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그 형제들 2 - 청년 요셉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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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과 그 형제들》의 두 번째 이야기. 요셉은 어느 새 열일곱 살의 미소년, 그것도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인간의 자녀들 중 가장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했다. 청춘의 아름다움은 우아함이고, 우아함의 본질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중간에 있는 법. 그러나 거친 목축시대의 아름다움이란 창백한 지성이 만들어낸 생각이요 꿈일 뿐 아니었을까. 이 미소년은 열 명이나 되는 형들과 달리 양을 돌보는 목자 일에 매달리는 대신 현명한 가정교사이자 아버지 야곱의 이복형제인 것처럼 보이는 엘리에젤로부터 글 읽기와 쓰기, 주님에 관한 비의秘義 같은 것을 배우기에 이른다. 주님이 모든 식물과 동물을 만든 연후 가장 늦게 사람을 창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요셉은 거침없이 대답한다. 첫째가 어떤 인간도 창조에 동참했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고, 두 번째가 쇠파리조차 나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점을 통해 인간에게 겸손 하라는 뜻이며, 세 번째가 모든 준비를 갖춘 후 손님인 인간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라고. 스승이 하나를 알려주면 아름답고 우아한 외모를 갖춘 요셉은 열을 아는 총명함까지 지니고 있다. 다만 두 번째 이유를 통해 알아야 했을 “인간의 겸손”이 치명적으로 결핍된 채.
  요셉의 총명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숫자, 특히 별자리와 시간에 관한 것에 특출한 명민함을 보인다. 1초와 1분, 1시간, 하루, 일 년을 태양력과 태음력과 관련할 줄 알고, 그리하여 1,460년이라는 긴 시간까지 양력과 음력을 확장하여 이들 사이의 수에 의한 연결을 완벽하게 파악한 상태이며, 가외로 꼭 알아야 할 질병과 이의 치료법, 지구상의 여러 민족에 관한 지식까지 섭렵하는데, 이것들은 훗날 가장 위대한 나라 이집트에 정착해 농경과 치수, 의료에 혁혁한 위력을 발휘할 기본 자질로 작용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 《요셉과 그 형제들 - 청년 요셉》은 요셉의 17세 시절에 벌어졌던 사건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이집트에서의 활약은 아직까지는 그저 짐작일 뿐.
  모두 열두 명의 형제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이자 정실부인의 장남이며 아름다운 외모에 총명한 두뇌를 소유했으나 결코 겸손하지 못했던 요셉. 동복의 아우 벤야민을 제외한 열 명의 이복형제들은 소와 양, 염소를 몰며 황야를 떠돌다가 파종을 하거나 수확을 할 때는 태양 볕에 피부를 태워가며 농사일을 해야 했던 시절, 성스런 테레빈 나무 그늘에 앉아 엘리에젤로부터 글쓰기와 읽기, 그리고 형제들 눈에는 잡담일 뿐인 교훈과 지식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 요셉에게 질투를 느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 여기에 요셉은 또한 형들의 행동거지를 모두 근엄하고 경이로운 정신의 아버지에게 일일이 고해바치는 고자질쟁이임에야 형들이 요셉을 미워해, 처음에는 ‘점토서판을 읽는 자’라는 별명으로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미움을 산 연후에는 ‘꿈꾸는 자’로 불리기에 이른다. 요셉은 또한 힘만 세고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황야의 거친 형제들을 ‘선과 악을 모르는 자들’ 심하게는 ‘개대가리들’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으니 형제들의 요셉에 대한 미움은 어쩔 도리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여기에 아버지 야곱은 대놓고 한 명의 아들을 위해 열 명의 형제를 버릴 수 있을 것처럼 노골적으로 요셉만 총애하고 또 총애해 이미 열 명에 이르는 레아와 첩들이 낳은 아들들의 상실감은 어쩔 수가 없었을 것.
  이미 전에 레아가 낳은 맏이 르우벤은 정처 라헬의 몸종이자 아버지 야곱의 첩인 빌하와 동침한 것이 들통이 나 장자의 자리를 빼앗긴 적이 있고, 둘째와 셋째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고을을 학살, 약탈한 것 때문에 이미 야곱의 눈 밖에 나서 아직 장자의 자리를 비워두어, 열 명에 이르는 거친 형제들은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장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야곱이 요셉만 특별하게 아끼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심지어 요셉 당사자에게도 확실하게 보이는 터라, 요셉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그들 자신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단단한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열 명의 거친 형들도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와는 달리, 요셉 자신을 본인들보다 더 사랑하겠거니 라고 여기면서 스스로의 초년 사주를 망칠 준비를 한다.
  기억해두면 좋다. 열 명의 이복형제들은 얄밉고, 성격 고약하고(오해다.), 안하무인이며, 교만하기 짝이 없는(진실이다.) 요셉이 자신들을 제치고 장자의 자리에 올라, 자신들의 경배를 요구하는 일을 참을 수 없어 한다.
