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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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단편소설을 제일 잘 쓴다는 작가의 첫번째 장편소설. 이 한 편의 소설로 단번에 2017년 부커상을 거머쥐었다. 단편집 《12월 10일》 한 권 읽었을 뿐이라 손더스가 어떻더라, 감히 소감을 말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라고 아는데 미국에서는 상당한 모양이다. ‘현재’ 미국 최고의 단편작가라고 하면 뭐 그런가보다 할 수 있어도 시대를 막론하고 미국 최고의 단편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기는 쉽지 않을 듯. 《12월 10일》을 나름대로 인상깊게 읽어 그에 대한 소감을 보태자면, 다분히 엽기 그로테스크적 취향을 숨기지 않잖아?


  이 작품도 그렇다. 그로테스크. 제목 속의 ‘바르도’를 읽고 내 머리 속에서는 엉뚱하게도 브리짓이 생각났지 뭐야? 브리짓 바르도. 개 먹는 원조 국가 중국에다 대고는 찍소리 못 하면서 애먼 우리나라 사람들더러 개 먹는 야만스런 한국인이라고 설왕설래했던 여자. 참! 우리나라 20대 대통령 배우자가 강제하다시피 해서 법령이 통과된 진짜 야만스런 개고기 금지법도 저번 탄핵과 더불어 더불어민주당과 1찍들이 이 법 무효화시키는 법안은 내지 않으려나? 아이 씨. 난 개고기 안 먹는다니까. 세상의 많은, 거의 모든 ‘금법禁法’을 싫어하는 인간일 뿐이라니까.

  그건 그렇고, 하여간 이 책의 바르도는 브리짓 바르도가 아니라, 작품 뒤에 달린 “옮긴이의 말”에서 요즘 우리나라에서 제일 바쁜 역자 정영목이 네 페이지 분량으로 쓴 해설을 인용하면 ”티베트 불교에 나오는 용어를 티베트어에서 음차한 것으로 우리말로는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라 하며, 죽고 나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를 가리킨다(기독교 계열에서 말하는 연옥이나 림보와 약간 겹치는 면이 있을 듯하다).”라고 설명해 놓았다.

  단테가 만들어 수백년 잘 써먹은 연옥이란 장소는 애초에 성경, 오래된 계약서나 새로 만든 계약서, 즉 구약과 신약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그곳에 떨어진 인간들은 별 잘못 없이 그저 예수를 믿지 않아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를 믿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천국으로 가지 못해, 대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위하여 열라 기도해주면 천국으로 갈 수 있어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만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누워 있든지 앉아 있든지 하여간 빈둥빈둥.

  반면에 중음이란 곳은 육신, 이거 한자어로 써야 하는 데, 肉고기 身몸, 고기로 된 몸에서 떠난 정신이, 혹자는 이걸 영혼이라고 부르고 싶겠지만, 어쨌거나 정신, 영혼, 하여튼 아직 무화되지 않은 뇌파가 얼른 염라대왕 전에 출두해 살아생전 잘잘못을 평가받아 천국과 지옥 또는 환생의 사이클을 돌아야 하건만 대두분의 뇌파와 달리 아직 살아생전 맺은 드런 정을 깔끔하게 정리하거나 잊지 못한 것들이 휘휘 날아다니는 공간이고, 이런 뇌파들의 모임을 우리는 간단하게 귀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바르도가 중음. 이 속에 들어간 링컨. 링컨이 우리가 아는 그 링컨, 말단비대증이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맞느냐고? 반은 에이브러햄, 나머지 반은 메리 링컨. 즉 둘 사이의 아들 윌리 링컨이다. 아, 링컨의 아들 윌리가 죽어 아직 천국에 들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허공을 배회하고 있구나, 저런. 이런 정도만 이해하고 넘어가자.


  중음에 있는 영혼. 그걸 우리는 좋은 말로 중음신, 놀랍게도 여기서 신은 ‘귀신’ 할 때의 신神이 아니라 몸 신身자를 쓰는데, 그럼에도 중음신은 귀신을 일컫는 말이다. 이 속에서 스토리를 만들려면 다른 귀신들도 있어야겠지?

  볼먼씨는 46세. 그녀는 18세. 볼먼씨는 늘씬하지도 않고, 머리도 약간 벗겨졌고, 한쪽 다리를 절고, 나무 틀니를 하고 있다. 볼먼씨가 하고자 했던 결혼이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볼먼씨는 늙고 추하고 지쳤다는 걸 스스로도 잘 이해하고 있다. 이 혼인은 정략에 뿌리를 두었다는 것도.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볼먼씨의 돈이 필요한 거였겠지. 볼먼씨는 아내를 보면서 아내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결코, 꿈도 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하여 결혼 초야. 아내의 방에 든 볼먼씨는 젊은 아내에게 제안한다.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자고. 겉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결혼이 완성된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부부가 아닌 친구가 되자고.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한다. 볼먼씨는 아내에게 정중했고, 친절했고, 활수하게 베풀어 먹고, 입고, 친정식구 대하는 걸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서재의 볼먼씨 책상 위에 아내가 쓴 편지가 놓여 있었다.

  “우리가 함께 하는 행복의 영역을 저에겐 아직 낯선 친밀한 방식으로 확장하기 바라요. 여인이 되는 과정을 볼먼 씨를 통해 만들어갔으면 좋겠어요.”

  28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이렇게 비로소 둘의 몸은 합해졌고, 활달한 인쇄업자 볼먼씨는 더욱 활기로워졌으며 아내는 서서히 당당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입가에 미소가 떨어지지 않는 부부. 그러나 행복은 그리 길지 못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기쁜 마음으로 인쇄소를 향한 볼먼씨. 문제는 인쇄소에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사무실에 앉아 밀린 서류를 정리하던 볼먼씨 위에서 건물의 들보가 떨어져 볼먼씨의 “여기”를 때렸다고 하는데 여기가 어디를 말하는지는 결코 밝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볼면씨는 자기가 귀신이 되었는 지도 모르고 병자-상자sick-box, 쉬운 말로 하자면 관coffin에 담겼다가, 며칠 후엔 병자-달구지, 즉 장의사 수레에 실려 교회를 거쳐 병자-두둑, 묘지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늘에서 떨어진 들보에 뭔가가 깨져 볼먼씨가 육신에서 나왔고, 한 때는 볼먼씨라고 불렸던 고기 덩어리를 관에 넣어 교회로 끌고 가서 신부 또는 목사가 몇 번 기도를 하더니 다시 끌고 가 파묻었을 뿐, 볼먼씨는 그냥 이렇게 있는 거다. 어디에? 바르도. 중음에. 그리하여 볼먼씨, 시간이 가면서 이 바르도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로저 3세는 부모에게 ‘미안하다’는 요지의 편지를 남기고 도기 대야 위에 손목을 올려놓고 그걸 칼로 아주 모질게 베어 버렸다. 그래도 동맥까지 절단한 거 같지는 않고, 정맥은 확실하게 그은 모양인데, 어떻게 아느냐 하면, 동맥이 잘렸으면 순식간에 과다출혈 및 쇼크로 까무러쳐야 마땅하건만, 로저 3세는 흘러나온 피와 대야의 흰색을 배경으로 갑자기 번지는 충격적인 붉은 피, 이 기막힌 일종의 보색대비 때문에 속이 메스꺼워지더니, 어지럼증을 느껴 바닥에 주저 앉아서 잘 됐다, 이제 죽겠구나, 이런 생각 대신 조금 쪽팔리지만, 어, 이게 아닌데, 살고 싶은 걸,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그리하여 방을 나와 층계를 향해, 층계에서 아래층으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갔고, 얼른 하인들 눈에 띄어야 바뀐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거기서도 역시 두 발과 한 손으로 기어 식당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어이 바르도의 두번째 자리에 오를 뿐이었다.


