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의 죽음
피터 애크로이드 지음, 한기찬 옮김 / 프레스21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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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한 애크로이드의 소설은 다 읽은 셈이다. 차례대로 <플라톤의 반란: The Plato Papers>, <혹스무어>, <디 박사의 집> 그리고 <어느 시인의 죽음: Chatterton>. 제목을 왜 <어느 시인의 죽음>으로 뽑았을까. 너무 뻔한 제목 아닌가 싶다. 그냥 원래대로 <채터턴>이라 해도 괜찮았을 거 같은데. <혹스무어>의 독후감에서도 쓴 적이 있고, 이 책을 통해서 늙은 작가 해리엇 스크로프의 입을 통해 한 번 더 이야기하지만 애크로이드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가져와 그것의 변형을 통해 실제 역사의 사실에 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즉 역사적 “사실이란 건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이번에 애크로이드가 만들어낸 인물은 18세기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죽은 빗나간 천재소년 토머스 채터턴(1752~70).

 

토머스 채터튼의 초상


 역사적 사실로 말하자면, 열대여섯 살 때 수도승 ‘롤리’의 이름으로 속창을 짓는 등 정통 중세 문체를 만드는데 천재를 발휘했으며 성공을 위해 17세에 런던으로 옮겼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해 가난과 실패에 지쳐 1770년 8월 24일, 브룩가街 다락방에서 비소를 먹고 음독자살해 슈레인 구빈원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하는 실제인물이다. 애크로이드의 상상은 채터턴이 훌륭하고도 자유롭게 중세 문체를 사용하여 당대 시인들의 작풍을 그대로 모방해, 결과물을 어린 채터턴이 쓴 것이 아니고 수도승 롤리뿐만 아니라 유명 시인, 심지어 윌리엄 블레이크의 미발표 시라고 주장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을 수준이었으며, 그의 위조에 관한 일가견은 샘 조인슨이라는 출판업자를 만나 ‘존 채터턴’이란 인물을 위장 자살시킨 다음 본격화되어 이후 30년 이상 위장작가로 풍요롭게 살았을 수도 있다는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그리하여 사실 영국이 자랑하는 중세 시인들의 작품의 절반 정도는 당대의 시인이 아니라 존 채터턴이 쓴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 <혹스무어>, <디 박사의 집>에 이어 이번에도 한 역사적 사실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허구의 수렁으로 함몰시켜버리고 말았다.
  영국의 화가 헨리 월리스는 지난 세기의 한 천재가 불운하게 죽은 것을 모티브로 해서 젊고 총기가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자살을 시도하던 젊은 시인 조지 메레디스를 모델로 고용해 창문이 열린 다락방에서 자살에 이른 체터턴을 그린 <채터턴>을 1856년에 완성한다. 작품 속에서도 시인이자 주인공인 찰스 위치우드는 아들 에드워드와 함께 테이트 미술관을 방문해 이 작품을 감상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헨리 월리스, <채터튼> 1856


  이 그림에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애크로이드는 책 속에서 다른 초상화 한 점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1802년 조지 스테드라는 화가의 그림으로 중년의 남자가 네 권의 책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댄 모습이다. 주인공 찰스 위치우드는 집의 가장이기는 하지만 아내가 화랑의 비서 일을 하며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룸펜 인텔리겐치아다. 그러나 자신도 그렇고, 자신보다 아내가 더 그런데, 스스로 뮤즈의 찬란한 입김을 받은 시인으로 지금 장시를 쓰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큰 영광이 쏟아질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몽상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신이 참 가난하다는 걸 새삼스레 자각해 오래된 책 <소멸된 18세기 플루트 연주법>을 팔기 위해 리노 골동품 점에 갔다가, 너무 헐값을 부르는데다 저쪽에서 자신을 빤하게 바라보고 있던 중년남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바람에 단박에 남자의 초상화와 자신의 책 두 권을 교환해 집에 가지고 오게 된다. 이 때 휠체어의 여자 주인이 리노 씨에게 한 말은 이랬다.
