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5
마틴 에이미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작가 마틴 에이미스는, 여태까지 영어로 출간된 소설 75선에 포함된 <럭키 짐>을 쓴 킹슬리 에이미스의 친아들로 출판사 열린책들을 통해 <런던 필즈>라는 재미있는 책을 국내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다. 내가 읽어본 바로는 마틴 에이미스는 아버지 킹슬리의 작풍作風을 따라 코믹한 분위기의 촌철살인 작품을 썼으며, 외국의 언어로 쓰인 유머라는 측면에서 작품의 생산연도가 현재와 더 근접한 아들 에이미스의 작품이 ‘훨씬’ 더 독자에게 다가왔다. <런던 필즈>에서 마틴은 개차반 성향의 남자 키쓰 탤런트를 등장시켜 팜 파탈 형 미모의 여인을 무참하게 살해‘하려는’ 장면을 통해 특유의 해학으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블랙 유머 형식으로 표현했다.
  <런던 필즈>보다 5년 먼저 출간한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노트 : 이후 “돈”으로 표기>는 1981년부터 1982년의 런던과 뉴욕을 무대로 뉴욕의 필딩 구드니가 영국의 CF 감독 존 셀프에게 미국 유명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장편 상업영화를 한 편 제작하자고 꼬드겨 사기를 치는 이야기다. 이런 큰 줄기는 1권 중후반에 접어들면 어떤 독자라도 눈치를 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리 언질을 주어도 별 까탈이 없으리라 믿는다. 필딩은 스물다섯 살에 탄탄한 몸매와 건강한 체력까지는 확실하고, 거기다가 눈부신 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며, 책 제목처럼 기어이 자살 노트를 쓰는 주인공 존 셀프는 영국의 CF계에선 나름대로 성공을 했으나 세상에 둘도 없는 속물이면서도 기본적인 심성은 나쁘지 않은 인물로 설정했다. 존 셀프는 책을 출간할 당시의 마틴의 나이인 서른다섯 살. 출연진 가운데 끝까지 눈에 띄는 등장인물은 ‘마틴 에이미스’라고 하는 체스 잘 두는 영국 소설가. 정말이다. 마틴은 마치 미국의 영화감독 히치콕처럼 자신이 쓴 책의 한 귀퉁이에 슬쩍 등장해 참견까지 한다.
  아아, 이 말 먼저 하자. 마틴 에이미스의 <돈>은 당시 언론이 뽑은 세계 100대 소설책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그러니 아버지 에이미스는 영문소설 75선, 아들은 세계 100대 소설.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덥석 미끼를 물었다가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기겁을 하고 책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건 주인공 존 셀프의 행적과 입담 때문이다. 사기꾼 필딩으로부터 제의가 오기 전까지 완전한 영국 잡놈인 존의 일상은 말 그대로 ‘무위의 하루’로 책의 초반에 쓰인 것을 그대로 인용하면, 아침부터 술 마시고, 밥 먹고, 면도하고, 자위하고, 술 마시고, 밥 먹고, 자위하고(이거 많이 하면 피난다는데 걱정이 될 정도로), 잇몸이 퉁퉁 부은 채 TV보고, 술 마시고, “작고 나긋나긋하고 잘 튕기고 몸이 유연하고 침대에서 영리하지만 남자들의 공격과 성추행, 강간을 두려워”하는 영국 소설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국가대표 걸레인 애인 셀리나 스트리트와 액체교환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일이다. 사기꾼의 낚시에 걸린지도 모르고 뉴욕에 가도 관심의 초점은 영화보다 술과 패스트푸드와 포르노와 여자에 집중되어 있는 말종이다. 그러니 존이 자신의 행적을 묘사하기 위해 점잖은 분들이 읽기엔 과하게 지저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과 단어가 자주 출몰하니 미리 주의를 기울이시라는 말씀. 내 경우엔 뭐 이왕 알 거 다 아는 처지라서 그런지 그냥 읽는 재미가 넘쳐흘렀다.
  그래도 CF 감독이고, 알렉 루엘린이라는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절친에게 돈도 활수하게 꾸어주고 그의 아내와 계단에서 관계도 맺는 ‘영국’ 인간이, 나이 서른다섯에 이를 때까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도 한 번 읽어보지 않았으며, <오셀로>에서 데스데모나가 카시오와 정말로 밀통을 해서 오셀로에게 죽임을 당한 줄 안다. 물론 알렉 루엘린이라는 작자도 역시 존의 애인인 셀리나와 여러번 관계를 맺는 등,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책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 건 남편이 하필이면 영국의 국가대표 걸레 셀리나와 바람을 피운 미국여자 마티나 트웨인과 위에서 얘기한 마틴 에이미스, 그리고 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스트립 바 “세익스피어”에서 잡역부이자 경비원 일을 하는 늙은 뚱보 빈스 정도. 나머지는 전부, 한 명도 빼지 않고 다 속물들 themselves다.
  마틴 에이미스의 의도는 현대를 지배하는 20세기 배금주의 문명을 될 수 있는 대로 비트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당연히 이런 흐름 속에서도 피해를 입는 속물에게 독자는 가여움을 느끼고, 피해의 당사자인 존 역시 간혹 “이제 그만 젊어야겠다. 왜냐고? 죽을 거 같으니까. 젊었다는 사실 때문에 죽을 것만 같다.”고 철학적인 문장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실 그렇다. 아직도 돈이 없이 사는 삶이란 상당히 괴롭다. 물론 돈이 많다고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괴로운 건 아니지만. 현대인의 거의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돈을 좇아, 돈을 위해, 돈에 의해 몸을 맡기고 있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돈 속에서 방향을 잃고 미로가 되는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 얻은 크고 튼튼한 애인,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내게 많은 돈이 생기면 분명 그녀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 그러나 지금은 내게 오직 한 명인 그녀를 신도림 트랜스퍼 계단에 앉아 모자를 벗은 채 기다리는데 한 곱게 생긴 중년여인이 모자 속에 천 원짜리 지폐를 떨어뜨려 넣어주며 상큼한 미소를 보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 하지 말고 한 번 해볼까? 근데 내가 생긴 게 도무지 없어 보이지 않아서 성공할 거 같지는 않네.



  * 이 책의 주인공 존 셀프를 읽는 내내 존 케네디 툴의 명품 희극 <바보들의 결탁>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 라일리를 떠올렸다. 이그네이셔스한테 돈이 많다면 딱 존 셀프의 모습일 거 같아서. 어쨌든 이그네이셔스도, 존도 슬픈 희극의 주인공들이다. 아니면 희극의 슬픈 주인공이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