  1862년 초. 미국의 대통령은 매년 겨울 정기적으로 공식 만찬을 여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1862년은 미국에서 내전이 일어나 한 전투에서 3천명이 전사한 불운한 시기라, 과연 백악관 만찬을 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가와 정가에서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를 깊이 숙고한 메리와 에이브러햄 링컨은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3회에 걸친 만찬을 예정대로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링컨 가의 두 아들 테드와 윌리는 시즌을 맞아 많은 선물을 받았다. 작은 조랑말을 선물받은 윌리는 너무 기뻐서 그렇게 추운 겨울날 두터운 외투도 입지 않고 날마다, 하루도 빼지 않고 하루 종일 말에 올라 달리고 또 달렸다. 미국 동부의 겨울엔 비가 많이 오는 거 아시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윌리는 말에 기어 올라갔는데, 대통령 링컨은 자기가 워낙 건강 체질이고 살면서 의사 만난 적도 없거나 거의 없기도 하고, 원래 아이들 양육 방식도 하고 싶은 거 못하게 하는 걸 싫어해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그건 메리 여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지?

  그랬더니 윌리는 단박에 감기에 걸렸고, 감긴줄 알았는데 이게 독감으로 넘어갔고, 독감이 조금 지난 후엔 의학에 조예가 없는 엄마 메리 링컨 여사가 보기에도 허파에 울혈이 생긴 거 같았다. 이미 메리 여사는 만찬용 드레스와 수많은 보석 치장물을 달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럽 왕국의 왕자, 귀족, 대사를 망라하고, 전쟁 중 잠시 휴가를 낸 장군들까지 모두 모인 정기 만찬이 성공리에 치뤄지고 있음에도 대통령 링컨 부부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 진짜 웃을 수는 없던 거였다. 윌리가 좀 낫나? 싶어서. 하긴 의사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곧 나을 것이라고 확답을 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후 윌리는 점점 쇠약해지더니 드디어 링컨의 비서 윌리엄 스터도드가 공식적으로, 가망이 전혀 없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정확한 날짜는 나오지 않는데, 오후 다섯 시, 링컨은 말했다. 내 아이가 갔네… 정말로 가버렸네!

  사람을 끄는 인간성에서나 재주와 취향에 있어서나 아버지를 빼다 박은 아이 윌리. 열 살? 열한 살?

  윌리는 몸에서 나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병자-형체를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를. 가만히 아버지에게 몸을 기대 서있다는 것도 아버지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좌절감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윌리는 급기야 다시 자신에게 들어가본다. 그랬더니 링컨은 자신이 안고 있는 것의 상태가 바뀐 것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로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윌리는 그 안에 계속 있을 수 없어 다시 기어 나왔다.

  1862년 2월 25일 새벽 한 시.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은 아들의 묘당을 찾아온다. 묘당을 지키는 묘지기는 해가 진 다음엔 누구도 묘지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상대가 대통령임에야 금지할 수 없었다. 아들 윌리의 몸을 담은 묘당에 들어간 키 큰 링컨은 윌리의 관을 열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언제나 자기가 윌리를 보살피겠다고 약속한다. 아니, 이걸 듣는 윌리는 아버지가 그렇게 약속한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다른 아이들처럼 천국이나 연옥에 일찍 가기는 다 튼 것이지. 아버지가 지켜주기로 했는데 거긴 뭐하러 가느냐고.


  우리말로 아무리 잘 번역했다 쳐도 원어 속의 디테일한 글의 기교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알기 쉽게 더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귀신들 모여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귀신도 귀신 나름이지 때는 미국 내전으로 당장 한 전투에서 죽은 귀신만 3천 마리, 노예 상태에서 몰살당한 아프리칸 미국인들의 한 맺힌 귀신이 또 수천 수만 마리 있을 터. 이런 정서를 다 체감하고, 단어 하나 하나의 맛을 제대로 알려면 이 작품을 원서가 아니라 번역으로 읽는 일은 쉽지 않겠다. 더구나 어떻게 2017년에 부커상을 받았는지, 이 작품이 어떤 면에서 부커상을 받을 만한 지 납득하기도 쉽지 않다. 하긴 어제 읽은 스위프트의 <마지막 주문>도 윌리엄 포크너의 플롯을 그래도 채용했음에도 부커상을 받기는 했지만. 부커상도 가끔은 아무나 막 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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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9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판 귀신 얘기? 아님 식스센스?
마지막 부커상 문장에서 빵 터져서 유쾌한 리뷰 읽기가 되었습니다. 다만 딱히 끌리는 책은 아니군요. ㅎㅎ

Falstaff 2025-09-10 03:34   좋아요 1 | URL
미국판 귀신 커뮤니티랍니다. ㅋㅋㅋㅋ
다음 달에 업로드할 저 노르웨이 피오르 지역의 귀신 커뮤니티 이야기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하고 더 비슷합니다.
귀신 이야기 싫어하는데 요즘 우연히 이런 이야기 연달아 읽어서 막 짜증나요!

유부만두 2025-09-1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힘들게 읽은 기억이 나요. 정신사나운 소설이라고 독후감을 남겨놨네요. ^^
 
마지막 주문 - 1996년 부커상 수상작
그레이엄 스위프트 지음, 손영도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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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엄 스위프트, 1949년 5월생이면 지금 76세. 연식이 꽤 됐는데도 위키피디아에 자기 프라이버시에 관해 별로 밝히지 않았다. 영국 남부 출신이고, 사립 기숙학교인 덜위치 칼리지를 졸업한 걸로 보아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집에서 자란 것 같다. 우리한테도 알려진 소설가 가운데 레이먼드 챈들러와 <영국인 환자>를 쓴 마이클 온타치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책의 앞날개를 인용하면, 케임브리지 퀸스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장학금을 받아 요크대학 영문학과 대학원을 다녔지만 학위를 받지 않은 상태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경비원, 농장 노동까지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데, 아마도 잠깐 그런 일도 했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교사로 일하며 글을 썼다니까. 1983년에 발표한 <워터랜드>가 영화화되면서부터 돈 걱정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을 것 같다. 이 작품은 부커상 숏리스트까지 올라갔다가 미역국을 먹었고, 이후 13년이 지난 1996년에 오늘 소개하는 <마지막 주문 Last Orders>로 기어이 부커상을 받았다.

  이 책은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냈다. 대개 대학 출판부에서 낸 작품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재미없다는 거. 고대출판부에서 나온 책 가운데 재미없게 읽은 것이 막스 프리쉬의 <몬타우크>, 페터 바이스가 쓴 <소송, 새로운 소송>, 몰리에르 희곡 <아내들의 학교>, 카베사 데 바카의 <조난 일기> 외 몇 권이 더 있는 거 같은데 하여간 재미있게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혹시 전문 상업 출판사가 재미난 거 다 채 가고 남은 것들만 대학 출판부 손에 떨어지는 거 아냐? 이 대학만 그런 게 아니고 웬만한 대학 출판부에서 낸 책들이 어찌 그리 알뜰하게 재미가 없느냐고.