  이 집에 일종의 보물이 있다. 야곱이 결혼한 날 죽을 때까지 사랑한 라헬이 입었던 웨딩드레스, 베일 달린 케토닛 파심. 몇 년 전 요셉이 접신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 야곱은 좋은 선물을 하겠다고 요셉에게 언질을 준 적이 있었는데, 하루는 야곱과 요셉이 장기를 두다가 요셉이 일부러 장기를 져주며 약속했던 선물을 달라고 집요하고, 귀여워 도무지 거절할 수 없게 졸라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가문의 보물, 라헬의 것이었지만 결혼 첫날밤에는 라헬의 언니 레아가 입고 신방에 들었던 케토닛을 받는다. 세상 어려운지 모르고 커 온 요셉은 곧바로 이 옷을 입고 자랑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세겜에서 목자 일을 하고 있던 형들까지 정말로 아버지가 요셉에게 그 옷을 주었는지 확인하러 사흘 길을 달려와 직접 보고난 다음 극심하게 실망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모두 아시다시피, 요셉은 소위 로열 블러드. 아브라함-이사악-야곱에 이은 적장자. 적장자 또는 축복받은 자들은 어떤 통로든지 앞날에 대한 예시를 경험하는데 요셉의 경우에는 꿈으로 현시가 된다. 첫 번째 꾼 꿈은, 양을 돌보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풀밭에 누웠는데 황소만 하고 머리에 뿔이 달린 독수리가 자신을 어금니에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거였다. 이때 요셉은 비명도 지르지 않는데, 들판에 사람이 없어 아무도 비명을 듣지 못해서이고, 숨이 막혀서이며, 무엇보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 않아서, 그만큼 기분이 좋아서 그랬던 거였다. 하늘 끝까지 올라간 독수리는 암피엘 천사의 모습으로 변신해 하늘나라로 진입, 제불(제6 하늘)을 거쳐 일곱 번째 테라스인 아라보트에 도착해 급기야 주님을 배알하기에 이른다. 하느님께서 이르기를;
  “여기 있는 이 자에게 내 손으로 36만5천 번의 은총을 내려 위대한 자, 숭고한 자로 만들겠다. 너에게 열쇠를 맡길 테니 아라보트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일을 네가 알아서 하라. 그렇게 되면 너는 모든 무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가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 요셉은 이 꿈 이야기를 동복동생 벤야민에게만 하고, 현명한 꼬마 벤야민은 요셉으로부터 다른 누구에게도 이 꿈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겠노라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나 그걸로 끝. 열 명의 형들과 자신까지 다 모여 추수를 하던 중 점심 먹고 잠깐 자는 동안 꾼 꿈을 그대로, 그 자리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요셉.
  “형제 열한 명(어린 벤야민 제외)이 추수를 하는데 제가 가운데 있고 열 명의 형들이 저를 중심으로 원을 이루어 둥그렇게 추수를 해 곡식단을 쌓았어요. 일을 마치고 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니까, 제 곡식단은 곧게 서 있고, 형들의 곡식단들이 전부 요셉의 것에 절을 하고 있더라고요.”
  형들, 꼭지가 돌아버렸다. 그러나 차마 한 대 쥐어박지도 못했다. 그랬다 하면 요셉이 또 야곱에게 고자질을 할 것이고 자신들은 더 곤란한 지경으로 떨어질 테니. 반면에 천진한 악동 요셉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추수하는 장소에 들러서 형들한테 격려 좀 해주라고 해 다음 날 당장 타작마당 차일 친 곳에 도착한다. 다들 엄한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쭈볏쭈볏 하던 차에 요셉이 분위기를 잡는답시고 또 어젯밤 꿈꾼 이야기를 한다.
  “하늘에 해와 달과 열 개의 별이 떴는데, 다 내 별에 절을 하더라고요.”
  분위기 눈치 챈 야곱이 요셉을 꾸중한다. 물론 립 서비스. 속으로는 무척 기쁘지만 다른 형제들을 위해 야단치는 시늉을 했다. 그랬더니 열 명의 형제들은 추수를 마치자마자 아버지에게 자기들은 집 안에서 별 볼일 없는 쭉정이들이니 세겜에 가서 양이나 치겠다고 이별을 고해버린다. 나중에 사달이 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야곱은 형제들 간 화해를 시키기 위해서 요셉 혼자 나귀를 타고 세겜에 가서 형들에게 절을 하고 선물도 주고 오라고 명을 내린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환상에 빠져 있는 요셉이 장자 상속권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화려한 예복 케토닛 파심을 입고 범 같은 형들이 무려 열 명 씩이나 있는 세겜으로 행차를 하니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토마스 만은 형제들을 변호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동안 과하게 이복형제들에게 비난이 집중되어 왔다고 하면서 그들의 끝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내와 속으로만 삭여둔 차별, 편애 같은 것에 동정을 보낸다.
  읽으면서 점점 흥미로워진다. 구약성서보다 훨씬 재미있다. 그러나 원시 종교들과 신들에 관한 묘사와 종교에 대한 사색 부분이 길게 이어지는 건 신이 존재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믿는 독자가 전혀 수긍하지 않으며 읽기엔 징글징글하게 장황한 느낌이 든다. 다음번 3책 《요셉과 그 형제들 - 이집트에서의 요셉》은 곧바로 스토리로 접어들어 그나마 다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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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02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약성서보다 훨씬 재미있다니..... 재미없다는 소리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9-02 12:4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역시 독해력은 잠자냥님 당할 사람이 읎어요. ㅋㅋㅋㅋ
 