  “이 그림엔 죽음이 서려 있다고요!”
  불운을 예고하는 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소설작법 3장 1절에 의거하여, 그림을 집에 가지고 온 이후 찰스는 만성 어지럼증과 편두통에 시달려 마음씨 좋은 아내 비비안의 걱정은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 이 와중에 찰스는 친구이자 자신은 모르지만 아내 비비안을 숭배하는 필립 슬랙과 함께 그림의 때를 살살 벗겨내니 네 권의 책은 각기 <국립식물원>, <복수>, <엘라>, <발라>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터턴의 저서들이다. 이 책들의 제목에 의거하여 혹시 채터턴이 50세까지 살아 있어서 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아닐까, 하고 상상을 하게 되고, 이의 확인을 위해 리노 골동품상에 그림을 판 조인슨 씨(저 위의 출판업자와 당연히 관련이 있는 후손)를 찾아 브리스틀로 향해 팻이라는 노인으로부터 관련 자료를 넘겨받는데, 저런, 자신의 짐작 또는 상상력이 맞아 떨어진 거였다. 18세를 석 달 남기고 죽은, 18세기는 물론이거니와 전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가짜작품 창작의 달인이 알고 보니 50세가 넘어서까지 살아 있었음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심지어 여태까지 토비아스 스몰렛, 윌리엄 블레이크 등의 시로 알고 있던 것들 가운데 숱한 작품들이 사실은 채터턴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 아아, 진정하시라.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그랬을 수도 있다는 애크로이드 특유의 역사 담론 뒤틀기니까.
  여기에 조지 메레디스가 채터턴의 대역으로 그의 시체 모델로 그림을 그리게 된 이야기가 삽화처럼 그려진다. 1856년, 가난 때문에 아내는 도망가고 사는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 채터턴의 아버지가 합창단 지휘자를 했고, 채터턴 역시 각별한 애정이 있었으며 그의 생몰연대가 동판에 적혀 있는 브리스틀의 세인트 메리 레드클리프의 채터턴 유적에 앉아 수은과 비소가 든 독약 병을 입에 가져가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팔을 탁, 쳐서 병을 땅에 떨어뜨리고 사라지는데, 그것이 바로 채터턴의 영혼이라고 해석하기에 이른다.
  이외에 현대 영국의 문학, 미술계에서도 위작과 소설 내용의 복사 같은 일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까지 아울러 말 그대로 3세기에 이르는 담론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뜻은? 기존의 역사적, 기득권을 갖는 해석을 때려 부순다는 의미. 이게 애크로이드 소설문학의 본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 <어느 시인의 죽음>에 만점을 주지는 못한다. 처음부터 흥미진진했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그의 초상화가 새롭게 변하는 중요한 장면이 조금은 황당했기 때문에. 이 책이 지금 절판 상태라 하더라도 언제 다시 복간될지 몰라 어떤 모습인지는 차마 밝혀두지 못하겠다. 그만큼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이 속속 번역 출간했으면 좋겠는데 어째 각 출판사에선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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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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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이이가 쓴 <저항의 멜랑콜리>를 ‘대단히’ 흥미롭게 읽어서 애초부터 올해에 꼭 읽겠다고 꼽았던 책. 그러나 쉽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 지레짐작 했던 책. 무엇보다 먼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사탄탱고>의 문장은 <저항의 멜랑콜리>에 비하여 많이 짧다. 원래 이이의 글이 대단히 긴 편이라고 한다. 경애하는 서재 동무님께 들은 바, 헝가리어 자체가 쉼표 한 번만 찍으면 글을 무한히 길게 쓸 수 있단다. 그래 이 책도 원래는 길고 긴 문장을 역자의 의도에 의하여 몇 개의 우리말로 자른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초기작이라 본격적으로 문장이 길어지기 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을 감상하는 데는 그것의 길고 짧음이 그리 큰 문제인 것 같지가 않다.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이이의 다른 책 <마지막 늑대>도 포함하여,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주제를 꾸려나가기 위해 가장 적절한 문장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독자가 접하는 것과 비교해, ‘미친 듯이’ 길고 긴 문장이라 하더라도 만연체 특유의 늘어지는 감정은커녕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의 신상체腎上體, 즉 부신의 수질髓質에서 아드레날린을 급격하게 분비하게 만든다. 