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2
페터 플람 지음, 이창남 옮김 / 민음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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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터 플람은 구글 검색해도 별로 알아낼 것이 없다. 1891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인. 본명은 에리히 모스 Erich Mosse. 작가보다는 의사가 더 어울리는 직업이다. 1926년에 데뷔작인 <나?>를 발간한 이후 두 편의 작품을 더 쓰면서 전문의 과정을 마친다. 1933년 역시 유대인인 마리안느와 파리로, 34년에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정신과 의사로 정착했다. 책 앞날개를 보면 이이의 환자로 윌리엄 포크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유진 오닐의 늙은 사위)찰리 채플린 등이 있었단다. 그렇다고 나머지 생을 의사로만 산 건 아니고, 열심히 작품생활을 한 것도 아니지만 작가로도 산 것 같은데, 존경하는 우리나라의 장용학 선생은 나이 들어 작품을 쓰지 못하게 되자,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고, 글도 쓰지 못하는데 무슨 작가라고 부르느냐고, 창피하다고 했던 데 반하여, 플람은 1959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펜클럽 회의에도 참석한 모양이다. 뭐 고향 방문단의 의미였겠지.

  근데 <나?>는 꽤 괜찮다. 본문이 169페이지에 끝나는 짧은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포스트모던하다. 도대체 전간기, 특히 1920년대 북동부 유럽, 폴란드와 독일 유대인 작가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당히 스타일리시한 작품들이 많다. 폴란드의 유대인 3인방은 누구인지 아시지? 비트키예비치, 슐츠, 곰브로비치. 페터 플람이 이 3인방 수준이라고, 나도 양심이 있으니까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이이의 작품도 근처까지는 간다.


  작품의 첫 문단.

  “내가 아닙니다, 재판장님. 죽은 이가 나의 입으로 말합니다. 여기 서 있는 건 내가 아니고, 들어 올려지는 팔은 나의 팔이 아니고, 하얗게 세어 버린 건 나의 머리카락이 아니며, 내가 저지른 일이,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이 문단을 논리 혹은 상식적으로 해석하기 위하여는, 화자가 유령이거나, 정신착란이거나, 아니면 어제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 <샤일록 작전>처럼 ‘내 속의 또다른 나’ 혹은 ‘페르소나’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① 유령은 아니다. ② 정신착란?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③ 내 속의 또다른 나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페터 플람이 정신의학 전공의 시절이었으니 ② 아니면 ③이다.

  여기서 장면 전환. 1차세계대전 당시의 대표적 격전지인 베르됭. 그곳을 눈 앞에 둔 두오몽의 무수한 시신들. ‘나’는 그곳에 있다. 뼈와 두개골과 재와 ‘나’의 이름, ‘나’의 이름은 아니지만 ‘나’의 이름이기도 한. ‘나’의 운명이 아니지만 ‘나’의 운명이기도 한.

  ‘나’의 이름은 빌헬름 베투흐Bettuch이다. 이게 웃기지만 진짜 이름. Bettuch.침대보라는 뜻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름 때문에 무지하게 놀림을 받았다. 그래도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이 이름으로 평생을 견뎠다. 조용히 감내해왔다. 그러나 빌헬름 베투흐라는 이름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1918년 11월 11일. 베를린과 뮌헨에서 혁명이 일어나 전쟁이 4년만에 끝났다고 바쉬 대위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폭탄도, 죽음도, 진창도, 강제도, 법도, 무기도, 강박도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와해되고, 해체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나’ 빌헬름 베투흐는 앞으로 뛰었다. 적군이었던 무리의 진영 쪽을 향하여. 그들도 더 이상 충을 쏘지 않을 것이라 믿고. 그렇게 도착한 지점, 한 시절 피아의 접선이었던 곳에 설치한 철조망. 그가 걸려있다. 전쟁이 끝나기 단 하루 전에 부상병을 구하기 위하여 전진했다가 적군이 쏜 총알을 맞고 철조망에 선 채로 걸린 시신. 단 하루 사이에 납탄 하나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아 버렸다. 베투흐였던 ‘나’는 그의 시신에서 회색수첩을 꺼내 내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는 내 것이다. 그의 여권이. 그의 이름과 그의 운명이. 이것으로 빌헬름 베투흐는 사라지고 한스 슈테른은 계속 삶을 살아간다.


  이제 ‘나’는 기차 일등칸에 탄 많이 배운 부유한 남자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프랑크푸르트가 아니라 베를린행 기차에 타서, 베를린 역에서 내리고, 벨레뷔 거리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그가 말한다. 당신이 돌아왔네요. 그레테가 뭐라고 할까요? 나중에 알려지지만 이이는 친구 보비다. 그가 말한다. 당신이 보낸 마지막 편지가 매우 기묘했어요. 죽음의 예감이랄까, 그런 소문이 났지요. 그러나 이렇게 다시 나타났으니 다 된 겁니다. 아무런 문제없습니다. 아주 좋아요. 보비가 차를 태워 집 앞에 내려준다.

