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그 형제들 1 - 야곱 이야기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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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 이렇게 이름만 불러 봐도 어쩐지 쉽게 읽히지 않을 듯한 독일인스러운 완고함이 뚝뚝 떨어진다. 맞다. 그나마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는 쉽게 읽혔고, 유작이자 미완성 작품인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은 또 예상 외로 희극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토마스 만, 하면 선뜻 드는 생각이 (지나치게)진지한 작가라는 것. <마의 산>. 나는 그걸 무슨 마음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는지 몰라.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당시 10대 후반 특유의 기질, 세상 고민은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사회분위기도 그 시절엔 그래야 한다는 듯 은근히 부채질했던 것 같기도 한 “Strum und Drang” 질풍노도를 해야 할 것 같은 꼬임에 휩쓸려 그랬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쥐뿔도 모르면서.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지?
  토마스 만은 보이는 족족 읽어치웠다. 딱 하나 빼고. 《요셉과 그 형제들》. 이 작품이 번역되어 우리글로 읽을 수 있다는 걸 안 지가 벌써 10년이 넘는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은 쉽게 손에 들 수 없었다. 일단 분량에 기가 넘어갔다. 여섯 권에 3,510쪽. 게다가 구약의 창세기를 기본으로 하는 텍스트를 전혀 기독교적인 환경을 경험해보지 못한 유물론자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그동안 나는 이 책과는 별개로 구약성서를 순전히 호기심으로 읽어봤으며, 몇 년 후 다시 토마스 만을 검색할 때는, 맞아 이 책이 있었지, 이젠 읽어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며, 그리하여 《요셉과 그 형제들》의 첫 번째 <야곱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겼고, 넘기자마자 곧바로 고난의 행진이 시작됨을 눈치 챘다. 19년 전 서울대 독문과 교수를 하던 안삼환 선생이 독자로 하여금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게 이 책의 위대성을 언급하고, 이어 역자 장지연이 쓴 ‘옮긴이의 말’ “신화를 읽는다는 일,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본다는 일”이 이어지고 나서야 드디어 첫 번째 책 <야곱 이야기>를 시작한다.
  <야곱 이야기>도 1부가 아닌 “저승 나들이”라는 제목의 ‘서곡’이 달려 있어 저 먼 먼 시대, 하늘이 처음 열렸던 때부터 드디어 천지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다분히 작가의 사색을 통해 설명을 한다. 작가는 애초 천지창조부터 요셉의 시절까지 기독교의 신, 하느님 또는 주님을 아직 발전이 덜 된 신으로 상정한다. 그럼 서곡이나마 어떻게 펼쳐지는지 한 번 보자.
  최초의 인간, 또는 완전한 인간인 아담 카드몬이 있었다. 카드몬은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청년으로 인간의 원형이자 총괄개념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인 바, 처음부터 모든 창조를 위협하는 악에 대항해 싸울 전사로 선발된 자아다. 그러나 안타깝게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급기야 악령의 포로로 떨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신은 두 번째 사자使者를 파견하기에 이르고, 이 피조물은 최초의 인간보다 고귀한 자아를 지니게 만들었다. 세속의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 숙명의 두 번째 사자는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최초의 인간다운 존재를 쉽게 “영혼”이라 이야기한다. 영혼은 생명은 있으되 지식이 없는 존재. 평안과 행복이 지배하는 높은 세상을 마다하고 물질에 마음이 기울어 물질과 몸을 섞어 형체를 만들고 싶어 안달을 했다. 그래 정작 형체를 얻고 보니, 즉 사람의 몸을 얻어 최초 이후의 인간이 되어보니, 쾌락을 얻고자 하는 욕구만 커지게 되어, 이 괴로워하는 영혼을 위해 신은 드디어 세상을 창조하기에 이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면 두 번째 사자는 무엇일까. 신은 자신의 신성을 “정신”으로 만들어 세상의 인간에게 보냄으로써 영혼과 유사하나 영혼 자체는 아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상태로 전환시킨다. 그 결과 이제 영혼만 떠나면 형체의 세계 역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 다분히 문학적인 발상이라서 비록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안도는 된다. 이때 ‘정신’이 두 번째 사자.