황금가지 동서문화사 월드북 39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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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가지>. 프레이저 필생의 역작. 작업이 워낙 방대하여 작가 스스로 내용을 요약한 축약본. 축약본이라도 나로 하여금 닷새에 걸쳐 정독하게 만든 흥미진진하고 사색할 만하고, 즐거이 다른 분들께 일독을 권하게 하는 걸작. 이런 '책 읽는 즐거움'을 경험한 것이 생전에 몇 번이나 되었는가!

 그러나 주의하시라. 인류학 또는 신화학이 나하고 맞아서 이 책을 이리도 찬미하는 것. 만일 당신이 프레이저가 평생을 바친 이 학문과 맞지 않는다면, 비록 이 책이 유려한 문장과 번역으로 만들었을지라도 한 얘기 또 하고, 비슷한 얘기 보태고, 거기에다 한 번 더 반복하고, 반복한 것과 비슷한 얘기 다시 하는데 질릴 것이고, 책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도 여전히 같은 부분을 읽고 있는 듯한, 두꺼운 책 읽을 때의 곤혹스러움을 아주 제대로 경험하실 수 있을 것이다. 자, 이 정도면 주의줄 것은 줬으니, 내 말을 믿고 책을 읽어볼 것인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당신 뜻에 달렸다. 아울러 읽고난 다음에 후회를 할 것인가, 뿌듯해 할 것인가도 역시 전적으로 당신 책임이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어떤 얘기를 먼저 해야 하는가. 이 점이 참 곤란했다. 제목 '황금가지'는 분명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아이네이아스가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만나러 지하 명부를 방문할 때, 손전등 대신 쥐고 가던 황금가지를 얘기하는 것으로, 이 책은 그놈의 우라질 '황금가지'가 도대체 어떤 것이고 무슨 의미가 있느냐를 밝히는 긴 탐색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는 아도니스 신화. 산돼지에 물려죽은 아도니스. 지하 명부로 떨어진 아도니스를 찾아 아프로디테가 명부로 내려가 페르세포네와 담판을 지어, 두 라이벌이 1년의 1/3씩(또는 1/2씩) 나눠 갖기로 한 것에 대한 의미. 책을 관통하는 순환고리, 죽음과 부활, 수확과 파종에 대한 인류학과 신화적 해석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난 어떤 얘기를 먼저할까를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공평하게 결정하기를, "둘 다 얘기하지 말자". 왜냐하면 지금 쓰는 독후감의 목적은 다른 때와 다르게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 <황금가지>의 일독을 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실 분이 정말 읽고난 다음엔 어차피 다 아시게 될 것이라서.

 글을 쓰는데는 언제나 어려움이 따른다.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리니까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문제가, 그럼 독후감으로 뭘 얘기할 건데? 하는 점. 제일 중요한 두가지를 다, 처음부터 인간살이에 있어본 적도 없는 '공평'이란 이유로 말하지 않기로 하고, 그렇다고 책의 내용을 써놓는 것도 아니라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그럼 뭐가 중헌디?

 이 책은 인류학과 신화학에 관한 것이다. 신화학? 띄어쓰기 한 번 하면 '신 화학'. 새로운 화학? 그럼 주기율표에 뭔가 더 보태졌나? 그렇다. 당신은 모르겠고, 내 뇌에 각인되어 있던 인류사적 주기율표에 대단히 특이하고 강력한 합성원소 하나가 보태졌다. 인류사의 또 다른,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발전 단계. 주술-종교-과학에 이르는 흐름을 관장하는 새로운 원소를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거다. 문제의 새로운 원소는 아직도 여전히 주술-종교-과학 이후에 도래할(어쩌면 이미 우리 앞에 나타난) 다른 형태의 인류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도면 책 <황금가지> 영업은 할 만큼 한 것 같다. 그럼 책에 나오는 재미난 것 좀 더 얘기한다고 구박받지는 않겠지.

 289쪽에 말레이 반도의 어떤 부족이 행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주술적 처방'에 관해 써놓았다. 그게 대단히 아름다워서 소개한다.


"이제 막 떠오른 달이 동쪽 지평선에 붉게 떠올랐을 때, 바깥에 나가 달빛을 받으면서 왼쪽 엄지 발가락 위에 오른쪽 엄지 발가락을 포개고 오른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는 화살을 쏜다. 내가 화살을 쏘면 달빛이 흐려지리라.

 나는 화살을 쏜다. 그러면 햇빛도 흐려지리라.

 나는 화살을 쏜다. 그러면 별빛도 흐려지리라.

 그러나 내가 쏜 것은 해도 달도 별도 아니다.

 마을의 그 아가씨, 그녀의 마음 한가운데이다.