쉬운 말로하면, 이야기에 빠져버린다는 뜻. 그러나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말 번역을 통하기는 했지만, 직접 읽어봐야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작년 연말, 2019년에 읽은 가장 좋은 책으로 <저항의 멜랑콜리>를 선정하면서 “카프카는 특정한 한 사람, 예를 들면 측량 기사나 K, 딱 한 명만 골라 후벼 파는 반면 크러스호르커이는 이 책에서 시골에 있는 수상한 소도시의 그나마 다양한 사람을(아니, 어쩌면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만 다를 뿐”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금 전 <사탄탱고>를 다 읽고 역자의 해설을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초기 소설은 카프카 적이다. 그러나 카프카가 단독자單獨者를 그린다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군상群像을 등장시킨다.” 이런 해설을 읽으면 나 같은 아마추어, 기껏해야 딜레탕트들은 기분 좋다. 역자가 나처럼 카프카와 비교하는 것만 해도 그런데, 작가가 집중하는 대상까지 내가 생각했던 점과 같다고 하니 더욱 그렇지 않겠나. 우쭐대는 모양이 밥맛없더라도 좀 이해해주시라.
  구성도 <저항의....>와 비슷한 점이 있다. <저항의....>는 아주 추운 날,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를 전시하겠다는 서커스가 들어옴으로 해서 일이 벌어지는 반면, <사탄탱고>는 이제 가을비의 첫 번째 방울이 떨어질 무렵 저 호흐마이스 벌판에서 종소리가 들리던 날 밤, 죽었다고 알려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다 망해가는 집단 농장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농장 구성원들이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써 놓으면 전혀 감흥을 느낄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성당이 4km 떨어져 있지만 종도 없고 종탑마저 지난 전쟁 때 완전히 무너져버려 종이 있다고 해도 여기까지 들릴 리 없는 거리. 농장에서 가장 예쁜 슈미트 부인의 침상에서 새벽에 깨어 불길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절름발이 후터키의 불안과 한 순간에 환영처럼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아) 검게 보이는 아카시아 가지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듯한 혼돈의 감정을 독후감에서는 도무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 거기다가 종소리가 끝난 다음의 완벽한 고요. 적막은 더 불안과 불운의 영감에 휩싸이게 하고. 슈미트 부인 역시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문고리를 흔들고 있지만 정작 고함도 나오지 않는 고통스런 악몽을 꾼다. 그래 초장부터 소설은 제목처럼 뭔가 악마주의적인 분위기 속에 불길한 죽음의 기운이 넘실댄다.
  이같이 소설 첫 머리가 강렬해 독자는 책이 끝날 때까지 작품의 어느 곳, 어느 장면도 이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면 단박에 기억이 날 정도로 뚜렷하게 기억하게 되는데, 농장의 모든 일꾼들이 마을 북쪽의 농장으로 가 8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하고 번 돈을 남편과 이웃 크라네르 둘이 몽땅 챙겨 갑자기 들이닥친다. 둘이 이 돈을 반씩 챙겨 마을을 떠날 결심을 했으나, 불륜의 밤을 지낸 후터키가 창밖으로 튀었다가 새벽 불빛을 보고 방문한다는 듯이 나타나 결국 셋이 나누기로 한다. 이때 역시 불빛을 보고 또 다른 이웃 헐리치 부인이 놀랄만한 소식을 가지고 방문하니,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마을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 전직 기술자인 후터키는 이리미아시가 이곳에 오기만 하면 생산과 농사가 놀라울 만큼 발전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해 마음을 바꾼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리마시아는 위대한 마법사 비슷한 인물로 심지어 쇠똥으로도 성을 지을 수 있을만한 추진력과 지식과 연줄이 있는 영웅이기 때문에. 크라네르 부인도 등장해 아리미아시가 앞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뭔가를 이룰 것이라 첨언을 하자,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새벽 가을비를 맞으며 슈미트 부인이 정말로 그들이 농장으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비옷과 두툼한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고, 후터키와 슈미트 역시 “짜증내지 말라고, 보란 듯이 잘 살 수 있게 될 테니까! 흥청망청 마음껏 즐기며 살 거야!” 희망가를 노래하며 메시아를 맞으려 빗속을 행진하는 것으로 1부의 첫 번째 장章이 끝난다.
