도 백인이다. 표지를 벗긴 하드커버만 들고 다니며 읽어서, 작가가 흑인이겠지만 혹시 백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시카고 토박이. 시카고 대학을 다니다 아직까지는 유일한 아내 캐롤을 만나 학교를 때려치우고 곧바로 단편소설 작업에 착수하는데 무려 10년 동안 200~300편을 썼다. 소설 쓰는 기계냐고? 그렇게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소설은 야설뿐 아닐까? 맞다. 10년간 야설작가로 필명을 날리던 레즈닉은 그후 13년 동안 아주 훌륭한 개 사육인으로도 살았다. 얼마나 훌륭했느냐 하면, 13년 동안 스물일곱 번이나 최우수 콜리 종을 키워냈을 정도. 최우수 콜리. 흠. 그 ‘최우수’ 자리에 스물일곱 마리의 개가 오르기까지 개 몇 백 마리가 얼마나 특별한 운동과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는지는 물론 일반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 터. 그러다가 개 냄새가 지긋지긋해졌는지 1981년의 어느 날 문득 레즈닉은 다시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이번엔 SF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다작하는 성향을 가진 레즈닉은 그 후 2000년 현재까지 20년 동안 백 편이 넘는 단편을 발표했다고 하며, 오늘 독후감을 쓰는 <키리냐가>도 처음엔 단편으로 썼으나 줄거리가 이어지는 후속 작을 연달아 발표하여 결국엔 열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장편이 된다.
 작가가 백인이라서 놀란 이유는,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무대가 아프리카 케냐. 본문 여덟 편은 유럽인들이 관리하는 지구형 행성 속 아프리카의 토속신 ‘응가이’가 거처했던 신령스러운 산 ‘키리냐가’의 이름을 딴 사바나 지역이며, 작품 속에 무수한 흑인 사이에서 등장하는 백인은 모두 세 명으로, 우주선 폭발로 인해 중상을 당한 금발의 남자 우주선 조종사, 이 사람을 응급처치하고 후송하기 위해 도착한 여자 의사, 주인공인 주술사 코리바가 악마가 조종해 발부터 세상에 나온 신생아를 목 졸라 죽여 이에 항의하러 키리냐가에 온 금발의 여자 관리인뿐이라서 이다.
 주인공인 늙은 코리바는 케냐 지역 일대에 거주하던 세 부족, 마사이, 캄바, 키쿠유족이 유럽 문명의 침입으로 부족의 순결함을 잃고 검은 유럽인으로 변모한 채 케냐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참을 수 없어 우주선을 타고 키리냐가에 가 주술사 ‘문두무구’의 자리에 오른다. 그곳에서 코리바는 진정한 키쿠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훌륭하게 주술사의 역할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인 비를 부르는 일은 행성을 관리하는 유럽인들과의 컴퓨터를 이용한 교신으로 해결한다. 주술사로서 코리바가 가진 능력은 일찍이 케임브리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예일에서 두 개의 학위를 가진 지식과 우화를 만들어내는 문학적 소양이다. 그러나 그는 키리냐가의 문두무구, 키쿠유족의 정신적 아버지라는 자리에 앉아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종족의 순결을 지켜나가기로 결심을 한다. 유럽의 문명 일체를 거부하는 것. 예를 들어 아픈 아이가 있다고 하자. 코리바는 아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만든 약과 고약으로 병을 다스리려 하지 유럽인주술사로 하여금 금속침으로 아픈 아이의 살갗을 뚫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열병을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유럽의 의술을 받아들이면 다음엔 그들이 만든 편리한 기계를 사용하게 될 것이고, 이어서 옷, 음식, 집, 농업 등 일체의 고유한 문화가 절멸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본 역사나 정치, 경제 역시 다 마찬가지다.