 꼭! 꼭! 그대의 영혼이여, 이리와서 나와 함께 걷자.

 오라, 내 옆에 앉으세요.

 오라, 나의 베개를 같이 베고 잠 자리.


 이것을 세번 되풀이하여 부르고 그때마다 휘파람을 분다."


 왜 왼 엄지발가락을 오른 엄지발가락으로 누른 상태에서 이런 노래를 불러야 주술이 먹히는 걸까? 오른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달빛을 받으면서 아름다운 말들을 세번 외칠 때 왼손은 어디다 두고 있었을까? 왜 한국에선 아들 낳고 싶으면 애 만들 때 아빠가 오른 엄지발가락에 잔뜩 힘을 준 상태에서 사정을 하라고 농담할까? 혹시 말레이 반도의 주술이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문화권에서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어째서 난 이 아름다운 노래를 읽으면서도 이따위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을까?

 아, 나의 고뇌는 갈수록 깊어져만 간다.


 농경시대로 접어든 주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주술은 강우(혹은 제우制雨)능력이다. 비는 주술사가 얘 비구름아, 이제 비를 좀 뿌려라, 해서 내리는 것이지 자연 현상으로 내릴 만해서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비를 충분히 내리게 하고, 과하면 더이상 내리지 않게 하는 게 주술사 또는 주술사가 진화해서 생긴 왕의 능력이었다. 주술사(또는 왕)가 나이먹어 힘이 좀 빠진 듯 보이면 종족들의 손에 의하여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이들의 팔자였는데, 그걸 지금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재미난 강우 주술 하나를, 읽다가 배꼽이 빠질 것 같았던 걸 소개한다. 비가 오는 거,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현상. 인간의 몸에 합법적이고 가장 자주 물을 쏟아내는 것, 그중에 적출할 수 있는 것이 남성의 비뇨기. 근데 그걸 그냥 적출, 싹둑 잘라내는 거냐고? 에이, 천만에. 다음을 읽어보시라.

 "디에리 족은 할례 때 젊은이에게서 잘라 낸 포피 또한 비를 부르는 힘을 가진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부족총회'에서는 가뭄을 대비해서 언제나 얼마 가량의 포피를 비축해둔다. 그것들을 늑대나 얼룩구렁이의 기름과 함께 싸서 조심스럽게 감추어둔다.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포장을 펴보아서는 안 된다. (강우)의식이 끝나면 포피는 효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땅에 묻는다." (제 5장 날씨의 주술적 조건. 110쪽. 괄호는 내가 쓴 주석)

 웃겨 죽는줄 알았다. 할례, 포경수술할 때 잘라낸 포피를 뚫고 물, 즉 오줌이 나왔으니까 그것도 강우주술의 재료로 썼다는 거다. 그걸 책에선 동종주술이라고 하는데(그게 뭔지 궁금하시면 책 읽어보시라), 수년간 뭔가를 싸고 있었던 포피를 잔뜩 모았다가 잘 써먹은 인간을 나도 한 명 안다. 이건 실화고, 이런 야만이 벌어질 수 있는 대한민국 집단은 군대밖에 없다. 내가 복무했던 주둔부대 바로 옆의 의무대에 고등학교 동창이 하나 있었다. 나보다 두달 가량 고참이었는데 군대가서 만났다. 걔네 군의관 한 새끼가 얼마나 내 친구를 괴롭히고 두드려 패고 했는지 얘가 이를 뽀도독 갈더니 사단 병력 가운데 지원자는 누구나 다, 빠짐없이 무료로 할례를 해주고 디에리 족의 주술사처럼 인간의 포피를 냉동실에다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냉동실 문을 연 친구가 그걸 들고 식당 조리실에 가서 참기름을 잔뜩 친 후라이팬에다가 들들 볶아 귀한 맛소금에다 후추가루 까지 살살 뿌려, 진로소주 한 병 곁들인 다음 문제의 군의관 새끼한테 소고기 맛난 특수부위라고 구라를 치고 상납을 했다. 젓가락으로 하나를 집어 꼭꼭 씹어보니, 씹는 맛이 기가 막힌지라,

 "이게 소고기 어디 부위냐?"

 "그게 제가 휴가나가서 집 앞에 정육점에다 얘기한 거거든요. 이름은 잊었는데 소 한 마리 잡아도 한 줌 나올까 말까하는 진짜 특수부위랍니다."

 "그래? 거 쫀득쫀득하니 맛이 괜찮구먼."

 하면서 내 친구한테 너도 한번 맛이나 봐라, 란 얘기 한 번 없이 혼자서 그 많은 흠흠흠... 조껍데기를 다 처먹더란 거다. 그 다음 부턴 제대할 때까지 한 대도 안 맞았다나? 그랴, 무료할례를 그렇게 많이 해주었으니 내 친구가 복 받은 거다. 나? 아니다. 난 직장생활 해서 번 내 돈 내고 떳떳하게.... 깠다.


 근데 성탄절이 왜 12월 25일, 동지 부근에 있는 줄 아셔? 1월 6일까지 성탄 트리를 달아놓는 이유는?