  책은 모두 2부, 열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 2, 3, 4, 5, 6장으로 되어 있는 반면, 2부는 6, 5, 4, 3, 2, 1장의 순서다. 그리하여 이 장들이 만들어내는 건 한 사이클cycle. 즉 원이다. 원의 특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돌고 도는 것. 이게 어떤 뜻인지는 밝힐 수 없다. 진짜로 책을 읽을 분을 위하여. <저항의....>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끈질기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력이 조금 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끈질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앉아서 한 번에 30쪽 가량을 읽을 수 있는 모든 분께 권한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이이의 이름을 기억하시라. 출판사 알마는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어 <저 아래 서왕모>를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으며 그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출간할 계획이라고 알라딘에 광고를 했다. 이제 <....서왕모>를 기다리고 있는데 굳이 그것 말고도, 그의 작품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번역 출간해주었으면 좋겠다. <저항의 멜랑콜리>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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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집 범우문고 16
김소월 지음 / 범우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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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소월 김정식(金廷湜). 1902년 9월(음력 8월)에 태어나 서른두 해를 살다 1934년 12월에 생을 접은 시인. 그의 죽음조차 뇌일혈로 인한 자연사인지, 독극물 자살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유년시절 일본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미쳐버린 아버지, 할아버지 슬하에서 한문교육, 이른 결혼, 오산학교에서 김억金億을 사사, 교장 조만식 흠모, 일본 도쿄상과대학 진학, 관동지진으로 귀국, 사업 실패, 가장으로서의 자괴감 같은 모든 바이오그래피도 김억이 자비출판해준 시집 《진달래꽃》 한 권으로 지워진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시인이 김소월일 것이다. 나도 물론이고. 그러나 교과서 말고 진짜 그의 시집을 읽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너무나 많이, 너무도 자주 그의 이름과 시와, 시에 곡을 붙인 가곡과 가요 때문에 오히려 정작 이이의 시를 읽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하리라.
  굳이 그의 대표작 <진달래꽃>,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를 인용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 절묘한 은유의 벼랑 끝. 이런 게 진짜 시 아닌가 싶다. 말로는 죽어도 안 울겠다고 하는 동시에 가슴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는 역설. 하긴 소월이 누군가. 국문학 전공하는 사람들 가운데 시를 공부해 박사를 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연구주제로 삼은 이가 김소월이다. 소설? 이광수. 그러나 지금 시대에 소월처럼 시를 쓸 수도 없고, 쓸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앞으로도 몇 세기를 거쳐 애송될 것이다. 이게 바로 고전의 힘. <가는 길>이라는 시 한 번 읽어보자.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전문)



  시집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런 설렘과 안타까움과 외로움이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을 거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도 숨겨진 작품은 언제나 있는 법. 이 시 하나를 찾아낸 것으로도 시집을 사 읽는 본전은 뽑았다. 강물은 서로 따라가고 흘러도 연이어 흐르는데 어찌 사람은 그리워도 그립다 말 못하고, 그냥 갈까 망설이면서도 뒤 돌아보고 싶은 마음 못 다스린 채 서산에 해가 질 때까지.