  ‘나’는 올려다본다. 창문에 기댄 그녀. 빛나는 황금 갈색, 티치아노의 머리카락을 한 창백한 얼굴. 달콤함, 두려움, 고통, 동경, 사랑이 가득한 모습.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이 여인이, 아마도 그레테라고 불리는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내게 입맞춤을 한다. 나는 뜨겁고 둔중하고 몸을 꿰뚫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여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자마자 검은 털이 덥수룩한 몸체와 하얗게 빛나는 이빨의 개가 ‘나’의 살을 물고 흔든다. ‘나’의 피가 흘러 양말 아래로 흐른다. 여자는 나를 ‘한스’라고 부르면서 바지를 걷고 물린 상처를 동여매준다. 여기가 ‘나’의 집이고, 이 여자가 ‘나’의 아내?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나’는 누구이고 ‘나’의 이름은 무엇일까?

  왼쪽 가슴 위, 왼쪽 주머니 속의 가죽지갑. 그 안에 든 여권. 안개가 유령 같은 어스름처럼 둘러싸인 무방비한 시체의 도난당한 여권. 이것을 가진 순간, ‘나’는 침대보라는 친구들의 놀림과, 댄스홀 금발 아가씨 리젤의 키득거림에서 벗어난다. 이제 그런 곳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다른 사람이다. 간단하게 옷만 바꾸어 입었을 뿐인데. 그 시체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행운을 탈취했다. 초록빛 눈을 가진 개한테만 말고. 이 개만 ‘나’를 미워하고 다리에서 살점을 뜯어내 피를 흘리게 하고 ‘나’를 노려보고 거칠게 격앙한다. ‘나’는 그래서 이 개를 귀하게 다뤄야 하며, 쓰다듬어야 한다. 네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음에도 개의 이름 네로를 안다. 어디서 이름을 알았을까? 네로. 이름을 부르자 내게 덤벼들어 두 발을 ‘나’의 어깨에 딛고 물기 많은 혀로 얼굴을 핥으며 낑낑대는 울부짖음 비슷한 소리를 낸다. ‘나’의 행동이 옳았다.


  심지어 ‘나’, 이제 한스 슈테른이 된 ‘나’는 집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1층에 있는 병원을 개업한다. ‘나’는 외과의이다. 다친 곳을 소독하고, 꿰매고, 약을 바르고, 뼈를 잇고 깁스를 한다. 어떻게 이런 처치를 할 수 있을까? ‘나’는 한스 슈테른이기 때문이다.

  상처는 치료할 수 있어도 ‘나’의 속 상처는 그렇지 못하다. 전쟁 4년. 그동안 휴가를 받아 집에 온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작품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모른다. 그레테는 알 것이다. 하여간 ‘나’ 한스 슈테른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그레테는 아들을 낳았고, 당연히 ‘나’의 아들이라 주장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어도 점점 혹시 이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닐 지 모른다고, 드물게 생각하게 되고, 이것보다 조금 더 잦게 ‘나’가 없는 동안 수시로 휴가를 나온 법무관이자 지금은 베를린 검찰청의 검사로 있는 스벤 보르게스와 그레테가 연인 사이일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나’ 속의 프랑크푸르트 출신 프롤레타리아 청년 빌헬름 베투흐는 이런 질투가 한 번씩 휘몰아칠 때 참지 못해 황금 갈색의 티치아노 머리카락을 한 아름다운 그레테에게 손찌검을 하고, 곧바로 뉘우치며 사과한다.

  당연히 행운은 오래가지 않는다. 누구의 아들도 아닌 ‘나’. 빌헬름 베투흐가 한스 슈테른이 되면서 ‘나’는 한 가지를 잃었다. 배꼽. 앞 세대의 누구와도 연결하지 못한 유일한 개체. 그래서 ‘나’의 프랑크푸르트 가족 중 한 명인 누이동생 에마 베투흐는 ‘나’를 결코 알아보지 못한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의사에게 보이기 위하여 무턱대고 베를린에 와서 돈을 벌어보고자 하는 에마. ‘나’는 에마로 인해, 에마와 더불어 비극으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하며,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정말로 ‘나’를 낳은 어머니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죽는다. 배꼽이 없으니까. 누구와도 이어지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이게 다는 아니다. 짧은 작품이니 궁금하면 직접 읽어 보시는 편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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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2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듣도 보도 못한 작가입니다! 근데 환자들이 어마무시하군요!!ㅎㅎ
슐츠와 곰브로비치 근처에 간 작가라...
일단 첫 문장에 끌려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짧은 작품이라서 더 좋군요.
아쉽게도 별4개이지만 정신분석을 다룬 작품이라 구매해야할 각입니다.
폴스타프 님 아니면 이런 작품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알라딘 문학 리뷰 제왕 이십니다!!^^

Falstaff 2025-04-23 15:38   좋아요 0 | URL
아휴... 소쿠리 비행기 태우시면 전 멀미합니다.
이 책 괜찮습니다. 전간기 폴란드 유대인 작가까지 올리기는 여러모로 거시기하지만 일단 짧아서 부담이 없고요, 나름대로 독자들 뇌가 섞이게 만들려고 애 쓰고요, ㅎㅎ 뭐 그렇습니다.
 
