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들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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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독일어 문화권에서는 센세이셔널을 일으킨 작가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이의 소설 작품들을 번역 출간했는데 이번엔 을유문화사에서 최신작 <망자들>(2016)을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내놓았다. 좋은 일이다. 나는 <망자들>을 읽자마자 크라흐트의 데뷔작인 <파저란트>와 <제국>을 보관해 두었다. 올해 안에 적어도 한 권은 읽을 듯하다.
  그 정도로 매력적이다.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1930년대 초중반의 5월. 비 내리는 도쿄에 어둠이 깔리고, 이런저런 실수를 저질렀던 젊고 잘생긴 장교가 일본 특유의 의식인 할복자살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배를 스스로 갈라 죽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 사람들도 그것을 알아 카이샤쿠, 즉 할복하는 사람의 뒤에 서 있다가 큰 칼로 목을 내리침으로써 빨리 죽음에 이르게 도와주는 사람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소설의 일본군 장교는 무릎을 꿇은 채 아주 예리하게 벼린 단도를 자기 복부, 단전부분에 꾹 누르고 엎어진다. 그러나 장을 찌른 것 가지고는 곧바로 죽음에 이르지 않아 (대개 여기가 카이셰쿠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다시 고통을 무릅쓰고 똑바로 앉아 칼을 위쪽으로 북 치켜 올렸고, 그래서 위에 손상을 주었는지 덩이진 피를 입으로 물컹물컹 쏟아내며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 순간, 벽 속에 숨어 있던 무비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고, 심지어 필름 돌아가는 소리도 약하지만 여전히 흘러나왔다.
  인화를 마친 필름을 가정용 영사기로 보고 있던 희대의 천재 아마카스 마사히코. 아홉 살이 채 안 되어 일곱 개의 언어를 마스터하고 산스크리스트어를 독학했으며 그랜드 피아노로 협주곡을 작곡하면서 하이네를 독어로 읽었던 어린 시절부터 손톱을 물어뜯었고, 손톱에서 피가 나고 너덜너덜해지자 이젠 발톱까지 물어뜯었던 아이는 성장해 정부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면에 장교의 배에서부터 양비귀꽃 같은 피가 솟구치는 장면에서 눈길을 거두고 만다. 혐오스러워서. 예전에 중화제국에서 행해지던 능지처참 장면을 사진을 통해 본 적이 있는데(나도 있다.), 세상에는 재현하고 복사하면 안 되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동의한다). 아마카스는 이 필름을 자신이 직접 타이프 한 편지와 함께 베를린으로 보낼 생각이다. 진짜 느낌은 언어적 표현이나 슬로건 보다는 사진이나 영화를 중심으로 모습을 갖춘다는 신념에 따라, 할복 장면을 포함한 영화를 베를린에 보냄으로써 그쪽에서 진행하고 있는 정체政體를 지지하려는 생각이었을까? 해석은 독자 마음이다.
  작품 속에선 영화와 편지를 보냄과 함께,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맞설 대안으로 유럽 영화의 대국인 독일의 감독, 아니면 오스트리아나 네덜란드 출신의 감독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때 아마카스가 염두에 두고 있던 감독 가운데 한 명이 ‘에밀 네겔리.’ 최근에 그의 영화 <풍차>를 보고 사건의 부재 속에서 신성한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감동을 받은 터이었다. 이런 차에 믿기지 않게 정말로 에밀 네겔리가 긴 항해 끝에 일본 고베 항에 발을 딛는다.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 준수한 용모를 지닌 에밀 네겔리(그러나 이미 대머리가 상당히 진행된 중년의 사내)는 스위스 사람으로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프로펠러 항공기를 타고 이동 중이다. 세계상世界像에 대한 확고하고 건강한 회의를 품고 있는 네겔리는 식사 또는 식도락을 즐기지 않는 타입으로 양분섭취 과정은 지겹고 가끔은 심지어 역겹게 생각해 소량의 저녁식사 전까지 커피만 마시기도 하는 인물로 포도당 섭취의 부족은 어쩔 수 없이 주변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짜증을 부리는 일로 나타나기도 하는, 조금쯤 대하기 피곤한 사람에 속한다. 독일인 약혼녀 ‘이다 폰 윅스퀼’은 일 때문에 지금 일본에 가 있지만 자신도 몇 달 후 일본으로 가게될 지는 꿈도 꾸어본 적이 없다. 영화인 네겔리가 생각하기로 세계 영화 백년 역사상 천재가 딱 다섯 명이 있었다. 차례로 로베르 브레송, 장 비고, 알렉산드르 도브젠코, 오스 야스지로, 그리고 자신이란다. 앞의 네 명은 실제 인물이고 주로 무성영화 시대의 감독이다.