  런던의 런던탑과 빅벤 맞은편 버먼지 스미스필드는 정육업 때문에 피투성이의 중심으로 이름을 냈다. 삶과 죽음 그 자체라서 이 거리에 세인트바트 병원이 있고 예전엔 정기적으로 참수형과 교수형을 집행하던 뉴게이트 교도소 자리에 중앙형사법원이 들어선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 물론 영국인, 특히 런던 사람이라면 말이지만. 1903년 이 거리에 도즈 선생이 가족 정육점을 열어 옥호를 “도즈 부자의 가족 정육점”이라 했다. 여기서 도즈 부자라고 함은, 돈 많은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아빠와 아들을 말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잭 아서 도즈 씨였다. 처음부터 잭이 정육점 주인, 조금 나쁜 말을 쓰면 푸주한이 되고자 한 건 아니었다. 길 건너에 있는 세인트바트 병원에 유난히 예쁜 간호사들이 많은 것을 보고 자란 사춘기 시절 잭은, 의사 한 명이 서너명의 간호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나도 열쒸미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말 거야, 각오를 다졌건만 당연히 메스 대신 발골도를 쥐게 되었다.

  잭이 정육점 2대 사장이 되기가 얼마나 싫었는지 설명하자면, 젊음이 탱천할 시기에 집에서 토껴 홉 농장에 가서 홉 따는 일까지 했다. 물론 한 해 잠깐. 여기서 잭은 따라는 홉 대신에 아름다운 에이미 아가씨를 만나 보자마자 홀랑 반해 눈이 휘까닥 뒤집힌 김에 결혼을 해버렸다. 그리고 딸을 낳아 아이 이름을 ‘준’이라 했다. 이후 곧 2차세계대전 발발. 잭은 다른 젊은이들보다 한 발 일찍 입대해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했다. 6개월 후, 어떻게 되느냐고? 죽어? 다쳐서 돌아와? 아니다. 반년 후에 같은 부대에 영국인 시각으로 난쟁이 반바지만 한 조그만 키의 병사가 전입 온다. 그래서 너는 어디서 왔냐? 물어보니까 글쎄 버먼지 스미스필드 출신이라는 거 아냐? ‘도즈 부자의 가족 정육점’에서 한 골목 꺾으면 바로 나오는 고철 수집상집 아들이었던 거다. 그래서 어제 읽은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의 주인공 레니와 조지처럼, 소대가 작전을 나가면 무지하게 덩치가 좋은 잭이 난쟁이 반바지 레이의 앞에 서서 수색을 했는데, 만일 잭이 레이를 만나자마자 자랑삼아 지갑 속 아내 에이미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래서 레이 역시 단박에 에이미한테 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레이가 앞장서서 수색을 했을 거라고 먼 훗날 레이가 추억한다. 잭이 총에 맞아 죽어주면 지갑과 사진을 갖고 버먼지의 정육점에 가서 에이미에게 우짜고저짜고….

  근데 잭과 에이미가 낳은 딸 준은 안타깝게도 정신지체를 갖고 태어났다. 준이 스물일곱 살이 되도, 쉰 살이 되어도 두 살배기 지능에도 미치지 못하는 운명이다. 전쟁터에 보병부대 소총수로 투입된 병사들의 평균적 위험을 감수한 잭과 레이는 서로 상대가 배려하고 결정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위험을 공유했고, 이건 죽음이 이들을 떼어놓을 때까지 진한 우정을 이어가게 했다. 이때 잭과 레이가 적군에게 당한 폭격보다 훨씬 심한 정도로 독일군 전폭기가 런던의 버먼지를 때렸다. 다행히 잭의 아빠가 운영하는 정육점도, 레이의 아빠가 운영하는 고철수집 가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무지하게 많은 건축물이 파괴되었는데, 이때 집 하나가 와장창 무너지면서 젊은 엄마, 아빠가 그 자리에서 죽고, 아들아이만 하나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남았다. 당시 정신지체 딸 준을 요양원으로 보낸 잭 부부는 빈스라는 이름의 고아 소년을 데려와 성姓 도즈를 부여하고 양자로 키웠다. 서양사람들은 입양을 해도 굳이 입양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모가 나서서 사실은 네가 입양 어쩌고 저쩌고 할 이유는 없는 법이라서 잭과 에이미도 그렇게 했건만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나중에 알게 됐지만 빈스는 도즈 부부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질 수밖에 없었다.

  에이미 가슴에 못이 콱 박힌 거 하나. 뭐겠어, 딸 준 이야기지. 엄마 에이미는 준을 요양원에 보낸 이후에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월요일과 목요일에 면회를 갔다. 단, 40대 시절에 12주 동안 목요일에는 가지 못한 일 빼고. 반면에 잭은 단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고, 면회 다녀온 아내에게 준에 대하여 묻지도 않았고, 일상 대화 중에도 준은 한 번도 화제에 올라온 적도 없으며, 심지어 빈말이라도 준을 발음하지도 않았다. 이건 에이미가 잭과 준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갈림길을 만들었고, 그리하여 당연히 준을 선택했으며, 훗날 잭이 위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지만 의사가 배를 열자마자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채 즉각 다시 봉합을 하고, 대책 없음을 선언한 며칠 후에 잭이 스틱스 강을 건널 때 준의 50세 생일, 또한 반스의 40세 생일을 맞이할 때까지, 에이미는 한 번도 잭을 선택해본 적이 없었다. 신기하지? 그러고도 어떻게 혼인을 이어간데? 하긴, 잭은 그럼에도 다른 로맨스를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가벼운 로맨스라도. 에이미는? 안 알려줌. 난쟁이 반바지를 열두어 번 입어보긴 했음.


  여태까지 길게 쓴 것이 뭐? 그렇다. 변죽 울린 거다. 이제부터 진짜다.

  잭한테는 절친 세 명이 있다. 당연히 레이. 그리고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프로권투 미들급 선수권자였던 레니와 대를 이어 한 점포를 운영하는 장의사 빅. 레이는 충분하게 이야기했다.

  레니와 아내 존Joan 사이에 샐리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권투 시합에 나가 준결승에서 장렬한 KO패를 당한 이후 야채장사를 하는 레니는 이 아이를 잭의 양아들 빈스와 엮어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고기를 사러 벤을 운전해 장거리 출장을 갔던 잭이 블랙번 근처에서 주디라는 이름의 열일곱 살 먹은 가출 아가씨를 집에 데려와 숙식제공에 약간의 임금을 주고 직원으로 채용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건만 이제 자주 얼굴을 맞대야 하는 빈스는 당연히 주디라는 가명을 썼던 아가씨 맨디와 친해지게 됐고, 급기야 반바지 레이 아저씨의 캠핑카를 빌려 거기서 맨디와 했고, 이후 아예 캠핑카에 맨디를 살게 하고 시간 날 때마다 하더니, 맨디가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결혼해버렸다. 이 사이인지 이후인지 하여간 샐리는 지붕 쳐다보는 강아지 신세가 되어 아무 남자를 만나 사랑해버리고, 결혼해버렸다. 사기꾼에 폭력 전과가 있는 남편과 살다가, 이 왕년의 사기꾼이 단 한 명의 소유자밖에 거치지 않은 거의 신품 BMW를 훔쳐 빈스에게 팔려 했다가, 빈스가 업계의 양심을 지켜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다시 교도소에 가서 나랏밥을 먹게 되어 빈스에게 좋은 감정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안 사겠다면 되지 그렇다고 친구지간에, 왕년의 친구 남편을 경찰에 고발을 한다고? 이런 심정이었지 뭐.