  소월, 하면 대개 여성성, 그리고 슬픔에서 비롯하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사실로도 그런 취향의 시들이 소월을 국민시인으로 만들었지만 <초혼>같은 외침의 시도 있기는 하다. 평안북도의 망해가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마지막 남은 가산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지만 바로 그 해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숱한 조선인을 살해한 장면이 기억에 남았을 소월. 곧바로 귀국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할아버지의 광산 사업을 말아먹고,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다가 역시 깨끗하게 말아먹은 소월에게 어찌 동 시대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없었으랴. 다만 조선인의 한과 설움에서 비롯하는 시들의 막강한 감동의 아우라에 빛을 잃었을 뿐이지. <마음의 눈물>이라는 시 일부.



  내 마음에서 눈물난다.
  뒷산에 푸르른 미류나무 잎들이 알지,
  내 마음에서, 마음에서 눈물나는 줄을,
  나 보고 싶은 사람, 나 한 번 보게 하여 주소,
  우리 작은놈 날 보고 싶어하지.


  건넛집 갓난이도 날 보고 싶을 테지,
  나도 보고 싶다, 너희들이 어떻게 자라는 것을.
  나 하고 싶은 노릇 나 하게 하여 주소.
  못 잊어 그리운 너의 품속이여!
  못 잊고, 못 잊어 그립길래 내가 괴로와하는 조선이여  (부분)


  솔직하게 얘기해서, 이 시가 비록 소월표 서정시가 가슴 속을 푹 질러주는 감동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작은 것들에서 시작하는 조선을 위한 영탄이 결코 가볍지 않다. 이것 역시 시집을 통해 얻은 수확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월 시의 본류는 슬픔의 아름다움. 예컨대 <접동새>의,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구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중략)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산 옮아 가며 슬피 웁니다   (부분)



  같이 시인의 숙모 계희영으로부터 들은 우리의 옛 이야기 속 정서를 품고 있다거나, 제대로 대가리가 굵어지기 전인 중학생 때 썼지만 그리움에 관한 절절한 역설로 만든 절창 <먼 훗날> 같은 것이 더 좋다. 이 시 전문을 읽으면서 너무도 유명한 시인의 시들이라서 잘 써봐야 본전인 독후감을 마친다.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때에 ‘잊었노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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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5
마틴 에이미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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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마틴 에이미스는, 여태까지 영어로 출간된 소설 75선에 포함된 <럭키 짐>을 쓴 킹슬리 에이미스의 친아들로 출판사 열린책들을 통해 <런던 필즈>라는 재미있는 책을 국내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다. 내가 읽어본 바로는 마틴 에이미스는 아버지 킹슬리의 작풍作風을 따라 코믹한 분위기의 촌철살인 작품을 썼으며, 외국의 언어로 쓰인 유머라는 측면에서 작품의 생산연도가 현재와 더 근접한 아들 에이미스의 작품이 ‘훨씬’ 더 독자에게 다가왔다. <런던 필즈>에서 마틴은 개차반 성향의 남자 키쓰 탤런트를 등장시켜 팜 파탈 형 미모의 여인을 무참하게 살해‘하려는’ 장면을 통해 특유의 해학으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블랙 유머 형식으로 표현했다.
  <런던 필즈>보다 5년 먼저 출간한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노트 : 이후 “돈”으로 표기>는 1981년부터 1982년의 런던과 뉴욕을 무대로 뉴욕의 필딩 구드니가 영국의 CF 감독 존 셀프에게 미국 유명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장편 상업영화를 한 편 제작하자고 꼬드겨 사기를 치는 이야기다. 이런 큰 줄기는 1권 중후반에 접어들면 어떤 독자라도 눈치를 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리 언질을 주어도 별 까탈이 없으리라 믿는다. 필딩은 스물다섯 살에 탄탄한 몸매와 건강한 체력까지는 확실하고, 거기다가 눈부신 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며, 책 제목처럼 기어이 자살 노트를 쓰는 주인공 존 셀프는 영국의 CF계에선 나름대로 성공을 했으나 세상에 둘도 없는 속물이면서도 기본적인 심성은 나쁘지 않은 인물로 설정했다. 존 셀프는 책을 출간할 당시의 마틴의 나이인 서른다섯 살. 출연진 가운데 끝까지 눈에 띄는 등장인물은 ‘마틴 에이미스’라고 하는 체스 잘 두는 영국 소설가. 정말이다. 마틴은 마치 미국의 영화감독 히치콕처럼 자신이 쓴 책의 한 귀퉁이에 슬쩍 등장해 참견까지 한다.