  베를린에 도착하니 앞에서 얘기한 아마카스가 보낸 편지와 영화와는 전혀 별개로 독일제국의 문화상 후겐베르크가 거대 프로젝트를 네겔리에게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화상과 만남의 자리에서 동석하게 된 영화비평가이자 유대인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와 로테 아이스너는 뱀파이어와 유령에 관한 공포영화를 만들 것을 조언해주고, 자신들 역시 뱀파이어와 유령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낳고 자라고 공부하고 사랑했던 독일 땅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고백한다. 동시에 하는 말이, 영화 속 귀신은 반드시 잘 생기고 마른 동양인이어야 한단다. 즉 유럽에서는 유효기간이 끝난 브램 스토커 식의 드라큘라 대신 다른 존재의 죽음 같은 것을 찾아 일본으로 떠남으로 해서 처음에 후겐베르크가 제안한 거금 20만 달러의 제작비를 80만 달러까지 올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네겔리는 약혼녀가 있는 일본 땅으로 출항하게 된 것.
  어렸을 때 네겔리는 늘 어마어마하게 비싼 와이셔츠에 좁은 커프스, 금으로 만든 얇은 손목시계를 찬 아버지의 가는 손을 동경해왔다. 그러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서 아버지는 평생 아들을 이름 ‘에밀’ 대신 ‘필립’이라 불렀는데 그게 유머로 서투르게 위장한 잔인함을 아들에게 투사한 행위라고 단정한 것은 먼 훗날 엘펜슈타인의 복음병원 임종실에서 아버지의 가는 손을 다시 붙잡았을 때였다. 일 년 전부터 이를 닦지 않아 공포스런 구취를 풍기며 죽음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에밀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고 고개 숙인 그의 귀에 무엇을 속삭이려 했을까. 자신이 들은 것은 분명히 “하”라는 외마디. 독일어 발음으로 ‘H?’ 그건 모르겠지만 에밀은 틀림없이 자신이 단 하나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왔으니, 평생 단 한 번, 누군가를 저주할 수 있고, 그 저주는 백퍼센트 실현된다는 믿음이었다. 이런 사람이 오래 떨어져 살았던 약혼녀 이다 폰 윅스퀼과 일본의 천재적 영화인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있는 일본에 도착하니, 그 순간 독자는 네겔리의 특별한 능력이 언제 발현될까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스토리 위주로만 읽으면 섭섭한 일이다. 글. ‘글’이라고 하면 ‘문장’의 집합일 터인데, 사실 개별적 문장이 감성에 호소한다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다 모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글’을 읽는 일이 대단히 즐겁다는 것. 뭐라 한 마디로 딱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아, 생각났다, 글이 대단히 유혹적이다. 뭔가 곧 드러날 것 같은 비의를 숨긴 듯한 글, 문장의 연속이 매력적이다. 그리하여 난 이 작품은 스토리가 반, 문장의 조합으로써의 글을 감상하는 것이 또 반이라고 감정했다. 필자와 독자 사이에 역자가 간섭을 했겠으나, 번역본을 읽으면서도 크라흐트의 미학을 감지하는데 문제가 없다. 이러니 어찌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지 않을 수 있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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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7-3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꼭 읽어보려고요. 배경이 일본 도쿄라는 점도 흥미롭네요.

Falstaff 2020-07-30 09:55   좋아요 0 | URL
옙. 흥미로우실 겁니다. 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이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ㅎㅎㅎ
 
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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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이제 한 작품만 더 읽으면 파묵의 소설은 올 클리어. 올해 안에 그렇게 하고자 한다. 그러니 파묵 씨는 조금 더 분발해야 할 듯.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이니만큼 이이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으니 작가나 다른 작품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할 건 없다. 곧바로 소설 속으로 들어가자.
  이스탄불의 베쉭타시 뒤편, 오스만 제국의 31대 술탄인 압뒬메지드의 명령으로 1848년에 지은 우흘라무르 여름별장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 ‘아큰 첼리크’라는 약사가 아들 젬, 아내와 함께 살았다. 이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젊은 시절부터 사회주의의 거의 모든 분파와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해왔던 운동가로 ‘하야트’, 우리말로 ‘삶’ 또는 ‘인생’이란 이름의 약국을 경영하며 그리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해왔다. 큰 키에 마르고 잘 생긴 외모를 하고 있어서 많은 여자들이 이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도 느꼈으며, 이 가운데 몇 명은 자신도 사랑하기까지 했단다.
  아주 오래 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밤에 군인들이 아큰을 체포할 당시 젬의 엄마는 무척 상심했으나 아들에게 아버지가 영웅임을 명심하라고 몇 번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7, 8년 전에도 경찰서에 또다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2년 만에 풀려나왔을 때는 엄마가 아빠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1985년, 젬이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 세 번째로 사라지자 이번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후 엄마는 결코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젬 역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몇 번을 상봉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아들에게 그리 큰 애정을 두지 않았는데, 자신이 수시로 국가기관에 체포를 당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의 성격상 모든 일을 신중하고 비밀스럽게 하는 습관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원래 성격이 자식에게 그리 큰 정을 주지 못하는 남자였을 수도 있다. 하여간 이번엔 바람기 때문에 가출한 것이 분명한 아버지로부터 학비를 비롯해 어떠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 모자는 1986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스탄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게브제’의 변호사 이모부 댁의 별채로, 월세를 내지 않고 살기 위해 이사를 했다.