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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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왜 예술일까? 밤이 새기도 전에 제일 사랑하는 동무를 세 번 배반한 늙은이의 모습은 어땠을까? 십자가 형을 받고 죽어 이제 내려와 엄마의 무릎에 뉘었어도 성 아드님은 해부학 적 예외가 가능했을까? 예술 표현의 디테일이 이 작품에서 제일 매력적이라고 나는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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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치어 옴짝달싹 못한다. 벌써 이게 몇 년 째야. 1차로 오늘 버릴 책. 일주일에 한 번씩 여름까지만 내다 버리면 될 거 같은데... 에휴.



폴린 레아주의 <O 이야기>가 끌린다고요? 흐흐흐 

저는 남정현의 <분지>가 제일 아깝습니다. <우리동네 아이들>과 <제노의 의식>은 직역이었으면 퇴출시키지 않을 터이고요. <피에르 또는 모호함>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비문과 오식 때문에 명작임에도 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십대 시절부터 읽으려고, 읽으려고 했는데, 저 책 말고 한두 권 더 있을 겁니다, 그것도 눈에 띄는 대로 버릴 건데요, 도가니 쑤시고 어금니 빠질 때까지 못 읽었습니다. 결국 읽지 못하고 갈 거 같습니다.

다 이렇게 사는 것이지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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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4-21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다 내다버리셨죠?! 후다닥=33

Falstaff 2025-04-21 14:16   좋아요 0 | URL
지금 버리고 왔습니다. 오늘이 재활용 수거일이거든요.

잠자냥 2025-04-21 14: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산책도 아니고 빌린책도 아니고 되판책도 아닌 오늘 내다버린 책이라는 신 분야 개척 폴스타프 ㅋㅋㅋㅋ

Falstaff 2025-04-21 14:16   좋아요 0 | URL
앗, 그런가요? ㅋㅋㅋㅋ 듣고 보니 정말 웃기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5-04-2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훑어보니...) 내다버릴 만 한 책이 종종 보이는군요. ㅋㅋㅋㅋ
<아르망스>는 절판이라 한때 구하려고 애쓰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O 이야기>는 저는 갖고 있습죠... *에헴*

그나저나 폴님이 내다버리면 반유행열반님이 대체 어디다 내다버리느냐고 묻고서는 화라락 모조리 수거해 갈 거 같은 느낌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5-04-21 14:18   좋아요 1 | URL
아르망스는 읽다가 복창 터질 거 같이 답답해서 말씀입죠.
열반인 댁 옥호가 통곡헌인데, 제가 거기까지 납품하기는 쉽지 않고, 쇤네 사는 누옥까지 오실 거 같지도 않으니 ㅎㅎㅎ 할 수 없지요 뭐.

잠자냥 2025-04-21 14:37   좋아요 0 | URL
아르망스 ㅋㅋㅋㅋㅋ 다시 생각해도 웃긴 넘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4-21 17:16   좋아요 0 | URL
이쯤에서 O 이야기 저는 영화로 봤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보다가 중단한 것 같습니다. 도무지 볼 수 없는 영화라서.....

페넬로페 2025-04-21 15: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저도 책을 왕창 정리했어요.
읽지도 않은 책이 너무 많은데 그 책들이 도서관에 다 있더라고요.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되팔고
나머지는 재활용 날짜에 맞춰 여러 차례 버렸어요. 집에는 밑줄 그은 책이 주로 남아 있는데 앞으로는 무조건 읽을 책만 한 권씩 사기로 했어요.
책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는건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럴까요! ㅎㅎ

Falstaff 2025-04-21 15:30   좋아요 1 | URL
이제 책을 옮기고 정리하고 뭐 그럴 힘이 부족해져서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더라고요. 오늘 그것 좀 했다고 에휴 허리야, 몇 번이나 곡소리가 나던지 말이죠. ㅋㅋㅋ
저는 다행스럽게 한 번도 안 열어본 책은 한 권도 없고, 끝까지 다 읽지 못한 책은 거의 없는 데요, 하여튼 못 읽은 책은 안 버립니다. 언젠가는 읽을 거다, 싶어서요.
몰로이, 페테르부르크, 말리나 뭐 이런 책들인데 끝장을 보고 말 겁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5-04-2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정리좀 해야 하는데요. 이거 보고 자극받아 책 정리 실행해보겠습니다!!

