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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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이이가 쓴 <저항의 멜랑콜리>를 ‘대단히’ 흥미롭게 읽어서 애초부터 올해에 꼭 읽겠다고 꼽았던 책. 그러나 쉽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 지레짐작 했던 책. 무엇보다 먼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사탄탱고>의 문장은 <저항의 멜랑콜리>에 비하여 많이 짧다. 원래 이이의 글이 대단히 긴 편이라고 한다. 경애하는 서재 동무님께 들은 바, 헝가리어 자체가 쉼표 한 번만 찍으면 글을 무한히 길게 쓸 수 있단다. 그래 이 책도 원래는 길고 긴 문장을 역자의 의도에 의하여 몇 개의 우리말로 자른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초기작이라 본격적으로 문장이 길어지기 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을 감상하는 데는 그것의 길고 짧음이 그리 큰 문제인 것 같지가 않다.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이이의 다른 책 <마지막 늑대>도 포함하여,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주제를 꾸려나가기 위해 가장 적절한 문장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독자가 접하는 것과 비교해, ‘미친 듯이’ 길고 긴 문장이라 하더라도 만연체 특유의 늘어지는 감정은커녕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의 신상체腎上體, 즉 부신의 수질髓質에서 아드레날린을 급격하게 분비하게 만든다. 쉬운 말로하면, 이야기에 빠져버린다는 뜻. 그러나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말 번역을 통하기는 했지만, 직접 읽어봐야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작년 연말, 2019년에 읽은 가장 좋은 책으로 <저항의 멜랑콜리>를 선정하면서 “카프카는 특정한 한 사람, 예를 들면 측량 기사나 K, 딱 한 명만 골라 후벼 파는 반면 크러스호르커이는 이 책에서 시골에 있는 수상한 소도시의 그나마 다양한 사람을(아니, 어쩌면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만 다를 뿐”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금 전 <사탄탱고>를 다 읽고 역자의 해설을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초기 소설은 카프카 적이다. 그러나 카프카가 단독자單獨者를 그린다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군상群像을 등장시킨다.” 이런 해설을 읽으면 나 같은 아마추어, 기껏해야 딜레탕트들은 기분 좋다. 역자가 나처럼 카프카와 비교하는 것만 해도 그런데, 작가가 집중하는 대상까지 내가 생각했던 점과 같다고 하니 더욱 그렇지 않겠나. 우쭐대는 모양이 밥맛없더라도 좀 이해해주시라.
  구성도 <저항의....>와 비슷한 점이 있다. <저항의....>는 아주 추운 날,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를 전시하겠다는 서커스가 들어옴으로 해서 일이 벌어지는 반면, <사탄탱고>는 이제 가을비의 첫 번째 방울이 떨어질 무렵 저 호흐마이스 벌판에서 종소리가 들리던 날 밤, 죽었다고 알려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다 망해가는 집단 농장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농장 구성원들이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써 놓으면 전혀 감흥을 느낄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성당이 4km 떨어져 있지만 종도 없고 종탑마저 지난 전쟁 때 완전히 무너져버려 종이 있다고 해도 여기까지 들릴 리 없는 거리. 농장에서 가장 예쁜 슈미트 부인의 침상에서 새벽에 깨어 불길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절름발이 후터키의 불안과 한 순간에 환영처럼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아) 검게 보이는 아카시아 가지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듯한 혼돈의 감정을 독후감에서는 도무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 거기다가 종소리가 끝난 다음의 완벽한 고요. 적막은 더 불안과 불운의 영감에 휩싸이게 하고. 슈미트 부인 역시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문고리를 흔들고 있지만 정작 고함도 나오지 않는 고통스런 악몽을 꾼다. 그래 초장부터 소설은 제목처럼 뭔가 악마주의적인 분위기 속에 불길한 죽음의 기운이 넘실댄다.
  이같이 소설 첫 머리가 강렬해 독자는 책이 끝날 때까지 작품의 어느 곳, 어느 장면도 이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면 단박에 기억이 날 정도로 뚜렷하게 기억하게 되는데, 농장의 모든 일꾼들이 마을 북쪽의 농장으로 가 8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하고 번 돈을 남편과 이웃 크라네르 둘이 몽땅 챙겨 갑자기 들이닥친다. 둘이 이 돈을 반씩 챙겨 마을을 떠날 결심을 했으나, 불륜의 밤을 지낸 후터키가 창밖으로 튀었다가 새벽 불빛을 보고 방문한다는 듯이 나타나 결국 셋이 나누기로 한다. 이때 역시 불빛을 보고 또 다른 이웃 헐리치 부인이 놀랄만한 소식을 가지고 방문하니,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마을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 전직 기술자인 후터키는 이리미아시가 이곳에 오기만 하면 생산과 농사가 놀라울 만큼 발전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해 마음을 바꾼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리마시아는 위대한 마법사 비슷한 인물로 심지어 쇠똥으로도 성을 지을 수 있을만한 추진력과 지식과 연줄이 있는 영웅이기 때문에. 크라네르 부인도 등장해 아리미아시가 앞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뭔가를 이룰 것이라 첨언을 하자,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새벽 가을비를 맞으며 슈미트 부인이 정말로 그들이 농장으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비옷과 두툼한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고, 후터키와 슈미트 역시 “짜증내지 말라고, 보란 듯이 잘 살 수 있게 될 테니까! 흥청망청 마음껏 즐기며 살 거야!” 희망가를 노래하며 메시아를 맞으려 빗속을 행진하는 것으로 1부의 첫 번째 장章이 끝난다.
  책은 모두 2부, 열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 2, 3, 4, 5, 6장으로 되어 있는 반면, 2부는 6, 5, 4, 3, 2, 1장의 순서다. 그리하여 이 장들이 만들어내는 건 한 사이클cycle. 즉 원이다. 원의 특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돌고 도는 것. 이게 어떤 뜻인지는 밝힐 수 없다. 진짜로 책을 읽을 분을 위하여. <저항의....>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끈질기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력이 조금 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끈질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앉아서 한 번에 30쪽 가량을 읽을 수 있는 모든 분께 권한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이이의 이름을 기억하시라. 출판사 알마는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어 <저 아래 서왕모>를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으며 그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출간할 계획이라고 알라딘에 광고를 했다. 이제 <....서왕모>를 기다리고 있는데 굳이 그것 말고도, 그의 작품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번역 출간해주었으면 좋겠다. <저항의 멜랑콜리>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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