 다 책에 나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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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0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정말 명작이죠. 게다가 흥미진진하기까지. 이런 작품이 정말 고전입니다요. 프레이저 이 양반 정말 대단함. ㅎㅎ

Falstaff 2020-09-01 10:11   좋아요 0 | URL
옙. 말이 필요없는, 꼭 직접 구입을 해서 책장에 꽂아 놓아야 하는 책입니다. ㅋㅋㅋ
 
엘살바도르 엘 보르보욘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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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에 볶은 커피는요, 써요. 쓰기만 합니다. 고소하지도 않고 산미도 없고,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청국장 냄새도 없습니다. 그냥 써요. 맛을 못 느끼면 코로나라고요? 전 음성입니다. 너무 많이 볶았습니다. 물론 제 취향에 그렇다는 말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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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그 형제들 1 - 야곱 이야기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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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 이렇게 이름만 불러 봐도 어쩐지 쉽게 읽히지 않을 듯한 독일인스러운 완고함이 뚝뚝 떨어진다. 맞다. 그나마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는 쉽게 읽혔고, 유작이자 미완성 작품인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은 또 예상 외로 희극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토마스 만, 하면 선뜻 드는 생각이 (지나치게)진지한 작가라는 것. <마의 산>. 나는 그걸 무슨 마음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는지 몰라.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당시 10대 후반 특유의 기질, 세상 고민은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사회분위기도 그 시절엔 그래야 한다는 듯 은근히 부채질했던 것 같기도 한 “Strum und Drang” 질풍노도를 해야 할 것 같은 꼬임에 휩쓸려 그랬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쥐뿔도 모르면서.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지?
  토마스 만은 보이는 족족 읽어치웠다. 딱 하나 빼고. 《요셉과 그 형제들》. 이 작품이 번역되어 우리글로 읽을 수 있다는 걸 안 지가 벌써 10년이 넘는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은 쉽게 손에 들 수 없었다. 일단 분량에 기가 넘어갔다. 여섯 권에 3,510쪽. 게다가 구약의 창세기를 기본으로 하는 텍스트를 전혀 기독교적인 환경을 경험해보지 못한 유물론자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그동안 나는 이 책과는 별개로 구약성서를 순전히 호기심으로 읽어봤으며, 몇 년 후 다시 토마스 만을 검색할 때는, 맞아 이 책이 있었지, 이젠 읽어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며, 그리하여 《요셉과 그 형제들》의 첫 번째 <야곱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겼고, 넘기자마자 곧바로 고난의 행진이 시작됨을 눈치 챘다. 19년 전 서울대 독문과 교수를 하던 안삼환 선생이 독자로 하여금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게 이 책의 위대성을 언급하고, 이어 역자 장지연이 쓴 ‘옮긴이의 말’ “신화를 읽는다는 일,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본다는 일”이 이어지고 나서야 드디어 첫 번째 책 <야곱 이야기>를 시작한다.
  <야곱 이야기>도 1부가 아닌 “저승 나들이”라는 제목의 ‘서곡’이 달려 있어 저 먼 먼 시대, 하늘이 처음 열렸던 때부터 드디어 천지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다분히 작가의 사색을 통해 설명을 한다. 작가는 애초 천지창조부터 요셉의 시절까지 기독교의 신, 하느님 또는 주님을 아직 발전이 덜 된 신으로 상정한다. 그럼 서곡이나마 어떻게 펼쳐지는지 한 번 보자.