 이 행성의 이름이 유토피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일찍이 토머스 모어 경이 자기 대가리가 잘리기 전에 발명해놓은 Utopia가 아니라 Eutopia, 유럽인들이 만든 유토피아. 행성의 이름에서 벌써 눈치 빠른 독자는 코리바의 원대한 구상이 개꿈으로 끝날 것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 그가 만들어놓은 유토피아로서의 키리냐가는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고, 처음엔 그 균열을 손가락 한 개로 막을 수 있었지만 차츰차츰 더 많은 균열이 더 크게 벌어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애초부터 코리바는 착각을 했던 것. 나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는, 빠르거나 늦거나의 문제지 결국은 어떤 형태로라도 운동하는 건 진리다. 부족장과 주술사가 합심해 만든 유토피아 사회는 어느새 푹 고인 물이 돼버려, 젊은이들은 권태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당연하다. 이웃부족의 침략도 없고, 이웃부족을 침략하지도 않고, 아무런 긴장tension 없이 그냥 번식해서 사는 것이 어찌 유토피아일 수 있을까. 인간이건 사회건 기본적으로 바라는 건, 때로는 과격할 수도 있지만 주로 과격하지 않은 변화와 파동. 코리바와 키쿠유족의 유토피아는 애초부터 생물학적 진보에 너무 무식했다는 결함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힘겹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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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0
야오위안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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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앙. 사마천의 <사기열전> 8편인 상군열전에 의하면, “상군은 위나라 왕의 여러 첩이 낳은 공자로서 이름은 앙이고 성은 공손씨이며 그 조상은 성이 희姬였다.” (김원중 역, 민음사 <사기열전1> 207쪽. 2007) 라고 한다. 희씨 성은 주나라 왕가의 성姓이니 원시 봉건사회였던 주나라 초기에 왕족 하나가 주의 봉토를 받아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위衛’라 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왕자는 왕자였겠지만 야오위안은 책에서 상앙을 왕이 아니라 (왕의 아들인)공자가 천한 신분의 여인 ‘희랑’ 사이에 만든 사생아로 등장시킨다. 희랑은 나중에 자신의 손으로 눈을 파 맹인이 됐다가 노예 신분으로 떨어졌음에도 진나라 수도 함양에 도착해 기어이 아들 상앙을 만나는 것으로 각색했다.
 나를 포함해서 상앙에 관해 사전지식이 좀 있는 독자라면 상앙이 변법, 즉 새로 바뀐 ‘상앙의 법’을 시행하기 전에 도성의 남문 앞에다 세 길의 장대를 세우고 이것을 북문으로 옮기면 금 50냥을 주겠다는 이야기가 반드시 나올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근데, 안 나온다. 대신 <사기열전>의 첫 장면, 자기 집안의 집사 수준인 중서자中庶子로 채용하고 있던 공숙좌가, 상앙이 현명한 줄 알고 있다가 위나라 왕에게 추천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임종의 침상에 드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주의할 건, 상앙은 위衛 왕실의 떨거지 사생아이고, 그를 거두어 자기 수하에 둔 이는 전국칠웅 가운데 하나인 위魏나라의 중신 공숙좌라는 거. 나라 이름이 우리말로 하면 비슷비슷해서 많이 헷갈린다. 위왕이 문병 차 중신 공숙좌의 집에 들렀을 때, 공숙좌가 말하기를 “제 중서자로 있는 공손앙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재능이 빼어납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나랏일을 그에게 맡기고 다스리는 이치를 들으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중신이라지만 일개 집사에 불과한 젊은이에게 어찌 나라 살림을 맡길 수 있으랴. 이를 눈치 챈 공숙좌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고 다시 왕에게 말한다. “왕께서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그를 죽여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십시오.”
 때는 본격적인 전국시대. 천하의 영재가 있으면 영재를 채용하든지 죽여야 했다. 살려두면 다른 나라로 망명해 자신의 영재를 휘날려 창을 거꾸로 잡을 터이니 말이다. 죽어가는 공숙좌가 왕에게 그리 말을 했는데 그래도 좀 찜찜한 구석이 있어 상앙을 부르더니 그것도 훈수라고 한 마디 한다. “오늘 왕께서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을 묻기에 나는 너를 추천했지만 받아들이지 않더라. 그래 만일 기용하지 않으시려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고했다. 그러니 너는 이 길로 빨리 위나라를 떠라.” 이 말을 들은 상앙이 답하기를, “저 왕께서는 당신 말을 듣고도 저를 임용하지 않는데, 또 어찌 당신 말을 들어 저를 죽이겠나이까.” 하면서 공숙좌의 장사까지 다 지내고난 다음에 진나라로 가서 스물한 살의 젊은 군주 효공과 세 번에 걸친 면담을 통해 한 자리를 꿰어 찬다.