  장의사 빅은 직업에 어울리는 옷과 태도를 평소에도 유감없이 과시하고 사는 왕년의 해군. 친구들은 빅이 자기들보다 오래 살아, 자기들이 죽은 다음에 염도 잘 먹여주고, 장례도 잘 치뤄주기를 바란다. 이걸 빅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른다. 평소 태도가 이러니 세상 사람들하고 유감 생기는 행동과 표현을 해 본 적 없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 그러나 장의사라는 직업이 반은 왕족이요, 반은 문둥이라. 자신한테 쏟아지는 경멸과 경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이 세 친구와 양아들 빈스가, 잭이 죽어 장례를 마치고, 화장을 해서 이제 가로 세로 15cm, 높이 30cm가량의 판지 상자 속 플라스틱 통 안에 든 하얀 골분 상태로 이들의 단골 술집 “마차와 말들” 주점 바 위에 놓여 있다. 이제 세 친구와 입양 아들 빈스가 잭의 유언대로 그의 뼛가루를 뿌리러 가려 한다.

  잭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내 에이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수신인은 에이미가 아니고 “관계자 제위”였다. 어쨌든 말하기를:

  “마게이트 잔교 끝에서 내 유골을 뿌려주기 바랍니다.”

  시절은 만우절 다음날 4월 2일. 목요일. 일찌감치 준과 잭 사이에서 준을 선택한 에이미는, 에이미의 말을 신뢰한다면, 다른 요일이면 몰라도 목요일이니 자신은 잭의 유골을 뿌리러 가지 않고 평소처럼 준을 면회하러 가겠으니, 친구 세분과 빈스가 유언을 따라주던가 말던가.

  평소 “마차와 말들” 주점의 주인 버니와 친했던 잭. 버니는 기꺼이 나머지 친구들에게 술 한 잔을 무료 제공하고 자신도 참여하지 못한 유감을 표현한다. 술 한 잔씩 들이켜니 주점 밖에 차를 댄 중고차 딜러 빈스. 그가 끌고 온 차가 벤츠 S-클래스 380. V8에 6년된 중고지만 시속 2백km까지 전혀 흔들림 없이 주행한다. 이 차를 타고 잭의 유골을 뿌리러 가는 하루를 쓴 작품.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히고 설킨다.

  그러나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 이거, 이 플롯, 어디서 본 거야,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래 궁리하기 시작. 음. 윌리엄 포크너가 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독후감 쓰려고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그레이엄 스위프트가 1996년에 부커상을 탈 때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와 유사한 점을 들어 시비한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도 시비한 사람들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이걸 어쩌나, 비슷해도 너무 비슷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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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8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도 부커상을 받았단 말인가요? 유사설정이 많음에도 상을 받았다는건 그만크 뛰어났단 얘기일까요?

Falstaff 2025-09-08 17:19   좋아요 1 | URL
그렇다고 봐야지요. 나름대로 괜찮은데요, 플롯은 좀 문제가 된다고 아니 말할 수 없네요. 읽는 사람에 따라서 그냥 스토리 상 유사성이라고 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이런 빌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이면 책이 잘 팔리는 거야 그렇다고 치고, 유명 문학상을 넙죽 안겨주는 건 좀 걸쩔지근 하지 않았나 싶은 겁니다. 상만 받지 않았어도 그리 크게 까탈을 받을 거 같지는 않다는 말씀입지요. ㅎㅎㅎ 사는 일이 다 그렇지요 뭐.
 
생쥐와 인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2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비룡소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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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인벡의 중단편소설. 단편이라고 했으면 딱 좋겠는데, 본문이 191페이지에서 끝난다. 편집도 널럴하다. 눈이 전혀 피로하지 않다. 우리나라 같으면 장편이라 부르는 출판사도 있고, 경장편이라 칭하기에 딱 좋은 분량일 수도 있다. 이런 구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친애하는 작가 제럴드 머네인처럼 그냥 ‘픽션’이라고 하자.


  스타인벡은 전형적인 서부 작가다. 총질하는 서부극이 아니라 주로 서부지역을 무대로 작품을 쓰는 작가라는 말이다. 동부, 특히 뉴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는 쌔고 쌨는데 중부와 서부는 얼른 떠오르는 작가가 별로 없다. 이 가운데 한 명이 스타인벡. <생쥐와 인간>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한 2백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솔대드 근처의 개빌런 산맥 언저리, 작은 강이 흐르는 오붓한 농장지역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책을 열면 두 남자가 보인다. 둘 다 청바지와 놋쇠단추가 달린 청재킷 차림이다. 볼품없는 검은 모자를 썼고, 둘 다 둘둘 만 담요를 어깨에 걸고 있다. 앞에 가는 남자는 작은 몸집에 검게 탄 얼굴을 한 영리하게 보이는 모습이다. 날카롭고 야무진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뒤를 따르는 남자는 반대로 거대한 덩치에 큰 눈과 흐릿한 눈동자 색을 갖고 있다. 한 눈에 봐도 순한 사람이지만 대단한 완력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작은 남자의 이름은 조지 밀튼. 큰 덩치는 이름이 재미있게도 레니 스몰. 이렇게 큰 스몰 봤어? 나중에 누가 이렇게 농담한다.

  이들은 솔대드의 머리 앤 레이 농장 사무소에서 취업카드와 버스표를 받아 버스를 타고 오다 내려서 농장으로 일자리를 얻으러 가는 길이다. 여기 오기 전에는 북쪽 위드에 있는 농장에서 일하다가 레니가 말썽을 일으켜 도망온 참이다.

  먼 거리를 걷다가 물가에 이르러 쉬기로 결정한 조지. 무엇이든 조지가 결정하고 지시한다. 레니는 조지가 하는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조지가 레니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빼앗는다. 죽은 생쥐다.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닌 클라라 아주머니가 레니에게 산 생쥐를 잡아 주던 것이 버릇이 됐다. 레니는 부르러운 걸 만지기 좋아한다. 죽은 쥐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엄지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조금쯤은 행복해한다. 그러나 죽은 건 썩는다. 썩어가면서 악취와 진물을 토해낸다. 조지가 죽은 쥐를 저 멀리 던져버린다. 레니는 섭섭하다. 이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조지는 레니에게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작지만 땅을 사서 농사도 직접 짓고 토끼도 키울 거다, 그러면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는 네가 키워라, 이렇게 무마하고는 했다. 그래서 레니는 꿈이 토끼를 키우는 농장에 사는 일이다.