  아아, 이 말 먼저 하자. 마틴 에이미스의 <돈>은 당시 언론이 뽑은 세계 100대 소설책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그러니 아버지 에이미스는 영문소설 75선, 아들은 세계 100대 소설.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덥석 미끼를 물었다가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기겁을 하고 책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건 주인공 존 셀프의 행적과 입담 때문이다. 사기꾼 필딩으로부터 제의가 오기 전까지 완전한 영국 잡놈인 존의 일상은 말 그대로 ‘무위의 하루’로 책의 초반에 쓰인 것을 그대로 인용하면, 아침부터 술 마시고, 밥 먹고, 면도하고, 자위하고, 술 마시고, 밥 먹고, 자위하고(이거 많이 하면 피난다는데 걱정이 될 정도로), 잇몸이 퉁퉁 부은 채 TV보고, 술 마시고, “작고 나긋나긋하고 잘 튕기고 몸이 유연하고 침대에서 영리하지만 남자들의 공격과 성추행, 강간을 두려워”하는 영국 소설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국가대표 걸레인 애인 셀리나 스트리트와 액체교환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일이다. 사기꾼의 낚시에 걸린지도 모르고 뉴욕에 가도 관심의 초점은 영화보다 술과 패스트푸드와 포르노와 여자에 집중되어 있는 말종이다. 그러니 존이 자신의 행적을 묘사하기 위해 점잖은 분들이 읽기엔 과하게 지저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과 단어가 자주 출몰하니 미리 주의를 기울이시라는 말씀. 내 경우엔 뭐 이왕 알 거 다 아는 처지라서 그런지 그냥 읽는 재미가 넘쳐흘렀다.
  그래도 CF 감독이고, 알렉 루엘린이라는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절친에게 돈도 활수하게 꾸어주고 그의 아내와 계단에서 관계도 맺는 ‘영국’ 인간이, 나이 서른다섯에 이를 때까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도 한 번 읽어보지 않았으며, <오셀로>에서 데스데모나가 카시오와 정말로 밀통을 해서 오셀로에게 죽임을 당한 줄 안다. 물론 알렉 루엘린이라는 작자도 역시 존의 애인인 셀리나와 여러번 관계를 맺는 등,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책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 건 남편이 하필이면 영국의 국가대표 걸레 셀리나와 바람을 피운 미국여자 마티나 트웨인과 위에서 얘기한 마틴 에이미스, 그리고 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스트립 바 “세익스피어”에서 잡역부이자 경비원 일을 하는 늙은 뚱보 빈스 정도. 나머지는 전부, 한 명도 빼지 않고 다 속물들 themselves다.
  마틴 에이미스의 의도는 현대를 지배하는 20세기 배금주의 문명을 될 수 있는 대로 비트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당연히 이런 흐름 속에서도 피해를 입는 속물에게 독자는 가여움을 느끼고, 피해의 당사자인 존 역시 간혹 “이제 그만 젊어야겠다. 왜냐고? 죽을 거 같으니까. 젊었다는 사실 때문에 죽을 것만 같다.”고 철학적인 문장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실 그렇다. 아직도 돈이 없이 사는 삶이란 상당히 괴롭다. 물론 돈이 많다고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괴로운 건 아니지만. 현대인의 거의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돈을 좇아, 돈을 위해, 돈에 의해 몸을 맡기고 있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돈 속에서 방향을 잃고 미로가 되는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 얻은 크고 튼튼한 애인,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내게 많은 돈이 생기면 분명 그녀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 그러나 지금은 내게 오직 한 명인 그녀를 신도림 트랜스퍼 계단에 앉아 모자를 벗은 채 기다리는데 한 곱게 생긴 중년여인이 모자 속에 천 원짜리 지폐를 떨어뜨려 넣어주며 상큼한 미소를 보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 하지 말고 한 번 해볼까? 근데 내가 생긴 게 도무지 없어 보이지 않아서 성공할 거 같지는 않네.