  그리하여 드디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다. 코세 사람 쿠리갈주가 바벨에서 수메르와 악카르 사람들을 다스렸을 때 자신을 사계의 왕이라 자칭하며 ‘벨-마르둑’이란 신을 섬겼단다. 벨은 히브리어로 ‘바알’, 마르둑은 ‘태양신의 송아지’라는 뜻. 이 때, “어느 남자”가 달 신, 일명 신Sin을 섬기는 ‘우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당시의 강력한 통치자가 님로드의 거대한 탑(바벨탑)을 건설하는 일에 반대하여 식솔을 이끌고 정처 없이 유랑을 떠났다가 북쪽에 있는 달의 도시 하란에 도착해 수 년 동안 머물며 새로운 친인척 관계를 맺었다. 달신 신Sin을 섬기는 곳은 후에 ‘시날’이라는 지명으로 바뀌고 지금은 ‘시나이’라는 산의 이름으로 남게 된다.
  어느 남자는 다시 아내와 가솔, 하란에서 새로 생긴 친척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길을 잡아 가 도착한 곳이 바로 가나안. 처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하티 족이 땅의 주인이었다. 그래 이들은 가나안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이왕 신을 섬기려면 가장 으뜸가는 신을 섬기겠다고 결심하여 “엘로힘”이란 신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엘로힘은 남자에게 “자손이 모래와 별처럼 번창하여 민족을 이루게 하고, 모든 민족에게 축복을 주는 민족이 되리라”고 약속을 한다. 또한 “가나안 땅은 영원히 남자와 후손의 땅이 되리라”고 축복을 해준다. 약속의 내용을 읽은 후에 확실해졌다. 엘로힘이라는 신이 후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갈라질 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임이.
  이런 축복을 보는 문학 작가의 눈. 축복? 축복이라고? 정말 축복이란 빌어먹을 것이 있는 거야? 토마스 만은 “단어 뒤에 깔려있는 가치평가”를 한 번 보자고 하면서, 말 그대로의 축복만 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다고 단정한다. 맞다, 맞아. 신에게 들은 은근한 속삭임은 정말 축복이 아니라 나중에 아브람, 이사악,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민족들의 역사를 보더라도 평생에 걸친 축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축복을 ‘행복’ 또는 그냥 ‘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완전히 맞는 말이다. 이사악은 아버지에 의해 거의 죽었다 억지로 살아났고, 야곱은 야바위보다 더 지독한 사기 행각을 통해 형 대신 아버지에 의하여 축복을 받았지만 결국 축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독하기 독한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요셉도 비슷한 초년 사주를 타고 났고. 우리네 사는 것도 마찬가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 고통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혹 짧은 순간 즐겁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뭐 대단한 게 있다고 행운이니, 행복이니 하는지. 모든 사람은 축복을 받고 태어날 수 있지만 결국 길게 축복을 누리는 인간은 극소수에 그치는 것도 모자라,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축복이지 본인들은 지옥의 유황불 속인지, 그 속을 어떻게 아는가? 이런 형태의 축복, 남자가 엘로힘에게 들은 속삭임을 만은 간단하게 “그건 운명”이라고 퉁 치고 나간다.
  하여튼 우르를 떠난 남자의 후손이 책의 주인공 요셉이 맞긴 맞는데, ‘그 남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 비슷하지만, 천만의 말씀, 이름만 비슷하고 남자와 요셉의 사이엔 최소 20대, 약 600년 터울이 난단다. 그러니 증조부라 볼 수 없다는 것이 토마스 만의 주장. 작가는 창세기를 일종의 연대기로 여기고,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쓴 연대기라서 그들의 조상이 행한 일을 간혹 터무니없이 미화한 측면이 많다는 시각에 입각해 적어도 2미터 이상 거리두기를 유지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라고? 웃기지 말아라. 역사는 기록한 자들의 것이다.