  최초의 인간, 또는 완전한 인간인 아담 카드몬이 있었다. 카드몬은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청년으로 인간의 원형이자 총괄개념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인 바, 처음부터 모든 창조를 위협하는 악에 대항해 싸울 전사로 선발된 자아다. 그러나 안타깝게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급기야 악령의 포로로 떨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신은 두 번째 사자使者를 파견하기에 이르고, 이 피조물은 최초의 인간보다 고귀한 자아를 지니게 만들었다. 세속의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 숙명의 두 번째 사자는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최초의 인간다운 존재를 쉽게 “영혼”이라 이야기한다. 영혼은 생명은 있으되 지식이 없는 존재. 평안과 행복이 지배하는 높은 세상을 마다하고 물질에 마음이 기울어 물질과 몸을 섞어 형체를 만들고 싶어 안달을 했다. 그래 정작 형체를 얻고 보니, 즉 사람의 몸을 얻어 최초 이후의 인간이 되어보니, 쾌락을 얻고자 하는 욕구만 커지게 되어, 이 괴로워하는 영혼을 위해 신은 드디어 세상을 창조하기에 이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면 두 번째 사자는 무엇일까. 신은 자신의 신성을 “정신”으로 만들어 세상의 인간에게 보냄으로써 영혼과 유사하나 영혼 자체는 아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상태로 전환시킨다. 그 결과 이제 영혼만 떠나면 형체의 세계 역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 다분히 문학적인 발상이라서 비록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안도는 된다. 이때 ‘정신’이 두 번째 사자.
  그리하여 드디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다. 코세 사람 쿠리갈주가 바벨에서 수메르와 악카르 사람들을 다스렸을 때 자신을 사계의 왕이라 자칭하며 ‘벨-마르둑’이란 신을 섬겼단다. 벨은 히브리어로 ‘바알’, 마르둑은 ‘태양신의 송아지’라는 뜻. 이 때, “어느 남자”가 달 신, 일명 신Sin을 섬기는 ‘우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당시의 강력한 통치자가 님로드의 거대한 탑(바벨탑)을 건설하는 일에 반대하여 식솔을 이끌고 정처 없이 유랑을 떠났다가 북쪽에 있는 달의 도시 하란에 도착해 수 년 동안 머물며 새로운 친인척 관계를 맺었다. 달신 신Sin을 섬기는 곳은 후에 ‘시날’이라는 지명으로 바뀌고 지금은 ‘시나이’라는 산의 이름으로 남게 된다.
  어느 남자는 다시 아내와 가솔, 하란에서 새로 생긴 친척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길을 잡아 가 도착한 곳이 바로 가나안. 처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하티 족이 땅의 주인이었다. 그래 이들은 가나안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이왕 신을 섬기려면 가장 으뜸가는 신을 섬기겠다고 결심하여 “엘로힘”이란 신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엘로힘은 남자에게 “자손이 모래와 별처럼 번창하여 민족을 이루게 하고, 모든 민족에게 축복을 주는 민족이 되리라”고 약속을 한다. 또한 “가나안 땅은 영원히 남자와 후손의 땅이 되리라”고 축복을 해준다. 약속의 내용을 읽은 후에 확실해졌다. 엘로힘이라는 신이 후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갈라질 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임이.
  이런 축복을 보는 문학 작가의 눈. 축복? 축복이라고? 정말 축복이란 빌어먹을 것이 있는 거야? 토마스 만은 “단어 뒤에 깔려있는 가치평가”를 한 번 보자고 하면서, 말 그대로의 축복만 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다고 단정한다. 맞다, 맞아. 신에게 들은 은근한 속삭임은 정말 축복이 아니라 나중에 아브람, 이사악,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민족들의 역사를 보더라도 평생에 걸친 축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축복을 ‘행복’ 또는 그냥 ‘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완전히 맞는 말이다. 이사악은 아버지에 의해 거의 죽었다 억지로 살아났고, 야곱은 야바위보다 더 지독한 사기 행각을 통해 형 대신 아버지에 의하여 축복을 받았지만 결국 축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독하기 독한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요셉도 비슷한 초년 사주를 타고 났고. 우리네 사는 것도 마찬가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 고통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혹 짧은 순간 즐겁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뭐 대단한 게 있다고 행운이니, 행복이니 하는지. 모든 사람은 축복을 받고 태어날 수 있지만 결국 길게 축복을 누리는 인간은 극소수에 그치는 것도 모자라,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축복이지 본인들은 지옥의 유황불 속인지, 그 속을 어떻게 아는가? 이런 형태의 축복, 남자가 엘로힘에게 들은 속삭임을 만은 간단하게 “그건 운명”이라고 퉁 치고 나간다.
  하여튼 우르를 떠난 남자의 후손이 책의 주인공 요셉이 맞긴 맞는데, ‘그 남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 비슷하지만, 천만의 말씀, 이름만 비슷하고 남자와 요셉의 사이엔 최소 20대, 약 600년 터울이 난단다. 그러니 증조부라 볼 수 없다는 것이 토마스 만의 주장. 작가는 창세기를 일종의 연대기로 여기고,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쓴 연대기라서 그들의 조상이 행한 일을 간혹 터무니없이 미화한 측면이 많다는 시각에 입각해 적어도 2미터 이상 거리두기를 유지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라고? 웃기지 말아라. 역사는 기록한 자들의 것이다.