Falstaff 2025-04-21 17:31   좋아요 0 | URL
책을 버리면, 심정이 우짭니까, 그것도 다 읽고 나름대로 좋고 덜 좋고 지지고 볶은 책인 걸요. ㅋㅋㅋ 그랴 꽁치 통조림 까서 묵은지에 볶아 쐬주 한 병 낮술로 했더니 이게 또 천국이구먼요.
다락방 님도 정작 책정리 하시면 기쁘지는 않을 거 같아서.... 말입지요.

yamoo 2025-04-21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80권 보냈고 다음주까지 300권 동생에게 보낼 예정입니다. 읽지 않은 책들..쌓아만 놓은 책들이 너무 많아요..

Falstaff 2025-04-21 19: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그래도 보낼 동생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책 쌓는 건 암만봐도 욕심 같아요. 흑흑흑....

그레이스 2025-04-22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스트 흥미롭네요

Falstaff 2025-04-22 15:4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얘기 듣고서 생각해보니 그럴 것 같습니다. ㅎㅎ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5-04-23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절 아까워서 어떻게 버리셨습니까? 저도 몇 번 버렸으나 또 버려야 하는데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책의 4분의 1은 버려도 될 것 같아요. 다시 열어 보지 않을 것 같은 책이요. 완독한 책도 있고 완독하지 못한 책도 있어요.ㅋㅋ

Falstaff 2025-04-23 15:36   좋아요 0 | URL
그냥 짊어지고 사는 것보다는 아깝지만 정리하는 게 ㅎㅎㅎ 개인 복지 상 좀 더 좋은 선택 같더라고요. ^^

꼬마요정 2025-04-23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한박스 버렸습니다…. 곰팡이가 너무 많아서요. 아까운 책들도 많았는데 곰팡이 핀 책은 어떻게 안 되더군요ㅜㅜ

Falstaff 2025-04-23 19:22   좋아요 1 | URL
에구, 곰팡이는 안 됩니다. 버리기 잘 하셨어요!
 
샤일록 작전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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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목가>와 <휴먼 스테인>을 재미있게 읽고 단박에 필립 로스의 팬을 자임하고 다녔다가 <유령퇴장>에 급실망, 손절을 해? 말아? 적지 않은 세월 헤맸다. 무려 5년이나 망설이다 <우리 패거리들>을 읽고 으악, 이게 내가 알던 필립 로스 맞아? 작품 속에 간혹 경박한 면이 조금 눈에 뜨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폭력적으로 가볍게 입을, 또는 손모가지를 놀리다니 이제는 정말 가까이할 수 없군. 일단 마음먹었다가,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다 싶어 딱 한 번만 더 읽는다, 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은 책이 <샤일록 작전>이다. 내가 기억하는 유대인으로서의 필립 로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프라이드도 갖지 않는, 그러니까 유대인이라기 보다 마치 한국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렇듯이 그냥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보이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그렇게 보였다는 거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샤일록 작전>을 읽으면서 세계 유대인 공동체에서 (어쩌면) 로스가 튀는 행동을 해 오랜 세월 유럽쪽에 머물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모르겠으나,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이슬람 지역에서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생활한 유대인들을 주축으로 한 시오니스트들 하고는, 아주 내놓고 그러지는 못했겠지만, 서로 앙금 비슷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이 책에서도 필립 로스는 시오니즘을 내놓고 반대하지 않는다. 그럼 어떤 식?


  로스를 읽으면서 아주 예외적으로 <샤일록 작전>에서 그는 놀랍게도 포스트모던이라 할 수 있는, 그러나 이젠 벌써 클리셰가 되어버린 방식을 채택한다. 1988년 1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친척 앱터가 뉴욕의 필립 로스에게 전화를 해 이스라엘 라디오의 보도 내용을 알려준다. 나는 분명히 뉴욕에 있는데, 또다른 필립 로스가 예루살렘에서 폴란드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공포의 이반Ivan’이라 불린 존 데미야뉴크의 전범재판을 방청하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혔고, 라디오에서도 필립 로스가 재판을 방청했다고 소개했다는 거다. 이를테면 문학 작품 속에 간혹 등장하는 “또다른 나” 혹은 “페르소나”가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 스위트룸 511호에 묵고 있으며, 스위트룸에서 강연회를 겸한 팬들과 만나는 행사로 할 예정이라고. 정작 진짜배기 필립 로스는 책 한 권을 끝마치고 그간 쌓인 긴장을 풀 겸해서 책을 끝마치면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맨해튼의 방 두 개짜리 호텔 스위트룸에서 아내 클레어와 함께 거의 5개월 동안 피난민처럼 지내고 있는데 말씀이다. 웃기지? 방 두 개짜리, 맨해튼의 이름있는 호텔 스위트룸에서 5개월 동안이나 불쌍하게도 “피난민처럼” 지내고 있다니 말이지.