  위드에서도 사건은 그렇게 벌어졌다. 레니는 손으로 예쁘고 부드러운 것을 쓰다듬는 걸 좋아한다. 벨벳 천도 좋아한다. 부드러우니까. 위드에서 여자가 입은 빨간색 드레스를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빨갛고 부드러운 치마를 손으로 잡았고, 여자는 악을 쓰면서 얼른 손을 치우라고 했다. 레니는 손을 뗄 수 없었다. 그냥 “부드러움”을 만지기만 했을 뿐이고, 나쁜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더 악을 썼고, 그래도 레니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여자는 이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비명을 들은 남자들이 주위에서 몰려왔는데, 여자는 레니가 자기를 강간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조지는 레니를 데리고 숨었다가 밤이 오자 위드에서 도망쳐 길도 모르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레니의 이모 클라라 아주머니와 정이 들어 차마 레니가 당하게 내버려둘 수 없어서.


  이게 문제다. 클라라 아주머니가 살아 있을 때, 생쥐를 잡아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라고 레니에게 주면, 손으로 살살 문지르기만 해도 어떨 때는 생쥐가 레니의 손가락을 물었다. 한두번은 참았지만 계속 물어뜯으면 그러지 말라는 의미에서 엄지 손가락으로 살짝 누른다. 생쥐는 레니의 거대한 손가락 힘을 이기지 못해 목이 부러져 죽어 버린다. 레니는 생명이 아니라 부드럽고 예쁜 것을 만지기 좋아해, 생쥐가 죽었어도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거였다.

  그러니까 레니는 좀 모자란 사람이다. 일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라고 볼 수 있다. 조지가 무엇을 이야기하면 금방 잊는다.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조지가 레니에게 말한다. 물가를 따라 5백 미터를 가면 우리가 일할 농장이 나온다. 주인을 만나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네가 말을 하면 주인은 너를 고용하지 않겠지만, 네가 일하는 모습을 먼저 본다면 너를 고용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그런데 일을 하다가 만일에 문제가 생기면 여기 이곳, 내가 너한테 죽은 생쥐를 빼앗아 저 멀리 풀숲에 던져버린 이곳에 와서 숨어 있어. 그러면 후에 내가 와 너를 도와줄 테니까.

  이 장면을 읽는 독자는 오후에 농장에 가서 일자리를 얻지 않고 이곳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아침에 가려는 것이 조지가 레니를 떨어내고 혼자 제 갈 길을 갈 모양이구나, 짐작할 수도 있다. 추리는 독자 마음이니까. 그러나 아니다. 콩 통조림을 저녁으로 먹고 숲의 빈터에서 밤새 잠을 자고 아침에 농장을 찾아가 일자리를 얻는다. 그러니까 작품이 끝날 때까지 조지는 레니 옆에 있는다는 뜻이다.


  땅딸막한 농장주인 역시 청바지를 입었다. 노련한 농장주인이다. 레니의 정신이 그리 맑지 않은 걸 단박에 알아차리지만 농장 일꾼한테 머리 좋은 건 별로 필요 없는 일이라서 그 자리에서 둘 다 고용하고 마부 슬림의 반에 배치한다. 슬림은 현명한 일꾼이다. 일꾼 모두 인정하고, 라이트급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주에서 우승까지 했던 주인의 아들 컬리도 함부로 까불지 못하는 위압적인 인물이다. 그가 조지와 레니를 여러 면에서 도와준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슬림은 암캐를 키우는데 이번에 새끼 여덟 마리를 낳았다. 비실비실한 다섯 마리는 강에 빠뜨려 죽였고 세 마리가 남았는데, 부드럽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레니한테 한 마리 주라고 조지가 부탁해 흔쾌하게 그렇게 한다. 레니는 일만 끝나면 아예 마구간에 있는 개집 옆으로 가서 강아지를 주물럭거린다. 개 키워보셨지? 새끼를 자꾸 주무르면 죽는다. 이걸 ‘손 탄다’, 라고 한다. 나도 어린 시절에 많이 들은 말이다. 그런데 레니는 자기가 얻은 강아지를, 이제 나고 사나흘밖에 안 된 새끼를 품에 안고 같이 자려고 한다. 안 될 말이다. 그래서 개집에 가져다 놓고 줄창 그곳에 찾아간다.

  그러다가 한 번은 강아지가 레니의 손가락을 물었다. 갓난 강아지가 물었다 한들 그게 아프기야 하겠느냐만 그러지 말라는 의미에서 엄지손가락으로 새끼의 머리통을 뒤로 살짝 밀었는데 그만 목이 뚝 부러져 죽고 말았다.

  농장주인의 아들이자 전직 권투선수였던 컬리는, 미국에선 작은 체구에 속하는 라이트급, 일꾼 중에 누구는 웰터급이라고 하지만 하여튼 크지 않은 체구에 단단한 몸을 가졌다. 자신의 작은 체구에 모종의 열등감을 가졌는지 꼭 덩치 큰 사람하고만 싸우는 습관이 있다. 이런 컬리 눈에 레니가 들어왔다. 여러 일꾼이 보는 앞에서 일방적으로 컬리가 싸움을 걸어 레니를 두드려 팬다. 그래서 조지가 큰 소리로 레니에게 “컬리를 붙잡아. 꼼짝 못하게 붙잡으라고!”하고 명령했고, 코피가 나고 눈이 찢어진 레니가 컬리의 주먹을 자신의 어마어마하게 큰 손으로 꽉 쥔 다음 꼼짝 못하게 힘을 주니까, 순식간에 우드득, 컬리의 손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정말 어마어마한 괴력이다. 강아지 목뼈 부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컬리가 레니에게 시비를 건 것이 몸가짐이 헤픈 자기 아내를 찾아 일꾼들 숙소에 들렀을 때였다. 신혼 부부인데 컬리가 아내한테 하는 말이라고는 누구와 싸워 잽과 원투 스트레이트로 피떡을 만들어버렸다는 얘기뿐이어서 남편한테 신물이 난 여자가 일꾼 가운데 이놈도 좋고 저놈도 좋고 기웃거리던 모양이었다. 일꾼들은 컬리의 나쁜 성격도 알고, 여자의 헤픈 몸가짐도 알아, 그녀를 멀리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컬리의 아내한테 아름답고 부드러운 것이 하나 있었으니… 레니는 어쩔 수 없이 농장에 오기 전날 콩 통조림으로 저녁을 먹고, 잠을 잤던 숲 속 빈터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고, 조지는 약속한대로 아무도 모르게 그를 만나러 그곳으로 향했는데, 아쉽지만 독후감은 여기에서 끝.




별 4개는 아쉽고, 5개는 좀 과하고.... 좋은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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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9-05 0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주는 라인 업이 화려했다.
크리스타 볼프, 외젠 이오네스코, 마르셀 프루스트, 싱클레어 루이스에 존 스타인벡까지. 1년에 한 번 나오기도 힘들지 않나 싶군.

유수 2025-09-05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무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구판으로 읽어서 이 표지와 제목은 안 익숙하지만요. 리뷰 잘 읽겠습니다!!