  한 가지 예로 야곱이 장인 라반의 집에서 25년(성서에는 20년)에 걸친 종살이를 끝내고 큰 부를 얻어 다시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작은 무역도시 세겜의 옆에 장막을 치고 몇 년을 거주할 때의 일을 들었다. 애초 부유하지만 작은 규모의 도시 세겜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레아가 낳은 맏이 르우벤을 비롯해 시므온과 레위, 빌하의 아들 단, 호리호리하고 날렵한 납달리, 힘은 세지만 우울한 성격의 유다, 이렇게 여섯 아들들이 처음부터 세겜을 치고 약탈을 도모했다가, 아버지한테 심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래 도시와 계약을 맺고 평화로이 지내기를 4년. 언제나 사이가 좋을 수 있나 어디. 그래 토착민과의 관계가 조금씩 원만해지지 않을 즈음, 까탈스런 성격에 통풍을 앓고 있는 성주 하몰의 방탕한 아들 세겜(성의 이름과 같음)의 눈에 야곱의 유일한 딸 디나가 들어온다. 이 순간, 세겜의 모든 신경은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철 발 벗은” 디나 하나에게만 집중이 되어, 급기야 아버지 하몰이 아픈 몸을 이끌고 야곱의 장막에 가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야곱은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들들이 세겜은 이미 본처가 있는 몸인데 어찌 야곱의 외동딸을 첩으로 보낼 수 있느냐면서 펄펄 뛰며 반대한다. 야곱도 아들들의 마음속에 뭔가 있음을 짐작했지만 아이들 이야기가 틀리지 않아 청을 물리칠 수밖에. 그랬더니 이번엔 세겜 본인이 장막을 방문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으로 사례를 할 터이니 제발 디나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랬더니 어떻게 했느냐고? 약탈했지 뭐. 어느 날 몰래 전방 주시하다가 시계에 디나가 포착되자마자 잽싸게 보쌈해 집어와 할렘에 넣어놓고 그날로 동침해버리고 말았다. 며칠 후, 세겜이 다시 장막을 방문해 여차저차해서 여차저차 됐으니 그저 넓으신 아량을 바란다고 넙죽 엎드리니 이걸 죽여 살려? 이미 디나는 남의 처가 된 후. 이때 아들들이 요구하기를, 지참금을 받기엔 우리도 충분하게 부자인 것은 당신이 보는 바와 같으니 지금부터 사흘째가 되는 날, 우리와 같은 신을 모시겠다는 증표로 성 안의 모든 남자들에게, 늙었거나 젊었거나, 어리거나를 따지지 말고 반드시 돌칼을 써서 할례를 하라고 요구한다.
  생각 짧은 세겜. 이크, 이런 횡재라니. 돈 한 푼 안 들이고 어여쁜(어여쁘지 않다고 책에 수없이 나온다. 레아를 닮으면 예쁠 수 없다고, 그저 자기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다.) 리나를 영원히 얻을 수 있다니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성에 들어가 사흘째가 되자마자 모든 남자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바지 내려!를 외친다. 근데 할례를 하면, 당시엔 항생제도 없지, 소염제도 없어서 더욱 곤란했을 터인데, 움직임이 영 자유롭지 못하다. 어딘지 아시지? 쓸모없는 껍데기 잘라낸 곳이 따갑고 쓰라려서. 그렇게 해놓고 나흘째 되는 날, 야곱의 여섯 아들이 병사들을 몰고 야곱의 딸 리나를 구출하겠다는 명분으로 세겜 성에 쳐들어가 성주(는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분해 저절로 자연사했고), 성주 아들 세겜, 이집트 파견군 대장 베서-케-바스테트 등 거의 모든 남자들을 도륙내고 온갖 보물을 약탈해 야곱에게 바친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목하고 큰 그림을 비슷하지만 디테일로 가면 영 다르다. 이런 것이 바로 연대기,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증거. 이 책은 야곱이 아름다운 엄마 리브가의 지시를 핑계로 쌍둥이 형 에사오를 대신해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장면부터 다시 벧엘 언덕에 도착할 때까지를 자신의 해석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자신은 간혹 연대기라는 말을 쓰지만 문학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대별로 쓰게 되면 재미가 덜한 법, 토마스 만은 벧엘, 또는 베델의 성스러운 나무 성수에 나신으로 기대 몽상에 빠진 요셉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토마스 만답게 특정한 행위가 뒤에 벌어질 다른 행위에 연결, 즉 인과 관계로 이어지는, 또는 이어지게 하는 장치가 대단히 인상 깊다.
  이거 명작 맞다. 첫 번째 책 <야곱 이야기>만 읽어봐도 알겠다. 그러나 읽기는 그리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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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8-26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이 긴 작품을, 그것도 토마스 만.....(지루한 그;;)의 작품을!
나중에 더 늙으면 함 읽어볼라고 저희 도서관에 검색해봤더니, <요셉과 그 형제들 3 - 이집트에서의 요셉 (상>까지만 있네요. 사서도 지쳤던가, 아니면 이 책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던 사람도 그냥 거기서 포기한 것인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8-26 20:11   좋아요 0 | URL
대단하긴요 뭘. ㅋㅋㅋㅋ 이걸 쓴 사람도 있는뎁쇼. ^^;;
확실히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다 팔자지요 뭐.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0-08-27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단하시다는 말씀 안드릴 수가 없네요. 성경을 이 책 때문에 읽으신거죠? 멋지십니다.👍