 ‘상앙의 법’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엄정한 신상필벌의 법칙이다. 잘 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반드시 벌을 주는 법. 이런 신법을 수립하기 위해 상앙은 당연히 무리하게 기득권 집단, 특히 왕족인 영嬴씨들과 다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의 질서를 다 무시하고 신분, 토지, 사법, 과학, 심지어 계량형까지 통일시키는 등 놀라운 개혁을 일으켜 진나라를 천하무적의 강국으로 만든 반면, 개혁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문벌들과의 권력다툼 덕에 인간으로는 그리 큰 대접을 받지 못한다. 사마천도 “상군은 타고난 성품이 각박한 사람이다. 효공에게 벼슬을 얻고자 제왕의 도로 유세한 것을 보면 내용이 없고 화려한 말을 늘어놓은 것이지 마음속으로 하려던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군주의 총애를 받고 있던 신하를 이용하고, 자리에 오른 뒤에는 공자 건에게 형벌을 가하고, 위나라 장군 앙을 속이고, 조량의 충언을 따르지 않은 것도 상군이 은혜가 적은 것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나는 일찍이 상군이 지은 책들을 읽었는데 책의 내용도 그가 행동한 궤적과 비슷하였다. 결국 상군이 진나라에서 좋지 않은 평판을 얻게 된 데는 까닭이 있었구나!” 라고 말한다. 사마천이 말한 상앙의 유세나, 공자 건에게 가한 형벌 등도 다 야오위안의 희곡에 조금 모습을 달리해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법가로 칭하는 이들, 상앙을 비롯해 오기, 한비자, 이사 등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는 것. 상앙은 자기가 모시던 효공의 아들 혜왕에 의해 거열형으로 몸통이 다섯 토막이 나서 죽고, 오기는 초나라 임금의 시신 위에 엎드려 왕족이 쏜 무수한 화살을 맞고 죽으며, 한비자는 그를 영입했지만 시기했던 이사의 모함으로 사약을 먹고 죽으며, 이사는 환관 조고의 모략에 의하여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을 당한다. 더불어 사마천을 비롯한 후대의 사가들에게 현대적 해석이 내리기 전까지는 좋은 평판을 듣지도 못하니 이들의 팔자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사상을 좇는 나라는 계속 발전을 하고, 그걸 거두는 나라는 종말을 향해 간다. 드라마 <상앙>에서도 결국 진나라 혜왕의 손에 거열형을 당해 죽음을 당하는 와중에도, 진나라의 대를 이은 신하 공손고와 <사기열전>에서는 코가 베어지는 반면 희곡 <상앙>에선 왼쪽 다리의 절단형을 당하는 공자 건은 한 목소리로 상앙의 법은 계속 실행하되 상앙이라는 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상앙의 엄격한 법률체계를 이어간 진나라는 서기전 230년대에 법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던 재상 이사와 더불어 한나라에서 영입한 한비자의 활약으로 전국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개인은 불행하고 그들의 생각을 실천한 나라는 융성했던 시대의 풍운아, 그를 돌아보기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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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아주 오랜 동안 읽기를 망설였던 작품. 제목이 너무 직설적이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표지는 이렇다.