  그러나 대입을 코앞에 둔 젬과 엄마 입장에선 입시 학원에도 보내야 해서 학원비를 보태기 위해 젬은 이모부의 과수원 경비원 일을 하기로 했다가, ‘얼마 후’ 작년에 아버지가 가출한 다음에 잠깐 일했던 이스탄불 베쉭타시 시장 안에 있는 책방 ‘데니즈’에서 위층 소파에서 자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과수원 경비와 ‘데니즈’, 우리말로 ‘바다’ 책방 종업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이 ‘얼마 동안’ 벌어진 일이다. 이모부네 과수원 옆에서 우물 파는 일을 하던 마흐무트라는 나이든 사람이 있었다. 이이의 우물 파는 솜씨가 매우 좋아 사람들은 이름 뒤에 장인Meister라는 의미로 ‘우스타’라는 호칭을 붙여 ‘마흐무트 우스타’라고 했고, 일이 끝나자 우스타는 젬에게 자신을 따라가 넉넉잡고 두 주일만 일하면 일당으로 과수원에서 받는 것의 네 배 정도를 벌 수 있다고 해서, 마흐무트 우스타와 변호사 이모부, 엄마가 합의해 우물을 파러 지하에 내려 보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승낙을 한다.
  그래 군소재지 ‘왼괴렌’의 언덕 위 평원에 자리를 잡고 땅주인이자 고용인인 하이리 씨는 자신의 일꾼 알리를 보내 모두 셋이서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알리는 우스타의 고용인이 아니라서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고, 우스타와 젬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정을 돈독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우스타는 엉뚱하게도 젬에게 마치 아버지같이 (젬의 서술에 의하면)“삶을 결정해버릴 만큼 큰 영향”을 준게된다. 마흐무트 우스타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에게 희생으로 내주는 이야기를 비롯해, 야곱과 요셉 같은 코란 속 부자관계를 예로 들면서, 아버지란 사람은 공정해야 한다고, 공정하지 못하면 아버지는 자식의 눈을 멀게 만든다는 등의 일화를 주로 들려준다. 젬이 우스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면, 아버지는 아들에 의하여 부정되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리라.
  마흐무트가 젬에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니 젬은 마흐무트에게 일종의 반항을 하기 위해 전문을 읽은 것은 아니고 발췌나 요약본으로 읽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살을 붙여 풀어놓음으로 해서 성공적으로 마흐무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주요 스토리가 세 가지. 둘은 위에서 이야기했고, 나머지 하나는 왼괴렌 시내에 와 있는 유랑극단에서 공연했던 몇 가지 촌극 가운데 하나. 이 유랑극단 ‘교훈을 주는 전설 극단’은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 군사 쿠데타까지 아나톨리아에서 혁명적 민중연극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가 이제 군사정권 아래서 내용 속에 세속적 이야기도 많이 삽입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수긍을 한 극단으로, 이 가운데 1,000년 전 페르시아의 시인 페르도우시가 쓴 <왕서>의 한 장면도 포함된다.
  이란에서 견줄 자가 없는 뤼스템이라는 이름의 영웅이 사냥을 나갔다가 그만 적국의 땅인 투란으로 들어가게 된다. 투란에서는 그의 이름이 워낙 널리 알려졌는지라 손님으로 맞이하여 융숭한 대접을 하고 좋은 침실에서 잠들 수 있게 해주었단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투란 왕의 딸인 타흐미네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잘생긴 영웅 뤼스템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애원한다. 그래 동침을 한 다음 날, 뤼스템은 아이가 태어나면 정표로 항상 몸에 달고 다니라고 자신의 팔찌를 건네주고는 자기나라로 돌아갔고, 공주는 정말로 임신을 해 사내아이를 출산, 이름을 쉬흐랍이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 쉬흐랍 또한 영웅의 풍모를 지니게 되었을 때, 친부 뤼스템과 투란의 왕을 위해 좋은 뜻으로 이란을 침공하게 됐고 이 와중에 정적들이 농간을 부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전장에서 뤼스템과 쉬흐랍이 맞장을 뜨게 된다. 처음엔 쉬흐랍이 이겼지만, 뤼스템이 기지를 써 이란에서는 두 번 연속으로 싸움에서 승리해야 진정한 승리로 인정한다고 해, 한 번 더 싸웠으나, 이번에 뤼스템이 쉬흐랍을 눕히고는 곧바로, 서슴지 않고 갑옷 사이의 빈틈에 칼을 쑤셔 넣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이 순간 쉬흐랍의 팔뚝에 팔찌가 채워진 것을 보고 뤼스템이 쉬흐랍을 부여안은 채 오열을 하는 장면.