Falstaff 2020-08-27 09:1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성경을 이 책 때문에 읽었을까요. 본문에 썼듯이 세월이 지나가면서 별개로 호기심에, 주위에서 꼭 읽어볼 책이라고 하도 그래서 읽은 것이지요. ^^
 
와사등 / 기항지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3
김광균 지음, 배선애 엮음 / 소명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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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개성 출생.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열세 살인 1926년에 중외일보에 <가신 누님>을 발표했고, 열일곱 살 땐 동아일보에 <야경차夜警車>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물다섯 살, 1938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설야雪夜>가 당선하면서 정식 시인의 칭호를 얻었으니 시에 관해서는 무척 조숙했다. 이어 스물여섯에 첫 번째 시집 《와사등》을, 해방 후인 1947년에 《기항지》를 낸 후 1952년부터는 동생의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거의 시단에서 떠나다시피 했다 한다. 이 두 시집의 대표작들을 ‘원본비평연구’한 시집이 오늘 읽은 《와사등/기항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예비고사, 본고사 시험문제로 현대문학에 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아 시 읽기를 소홀히 했을 거 같았지만, 국어 교사들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나올 확률이 많다고 학생들을 무지하게 때려잡으며 현대시 공부를 시켰는데, 김광균, 김광섭 비슷한 시인들의 작품은 예외였다. 그래서 그냥 이름만 알고, 소위 ‘이미지즘’이란 장르로 기억하고 훅, 넘어갔다. 이런 시인들 가운데 생각나는 사람들이 <논개>의 변영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 또 누구누구가 있었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기억나지 않는다.
  일단 시를 읊어보자. 맨 처음에 나오는 시 <오후의 구도(構圖)> 2연.


  천정(天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 시
  하―얀 기적 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凝視)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항로(北洋航路)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이어서 두 번째 시 <해바라기의 감상(感傷)> 2연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이 굴러 내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흩트리고 느껴 울었다.



  천정에 걸린 시계가 새벽 두 시를 시보하고 있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새로 두 시가 새벽 두 시, 맞지? 맞을 거다. 댕, 댕, 괘종시계의 시보를 하―얀 기적 소리라고 치고, 그럼 고독한 나의 사색 또는 ‘오후의 응시’가 ‘북양항로의 깃발’, 먼 수평선에서 크게 원호를 이루는 저 먼 먼 선박으로 향한다는 말씀? 아니어도 좋다. 아니면 어떤가. 그냥 뜻 없는 시어들이 모이고 모여 ‘고독한 나’가 방에 누워 사색에 잠긴 이미지 하나만 독자가 읽어주면 시인으로서는 만족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시에서는 한없는 은유의 아름다움.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이 글쎄 굴러 내린단다. 이 때를 맞추어 시냇가에선 갈대들인 또 머리를 흩뜨리고 느껴 운다니. 김광균이야 뭐 애초부터 은유와 직유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인인 걸 새삼스럽게 이 정도로 감탄하기는 이르다.
  그런데 나는 소위 ‘이미지즘’이란 것이 시인의 심상의 모습 말고 사물을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딱 찍어 놓은 듯한 회화적 이미지로도 읽었다. 사실 김광균의 시집은 처음 읽는 것이고 이전엔 조카 교과서에서 하나 정도 ‘설핏’ 읽었을 뿐으로 다소 생소했으나 이 시집을 읽으면서 아, 내 스타일, 다리를 치기도 했으니,



  동화(童話)



  내려 퍼붓는 눈발 속에서
  나는 하나의 슬픈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조각난 달빛과 낡은 교회당이 걸려 있는
  작은 산 너머
  엷은 수포(水泡) 같은 저녁별이 스며 오르고
  흘러가는 달빛 속에선 슬픈 뱃노래가 들리는
  낙엽에 쌓인 옛 마을 옛 시절이
  가엾이 눈보라에 얼어붙은 오후.


  이 시는 두 편으로 구성된 <향수의 의장(意匠)>의 두 번째 편인데, 시인이 찾고 있던 슬픈 그림자를 낙엽이란 추억에 싸인 옛 시절의 얼어붙은 오후라는 회상 속 사진 또는 그림이라는 이미지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런 그림 또는 사진 한 장은 <외인촌(外人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연만 인용해보자.


  하이한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의 시를 읽어보니 현대 시인이라면 그다지 즐기지 않을 단어인 ‘고독’, ‘슬픔’, ‘울음’ 같은 것들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데 그게 전혀 흉하지 않다. 아니다, 내가 읽기에 흉하지 않다. 전문가들의 시선을 모르겠고. 흉하기는커녕 한 컷의 사진, 한 장의 그림의 분위기를 이미 충분히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그런 분위기, 이미지로 애초에 단정하는 단어로 읽히기까지 한다. 시집 《와사등》이라면 대표시가 <와사등>이라 이 작품을 소개해주기 바라시겠지만, 대표시를 소개하면 출판사에게는 여지없이 큰 실례를 하는 것이라 안 되겠고, 이미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래서 오히려 <와사등>을 젖히고 김광균의 대표 시로 알려져 있는 <추일서정(秋日抒情)> 전문을 읽어보자.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세상에 이렇게 자유롭게 은유와 직유를, 심지어 거칠게 사용할 수 있다니. 뭐 요즘엔 이 시를 쪼개서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며 분석하고, 일률적으로 해석해가며 시험공부를 한다고 하니 학생들은 사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쌍하다. 그냥 읽으면서 좋으면 좋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단순하게 즐길 수 있으면…… 그게 요순시대라고?
  이제 내가 제일 잘 읽었던 시, 가장 공감했던 시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 시가 어떻더라, 라는 말없이 독후감을 끝낸다.



  반가(反歌)


  물결은 어데로 흘러가기에
  아름다운 목숨 싣고 갔느냐.
  먼―훗날 물결은 다시 되돌아오리
  우리 어데서 만나 손목 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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