  이스라엘의 킹 데이비드 호텔 스위트룸 511호에서 로스 흉내를 내고 있는 미친놈의 입을 빌려, 필립 로스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이상적이기 때문에 전혀 가능성없는 이스라엘-이슬람,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기막힌 방안을 제시한다. 오죽했으면 나도 읽으면서 화들짝 놀랐겠느냐 말이지.

  이스라엘의 유명한 작가 아하론 아펠펠드가 뉴욕의 로스에게 전한 말에 의하면, 킹 데이비드 호텔의 필립 로스는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공포의 이반’, 존 데미야뉴크 전범재판을 방청하기 바로 전에 폴란드 그단스크의 모처에서 레흐 바웬사를 만나, 언젠가 폴란드에서 노동 솔리다리티가 정권을 잡을 때, 폴란드 내에서 유대인들의 재정착을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고 주장했단다. 예루살렘의 로스가 주장하기를,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시 자기들이 살던 유럽으로 이주하는, 역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지면, 이스라엘의 인구가 대폭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선을 1948년 수준으로 되돌릴 수 있어서,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역시 1948년 이전처럼 별 다툼 없이 서로 이웃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만일 지금처럼 미국과 이슬람 세력간의 무력충돌이 계속되면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두 진영 가운데 한 쪽에 의하여 원자폭탄이 날아들어 한 쪽을 거덜내 완전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는 주장이다. 만일 생존자가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지구인이 몽땅 멸망하는 순간까지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예전 나치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신세로 떨어질 것이며, 전세계 유대인들도 이마에 불그죽죽하게 찍힌 낙인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란다. 당연히 너무 순진하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과하게 낭만주의적인 발상이지만, 탁 읽어보면 어찌됐던 간에 아이디어 하나는 기발하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인물 한 명. 존 데미야뉴크. 1920년생 우크라이나인. 1940년에 소련군에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 1942년에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다. 북한을 비롯한 붉은 군대 소속원들은 포로로 잡히는 것을 수치로 알았고, 포로였던 병사들이 교환으로 귀국을 해도 경멸을 받았으며 심할 경우엔 범죄인처럼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소련 시절의 숱한 수용소 소설 읽어보시라. 내 말이 맞다. 스물두 살의 데미야뉴크는 나치군이 유대인 수용소에서 근무할 인원을 뽑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저요, 저요, 손을 번쩍 들어 몇 군데의 절멸수용소에 들어간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데미야뉴크가 특히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공포의 이반이라는 별명으로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존더코만도스Sonderkommandos를 지휘하면서 나신 상태로 가스실로 향하는 수만, 수십만 유대인들에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갖은 악행과 고문과 폭행을 저질렀다는 거다. 천운을 타고나 수용소에서 생존한 자들이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특정한 반면, 존 데미야뉴크, 본명 Ivan Mykolaiovyxh Demjanjuk는 무려 43년도 넘게 지나 목격자의 기억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그곳 교도관이었던 것은 맞는데 공포의 이반은 다른 교도관이었다고 주장한다. 전쟁이 끝나고 1951년에 미국으로 이민 가 포드 계열사에서 자동차 정비일을 하던 데미야뉴크는 1986년에 미국 경찰에 전범으로 체포되어 신병이 이스라엘로 넘겨진다. 이후 1988년에 첫 재판을 받는데, 이걸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 511호에 머무는 가짜 필립 로스가 방청을 했다는 거. 하여간 1심에서 데미야뉴크는 유죄, 사행 판결을 받지만 1993년 대법원에서 피고의 진술을 받아들여 진짜 ‘공포의 이반’은 다른 교도관이었다고 판결, 석방되어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2001년에 미국 정부에 의하여 절멸 수용소에서 근무했던 것이 확실하다고 결정이 나 다시 체포되어 2005년에 이번엔 유럽, 독일이나 우크라이나 또는 폴란드로 강제송환할 것을 결정하지만 정작 독일 법정으로 보내진 것은 2009년 5월, 그의 나이 89세 때였다. 뮌헨에서 있었던 1심 결과 데미야뉴크가 2만9천 명의 유대인 학살에 관련이 있는 자라고 판결해 5년 형을 받았으나, 데미야뉴크는 이를 다시 부인해 항소했고, 독일 정부는 일단 그를 석방했다. 아무런 추가 정보가 없어서 모르겠는데 내 생각으로는 보석 아니었을까 싶다. 재판은 계속 진행되지 못하고 2013년 3월 17일이 도래해, 그는 최종판결을 받지 못하고 독일의 노인 복지 시설에서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B급 문화의 대변인인 나무위키는 엄밀한 의미에서 데미야뉴크는 무죄인 상태로 죽었다고 썼다.