  비록 원본 <왕서>에는 없지만 이것을 연극으로 만든 ‘교훈을 주는 전설 극단’에서는 싸움과 죽음을 지켜보던 아내이자 어머니인 타흐미네 공주가 처절한 통곡과, 자신의 운명과 인간의 팔자에 대하여 장렬한 독백을 하는데, 이때 타흐미네 공주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서른두 살, 우리의 주인공 젬보다 딱 두 배 나이가 든 여인으로 분노, 화 등을 대표하는 빨강머리의 여인이다. 젬은 이 여인, 둥글고 아름다운 입술에, ‘나’한테 뭔가 기이한 것을 감지한 듯한 슬픈 미소를 보내고 마치 예전부터 아는 사람을 보는 눈길을 가지고 있는 ‘귈지한’이란 이름의 여인과, 아무리 파고, 파고 또 파도 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우물 천공 작업에 지쳐가는 젬은 이 여인과, 생전 처음으로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두려워할 것 없어. 난 네 엄마 또래야.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요셉. 소포클레스의 위대한 희곡 <오이디푸스>, 최고의 페르시아 서사시 <왕서>에서 뤼스템과 쉬흐람. 순서대로 아버지는 아들을 희생시키고, 아들은 아버지를 죽은 후 어머니와 결혼해 3남1녀를 낳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이야기들. 이것이 터키의 현대사, 아직도 종교적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유럽화 된 동서양의 분기점에서 어떻게 구현이 됐을까. 작가가 오르한 파묵. 세 가지 주제가 서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순환이 되더라도 이의는 없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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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개를 들여놓았나
마틴 에이미스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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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유명한 유머 작가를 고르라면 제롬 K. 제롬과 킹슬리 에이미스를 꼽을 듯하다. 훨씬 선배인 제롬은 <보트 위의 세 남자>로, 에이미스는 <럭키 짐>으로 명성을 즐기고 있는데 이 에이미스의 아들이 또 블랙 유머의 펜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런던 필즈>를 비롯해서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를 재미있게,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는 책 표지 디자인과 제목이 좀 오버스러워서 영 손이 가지 않아 여태까지 읽기를 미루어왔다가 이번에 ‘해치웠다.’ 원래 제목은 ‘Lionel Asbo’, 주인공 이름인 ‘라이오넬 애즈보’ 그대로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랬다.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다른 한 명은 데스먼드 또는 데스 혹은 데시 페퍼다인. 라이오넬 애즈보가 외삼촌이다. 이 복잡한 가계를 먼저 소개해야 하겠다.
  먼저 그레이스 페퍼다인. 아주 어려서부터 비틀스의 광팬이었다. 근데 매우 조숙한 어린이여서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만 열두 살 때 그만 덜커덕 임신을 해 딸 실라를 낳아버렸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아래로 연달아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존, 폴, 조지, 링고, 다섯째에 와서 이제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옛 비틀스 멤버의 이름을 따 스튜어트라고 했고, 여섯 번째 또 아들은 낳으니 더 가져다 붙일 비틀스 멤버가 없어 신경질을 벅벅 내다가 안무가 라이오넬 블레어에서 따온 ‘라이오넬’이라 불렀다. 이 라이오넬의 아버지가 첫째 딸 실라의 아버지와 같을 뿐이고, 나머지 다섯 명의 친아버지는 스칸디나비아,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어떤 나라 출신인 ‘것 같았다.’ 쉽게 말해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씀.
  이런 환경에서 나온 아이들이 보통의 영국인처럼 자라기는 매우 힘든 일. 멀리 갈 것 없이 맏이 실라만 보더라도, 문제적 환경과 문제적 인간들의 집합소인 디스턴 타운에 하나밖에 없는 스퀴어스 프리 초중등학교, 영국에서 경찰출동이 제일 많고, 중등학교 자격시험 합격률이 제일 낮고, 무단 결석률이 제일 높으며, 정학, 퇴학, 청소년 범죄 선도회 정도인 PRU 강등 비율이 가장 높아, 자연스럽게 소년원을 거쳐 청소년 감옥의 코스를 따르는 경우도 제일 많은 학교에서 완벽하게 공부도 하지 않는데도 수업시간에 들은 것만 가지고 전 과목 A를 받는 천재성을 지녔음에도 나중에 노숙자로 떨어질 운명을 지닌 자신보다 몇 살 더 먹은 흑인 아이와의 사이에서, 자신의 엄마와 같은 나이인 열두 살 때 그만 또 다른 주인공 데스먼드 페퍼다인을 출산해버렸다. 데스먼드, 데스, 데니는 생전에 딱 한 번 친부를 본 적이 있는 바, 공원의 벤치 위에서 잠을 자던 광경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것이 자기 생전 딱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본 자기 아들의 친아버지 모습이었단다.