Falstaff 2025-09-06 05:3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바람돌이 2025-09-05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니 어떡해요. 근데 불쌍한 생쥐도 강아지도...컬리의 아내도 부드러우니까 죽을듯요. ㅠㅠ

Falstaff 2025-09-06 05:39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말씀대로.... 흘러갑니다. 참 짠한 장면들이더라고요.

yamoo 2025-09-05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헛! 간만에 별5개 출현! 근데 다섯개가 아니라 네게 반이네..ㅎㅎ
생쥐와 인간..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 구입 안해도 된다는 안도감..^^

Falstaff 2025-09-06 05:4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얼른 읽으셔요. 앉은 자리에서 훅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의사과학자 애로우스미스 上 의사과학자 애로우스미스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유진홍 옮김 / 군자출판사(교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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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에 출간해 퓰리처 상을 받은 작품. 출간 백년을 맞아 가톨릭대학 감염내과 교수 유진홍의 번역으로 군자출판사에서 나왔다. 군자출판사는 의학서적 출판을 주로 하는 회사인데 의학, 약학, 치의학, 한의학, 보건학, 간호학 등등 가리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의사과학자 애로우스미스> 역시 의학 관련 서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일대를 졸업한 문과생이 쓴 완전한 소설책이다.


  주인공 마틴 애로우스미스는 미국의 가상의 주State인 위네멕Winnemac주에서도 시골인 엘크 밀스에서 태어나 자랐다. 소설은 마틴의 소년 시절부터 순서대로 시계바늘 따라 착착 흘러간다. 쓸데없이 과거 회상에 몇 십페이지를 할애하는 잔 수는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읽다가 아리송한 기분이 들어 다시 앞 페이지로 넘겨 확인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착한 책이다.

  엘크 밀스에는 단 한 명의 의사가 있었으니 닥터 비커슨. 지저분하고 통제가 안 되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어린 마틴에게 의학은 비즈니스 같은 돈벌이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어서 마틴에게 의사 공부를 하라고 독려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의사의 서가에 있어야 하는 세 종류의 책으로 그레이 씨가 쓴 해부학, 성경,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꼽았다. 비커슨 선생은 화학과 생물학을 공부하고, 대학 학부를 거쳐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가라고 충고했다. 애초에 의과대학에 입학하지 말고 학부에서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을 충분히 공부한 후에 비로소 의학을 전공하라는 취지였다. 이건 후에 당대 최고의 의과학자이자 마틴의 평생 스승인 유대계 독일인 막스 고틀립 박사의 가르침과 합치한다.

  마틴 애로우스미스는 ‘뉴욕의류바자’를 운영하는 J.J. 애로우스미스 씨의 아들로 14세인 1897년에 비공식 무급 조수 일을 해주던 닥터 비커슨의 가르침을 새겨 위네멕 대학에 입학해 육상선수 겸 농구팀 센터, 맹렬한 하키선수 경력으로 졸업했다. 가상의 웨네멕주는 미시간, 오하이오, 일리노이, 인디애나와 경계를 하고 있다니 중서부 지역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주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드디어 의예과에 입학했을 때는 고향의 부모와 비커슨 선생 모두 생을 접었다. 부모는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쓸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남겼다. 즉, 의사가 되는 순간 마틴은 주머니가 텅 빈 상태가 되어 개업할 돈이 없으니 무조건 취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의대에 진학해 마틴의 전 생애를 걸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칠 진정한 스승이자 세균학 교수인 막스 고틀립의 강의에 수강신청을 한다. 그러나 장렬한 퇴짜. 어두운 분위기에 냉담한 인상, 그리고 인간미 없는 인물로 이름이 난 고틀립 교수는 먼저 화학과 물리학을 더 배우고 1년 후에 자기 수업을 들으라고 지시한다. 고틀롭 교수는 면역학, 세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것은 맞지만 후학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직업에 관심이 별로 없고, 의사라는 돈벌이에는 더욱 관심이 없다. 오직 세균과 면역에 관한 연구만 하고 싶어하는 말 그대로 과학자. 딱 연구와 실험에만 몰두한다. 그것도 아주 고집스럽게. 완전한 논문이 아니면 발표도 하지 않아 다른 교수들과 비교하면 약 1/5 수준의 논문만 의학지에 게재할 뿐이다.

  마틴은 의과대학에서 여러 의대생을 사귀고 고급 친목 동아리 디감마 파이Digamma Pi라는 클럽에도 가입한다. 이 가운데 포츠버그 기독교 대학 졸업생 아이라 힝클리는 기독교 광신도로 서인도제도에 의료선교를 갔다가 페스트 구제에 나선 마틴과 상봉한다. 학교에 몇 안 되는 학부 졸업생이자 장차 의대를 수석졸업하고 훗날 부자들을 위한 과도한 처치와 과도한 시술을 특기로 떼돈을 벌고 출세도 할 애어스 듀어, 괜찮은 산부인과 개업의가 될 찌질한 뚱보 파프, 살집이 많고 가난한 익살꾼이자 의사 공부를 중도 작파하고 승용차딜러를 거쳐 사기꾼으로 입신양명할 절친 중의 절친이자 기숙사 룸메이트 클리프 클로슨 등이 있다. 뚱보 파프를 제외하고 훗날 다시 만나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다. 과학자 입장에서 그냥 그런, 잊어도 별로 특별할 거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인연이라서.


  고틀롭 교수의 실험 시간에 마틴 애로우스미스가 단연 두각을 보인다. 두 사람은 큰 키에 마른 체격, 그리 잘 생기지 못한 얼굴 같은 것이 서로 비슷하다. 이건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도 마찬가지다. 고틀롭 교수가 마틴, 그리고 싱클레어 루이스와 다른 점은 술이 과하지 않다는 거. 주인공과 작가는 둘 다 술고래이고, 특히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는 생의 중반 이후, 특히 193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에 급격하게 술이 늘어 메사추세츠 정신병원에 입원해 “술 없이 살 것인지, 술로 인해 죽을 것인지” 결정을 강요당하는 수준에 이른다. 마틴도 주종을 묻지 않고 모든 술을 벌컥벌컥 잘 마시지만 자청해서 몇 주 동안 술을 딱 안 마시고 실험에 몰두할 수 있을 정도의 자제력을 갖고 있으니 의존증 수준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마틴, 애칭 마트는 과학을 접근하는 법, 실험 현상을 과학적,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는 법, 이렇게 나온 결론을 수학적 수식으로 정리하는 법을 교수로부터 배우거나 따로 공부하게 된다. 물론 이런 단계에 이르기까지 두 사제는 납이 끓을 만큼 열을 내 싸우기도 하고, 액체질소만큼 냉랭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급기야 십수년 동안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지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서로가, 얼마나 위대한 과학자 스승인지, 과학자가 되기 위한 얼마나 위대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제자인지 충분히 알고 지냈으니, 그것 참.