  필립 로스는 <샤일록 작전>을 1993년에 써서 세번째로 펜/포크너 상을 받았다. 펜/포크너 상을 몇 월에 주는 지 모르겠으나, 1993년은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데미야뉴크에게 무죄를 선고한 해인데, 이 책에서 로스는 데미야뉴크가 빼도 박도 못하게 ‘공포의 이반’임을 확신한다. 독일 법정에서도 2만9천 명의 살해에 관련이 되었다고 했지,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공포의 이반으로 고문과 학대와 폭력을 <샤일록 작전>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실제로 했다면 유대인 관련해서는 거의 무조건적, 습관적으로 엄벌에 처하는 독일 법정이 왜 5년형만 때렸을까?

  하여간 나는 좀 이상하다. 지금 데미야뉴크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범인으로 확정하지 않은 시점에 한 인간을 뒤꿈치로 자근자근 밟고 있는 거다. 실제로 이 데미야뉴크를 이반으로 설정해서 다큐멘터리, 드라마 같은 것도 만들었다. 시청률과 박스오피스는 진실에 우선하니까.


  하나 더. 내 중딩 시절에는 확실하고, 고딩 시절에는 기억이 없는 거 보니까 그랬던 거 같은데,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대표하는 작품은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가 거의 유일했다. 확인하기 위해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을 검색해보니까 소설은 1979년, 영화가 1982년이다. 그럼 맞다. 내 청소년기 시절에는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알지 못했다.

  <샤일록 작전>에서 필립 로스 역시 1960년대까지 나치에 의한 유대인 멸절을 그렇게까지 강하고 비극적으로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처럼 <안네의 일기> 정도면 충분했다고.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다수의 홀로코스트 작품이 있었겠지. 로스의 주장은 ‘세계인의 주목을 크게 받을 만큼’이 아니었다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그러다가 1967년 6일 전쟁이 벌어지고, 이스라엘이 거의 완벽하게 이슬람 세계에 승리하면서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홀로코스트가 알려지기 시작했단다. 유대인은 지난 2천년 동안 차별받고 탄압받은 역사와 아울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중동부 유럽에서 있었던 불행한 멸절 시대를, 돈과 정치력과 문화의 힘으로 세계만방에 알림으로써, 1차, 2차, 3차…n차 중동전쟁을 통한 무슬림에 대한 가혹행위를 무마하고자 했던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거, 나도 독후감을 통해 자주 주장했던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 스스로가 유대인인 필립 로스의 입과 펜을 통해 나와 같은 질문을 던지니까, 비록 좋은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반갑기는 했다. 반가워? 아니, 아니. 이런 비극적인 사건에 적당한 다른 단어 없을까? 하여간 눈이 번쩍 띄었다니까.

  결론을 말할 시간이다. 분량이 너무 많다. 비슷한 이야기가 자꾸 중첩되어 지루한 느낌이 든다. 특히 “또 다른 나”와 “페르소나”와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별점을 준다면 셋 정도가 좋겠다고 생각이 들 즈음, 역 디아스포라를 주장하고, 중동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유행이 터져 별 하나 추가, 넷 정도가 마땅하지 않을까. 필립 로스가 60세에 발표해 펜/포크너 상을 받은 작품이다. 괜히 내 독후감과 선입견 때문에 이이의 작품을 멀리하실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말했다. 분량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했다고. 지루한 스토리를 굳이 소개하지는 않겠다. (메모해둔 것이 아깝기는 하네.) 이것만 인용하자. 500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늙은 스파이 스마일스버가가 필립 로스에게 하는 말이다.


  “유대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우리 역사를 배반했소. 그리스도교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우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했다는 뜻이오. 그들을 경멸과 예속의 대상인 ‘타자他者’로 만들어, 인간의 지위를 빼앗았소. 사실은 이것이오. 팔레스타인 민족은 전적으로 무고하며, 유대 민족은 전적으로 유죄다. 내게 있어 경악스러운 일은 소수의 부자 유대인이 PLO에 거액 기부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대인이 자기도 기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오.

