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의 죽음
피터 애크로이드 지음, 한기찬 옮김 / 프레스21 / 1998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한 애크로이드의 소설은 다 읽은 셈이다. 차례대로 <플라톤의 반란: The Plato Papers>, <혹스무어>, <디 박사의 집> 그리고 <어느 시인의 죽음: Chatterton>. 제목을 왜 <어느 시인의 죽음>으로 뽑았을까. 너무 뻔한 제목 아닌가 싶다. 그냥 원래대로 <채터턴>이라 해도 괜찮았을 거 같은데. <혹스무어>의 독후감에서도 쓴 적이 있고, 이 책을 통해서 늙은 작가 해리엇 스크로프의 입을 통해 한 번 더 이야기하지만 애크로이드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가져와 그것의 변형을 통해 실제 역사의 사실에 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즉 역사적 “사실이란 건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이번에 애크로이드가 만들어낸 인물은 18세기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죽은 빗나간 천재소년 토머스 채터턴(1752~70).

 

토머스 채터튼의 초상


 역사적 사실로 말하자면, 열대여섯 살 때 수도승 ‘롤리’의 이름으로 속창을 짓는 등 정통 중세 문체를 만드는데 천재를 발휘했으며 성공을 위해 17세에 런던으로 옮겼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해 가난과 실패에 지쳐 1770년 8월 24일, 브룩가街 다락방에서 비소를 먹고 음독자살해 슈레인 구빈원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하는 실제인물이다. 애크로이드의 상상은 채터턴이 훌륭하고도 자유롭게 중세 문체를 사용하여 당대 시인들의 작풍을 그대로 모방해, 결과물을 어린 채터턴이 쓴 것이 아니고 수도승 롤리뿐만 아니라 유명 시인, 심지어 윌리엄 블레이크의 미발표 시라고 주장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을 수준이었으며, 그의 위조에 관한 일가견은 샘 조인슨이라는 출판업자를 만나 ‘존 채터턴’이란 인물을 위장 자살시킨 다음 본격화되어 이후 30년 이상 위장작가로 풍요롭게 살았을 수도 있다는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그리하여 사실 영국이 자랑하는 중세 시인들의 작품의 절반 정도는 당대의 시인이 아니라 존 채터턴이 쓴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 <혹스무어>, <디 박사의 집>에 이어 이번에도 한 역사적 사실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허구의 수렁으로 함몰시켜버리고 말았다.
  영국의 화가 헨리 월리스는 지난 세기의 한 천재가 불운하게 죽은 것을 모티브로 해서 젊고 총기가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자살을 시도하던 젊은 시인 조지 메레디스를 모델로 고용해 창문이 열린 다락방에서 자살에 이른 체터턴을 그린 <채터턴>을 1856년에 완성한다. 작품 속에서도 시인이자 주인공인 찰스 위치우드는 아들 에드워드와 함께 테이트 미술관을 방문해 이 작품을 감상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헨리 월리스, <채터튼> 1856


  이 그림에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애크로이드는 책 속에서 다른 초상화 한 점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1802년 조지 스테드라는 화가의 그림으로 중년의 남자가 네 권의 책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댄 모습이다. 주인공 찰스 위치우드는 집의 가장이기는 하지만 아내가 화랑의 비서 일을 하며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룸펜 인텔리겐치아다. 그러나 자신도 그렇고, 자신보다 아내가 더 그런데, 스스로 뮤즈의 찬란한 입김을 받은 시인으로 지금 장시를 쓰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큰 영광이 쏟아질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몽상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신이 참 가난하다는 걸 새삼스레 자각해 오래된 책 <소멸된 18세기 플루트 연주법>을 팔기 위해 리노 골동품 점에 갔다가, 너무 헐값을 부르는데다 저쪽에서 자신을 빤하게 바라보고 있던 중년남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바람에 단박에 남자의 초상화와 자신의 책 두 권을 교환해 집에 가지고 오게 된다. 이 때 휠체어의 여자 주인이 리노 씨에게 한 말은 이랬다.
  “이 그림엔 죽음이 서려 있다고요!”
  불운을 예고하는 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소설작법 3장 1절에 의거하여, 그림을 집에 가지고 온 이후 찰스는 만성 어지럼증과 편두통에 시달려 마음씨 좋은 아내 비비안의 걱정은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 이 와중에 찰스는 친구이자 자신은 모르지만 아내 비비안을 숭배하는 필립 슬랙과 함께 그림의 때를 살살 벗겨내니 네 권의 책은 각기 <국립식물원>, <복수>, <엘라>, <발라>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터턴의 저서들이다. 이 책들의 제목에 의거하여 혹시 채터턴이 50세까지 살아 있어서 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아닐까, 하고 상상을 하게 되고, 이의 확인을 위해 리노 골동품상에 그림을 판 조인슨 씨(저 위의 출판업자와 당연히 관련이 있는 후손)를 찾아 브리스틀로 향해 팻이라는 노인으로부터 관련 자료를 넘겨받는데, 저런, 자신의 짐작 또는 상상력이 맞아 떨어진 거였다. 18세를 석 달 남기고 죽은, 18세기는 물론이거니와 전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가짜작품 창작의 달인이 알고 보니 50세가 넘어서까지 살아 있었음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심지어 여태까지 토비아스 스몰렛, 윌리엄 블레이크 등의 시로 알고 있던 것들 가운데 숱한 작품들이 사실은 채터턴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 아아, 진정하시라.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그랬을 수도 있다는 애크로이드 특유의 역사 담론 뒤틀기니까.
  여기에 조지 메레디스가 채터턴의 대역으로 그의 시체 모델로 그림을 그리게 된 이야기가 삽화처럼 그려진다. 1856년, 가난 때문에 아내는 도망가고 사는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 채터턴의 아버지가 합창단 지휘자를 했고, 채터턴 역시 각별한 애정이 있었으며 그의 생몰연대가 동판에 적혀 있는 브리스틀의 세인트 메리 레드클리프의 채터턴 유적에 앉아 수은과 비소가 든 독약 병을 입에 가져가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팔을 탁, 쳐서 병을 땅에 떨어뜨리고 사라지는데, 그것이 바로 채터턴의 영혼이라고 해석하기에 이른다.
  이외에 현대 영국의 문학, 미술계에서도 위작과 소설 내용의 복사 같은 일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까지 아울러 말 그대로 3세기에 이르는 담론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뜻은? 기존의 역사적, 기득권을 갖는 해석을 때려 부순다는 의미. 이게 애크로이드 소설문학의 본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 <어느 시인의 죽음>에 만점을 주지는 못한다. 처음부터 흥미진진했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그의 초상화가 새롭게 변하는 중요한 장면이 조금은 황당했기 때문에. 이 책이 지금 절판 상태라 하더라도 언제 다시 복간될지 몰라 어떤 모습인지는 차마 밝혀두지 못하겠다. 그만큼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이 속속 번역 출간했으면 좋겠는데 어째 각 출판사에선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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