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아빛 초상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00년 작으로 소위 아옌데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삼부작을 간행한 시기별로 보면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이 각각 1982년, 1999년, 2000년이지만, 내용으로 순서를 매기자면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 그리고 <영혼의 집>이 된다. 그러니 만일 이 매력적인 아옌데 삼부작을 아직 읽지 않으셨으면 발표 시기 말고 내용상 순서에 입각해 감상하시는 편이 훨씬 좋을 듯하다.
 이 책의 독후감을 쓰면서 <운명의 딸>에 관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운명의 딸>에는 두 명의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칠레 출신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가 초감각적인 사업능력을 발휘해 거대도시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부유한 거부 집단의 우두머리로 성장하는 여인 ‘파울리나 델 바예’와 비누상자에 담겨 자기가 싸 놓은 똥에 범벅이 된 갓 낳은 흑백 혼혈 아이 ‘엘리사 소머즈’. 자식이 셋이나 달린 이탈리아 출신 유부남 테너와 바람이 난 것이 소문이 나서 도망치듯 칠레로 이민 온 로즈 소머즈 집안에 개구멍받이로 들어왔는데, 사실 알고 보면 (<세피아빛 초상>에서) 소머즈 가문의 가장이자 로즈의 친오빠 존 소머즈 선장의 사생아로 밝혀진다.
 파울리나 여사는 샌프란시스코가 겨울일 때 칠레는 여름이라는 점을 착안해 복숭아 등의 열대 과일을 남극 빙하 위에 올려놓고 적도를 통과해 수입해옴으로써 하늘에서 쏟아지는 현금다발에 눌려 숨을 못 쉴 정도가 되는 천재적 발상을 보여주었고, 엘리사 양은 찌질한 총각 하나와 불같은 연애를 해 덜컥 임신을 해버리지만 황금의 꿈을 안고 엘도라도의 땅 캘리포니아로 훌쩍 떠나버린 애인을 잊지 못해 아이를 사산한 다음에 나무 물통에 몸을 숨기고 세계의 반을 돌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현명한 중국인 타오 치엔을 만난다. <세피아 빛 초상>에서는 기름지고 단 음식의 유혹에 굴복해버려 거대한 몸집으로 변한 파울리나와, 중국 의원 타오 치엔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현명하고 만족하며 살고 있는 엘리사가 다시 등장해 훌륭하고도 중요한 조연을 맡는다.
 이 두 여자 사이엔 뭐가 그리 질긴 인연이 있는지 파울리나의 잘생긴 맏아들 마티아스 로드리게스 데 산타 크루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이자 엘리사의 딸인 린 소머즈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사생아이자, 주인공이자, 작품의 화자 ‘나’인 아우로라 델 바예가 태어난다. 자기 혼자 사랑해 결국 아우로라의 탄생의 침상에서 과다출혈로 생을 마감하는 린과, 애초부터 결혼은 꿈에도 꾸지 않아 도피하듯 유럽으로 날아버리는 퇴폐주의자 마티아스. 마티아스는 처음부터 린 소머즈가 천사처럼 아름답지만 머릿속은 거의 공백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애초에 일회성 유희 목적으로 유혹을 했던 것. 그런데 졸지에 사생아를 임신한 린, 그녀의 부모 타오 치엔. 이때 엘리사 앞에 나타난 남자가 있었으니 파울리나의 조카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해 수련 중이던 세베로 델 바예. 엉뚱하게도 세베로 델 바예가 임신 중인 린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해서 <세피아 빛 초상>의 주인공 아우로라가 졸지에 사생아란 딱지를 떼고 아우로라 델 바예가 되지만, 세베로는 말 그대로 숫총각 상태에서 곧바로 홀아비로 신분이 바뀌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담. 이 때가 1880년. 책은 1862년부터 아우로라, 한문으로 쓰면 여명黎明, 즉 새벽, 중국발음으로는 ‘리밍’이 서른 살이 되는 1910년까지를 시간적 무대로 하고 있다.
 너무 복잡해서 뭔 얘기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시지? 원래 대하소설이 그런 법이다. 이 책은 대하소설까지는 아니어도 세 편 다섯 권을 서로 엮어 놓으면 대하소설 비슷해지니 이해해주시라.
 하이고, 좀 쉬었다 하자. 손목이 욱씬거린다.
 책의 스토리를 이리 줄줄 내리 엮어도 이제 겨우 주인공 아우로라 또는 리밍이 온통 양수에 불고 주름진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다.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불쌍한 새신랑이자 갑작스런 홀아비이자 진짜 착한 남자 세베로 델 바예는 애초에 약혼 비슷하게 했던 여성참정권자이자 사촌이자 천생 다산성의 여신인 니베아 델 바예와 결혼을 해 자식 열다섯 명을 낳고 이중에 여덟이 성인으로 자라는데, 여덟 가운데 클라라라는 이름의 딸도 있어서, 이 아이가 점점 자라 놀라운 심령의 능력을 가지게 되며 심지어는 18년 전에 출간해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던 <영혼의 집>에서 주인공을 먹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옌데 삼부작이라고 하지만 <세피아 빛 초상>과 <운명의 딸>은 상당한 수준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영혼의 집>과는 연결고리가 그리 크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세피아 빛 초상>에서는 볼리비아와 페루가 한 편을 먹고 칠레와 벌였던 태평양 전쟁과 칠레 내부의 혁명과 군부들 간의 투쟁이란 점에서는 또 <영혼의 집>에서 작가의 실제 삼촌인 살바도르 아옌데의 선거혁명과 쿠데타 등의 내전을 다루었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세피아sepia가 무슨 뜻인가 궁금해서 네이버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니 오징어 먹물 색, 짙은 암갈색이란다. 1862년에 시작해 1910년까지 주인공이자 화자인 아우로라 델 바예 또는 리밍의 복잡한 가족사를, 아우로라가 서른 살이 되어 가족과 자신의 기억, 그리고 자신의 밥벌이인 사진을 통한 기록에 대해 작가가 하는 얘기다. 기억은 좋았거나 슬펐거나 어쨌건 강렬했던 것들이 상당한 형태로 변형되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린 서른 살의 인생 이야기는 결국 짙은 암갈색에서 특정한 모습들을 그렸다는 의미다.
 아옌데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어찌 그리 재미있게 소설을 쓰는지. 진작 이 책을 읽지 않고 뭐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왕 아옌데 삼부작을 시작하시려면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 그리고 <영혼의 집>을 다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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