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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냐가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01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평점 :
먼저 작가 마이크 레즈닉에 대해. 원래 이름은 마이클 다이아몬드 레즈닉 Michael Diamond Resnick. 1942년생. 아래 첨부사진은 2005년에 찍은 것으로 보시다시피 놀랍게도 백인이다. 표지를 벗긴 하드커버만 들고 다니며 읽어서, 작가가 흑인이겠지만 혹시 백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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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토박이. 시카고 대학을 다니다 아직까지는 유일한 아내 캐롤을 만나 학교를 때려치우고 곧바로 단편소설 작업에 착수하는데 무려 10년 동안 200~300편을 썼다. 소설 쓰는 기계냐고? 그렇게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소설은 야설뿐 아닐까? 맞다. 10년간 야설작가로 필명을 날리던 레즈닉은 그후 13년 동안 아주 훌륭한 개 사육인으로도 살았다. 얼마나 훌륭했느냐 하면, 13년 동안 스물일곱 번이나 최우수 콜리 종을 키워냈을 정도. 최우수 콜리. 흠. 그 ‘최우수’ 자리에 스물일곱 마리의 개가 오르기까지 개 몇 백 마리가 얼마나 특별한 운동과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는지는 물론 일반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 터. 그러다가 개 냄새가 지긋지긋해졌는지 1981년의 어느 날 문득 레즈닉은 다시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이번엔 SF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다작하는 성향을 가진 레즈닉은 그 후 2000년 현재까지 20년 동안 백 편이 넘는 단편을 발표했다고 하며, 오늘 독후감을 쓰는 <키리냐가>도 처음엔 단편으로 썼으나 줄거리가 이어지는 후속 작을 연달아 발표하여 결국엔 열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장편이 된다.
작가가 백인이라서 놀란 이유는,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무대가 아프리카 케냐. 본문 여덟 편은 유럽인들이 관리하는 지구형 행성 속 아프리카의 토속신 ‘응가이’가 거처했던 신령스러운 산 ‘키리냐가’의 이름을 딴 사바나 지역이며, 작품 속에 무수한 흑인 사이에서 등장하는 백인은 모두 세 명으로, 우주선 폭발로 인해 중상을 당한 금발의 남자 우주선 조종사, 이 사람을 응급처치하고 후송하기 위해 도착한 여자 의사, 주인공인 주술사 코리바가 악마가 조종해 발부터 세상에 나온 신생아를 목 졸라 죽여 이에 항의하러 키리냐가에 온 금발의 여자 관리인뿐이라서 이다.
주인공인 늙은 코리바는 케냐 지역 일대에 거주하던 세 부족, 마사이, 캄바, 키쿠유족이 유럽 문명의 침입으로 부족의 순결함을 잃고 검은 유럽인으로 변모한 채 케냐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참을 수 없어 우주선을 타고 키리냐가에 가 주술사 ‘문두무구’의 자리에 오른다. 그곳에서 코리바는 진정한 키쿠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훌륭하게 주술사의 역할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인 비를 부르는 일은 행성을 관리하는 유럽인들과의 컴퓨터를 이용한 교신으로 해결한다. 주술사로서 코리바가 가진 능력은 일찍이 케임브리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예일에서 두 개의 학위를 가진 지식과 우화를 만들어내는 문학적 소양이다. 그러나 그는 키리냐가의 문두무구, 키쿠유족의 정신적 아버지라는 자리에 앉아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종족의 순결을 지켜나가기로 결심을 한다. 유럽의 문명 일체를 거부하는 것. 예를 들어 아픈 아이가 있다고 하자. 코리바는 아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만든 약과 고약으로 병을 다스리려 하지 유럽인주술사로 하여금 금속침으로 아픈 아이의 살갗을 뚫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열병을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유럽의 의술을 받아들이면 다음엔 그들이 만든 편리한 기계를 사용하게 될 것이고, 이어서 옷, 음식, 집, 농업 등 일체의 고유한 문화가 절멸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본 역사나 정치, 경제 역시 다 마찬가지다.
이 행성의 이름이 유토피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일찍이 토머스 모어 경이 자기 대가리가 잘리기 전에 발명해놓은 Utopia가 아니라 Eutopia, 유럽인들이 만든 유토피아. 행성의 이름에서 벌써 눈치 빠른 독자는 코리바의 원대한 구상이 개꿈으로 끝날 것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 그가 만들어놓은 유토피아로서의 키리냐가는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고, 처음엔 그 균열을 손가락 한 개로 막을 수 있었지만 차츰차츰 더 많은 균열이 더 크게 벌어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애초부터 코리바는 착각을 했던 것. 나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는, 빠르거나 늦거나의 문제지 결국은 어떤 형태로라도 운동하는 건 진리다. 부족장과 주술사가 합심해 만든 유토피아 사회는 어느새 푹 고인 물이 돼버려, 젊은이들은 권태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당연하다. 이웃부족의 침략도 없고, 이웃부족을 침략하지도 않고, 아무런 긴장tension 없이 그냥 번식해서 사는 것이 어찌 유토피아일 수 있을까. 인간이건 사회건 기본적으로 바라는 건, 때로는 과격할 수도 있지만 주로 과격하지 않은 변화와 파동. 코리바와 키쿠유족의 유토피아는 애초부터 생물학적 진보에 너무 무식했다는 결함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힘겹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