  교수와 결별하기 전에 마틴은 위네멕의 주도 제니스에 있는 대형병원인 제니스병원에 수막알균 균주를 가지러 갔다가 병원 복도를 청소하고 있는 수습간호사를 만나 다투고, 호감을 갖고, 데이트 신청을 하더니 결국 사랑하는 마음까지 품었는데, 아뿔싸, 이때 마틴은 약혼녀가 있었다. 장차 의사가 될 신분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의사 아내가 되기만 하면 의사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펑펑 써대는 희망으로 가슴을 부풀린 아가씨 매들린 폭스. 곡절을 겪은 끝에 수습간호사였던 리오라 토저 양과 결혼을 하고, 인턴 시절을 보낸 후에 리오라의 친정이 있는 시골 윗실베니아에서 개업의로 몇 년을 보낸다. 시골 사람들의 고집스러움과 완강한 보수적 사고방식과 경쟁 의사들의 잘난 척에 데어 다시 제니스로 컴백해 노틸러스 시의 공중보건 담당의가 되고, 윗실베니아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인 노틸러스에서도 실패한 마틴은 이제 대학시절 최우등생 애어스 듀어가 파트너로 있는 병원을 거쳐 드디어 뉴욕에 위치한 세계적인 의학 연구소 맥거크 연구소에 입소하는데, 맥거크 연구소의 재단 이사장이 제일 흠모하는 과학자 막스 고틀립 박사가 마틴을 추천했던 거였다.

  이 연구소에서도 고틀립 박사는 엄격한 과학자로 일체의 양보도 없이 연구에 매진한 결과 숱한 적들을 만들어냈다. 잘난 사람의 꼴을 못 보는 거, 이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다. 연구소에서 다시 마틴을 만난 교수는 이번에도 역시 마틴에게 수학과 물리학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라고 핀잔을 주면서 자기 조수이자 마틴의 망나니 절친 클리프 클로슨에 필적하는 냉소적 외골수이며 진정한 연구자인 테리 윅켓을 소개한다. 성격을 마틴과 달라도 과학과 실험에 몰두하는 진정에 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죽이 맞는 윅켓. 그는 조연답게 주인공인 마틴에게 수학과 물리학 등을 가르쳐주고, 몇 년이 흐른 후 마틴은 주인공답게 수학과 물리학에 있어 윅켓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그의 중요한 연구 결과를 로갈리즘과 시그마 등을 사용한 일목요연한 식으로 풀어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해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이 센셰이션은 그의 이름을 뉴욕과 런던과 파리에 휘날리게 할 뻔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프랑스 과학자가 먼저 논문을 발표하는 바람에 휘리릭 날아갔고, 대신 때마침 서인도제도 세인트휴버트 섬에서 창궐한 페스트를 구제하러 나이 들었지만 열성적 공중보건 활동가 구스타프 손델리우스와 마틴 부부가 현지에 도착한다. 부부가? 그렇다. 이건 암만 생각해도 작가 의도상 그런 거 같다. 합법적으로 마틴의 첫번째 아내 리오라를 호적에서 파내고 재혼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리오라가 거기서 죽어 마틴이 홀아비가 되느냐고? 그렇다. 죽는다. 죽어서 관에 들지도 못하고 적도 하늘아래 묻힌다. 열성적인 공중보건 활동가 손델리우스도 영웅적인 죽음을 맞고, 대학 동기동창 아이라 힝클리도 죽어 한줌 재가 된다. 다 죽고 페스트를 진압하고 돌아온 마틴 혼자 영웅이 된다.

  이 동안 아빠 같았던 스승 막스 고틀립 박사는 급성 치매에 걸려 어둔 골방에 앉아 눈만 껌벅껌벅거리고, 연구소에서는 친절한 악당인 리플튼 홀리버드가 고틀립 박사에 이어 소장 자리에 앉아 마틴이 싫어하고 기피하는 지시만 죽어라 내린다. 그리고 마틴은 세인트휴버트 섬에서 잠깐 만나 함께 해변을 걸었던 기억이 있는 백만장자이자 젊고 예쁜 과부 조이스 레니언과 결혼해 아들 존을 낳는다.

  이게 끝이냐고? 아니, 아니. 아직 남았다. 이제 백만장자 아내와 아들, 그리고 거대 연구소에서 기계적이고 광 파는 작업만 수행하게 된 높은 연봉의 연구자 마틴 애로우스미스가 책의 제목대로 의사과학자, 이걸 넘어 위대한 의과학자가 되려면 뭔가 남은 게 있다. 여기까지 열라 썼지만 하여튼 좀 밍밍하다. 이 밍밍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나는 결론을 말해야 하는데, 그러기 싫다. 좀 올드 스타일이지만 재미있는 책이니 도서관을 이용하시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늘 그렇듯이 결론은 “안 알려줌.”


  싱클레어 루이스가 쓴 작품답게 곳곳에 유머 코드를 담고 있다. 그걸 전부 알아채기는 같은 언어 사용자가 아니라 당연히 불가능하고, 작품 속에 눈에 띄는 등장인물이 두 명 있다는 건 그냥 뱀다리로 적어본다. 한 명은 베빗 씨. 이이가 살던 곳이 가상의 위네맥 주라서 루이스가 특별출연을 시켰고, 역자 유진홍도 알았겠지만 그냥 말없이 넘어간 도즈워스 씨도 만찬의 한 장면에 등장한다. 이런 걸 알아차리는 것도 책을 읽는 소소한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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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9-04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름은 들어 본 것 같은데 미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니 읽어보고 싶긴하네요. 의학 전문 출판사에서 소설도 내다니, 뭐 관련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발상도 재밌는 거 같고요. 의학 소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중고샵에 좀 흘러 나왔으려나 모르겠어요. ㅎ

Falstaff 2025-09-04 16:02   좋아요 1 | URL
이 책, 명색이 신간입니다. ㅎㅎㅎ 아직 중고샵까진 ^^;;
<모비딕>이 책방 해양 수산물 코너에 꽂혀 있었다는 전설을 생각하면 ㅋㅋㅋ

꼬마요정 2025-09-04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오라를 보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엘렌이 급사했다는 내용이 생각나네요. 그런데 그 수습간호사가 아니라 백만장자이자 예쁜 과부랑 결혼을 한다구요? 이 사람 뭔가 연구만 할 것처럼 보였는데 인생살이 스킬이 장난 아니로군요. ㅎㅎㅎ

Falstaff 2025-09-04 16:04   좋아요 1 | URL
앗, 수습 간호사하고 결혼하고 애 없이 사는 데요, 미쳤다고 페스트가 창궐하는 데 부부 동반으로 가느냐고요. 아니나 다를까, 거기서 조강지처 첫 마누라 죽고 다시 장가들어 아들 낳아 사는 여자님이 백만장자 상속인이었다는....
아이구,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쓰지 않어서 오해하시게 만들었습니다.

