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커스의 밤
앤절라 카터 지음, 조현준 옮김 / 창비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이 여사님 책 가운데 읽어본 건 딱 하나, <피로 물든 방>. 이것 읽을 때 제법 놀랐다. 말 그대로 고딕 소설. 열일곱 살 먹은 처녀애가 돈 하나 보고 나이 많은 남작님한테 시집 가 첫날밤을 치룬 다음 서방님이 출장을 가면서 금색 열쇠를 넘겨받긴 했는데, 이 열쇠를 돌려야 열리는 문을 여는 순간 넌 끔찍한 일을 당할 줄 알아라, 라는 경고를 받는 소설. 딱 그거다.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
  <써커스의 밤>에도 고딕식 등장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19세기 후반에 키가 190 센티미터에 육박하는(맨발로 서서 188cm) 장신과 건장한 체격을 지닌 영국 여인. 지금 시절로 얘기하면 2미터가 넘는 여자를 생각하면 된다. 거기다가, 놀랍게도 날갯죽지에 정말 날개가 돋았다. 심지어 비행까지 가능하다. 이름하여 헬렌 페버스. 직업은 곡예사다. 보통 고공 곡예를 하는 사람들은 키가 작아야 유리해서 당시엔 여자는 150미만, 남자는 160 센티미터 정도의 사람들이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었으나 페버스는 무려 190 센티미터. 거기다가 초특급 대우를 받는지라 주로 묶는 숙소는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며, 주요 사교 대상 역시 왕가와 귀족, 부르주아들. 별명은 곡예줄 위의 헬레네, 런던의 비너스 등.
  헬레네는 그리스의 왕 틴다레오스의 아내 레다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정을 통해 낳은 알에서 껍데기를 까고 나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알에서 태어났으니 헬렌 페버스의 날갯죽지에 날개가 돋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닐 터. 여기서 드는 의문 두 가지. 아시다시피 조류의 교미시간은 길어야 2초. 근데 신 중의 신 제우스가 겨우 2초 동안 레다와 교접을 하려고 백조로 변신했을까? 게다가 조류 수컷은 돌출된 생식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생식강 비슷한 구멍이 있어서 통로와 통로를 맞붙인 상태에서 사정을 해 암컷의 체내에 흘려보낸다. (그래서 병아리 감별사가 유망직종인 것이기도 하고.) 제우스가 변신하기로 선택한 동물이 하필이면생식기도 없(는 것처럼 작)고 지속시간도 겨우 2초에 불과한 백조였다고? 흠. 의심스럽다. 두 번째는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김알지를 비롯해 19세기 헬렌 페버스 등에게 아홉 달 여 동안 태반에서 영양을 흡수해온 통로의 말단, 배꼽이 있었을까? 첫 번째 의문은 책을 다 읽어도 해결이 나지 않지만 두 번째 의문은 풀린다. 근데 그것을 확인하려면 500쪽이 넘는 책을 거의 다 읽어야 한다. 확인해보시라.
  20세기 형 고딕소설 작가인 카터는 처음부터 우리의 날개 달린 비너스 헬렌 페버스에게 평탄한 인생을 허락하지 않았다. 런던을 따라 흐르는 템스 강의 북단 선착장 ‘와핑’에서 누군가가 세탁 바구니를 가져다 놓고 뺑소니를 쳤는데, ‘리지’라는 이름의 여인이 바구니를 열어보니 깨진 알 껍질이 어지러이 널린 가운데 분홍색의 갓 낳은 여자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때마침 리지의 신세 또한 어렵게 낳은 아이를 잃은 상태라 자기가 데려다 키우게 된 사연이 있었다. 처음엔 헨렌의 어린 날갯죽지엔 그냥 솜털 같이 생긴 것이 눈에 뜨일 정도로 소복하게 나 있었던 수준이었으나 점점 자람에 따라 확실하게 날개의 모습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냥 보통의 고딕이겠으나, 의붓엄마가 된 리지의 직장으로 말할 거 같으면 “넬슨의 예술원”이란 곳인데, 눈 한 쪽을 선원이 휘두른 깨진 유리컵에 퐁당 빠뜨려 외눈이 된 창녀를 사람들이 트라팔가 해전의 애꾸눈 영웅 넬슨을 칭하는 ‘제독’이라 불렀고, 이 제독이 돈도 벌고 나이도 들어 창녀 여럿을 두고 사업장을 벌여 자신을 위해 일하는 창녀들에게 관대한 대우를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리지는 처음엔 몸을 파는 직업에 종사하다가 페버스를 얻고 아기가 어린이로 자랐을 즈음부터는 부엌데기로 전직을 했다고 한다. 이때 이미 날개가 돋은 페버스는 넬슨의 예술원에 설치된 벽감壁龕에서 나신 비슷한 차림으로 날개를 노출시켜 마치 큐피드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이성적이고 합당한 성격을 가진 제독은 죽을 때까지 결코 페버스에게 창녀의 직업을 주지 않았지만, 유언장 없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숟가락 놓는 바람에 예술원은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하여 예술원에서 쫓겨나 거처를 ‘배터씨’라는 동네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곤궁한 처지를 당하게 되자 육체의 쾌락이 대단한 것임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인 “슈렉의 집”으로 마담 슈렉을 찾아간다.
  슈렉의 집이란 애초부터 영혼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한, 그리고 고딕 소설에 더 이상 맞춤한 곳이 없을 장소로, 헬렌 페버스는 네눈박이 올드 패니, 잠자는 미녀, 키가 90cm가 채 안 되는 위트셔 패니, 둘이 갈라져 한 쌍인, 다시 말해 반반씩이지만 각각은 아무것도 아닌 앨버트와 앨버티나, 거미줄이라 불린 여인, 입이 없는 남자 하인 뚜쌩 등과 함께 지내며 일종의 활인화 숍의 멤버가 된다. 이후 그 집에서 날개를 펼쳐 달아나 지금은 커니 대령이라 칭하는 서커스 단장의 팀에 합류해 명성을 떨치는 곡예줄 위의 헬레네로 활약하는 중이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날 수 있어? 진짜 날개가 달린 사람이 있나? 하는 궁금증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들었고, 이런 호기심마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나라, 미국의 캘리포니아 태생이며 뉴욕의 한 신문사에 기사를 팔아 생활하는 프리랜서 기자 잭 월써가 헬렌 페버스를 인터뷰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하고, 잭 월써 역시 페버스와 함께 서커스단의 어릿광대로 위장취업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날개달린 페버스와 기자 잭 월써, 그리고 도저히 전직 창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학식과 언변을 지닌 리지가 런던, 쌍뜨뻬쩨르부르그, 씨베리아를 관통하며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 가는데, 이거, 재미있다. 문학적 표현인 날개달린 거구의 여인이 런던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베리아를 거치면서 자신의 것을 차례대로 상실하는 것은 틀림없이 작가가 주장하는 무엇인가를 은유할 터이며,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뉴욕의 청년이 바이칼 호 북부 지역에서 몽고계 아시아 무속인과 깊숙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틀림없는 은유일 터. 그걸 밝히는 것은 독자들 개인의 몫이리라.
  이 책을 읽고 앤절라 카터의 다른 책을 한 권 보관함에 담았지 뭐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0-03-02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중고로 사들였는데
당최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ㅠㅠ

찾아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0-03-02 11:2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매냐 님은 ‘기억‘이 문젭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