  실라와 유일하게 같은 아버지를 둔 우리의 주인공 라이오넬 페퍼다인은,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스퀴어스 프리에서도 눈에 띄는 말썽꾼이라서 PRU를 거쳐 소년원, 청소년 감옥을 밥 먹듯 들락날락 거렸고, 성인이 돼서도 삶의 반 정도의 세월을 주로 폭력과 장물취득의 범죄에 연루되어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이다. ‘반사회적 행동금지 명령 Anti-Social Behaviour Order’을 하도 많이 받은 라이오넬은 그것도 근사한데, 싶어서 이름 자체를 페퍼다인에서 애즈보Asbo로 바꾼 인간이다. 리오넬 메시와 같은 이름을 쓰는 라이오넬에게 누구보다 빠삭한 세 가지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직업 범죄자의 삼위일체’라 불리는 악행과 감옥과 형법이었다. 책을 열면 벌써 로즈 놀스라는 남자를 병원에 입원해 장기 치료를 받아야할 만큼 폭행해 고소를 당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결코 고소 같은 걸 당할 인간은 아니지만. 라이오넬은 조와 제프라는 이름의 미친 핏불 테리어를 (엘리베이터가 21층까지만 올라오는, 즉 고장난)아파트 33층에서 사업상 필요 때문에 용맹성 증강을 위해 갖은 학대를 가해가며 키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업은 주로 채권추심이나 경쟁자 협박, 때로는 처치용을 말한다. 이 정도면 그림이 그려지시지?
  근데, 독후감을 읽는 분께서는 불쾌하고 지저분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마틴 에이미스의 코믹한 필설로 인해 경쾌하게 그리고 있으니 너무 그쪽으로 생각은 하지 마시고, 그레이스 페퍼다인 할머니에게 새로운 애인이 하나 생긴다. 바로 외손자 데스먼드. 데스먼드는 이제 열다섯 살에 불과하다. 데스는 학교를 거의 빠지지 않고, 수업 중에 졸지도 않으며, 선생을 공격하거나 화장실에서 마약에 절어 있지도 않는데다가 공부도 엄청 잘 해서 학교 안에서 겉도는 아이로 찍혀 흉포한 괴롭힘을 당할 충분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불과 여섯 살 많은 막내 삼촌의 막강한 영향력의 그늘 아래에 잘 다니고 있는 모범생이다. 모든 과목을 잘 한다. 진짜다. 가끔 이런 재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책 표지에 데스를 일컬어 “르네상스 소년” 즉, 다빈치처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뛰어난 소년이라 씌어 있는 거다. 근데 할머니가 사는 아파트에 배수관을 고쳐주러 갔다가 할머니가 슬슬 분위기 잡아가며 만지는 통에 정말로 성적인 접촉까지 간 것인데, 생각만 해도 징그럽지? 열두 살에 엄마를 낳고, 엄마가 데스를 또 열두 살에 낳아서 할머니와의 나이차이가 불과 24년, 이제 겨우 서른아홉 살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틀림없는 중범죄인데, 상대적 약자, 이 경우엔 손자인 데스에게 더 깊은 상흔이 남는다. 그는 남은 전 생애에 걸쳐 끔찍하지만 아물지 않은 상흔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관계가 끝이 나느냐고? 할머니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 학년 아래, 입술에 피어싱을 한 미소년 로이 나이팅게일과 관계를 시작하면서, 할머니도 손자와는 아무래도 좀 그래서 일찌감치 정리를 했던 거다. 그러나 아뿔싸, 막내 삼촌 라이오넬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로이를 납치해 모종의 장소에 팔아넘긴다. 쥐어뜯어 뜯긴 입술 살점이 붙은 피어싱을 데스에게 기념으로 준다. 나, 라이오넬의 엄마하고 했다면 이 정도는 각오를 하고 해야지.
  지금 데스는 삼촌하고 함께 산다. 몇 년 전, 슈퍼마켓에서 살짝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지만 금방 일어나 웃음을 지었던 엄마가 다음날 아침에 그만 숟가락을 놔버렸던 거다. 라이오넬도 그렇고 데스도 그렇고, 불과 여섯 살 많은 삼촌이 마치 아버지처럼 데스를 보살폈다고 주장할 정도로 많은 도움을 준 건 맞는 듯하다. 하여튼 삼촌이 시키고, 권하고, 가끔 강요하는 딱 반대로만 하면 세상사는 정답이 된다는 것을 일찍 깨친 데스먼드에게는.
  그런데, 크고 크고, 또 큰 사건이 벌어진다. 삼촌의 친구이자 사촌인 말론 웰크웨이와 한때 대외적으로 애인사이였던 지나 드래고의 결혼식 때 난리법석, 패싸움을 유도하여 크게 사고를 쳐서 또다시 교도소로 간 라이오넬을 면회 갔을 때였다. 평소 절대 복권 따위는 사지 않는 라이오넬이 단지 늙은 수감자를 괴롭히고 싶어서 복권 교환권을 강탈을 했는데 면회 온 데스먼드에게 로또 번호를 써 우편으로 보내라고 지시를 했었다. 근데, 데스먼드가 찍은 번호의 로또가 그만 무려 1억 4천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2,300억 원에 당첨이 된 거다. 와우!
  자, 여기까지만.