  * 이 책의 주인공 존 셀프를 읽는 내내 존 케네디 툴의 명품 희극 <바보들의 결탁>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 라일리를 떠올렸다. 이그네이셔스한테 돈이 많다면 딱 존 셀프의 모습일 거 같아서. 어쨌든 이그네이셔스도, 존도 슬픈 희극의 주인공들이다. 아니면 희극의 슬픈 주인공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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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커스의 밤
앤절라 카터 지음, 조현준 옮김 / 창비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이 여사님 책 가운데 읽어본 건 딱 하나, <피로 물든 방>. 이것 읽을 때 제법 놀랐다. 말 그대로 고딕 소설. 열일곱 살 먹은 처녀애가 돈 하나 보고 나이 많은 남작님한테 시집 가 첫날밤을 치룬 다음 서방님이 출장을 가면서 금색 열쇠를 넘겨받긴 했는데, 이 열쇠를 돌려야 열리는 문을 여는 순간 넌 끔찍한 일을 당할 줄 알아라, 라는 경고를 받는 소설. 딱 그거다.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
  <써커스의 밤>에도 고딕식 등장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19세기 후반에 키가 190 센티미터에 육박하는(맨발로 서서 188cm) 장신과 건장한 체격을 지닌 영국 여인. 지금 시절로 얘기하면 2미터가 넘는 여자를 생각하면 된다. 거기다가, 놀랍게도 날갯죽지에 정말 날개가 돋았다. 심지어 비행까지 가능하다. 이름하여 헬렌 페버스. 직업은 곡예사다. 보통 고공 곡예를 하는 사람들은 키가 작아야 유리해서 당시엔 여자는 150미만, 남자는 160 센티미터 정도의 사람들이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었으나 페버스는 무려 190 센티미터. 거기다가 초특급 대우를 받는지라 주로 묶는 숙소는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며, 주요 사교 대상 역시 왕가와 귀족, 부르주아들. 별명은 곡예줄 위의 헬레네, 런던의 비너스 등.
  헬레네는 그리스의 왕 틴다레오스의 아내 레다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정을 통해 낳은 알에서 껍데기를 까고 나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알에서 태어났으니 헬렌 페버스의 날갯죽지에 날개가 돋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닐 터. 여기서 드는 의문 두 가지. 아시다시피 조류의 교미시간은 길어야 2초. 근데 신 중의 신 제우스가 겨우 2초 동안 레다와 교접을 하려고 백조로 변신했을까? 게다가 조류 수컷은 돌출된 생식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생식강 비슷한 구멍이 있어서 통로와 통로를 맞붙인 상태에서 사정을 해 암컷의 체내에 흘려보낸다. (그래서 병아리 감별사가 유망직종인 것이기도 하고.) 제우스가 변신하기로 선택한 동물이 하필이면생식기도 없(는 것처럼 작)고 지속시간도 겨우 2초에 불과한 백조였다고? 흠. 의심스럽다. 두 번째는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김알지를 비롯해 19세기 헬렌 페버스 등에게 아홉 달 여 동안 태반에서 영양을 흡수해온 통로의 말단, 배꼽이 있었을까? 첫 번째 의문은 책을 다 읽어도 해결이 나지 않지만 두 번째 의문은 풀린다. 근데 그것을 확인하려면 500쪽이 넘는 책을 거의 다 읽어야 한다. 확인해보시라.