  (중략)

  언젠가 팔레스타인이 승리한다면, 그래서 여기 예루살렘에서, 예를 들면 지금 데미야뉴크 씨의 재판이 열리는 바로 그곳에서 전범재판이 열린다면, 그 재판에서 거물들뿐만 아니라 나 같은 하급 관리들도 다뤄진다면,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난 앞에서 나 자신을 변호할 말이 하나도 없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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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필립 로스 손절했어요. <에브리맨>이 좋아서 입문했고, 몇 권 읽어봤는데, 제겐 카버가 더 맞는 듯합니다. 그래서 로스 책 모두 처분했어요..ㅎㅎ

Falstaff 2025-04-21 11:20   좋아요 0 | URL
평양 감사도 싫으면 안 하는데 까짓 소설가야 말 하면 뭐합니까, 싫으면 때려 치우는 거지요. 잘 하셨습니다! ㅎㅎㅎ
 
현대일본희곡집 10 현대일본희곡집 10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엮음 / 연극과인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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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현대희곡은 그나마 자주 읽는 편인데 반해, 일본의 현대 희곡은 별로 기회가 없었다. 사카테 요지와 며칠 전에 읽은 마쓰다 마사타카가 언뜻 생각난다. 아주 약간 명의 작품을 더 읽었을 듯한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거나 동아시아에서 현대 문학 장르를 제일 먼저 도입하고 당시 조선과 중국으로 전파한 문화적 선진국 일본의 작품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다. 책을 기다리는 중에 읽은 마쓰다 마사타카의 <바다와 양산>은 일주일 전에 독후감을 썼듯이 애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일본의 희곡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오래전에 베세토BeSeTo에 대해 들은 적 있다. 베이징Beijing, 서울Seoul, 도쿄Tokyo의 앞머리를 따서 이름을 짓고 동아시아의 연극인끼리 의기투합해 교류를 모색하고 함께 발전하자는 취지의 단체를 이루었다고. 좋은 아이디어다.

  이 단체와 별개로, 혹은 일환으로 2002년에 한일연극교류협의회를 결성해서 도쿄에서는 한국현대희곡 낭독공연을 하고, 서울에서도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을 한 후에 희곡집을 냈다. 한국측 교류협회 회장 심재찬은 2022년에 현대일본희곡집 10편을 내면서, 2년에 한 번씩 일본 희곡 다섯 편을 실은 희곡집을 모두 다섯 번 출간하겠다고 했는데, 벌써 열 번째 책이 나와 기쁘다고 말한다. 좋은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건전한 교류가 이어지기 바란다.


  이 책에도 다섯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모리모토 가오루 (1912~46), <여자의 일생>

  야마우치 겐지 (1958~  ), <안경부부의 이스탄불 여행기>

  이시하라 넨 (1972~  ), <하얀 꽃을 숨기다>

  다니 겐이치 (1982~  ), <1986: 뫼비우스의 띠>

  요코야마 다쿠야 (1977~  ), <만나러 갈게, 비는 오지만>


  극작가들의 생몰연대가 다양한 편은 아니다. 일본 문예의 시기별 특징에 대하여 알지 못해서 이렇게 배치한 이유 또한 짐작하지 못하지만 70~80년대생 극작가들의 작품에 셋이나 실린 것이 눈에 확 들어오고, 같은 이유로 1910년대생 모리모토 또한 색다르다. 20, 30, 40, 60년대생은 무슨 이유로 빠졌을까? 이유가 있겠지. 특별히 그 시기에 극작의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닐 터이니. 기회가 있으면 일본 희곡을 더 읽으면서 차차 알아가면 될 터이다. 근데 도서관에서도 일본 희곡집은 찾기가 참 힘든다.


  모리모토 가오루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서양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책 속의 작가 소개를 보면 서머싯 몸과 노엘 카워드, 손톤 와일더 등이 대표적이란다. 이 가운데서도 비록 퓰리처 상을 받았을지언정 지금 시각으로 보면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와일더의 <우리 읍내>도 끼어 있다. 세월이 그런 것이지. 한 시절 각광을 받던 것이 이제는 한물간 것처럼 구석에 찌그러져야 하는 거.

  <여자의 일생> “초고는 태평양 전쟁 말기 전쟁 의식의 고취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선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일본문학보국회(日本文學報國會)의 위촉작이었다.” 그러니까 전쟁은 망해가지만 그럴수록 일본의 군부와 사회는 국민들에게 더욱 참전의 의지를 불사르고 심지어 옥쇄까지 요구하기 시작할 찰나인 1943년 말경에 의뢰를 받아 1945년 패전 바로 전에 공연을 했다. 당시 모리모토의 나이 34세. 근데 징집당하지 않고 희곡을 썼다고? 그렇다. 폐결핵이 있었던 모양이다. 작품의 초고는 출판되지 않고 자필 대본만 남아 있어 훗날 간행되었고, 패전 다음 해인 1946년에 모리모토가 작품을 대폭 수정해 패전 이후의 일본 현실도 작품에 담았다. 이때 미군정의 검열을 걱정해 출판사에서 또 한 번의 삭제가 이루어졌는데, 연극이라는 장르 특성상 작품을 공연할 때마다 드라마투르그나 연출자에 의하여 대본이 수정되어, 이 책 속의 <여자의 일생>은 1946년 개정판의 번역이다.