  이제 짧은 감상. 서양 유머 코드지만 요새 사람이라서 읽으면서 낄낄대는데 문제가 없다. 즐거운 시간을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지만, 내 경우에, 후반에 들어 불길하고 끔찍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 있고, 비슷한 유머 또는 말장난이 워낙 계속되니 나중엔 좀 질리는 감이 있었다. 그래도 이만한 블랙 유머를 선택하기 위하여는 행운이 필요하니 한 번 읽어봄 직도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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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창비시선 2
조태일 지음 / 창비 / 197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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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생 조태일. 스무 살 때 4월 혁명의 한복판에 섰고, 스물한 살 때 5월 쿠데타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종막(이라기보다 오랜 단절)을 목도한다. 스물네 살,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船舶선박>이 당선되어 중앙 문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등단 2년 전에 <다시 鋪道포도에서>를 전남일보에 실은 적이 있다. 거구와 튼튼한 골격을 지닌 이 사내의 스무 살 시대에는 이후에 꾸준하게 내보일 강건한 반골反骨의 기색을 발견할 수 없었다. 반면에 1975년에 간행한 《國土국토》는 출간하고 불과 몇 년 후 내가 읽어보려 책을 구하던 시기엔 이미 금서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이의 초기 시들이 당시 모더니즘을 구가하던 상투성과 모호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고, 나의 20대 시절에 약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國土국토》는 내 손을 떠났고, 이제 다시 책을 주문해 읽었을 때에야 그랬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다행이다. 알라딘에서 내가 책을 구입하고 곧바로 품절 표시가 떴으니. 그리고 아쉽다. 글씨체는 예전 금속활자 특유의 모습이로되 실제 활자로 찍은 질감이 나지 않아서.
  조태일. 말이 필요 없는 반골기가 가득한 강건한 반항시인. 1964년에 등단하여 굴욕적인 한일 협상과 베트남 파병이 결정되는 것을 본 그는 다음해인 1965년에 《나의 處女膜처녀막》 연작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항시인의 대열에 서게 된다. 시인이 말하는 ‘처녀막’은 자유이고, 민주주의이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민들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순간 5월의 쿠데타에 의해 열상裂傷을 입고 말아서 시인을 통탄하게 만든다.


  오월 내가 누워 있던 잔인한 새벽은 / 침실은 저 가까운 기억의 바다로 가 / 크게 생각하라. 크게 생각하라. // (중략) // 나의, 당신의, 상한 처녀막은 / 혁명으로(65년에 박정희 쿠데타라고 말하는 자체가 자살행위라 ‘혁명’이라 불렀던 것으로 짐작함) 파열돼서 부끄러워라. / 부끄러워라. 당신의 병사의, 시인의 처녀막도 / 혁명으로 파열돼서 정말 원통해라. / 아아, 내 작은 한줌의 자유여. 민주여. / 나의 상한 처녀막 근처에 웅성이는 / 고달픈 아우성을, 쫓기던 음성을 듣는가. (후략)  <나의 處女膜 ①> 부분.


  평론가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위의 연작시를 읽으면서 ‘울분의 시’라는 의미가 주는 명확한 한계, 즉 현재 처한 상태에 관한 슬픔과 분노와 그것들의 토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울분의 시’는 일찍이 김수영이 말했던 바,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방만 바꾸어버린 것과 유사하다. 그리하여 조태일 역시 반항시인에서 진정한 반항이란 뜻의 ‘저항시인’으로 한 발 더 나갈 것을, 독자들은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인 스스로도 시대가 점점 더 혹독한 정치적 겨울로 진입함에 따라 저항의 방편으로 시작詩作의 방향타를 조정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참외>를 읽어보면, 먼저 참외의 생김을 “누우런 주먹들”이라고 칭함으로써 그 달큰하고 부드러운 과육을 미각의 유혹으로 느끼지 않고 “불끈 쥐고 불끈 쥐고 사랑을 불끈 쥐고” 세상 곳곳에, “어느 놈들은 벌판에 홀로 홀로 남아 / 어느 놈들은 청과물시장 멍석 위에서 / 불붙는 살빛 불붙는 서러운 마음씨 부비며 / 누우렇게 허옇게” 우는 강건한 주먹들, 미음의 대상을 타도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무기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반면에 현실을 압도하는 파시스트 정권에 대하여 “저것들은 하느님이다. 얼굴 고운 악마님이다. / 때 찌든 삼베치마 앞에서 털 앞에서 / 땀나는 가슴 앞에서 콩크리트 앞에서 / 저것들은 하느님이다. 얼굴 고운 악마님이다.”라고 선언을 하니 이제 남은 건 때가 찌든 삼베치마를 입은 아낙들, 땀나는 알 가슴을 내놓은 남정들이 하느님, 얼굴 고운 악마님을 물리치는 것. 그리하여 “자유가 있느냐, 숨죽여 눈으로 물으면 / 민주가 있냐, 숨죽여 뼉다귀로 물으면 / 없다, 안 돼 있다, 뚜렷하게 대답하고 / (중략) / 침들도 그 말 좀 들어 보자고 /불끈 쥐고 불끈 쥐고 주먹을 불끈 쥐고 / 왼쪽 오른쪽 귀 앞세우고 솟아”나야 한단다.
