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동안 읽기를 망설였던 작품. 제목이 너무 직설적이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표지는 이렇다.
소설 제목으로 <소설>이 뭐야. 시인이 자기 시의 제목을 <시>라고 짓는 건 괜찮을 거 같은데 어째 소설 제목으로 <소설>은 덜 소설적인 거 같았다. 이유라고는 딱 그거 하나. 아니면 벌써 읽었을 터. 그러다가 열린책들의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작가 12인” 세트에 두 권을 한 권으로 묶어 포함한 것을 발견, 서슴없이 사 지금 막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느낌을 한 마디로 쓰자면, ‘대박’. 더 놀라운 건, 이 작품을 출간했을 때 작가의 나이가 무려 84세. 이후에도 미치너는 세 편의 소설, 한 편의 미완성 소설, 그리고 자서전을 쓴다. 노익장이란 건 이런 경우에 어울리는 단어. 짚단 한 단 들 힘이 있으면 글을 쓰는 인종들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목차를 보면, 모두 네 개의 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의 제목이 “작가 루카스 요더”, “편집자 이본 마멜”,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독자 제인 갈런드”라 씌어 있다. 그러니까 소설의 유통과정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소설이란 생명체를 담당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네 개의 기관/장기臟器로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로 나누어, 각자의 일인칭 시점으로 소설문학을 만들고, 수정하고, 구별하고, 읽는 행위에 관해 숙고하는 책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인 작가 루카스 요더가 펜실베이니아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독일 출신 이민자 마을을 무대로 쓴 필생의 역작인 8부작이지만, 그것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내가 읽은 <소설>의 진정한 주장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함께 변할 수밖에 없는 문학적 방식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실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갈등관계는, 구시대 또는 기존의 소설방식을 구사하는 주인공 루카스 요더와, 이제 문학이라고 함은 특출하게 뛰어난 문학적 자질/소양을 갖춘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으로 생각하는 작가와 평론가 베노 레트너, 칼 스트라이버트, 티모시 툴 사이의 관계라고 읽었다. 이 작품에서 거론하는 무수한 것들 가운데 아마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했던 부분이었으리라.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가운데 문학의 방식에 관해 가장 늦게 눈을 뜨는 인물은 당연히 문학 또는 소설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 독자일 것이다. 미치너도 기꺼이 꾸준하게 많은 독서를 한 독자의 경우에 저절로 문학의 진보나 진화라는 시각을 갖게 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단서를 달아 놓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건 좋은 작품(작가), 저건 나쁜 작품(작가)라고 선을 그을 필요가 있을까?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는 문학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에 국한하지 않을까? 나도 나름대로 전문 독자의 말석에는 있다고 자만하는 인간이지만, 책을 읽으며 (위대하거나 천박하거나 간에) 극한 지대에 있는 것들을 빼고는 내 주장을 악착같이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던데. 그러나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다른가보다. 책에서 대표적인 평론가 칼 스트라이버트의 스승인 옥스퍼드의 데블런 교수는 영국문학에서 의미 있는 작가로 네 명, 즉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라드를 선택하고, 평가절하 해야 하는 작가로 다른 네 명, 윌리엄 셰커리, 찰스 디킨스, 토마스 하디, 존 골즈워디를 고른다. 앞의 네 명은 진정한 서사의 비밀을 품고 있는 작품을 썼다고 주장하는데, 여성이자 영국인이 두 명이고 한 남자는 미국인, 또 다른 남자 역시 외국인인 폴란드 사람이다. 속물인 나는 속으로, 이 네 명이 쓴 한국어판을 거의 읽어봤다는데 안도를 했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겠다. 평가절하 해야 하는 작가들 가운데 존 골즈워디는 아직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인물이다. 데블런 교수의 제자를 자칭하는 칼 스트라이버트는 편집자 이본 마멜 앞에서 이 기준을 영국문학이 아닌 미국문학의 범주에 적용시키는 장면도 나온다. 그가 선택한 진정한 서사를 품은 네 명의 작가는 허먼 멜빌, 스티븐 크레인, 이디스 워튼, 윌리엄 포크너. 흠. 스티븐 크레인(이이는 작품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과 이디스 워튼은 동의하기 힘들다. 하지만 어쩌랴, 난 미국 사람이 아니어서 작품이 주는 감동과 동감을 미국인처럼 느끼지는 못하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근데 문제는 반드시 평가절하 되어야 하는 네 명의 작가들 명단이다. 싱클레어 루이스,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어어. 펄 벅은 당연한 거고, 싱클레어 루이스는 한 작품만 읽어봤으니 뭐라 주장하기 곤란하지만 그의 역작 <베빗>이 상당히 좋았던 걸로 기억하며, 스타인벡이 명단에 오른 사실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이를 상쇄하고 남는 것이 헤밍웨이가 이 명단에 올랐다는 점. 이렇게 상쾌할 수가. 그래, 헤밍웨이 속에서 위악을 감지한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거야. 좀 위안이 된다. 하여간 이 책 때문에 또 다른 책 좀 샀다. 책 속에서 여러 권의 책을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고르고 골라 한 댓 권 주문했다. 언제나처럼 여태까지 쓴 독후감으로 나는 변죽만 울렸다. 여기까지가 내 역할인 듯. 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권한다. 내가 읽은 열린책들 30주년 특별판이 절판이지만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 4번과 5번으로 판매하고 있다. 본문만 672쪽인데 참 재미있어서 이틀이면 독파한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