  1막 1장은 1945년 10월. 불타버린 도쿄의 자기 집터 앞에서 망연하게 앉아 있는 주인공 케이 앞에 쓰쓰미 에이지가 나타난다. 둘은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세월도 세월이려니와 패전 속의 필연적인 굶주림과 누추함까지 더해 기억 속의 모습을 되살릴 수 없는 거였다. 케이는 이 자리가 자기네 집이 있던 터이며, 지금 움 같은 몸 뉘일 곳을 만들어 어떻게 해서든지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다. 이제 늙어 자신을 해꼬지하거나 훔쳐갈 것도 없는 몸이니 그거 하나는 편하게 마음먹어도 되는 신세. 에이지는 전쟁이 끝나고 갈 곳이 없어 다른 사람들처럼 그나마 식량이 있는 지방으로 가는 대신, 혹은 가기 전에 예전에 살던 쓰쓰미 가문의 집터를 한 번 둘러보고 갈 셈쳐서 와본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서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놀라서 숨이 거의 멎을 듯이, “당신… 에이지 씨?” 하는 순간 무대는 빠르게 암전된다.

  1막 2장은 1905년. 1장과 같은 쓰쓰미 일가의 집. 1905년은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눈부신 승전을 올린 군국주의 일본의 전성기였다. 이때 둘째 아들 에이지가 열아홉 살. 고모네 집에서 거의 쫓겨난 케이가 쓰쓰미 집 마당에서 땅에 떨어진 빗을 주워 가지고 있다가 도둑으로 몰린 일이 있다. 가족들이 물어보니 케이의 어머니도 죽었고, 아버지는 청일전쟁에 나가 전사해서 고모네 집에 얹혀 살고 있던 거다. 군국주의 일본의 국민들은 전사한 아버지를 가진 자녀를 돌볼 줄 알아 케이는 이후 쓰쓰미 집안에 살게 되고, 청일전쟁이 동학농민전쟁 이후, 갑오경장 직전 일이니까 1894년, 이때 케이는 열댓 살 정도 되었는데, 이후 쓰쓰미 가족의 일원이 되어 당당하게 쓰쓰미 상점의 운영을 거의 전담하는 위치로 격상한다. 당연히 아들 가운데 한 명의 아내 신분으로.

  이런 이야기다. 그러면서 패전에 따른 책임 같은 것도 케이를 통해 발언하는 등 미군정의 입맛도 적당하게 맞추어 주지만 그렇다고 정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진심의 한 자락은 깔고 있는 듯한 느낌.


  유일한 여성 극작가인 이시하라 넨의 <하얀 꽃을 숨기다>도 주목할 만하다. 아니, 이런 표현 가지고는 부족하고, 희곡을 즐기거나 즐기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NHK를 빗댄 것이 틀림없는 MHK 방송국의 의뢰로 다큐멘터리 외주업체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재판하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여성들이 전세계에서 모여, 일본 정부와 천황을 ‘반인도적 범죄’로 심판”하는 여성들의 민중법정을 취재하기로 한다. 총 4부작 가운데 회사가 맡은 부분은 2화 여성국제전범법정, 3화 국제공청회의 소개와 전시 성폭력에 대한 생각이다. 이 이슈는 2001년 1월 30일에 실제로 NHK에서 방송한 특집 시리즈 “전쟁을 어떻게 재판하는가”에 관련한 일련의 소동이라고 각주에 설명이 나와 있다.

  결론은 버킹검. 결국 이들이 취재하고 편집한 여성국제전범법정과 전시성폭력은 무수하게 가위질을 당해 자신들이 찍어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은 거의 나오지 않고, 보나 안 보나 마찬가지 수준의 처참한 다큐멘터리만 나온다는 것인데, 여기까지는 우리도 알고 양심적 일본인들도 아는 것이지만, 여기에, 이렇게 말하면 이것도 성차별인지 모르겠는데, 여성만 표현할 수 있거나, 여성이기 때문에 다른 성보다 훨씬 더 호소력 있고 함축성 있게 포착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을 기가 막히게 드러낸다. 숱한 사람들이, 아동들이 당하고 있는 일종의 가스라이팅.

  아짱, 아짱,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하지?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요. 이 대사를 읽는 순간, 오조족 돋는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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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18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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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필립 로스, <샤일록 작전>
수요일. 페터 플람, <나?>
금요일. 거페이, <산하는 잠들고>

그레이스 2025-04-18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가스라이팅!
폴스타프님은 정말 많은 희곡을 읽으시네요.
그리스 비극 읽으면서 그제야 좀 희곡에 적응한듯해요.

Falstaff 2025-04-18 21:33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점점 나아지더라고요. 희곡을 읽지 말고 연극을 보자고 그랬었는데 이젠 희곡 읽으면서 무대를 상상하는 게 재미도 있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