  한 가지 예로 야곱이 장인 라반의 집에서 25년(성서에는 20년)에 걸친 종살이를 끝내고 큰 부를 얻어 다시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작은 무역도시 세겜의 옆에 장막을 치고 몇 년을 거주할 때의 일을 들었다. 애초 부유하지만 작은 규모의 도시 세겜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레아가 낳은 맏이 르우벤을 비롯해 시므온과 레위, 빌하의 아들 단, 호리호리하고 날렵한 납달리, 힘은 세지만 우울한 성격의 유다, 이렇게 여섯 아들들이 처음부터 세겜을 치고 약탈을 도모했다가, 아버지한테 심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래 도시와 계약을 맺고 평화로이 지내기를 4년. 언제나 사이가 좋을 수 있나 어디. 그래 토착민과의 관계가 조금씩 원만해지지 않을 즈음, 까탈스런 성격에 통풍을 앓고 있는 성주 하몰의 방탕한 아들 세겜(성의 이름과 같음)의 눈에 야곱의 유일한 딸 디나가 들어온다. 이 순간, 세겜의 모든 신경은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철 발 벗은” 디나 하나에게만 집중이 되어, 급기야 아버지 하몰이 아픈 몸을 이끌고 야곱의 장막에 가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야곱은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들들이 세겜은 이미 본처가 있는 몸인데 어찌 야곱의 외동딸을 첩으로 보낼 수 있느냐면서 펄펄 뛰며 반대한다. 야곱도 아들들의 마음속에 뭔가 있음을 짐작했지만 아이들 이야기가 틀리지 않아 청을 물리칠 수밖에. 그랬더니 이번엔 세겜 본인이 장막을 방문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으로 사례를 할 터이니 제발 디나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랬더니 어떻게 했느냐고? 약탈했지 뭐. 어느 날 몰래 전방 주시하다가 시계에 디나가 포착되자마자 잽싸게 보쌈해 집어와 할렘에 넣어놓고 그날로 동침해버리고 말았다. 며칠 후, 세겜이 다시 장막을 방문해 여차저차해서 여차저차 됐으니 그저 넓으신 아량을 바란다고 넙죽 엎드리니 이걸 죽여 살려? 이미 디나는 남의 처가 된 후. 이때 아들들이 요구하기를, 지참금을 받기엔 우리도 충분하게 부자인 것은 당신이 보는 바와 같으니 지금부터 사흘째가 되는 날, 우리와 같은 신을 모시겠다는 증표로 성 안의 모든 남자들에게, 늙었거나 젊었거나, 어리거나를 따지지 말고 반드시 돌칼을 써서 할례를 하라고 요구한다.
  생각 짧은 세겜. 이크, 이런 횡재라니. 돈 한 푼 안 들이고 어여쁜(어여쁘지 않다고 책에 수없이 나온다. 레아를 닮으면 예쁠 수 없다고, 그저 자기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다.) 리나를 영원히 얻을 수 있다니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성에 들어가 사흘째가 되자마자 모든 남자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바지 내려!를 외친다. 근데 할례를 하면, 당시엔 항생제도 없지, 소염제도 없어서 더욱 곤란했을 터인데, 움직임이 영 자유롭지 못하다. 어딘지 아시지? 쓸모없는 껍데기 잘라낸 곳이 따갑고 쓰라려서. 그렇게 해놓고 나흘째 되는 날, 야곱의 여섯 아들이 병사들을 몰고 야곱의 딸 리나를 구출하겠다는 명분으로 세겜 성에 쳐들어가 성주(는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분해 저절로 자연사했고), 성주 아들 세겜, 이집트 파견군 대장 베서-케-바스테트 등 거의 모든 남자들을 도륙내고 온갖 보물을 약탈해 야곱에게 바친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목하고 큰 그림을 비슷하지만 디테일로 가면 영 다르다. 이런 것이 바로 연대기,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증거. 이 책은 야곱이 아름다운 엄마 리브가의 지시를 핑계로 쌍둥이 형 에사오를 대신해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장면부터 다시 벧엘 언덕에 도착할 때까지를 자신의 해석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자신은 간혹 연대기라는 말을 쓰지만 문학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대별로 쓰게 되면 재미가 덜한 법, 토마스 만은 벧엘, 또는 베델의 성스러운 나무 성수에 나신으로 기대 몽상에 빠진 요셉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토마스 만답게 특정한 행위가 뒤에 벌어질 다른 행위에 연결, 즉 인과 관계로 이어지는, 또는 이어지게 하는 장치가 대단히 인상 깊다.
  이거 명작 맞다. 첫 번째 책 <야곱 이야기>만 읽어봐도 알겠다. 그러나 읽기는 그리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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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8-26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이 긴 작품을, 그것도 토마스 만.....(지루한 그;;)의 작품을!
나중에 더 늙으면 함 읽어볼라고 저희 도서관에 검색해봤더니, <요셉과 그 형제들 3 - 이집트에서의 요셉 (상>까지만 있네요. 사서도 지쳤던가, 아니면 이 책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던 사람도 그냥 거기서 포기한 것인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8-26 20:11   좋아요 0 | URL
대단하긴요 뭘. ㅋㅋㅋㅋ 이걸 쓴 사람도 있는뎁쇼. ^^;;
확실히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다 팔자지요 뭐.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0-08-27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단하시다는 말씀 안드릴 수가 없네요. 성경을 이 책 때문에 읽으신거죠? 멋지십니다.👍

Falstaff 2020-08-27 09:1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성경을 이 책 때문에 읽었을까요. 본문에 썼듯이 세월이 지나가면서 별개로 호기심에, 주위에서 꼭 읽어볼 책이라고 하도 그래서 읽은 것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