꼬마요정 2025-09-04 18:08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잘못 읽었나봐요. 약혼녀는 매들리 폭스네요. ㅎㅎㅎ 여튼 연애는 잘 하는 남자였어요. ㅎㅎㅎㅎ
 
질투의 끝 쏜살 문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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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년 반 만에 프루스트를 읽는다. 9년 반 전에 읽은 책? 김창석 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명 깊었냐고? 그럼. 감명 깊고말고.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신이 있다면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신님, 나로 하여금 이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찿아서>를 읽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재미 대가리라고는 1도 없으면서 길기는 더럽게 길어, 읽는 내내 청화집의 오소리감투에 쐬줏잔 기울이는 딴 생각을 품게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활자만 11권 4천8백페이지를 읽는 인내심을 함양할 기회를 주신 신님을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그래, 그래. 나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 페이지도 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별로 안 되는 독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건 맞지만 조금도 자랑하고 싶지 않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철저하게 활자만 읽었을 뿐이라서. 아무 생각나지 않는다. 이 작품을 감명 깊게 읽은 분들께도 진심어린 존경과 질투를 보낸다. 천성이 고귀하지 않은 나는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이 고평가된 작품 가운데 저 위, 꼭대기에 혹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지 않을까, 하고 심통부리는 많고 많은 덜 떨어진 독자 가운데 한 명이다. 요즘 들어 이 생각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오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단편집 《질투의 끝》은 2년 전부터 도서관 홈페이지에 “관심도서” 목록에 올려놓았던 책이다. 아무리 <잃어버린…>을 그리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프루스트인지라 무시무시한 11권, 4천8백쪽짜리 장편이 아닌 얇은 문고판 단편집이 나왔다는데 어찌 그냥 넘어가겠느냐는 말이지. 그런데 읽으려면 동네 도서관에서 다른 도서관으로 상호대차 서비스 신청을 해야 해서, 차일피일하다가 날들만 날리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주로 비밀댓글을 주시는 동네 서재 쥔께서 이 책을 거론하시기에 이르러, 아차, 맞아, 《질투의 끝》이 있었어, 기억이 새로워 서비스 신청을 해, 책을 받고, 반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는 걸 여태 게을렀구나, 싶었다.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책 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이 네 단편은 1896년, 스물다섯 살의 프루스트가 출간한 첫 작품집 『쾌락과 나날』의 수록작 가운데 네 편을 골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독후감을 쓰기 직전에, 도무지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들임에도 문장이 매력적이라,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궁리하던 중이었다. 25세 이전의 젊은 프루스트가 쓴 단편. 소년시절부터 허약체질에다 꽃가루 알러지 즉 건초열과 만성 천식으로 고생하던 작가는 여기에 세기말적 분위기까지 보태 죽음 혹은 죽음에 이르는 단계에 천착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럼에도 20대 초반의 남성으로 넘치는 리비도는 또한 쾌락에 집착하게 만들었겠지. 평생 노동하지 않고도 전업작가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부르주아의 일원으로 일찌감치 사교계 문턱을 넘은 병약한 도련님. 이이의 작품은 그리하여 바로 앞 시절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선배들과 완전히 맥을 달리해, 귀족계급과 사교계와 불륜과 관능을 포함한 사랑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

  사랑하는 공작부인 피아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무도회에서 코티용 춤을 추리라는 상상을 하며 최후를 맞는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이고, 마지막에 실린 <질투의 끝> 역시 사고를 당해 죽어가며 자신이 정리하고자 했던 손느 부인 프랑수아즈의 손을 잡을 다른 남자를 질투하는 내용이다.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은 시골 스티리아 출신의 매력적인 아가씨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파리의 사교계에 진출해 보헤미아의 공작부인이 되는 이야기이며,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결혼을 앞두고 집에서 연 파티 도중에 한 방에서 외간남자와 진한 페팅을 하다 벽난로 거울을 통해 관능에 절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에게 들켰다고 생각한 아가씨가 심장에 권총을 발사하는 이야기. 어떻게 보면 세기말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퇴폐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세기말이나 퇴폐를 이미 졸업한 젊은 부르주아 작가가 실제로 체험해보지는 않은 채 머리속에서 상정한 인물들의 심리를 탐색해 글로 써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설명하기 힘든데, 책을 읽는 내내 마르셀 프루스트가 작품 속 상황을 직접 경험해보지는 않았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앞에서 작품의 내용을 죽 써 놓으니 정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단연 문장이었다. 근데 이게 프루스트의 문장인지, 책을 번역한 윤진의 문장인지 나는 모른다. 프루스트보다 훨씬 긴 문장을 장황하면서도 아름답게 구사했던 알베르 꼬엔의 <주군의 여인>을 읽을 때도 《질투의 끝》의 인상깊은 길고 유려한 문장을 경험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군의 여인> 역시 이 책의 역자 윤진 번역이다. 단편소설을 읽으면서는 메모를 하지 않아 어느 문장을 특정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비교하기 위해 프루스트의 <게르망트 쪽> 몇 페이지를 읽어봤다. 흠. 그렇군. 프루스트의 문체였네. 스물한 살 때 문장이 죽을 때까지 갔네 그려.

  갑자기 파박, 떠오르는 생각 하나. 그렇다면, 활자만 겨우 읽어냈을 뿐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시간을 무지하게 길게 잡고 《질투의 끝》을 읽는 식으로 조금씩, 하루에 몇 십 쪽씩 읽을 수 있기만 하면 그것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까? 아오, 프루스트는 내 스타일이 확실하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시 읽을 때가 됐을 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요새 왜 자주 할까, 주책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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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9-03 0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으면 주책 있습니다.🤣

Falstaff 2025-09-03 16:12   좋아요 0 | URL
에휴, 안 읽으렵니다. ㅎㅎ

stella.K 2025-09-03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저주받은 명작 압축판이 있어 작년인가 올초에 사 놓고 아직도 안 읽고 있습니다. 압축판이어도 9백 페이지쯤되는데 이거 읽어보고 괜찮으면 진짜 번역본 읽어보려고. 근데 제가 하는 꼬락서니로봐선 이번 생은 이 책과 인연이 없지 싶기도 합니다. ㅠ 그래도 단편은 읽을만한가 봅니다. 그 저주받은 명작을 다시 읽을 생각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Falstaff 2025-09-03 16:14   좋아요 1 | URL
압축판 읽지 마셔요. 암만해도 덜 만족스럽고, 읽고 난 다음에 어디서 읽었다고 뽐내기에도 뭔가 좀 찝찝하고 그렇더라고요.
더 늙어 도가니에 힘 빠져서 도서관 못 다니면 혹시 다시 읽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그냥 말로만 그러는 거예요. ㅋㅋㅋ

stella.K 2025-09-03 17: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도가니! ㅎㅎ
아, 그런가요? 그럼 페페님도 그러시고, 문장이 좋다고하시니 딱 1권만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ㅋㅋ
근데 번역본은 누구게 좋을까요? 이제 김화영 교수건 너무 올드하다고 젊은 사람들은 안 읽으려고 하는가 보더라고요.

2025-09-03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3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5-09-03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쨌든 프루스트의 문장은 좋습니다. 비유도 그렇고요.
길어서 문제이긴 하지만요.

Falstaff 2025-09-03 16:15   좋아요 1 | URL
아이고, 프루스트 문장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냥 껌벅 넘어가지요.

바람돌이 2025-09-03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은퇴하면 매일 아침 커피를 내려서 마들렌 한 개를 곁들여 잃어버린 시간을 펴고 하루에 딱 50페이지만 읽는 상상을 합니다. 그런 날이 오긴 할까요? ㅎㅎ

Falstaff 2025-09-03 20:57   좋아요 1 | URL
아이고... 그럼요, 그런 시절이 꼭 올 겁니다. 정말 괜찮더라고요. ㅎㅎ

stella.K 2025-09-03 21:38   좋아요 2 | URL
오, 그 방법도 좋으네요. 매일 50 페이지! 근데 전 매일 모닝 커피는 가능하지만 마들렌은 글쎄요. 제가 선호하는 음식이 아니라 매일 먹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해요.ㅎㅎ

바람돌이 2025-09-03 21:41   좋아요 1 | URL
마들렌이 아니면 다른 것도 상관없겠죠
중요한건 매일 50페이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