  20세기 형 고딕소설 작가인 카터는 처음부터 우리의 날개 달린 비너스 헬렌 페버스에게 평탄한 인생을 허락하지 않았다. 런던을 따라 흐르는 템스 강의 북단 선착장 ‘와핑’에서 누군가가 세탁 바구니를 가져다 놓고 뺑소니를 쳤는데, ‘리지’라는 이름의 여인이 바구니를 열어보니 깨진 알 껍질이 어지러이 널린 가운데 분홍색의 갓 낳은 여자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때마침 리지의 신세 또한 어렵게 낳은 아이를 잃은 상태라 자기가 데려다 키우게 된 사연이 있었다. 처음엔 헨렌의 어린 날갯죽지엔 그냥 솜털 같이 생긴 것이 눈에 뜨일 정도로 소복하게 나 있었던 수준이었으나 점점 자람에 따라 확실하게 날개의 모습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냥 보통의 고딕이겠으나, 의붓엄마가 된 리지의 직장으로 말할 거 같으면 “넬슨의 예술원”이란 곳인데, 눈 한 쪽을 선원이 휘두른 깨진 유리컵에 퐁당 빠뜨려 외눈이 된 창녀를 사람들이 트라팔가 해전의 애꾸눈 영웅 넬슨을 칭하는 ‘제독’이라 불렀고, 이 제독이 돈도 벌고 나이도 들어 창녀 여럿을 두고 사업장을 벌여 자신을 위해 일하는 창녀들에게 관대한 대우를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리지는 처음엔 몸을 파는 직업에 종사하다가 페버스를 얻고 아기가 어린이로 자랐을 즈음부터는 부엌데기로 전직을 했다고 한다. 이때 이미 날개가 돋은 페버스는 넬슨의 예술원에 설치된 벽감壁龕에서 나신 비슷한 차림으로 날개를 노출시켜 마치 큐피드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이성적이고 합당한 성격을 가진 제독은 죽을 때까지 결코 페버스에게 창녀의 직업을 주지 않았지만, 유언장 없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숟가락 놓는 바람에 예술원은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하여 예술원에서 쫓겨나 거처를 ‘배터씨’라는 동네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곤궁한 처지를 당하게 되자 육체의 쾌락이 대단한 것임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인 “슈렉의 집”으로 마담 슈렉을 찾아간다.
  슈렉의 집이란 애초부터 영혼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한, 그리고 고딕 소설에 더 이상 맞춤한 곳이 없을 장소로, 헬렌 페버스는 네눈박이 올드 패니, 잠자는 미녀, 키가 90cm가 채 안 되는 위트셔 패니, 둘이 갈라져 한 쌍인, 다시 말해 반반씩이지만 각각은 아무것도 아닌 앨버트와 앨버티나, 거미줄이라 불린 여인, 입이 없는 남자 하인 뚜쌩 등과 함께 지내며 일종의 활인화 숍의 멤버가 된다. 이후 그 집에서 날개를 펼쳐 달아나 지금은 커니 대령이라 칭하는 서커스 단장의 팀에 합류해 명성을 떨치는 곡예줄 위의 헬레네로 활약하는 중이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날 수 있어? 진짜 날개가 달린 사람이 있나? 하는 궁금증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들었고, 이런 호기심마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나라, 미국의 캘리포니아 태생이며 뉴욕의 한 신문사에 기사를 팔아 생활하는 프리랜서 기자 잭 월써가 헬렌 페버스를 인터뷰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하고, 잭 월써 역시 페버스와 함께 서커스단의 어릿광대로 위장취업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날개달린 페버스와 기자 잭 월써, 그리고 도저히 전직 창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학식과 언변을 지닌 리지가 런던, 쌍뜨뻬쩨르부르그, 씨베리아를 관통하며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 가는데, 이거, 재미있다. 문학적 표현인 날개달린 거구의 여인이 런던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베리아를 거치면서 자신의 것을 차례대로 상실하는 것은 틀림없이 작가가 주장하는 무엇인가를 은유할 터이며,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뉴욕의 청년이 바이칼 호 북부 지역에서 몽고계 아시아 무속인과 깊숙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틀림없는 은유일 터. 그걸 밝히는 것은 독자들 개인의 몫이리라.
  이 책을 읽고 앤절라 카터의 다른 책을 한 권 보관함에 담았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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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3-02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중고로 사들였는데
당최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ㅠㅠ

찾아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0-03-02 11:2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매냐 님은 ‘기억‘이 문젭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