  그러나 세월은 오리무중, 후배 시인 최승자 말대로 “아무리 기총소사를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터져 나온 것이 1972년 소위 ‘10월 유신’이라는 괴물. 대통령은 장충체육관에서 미리 선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하여 투표로 결정을 하고(첫 번째 투표에서 99%의 찬성을 기록했다.), 국회의원의 삼분의 일을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은 헌법의 효력을 일시 중지시킬 수 있는 초헌법적인 기구로 상승시키며, 임기 6년에 무제한 연임이 가능한, 본격적인 독재 체제로 접어든다. 유신을 기점으로 박정희는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황제로 등극한다.
  암울한 시기. 암살이 아니라면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 같은 독재의 시절. 이때 조태일은 마흔일곱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연작시 《國土국토》를 1971년부터 5년간에 걸쳐 마무리하고, 75년에 <國土序詩국토서시>를 덧붙여 이 시집을 간행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판매금지 조치를 당한다. 국토 연작은 애초에 국토-1, 국토-2... 이런 식으로 썼으나 시집 간행 즈음해서 각각의 시에 따로 제목을 붙였다고 시인의 말에 나와 있다. 당시 잡지에서 조태일의 시를 찾아 읽기에는 나도 너무 어렸을 적이다. <국토> 연작에서도 고르게 현 시대에 대한 슬픔과 울분과 통음이 등장한다. 동시에 저항의 노래도 포함을 하고 있으나, 때는 엄혹한 공포의 시대, 판을 뒤집자는 직설은 간혹 일신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했으니 깊숙한 은유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이렇게.


  번개가 친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흐린 눈빛이지만 부딪쳐 보자.
  천둥이 운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쉰 목소리지만 합쳐서 목청을 뽑자.
  벼락이 친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四足(사족)을 동원해서 맨바닥이라도 치자
  우박이 쏟아진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메마른 눈물이라도 곧게 떨쿠어 보자.


  아내야 흐린 날은 서러운 살결이나
  축축하게 부비다가
  전류가 잘 통하는 피뢰침을
  당나귀 귀처럼 머리 위에 꽂고
  의좋은 꼭둑각시처럼 춤을 추자
  높은 데 아니면 벌판이라도 좋다.
  피뢰침을 꽂고 춤을 추자.  <흐린 날은 - 國土·20> 부분


  이외에도 명편들이 즐비한 시집이다. 어떻게 지난 시절을 견디고 왔는지 뒤돌아보면 참 대견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안타깝기도 하다. 오래 기억해야 마땅할 시인을 나는 너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낸 것이 아닐까 싶어 조금은 송구한 마음과 함께 시집을 읽었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것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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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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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 전, 희랍에 정말 잘 생기고 힘도 좋은 홀아비가 살았다. 이 홀아비는 죽은 아내를 너무도 사랑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만날 리라를 타며 마누라 타령만 하고 있으니 이를 어쩔꼬. 어떻게 청승을 떠는가 하면, 아래 영상을 보시라. “에우리디케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프랑스의 카스트라토, 아니, 카운터테너 필리프 자루스키가 노래한다.

Che far​o senza Euridice


  이하 내용은 아실 것. 아내를 너무 사랑해 횃불 대신 황금가지를 들고, 아니다, 황금가지를 손에 들었던 인물은 아이네이스구나, 하여간 지하에 내려가 하데스와 담판을 지어 에우리디케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올리려는데, 여봐 오르페우스, 당신을 위해서 하는 얘긴데, 이왕 죽은 마누라를 다시 살린다고? 다시 생각해봐, 지하의 왕이자 유피테르와 동등한 힘을 가진 형제인 하데스가 진지하게 조언을 하다가, 도무지 오르페우스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할 수 없이 허락을 하니, 단 조건 하나를 건다.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보면 오르페우스의 아내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 그리하여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뒤에다 달고 지상을 향하는 끝없는 계단을 오르는데, 뒤에서 에우리디케는 연신 여보, 낭군, 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얼굴 한 번 안 보는 거야? 속도 모르고 쫑알대다가, 나중에는 아예 강짜를 부린다. 오르페우스가 처음엔 다시 아내를 찾았다는 기쁨 때문에, 그러다가 좀 귀여워서 참고 올라가긴 하지만 점점 신경질이 돋기 시작한다. 신경질도 삼세번이라 자꾸 여보 영감, 나 죽자마자 좋아서 변소 가서 웃었지? 아니면 어째 잘 지냈냐고 말 한 마디가 없어? 바가지 박박 긁는지라, 늦게나마 지옥의 황제 하데스의 충고가 머리에 떠올라, 그래, 그래도 명색이 신이 한 조언이잖아, 에잇 좋다, 이제는 끝내자, 이만큼이면 됐다, 하고 고개를 휙, 돌려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고,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까마득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이제 여자라면 신물이 난 오르페우스는 본격적으로 예쁘게 생긴 남자애를 사냥하기에 이르렀다가, 디오니소스 축제 때 성난 여인들에 의하여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는 끔찍한 최후를 맞는 이야기.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냥 심심해서. 안 알려준다.