 

 

 소설 제목으로 <소설>이 뭐야. 시인이 자기 시의 제목을 <시>라고 짓는 건 괜찮을 거 같은데 어째 소설 제목으로 <소설>은 덜 소설적인 거 같았다. 이유라고는 딱 그거 하나. 아니면 벌써 읽었을 터. 그러다가 열린책들의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작가 12인” 세트에 두 권을 한 권으로 묶어 포함한 것을 발견, 서슴없이 사 지금 막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느낌을 한 마디로 쓰자면, ‘대박’. 더 놀라운 건, 이 작품을 출간했을 때 작가의 나이가 무려 84세. 이후에도 미치너는 세 편의 소설, 한 편의 미완성 소설, 그리고 자서전을 쓴다. 노익장이란 건 이런 경우에 어울리는 단어. 짚단 한 단 들 힘이 있으면 글을 쓰는 인종들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목차를 보면, 모두 네 개의 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의 제목이 “작가 루카스 요더”, “편집자 이본 마멜”,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독자 제인 갈런드”라 씌어 있다. 그러니까 소설의 유통과정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소설이란 생명체를 담당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네 개의 기관/장기臟器로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로 나누어, 각자의 일인칭 시점으로 소설문학을 만들고, 수정하고, 구별하고, 읽는 행위에 관해 숙고하는 책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인 작가 루카스 요더가 펜실베이니아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독일 출신 이민자 마을을 무대로 쓴 필생의 역작인 8부작이지만, 그것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내가 읽은 <소설>의 진정한 주장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함께 변할 수밖에 없는 문학적 방식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실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갈등관계는, 구시대 또는 기존의 소설방식을 구사하는 주인공 루카스 요더와, 이제 문학이라고 함은 특출하게 뛰어난 문학적 자질/소양을 갖춘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으로 생각하는 작가와 평론가 베노 레트너, 칼 스트라이버트, 티모시 툴 사이의 관계라고 읽었다. 이 작품에서 거론하는 무수한 것들 가운데 아마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했던 부분이었으리라.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가운데 문학의 방식에 관해 가장 늦게 눈을 뜨는 인물은 당연히 문학 또는 소설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 독자일 것이다. 미치너도 기꺼이 꾸준하게 많은 독서를 한 독자의 경우에 저절로 문학의 진보나 진화라는 시각을 갖게 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단서를 달아 놓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건 좋은 작품(작가), 저건 나쁜 작품(작가)라고 선을 그을 필요가 있을까?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는 문학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에 국한하지 않을까? 나도 나름대로 전문 독자의 말석에는 있다고 자만하는 인간이지만, 책을 읽으며 (위대하거나 천박하거나 간에) 극한 지대에 있는 것들을 빼고는 내 주장을 악착같이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던데. 그러나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다른가보다. 책에서 대표적인 평론가 칼 스트라이버트의 스승인 옥스퍼드의 데블런 교수는 영국문학에서 의미 있는 작가로 네 명, 즉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라드를 선택하고, 평가절하 해야 하는 작가로 다른 네 명, 윌리엄 셰커리, 찰스 디킨스, 토마스 하디, 존 골즈워디를 고른다. 앞의 네 명은 진정한 서사의 비밀을 품고 있는 작품을 썼다고 주장하는데, 여성이자 영국인이 두 명이고 한 남자는 미국인, 또 다른 남자 역시 외국인인 폴란드 사람이다. 속물인 나는 속으로, 이 네 명이 쓴 한국어판을 거의 읽어봤다는데 안도를 했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겠다. 평가절하 해야 하는 작가들 가운데 존 골즈워디는 아직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인물이다.
 데블런 교수의 제자를 자칭하는 칼 스트라이버트는 편집자 이본 마멜 앞에서 이 기준을 영국문학이 아닌 미국문학의 범주에 적용시키는 장면도 나온다. 그가 선택한 진정한 서사를 품은 네 명의 작가는 허먼 멜빌, 스티븐 크레인, 이디스 워튼, 윌리엄 포크너. 흠. 스티븐 크레인(이이는 작품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과 이디스 워튼은 동의하기 힘들다. 하지만 어쩌랴, 난 미국 사람이 아니어서 작품이 주는 감동과 동감을 미국인처럼 느끼지는 못하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근데 문제는 반드시 평가절하 되어야 하는 네 명의 작가들 명단이다. 싱클레어 루이스,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어어. 펄 벅은 당연한 거고, 싱클레어 루이스는 한 작품만 읽어봤으니 뭐라 주장하기 곤란하지만 그의 역작 <베빗>이 상당히 좋았던 걸로 기억하며, 스타인벡이 명단에 오른 사실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이를 상쇄하고 남는 것이 헤밍웨이가 이 명단에 올랐다는 점. 이렇게 상쾌할 수가. 그래, 헤밍웨이 속에서 위악을 감지한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거야. 좀 위안이 된다. 하여간 이 책 때문에 또 다른 책 좀 샀다. 책 속에서 여러 권의 책을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고르고 골라 한 댓 권 주문했다.
 언제나처럼 여태까지 쓴 독후감으로 나는 변죽만 울렸다. 여기까지가 내 역할인 듯. 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권한다. 내가 읽은 열린책들 30주년 특별판이 절판이지만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 4번과 5번으로 판매하고 있다. 본문만 672쪽인데 참 재미있어서 이틀이면 독파한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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