  1980년 6월, 나폴리. 마테오와 줄리아나 데 니티스 부부, 남편 마테오는 택시 운전수, 아내 줄리아나는 산타루치아 그랜드 호텔의 청소부를 하면서 여섯 살 먹은 외아들 필리포를 키우며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하루는 줄리아나의 직장에 단체손님이 들어 조금 일찍 출근을 해야 해서 아빠 마테오가 꼬마 피포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로 했단다. 근데 아빠도 아침 일찍 공항까지 가는 손님과 예약이 된 상태라 피포를 깨워 함께 택시에 태워 손님을 공항까지 모셔드리기는 했으나 도시로 오는 길에 그만 지옥 같은 교통체증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거의 다, 나폴리 시내까지 와서. 이미 지각을 한 상태라 조급해진 아빠는 차를 길가 한 구석에 세워두고 꼬마 피포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뛰어가는 게 빠를 거 같아서. 피포가 어른인 아빠를 따라가기가 쉬웠겠어? 그래 자꾸 좀 쉬었다 가자고 하는데도, 지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빠진 아빠는 억지로 피포를 끌고 가다가 파체(Pace, 평화)골목과 포르첼라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선 가운데를 기어이 뚫고 들어간다. 부자가 군중들의 가운데쯤에 들어선 순간 갑자기 총소리가 귓전을 때려 본능적으로 아빠는 꼬마 피포를 품에 꽉 안고 인도에 팍 엎드렸지만, 조금 후, 총알 하나가 꼬마 피포의 복부를 관통해버렸고, 피포는 그 길로 세상을 등진다.
  1980년 9월, 장례식이 끝나도 부부에게 일상적 생활이라고는 없다. 마테오는 택시를 끌고 밤새 나폴리 시내와 시외를 손님도 태우지 않고 돌아다니고, 줄리아나는 기묘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남편 마테오를 볶아댄다. 장소가 이탈리아 남부도시 나폴리임을 유념할 것. 치욕을 당하고도 복수를 하지 못하면 가문의 수치이자 불명예가 되는 곳.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궁금하면 읽어보시라. 재미있으나 좋은 책은 아닌 거 같지만. 그리하여 줄리아나는 어느 날, 마테오에게 치명적인 주문을 한다. “내 아들을 돌려줘, 마테오. 내놓으라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내 아들을 죽인 놈의 대가리라도 가져와!” 그리하여 마테오는 결심한다. 그렇게 하기로. 이런 종류의 사건, 나폴리 조직폭력배 집단의 대빵을 가리는 전쟁은 결코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담당형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마테오는 살인자 토토 쿨라초를 찾아간다.
  2002년 8월. 필리포 스칼파로. 커피 전문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커피 귀신. 아버지 가리발도 스칼파로로부터 커피의 비법을 전수받은 명인이면서 청출어람. 그는 베르살리에라 레스토랑에서 오직 커피만 담당하는 직원에 불과함에도 워낙 실력이 좋아 레스토랑의 주인은 ‘베르살리에라의 마법 커피’라는 카피가 든 새 메뉴판을 주문해 인쇄중이다. 사실 필리포 스칼파로는 세상의 모든 욕망과 기분에 따라 다른 커피를 만드는 귀신같은 실력을 지닌 것으로 이미 나폴리의 명사가 된 인물이다. 나이 스물일곱 살에. 종업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개를 부르는 주인의 모습으로 커피를 주문한 토토 쿨라초에게 커피를 담은 쟁반을 가져간 필리포는 그의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친 다음, "토토 쿨라초! 토토 쿨라초!" 예리한 칼로 쿨라초의 배를 찌른다. 딱 죽지 않을 만큼의 깊이로. 최대의 고통을 느끼지만 결코 숨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 괴로움과 눈물만을 원하기 때문. 필리포는 쿨라초의 목에 칼날을 대고 파르테노페 거리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충격에 의해 쿨라초의 고통은 새록새록 심해지면서 계단을 오르고도 조금 더 걸어 세워놓은 차의 조수석에 늙은 조직폭력배를 던져 넣고 자기는 운전을 한다. 쿨라초는 고통이 너무도 심해 도망할 생각조차 못하고.
  필리포가 쿨라초를 데리고 간 곳은 1980년 6월에 짧은 생을 마감한 꼬마 피포의 무덤. 필리포는 그의 왼손을 피포의 비석 위에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개의 손가락을 잘라 그냥 땅 위에 떨어지게 만든다. 지하의 피포가 알 수 있도록. 이어서 오른손을 올린 다음, 바로 그날, 1980년 6월의 아침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검지와 중지를 절단해 그건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뜬다. 그가 원했던 것은 쿨라초가 살아남는 것. 아무 것도 손에 쥘 수 없고, 가장 기초적인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일어나기 위해, 머리를 빗기 위해, 코를 풀기 위해서 매번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자연사하는 것.
  이 두 장면이 총 24부 중에서 책을 열자마자 나오는 처음 세 부의 내용이다. 그러면 1980년 6월에서 2002년 8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도대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려고 초장에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했을까? 미안하다. 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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