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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Omer Z. 리반엘리 지음, 고영범 옮김 / 가쎄(GASSE) / 201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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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은 줄퓌 리바넬리 <세레나데>가 워낙 좋아서 그런가, 이후 이이의 작품을 읽은 다음엔 그만큼의 재미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불안>을 읽은 지금은, 혹시 <세레나데>를 읽을 당시 오늘 아침에 읽은 <불안>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리바넬리 특유의 감정 과잉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감지는커녕 과장에 홀랑 빠져 내가 흔히 이야기하고는 하던 빼어난 문장에 의한 마취 혹은 최면에 취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혹까지 생기고 말았다.
아, 지금 <불안>이 재미가 없다거나,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충분히 재미있고, 알지 못했던 잔인한 인종청소를 당한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동적이기도 하다. 다만 이걸 묘사하는 리바넬리의 문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아오, 이 이야기는 애초부터 독후감 말미에 쓰려고 마음먹고 있던 건데 제일 먼저 말해버리고 말았다. 조금 있다가 20년이 훌쩍 넘는 단골 횟집에서 쐬주 마시자는 약속이 있다. 암만해도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배도 좀 고프고. 배 고프면 제대로 잘 판단이 안 되잖아?
화자 ‘나’의 이름이 이브라힘.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저널리즘에 종사한다. 쉬운 얘기로 신문기자다. 전엔 ‘기자’하면 어깨에 후까시 팍 들어간 줄 알아서, 기자가 되기 위한 시험 ‘기시’를 사시, 행시, 외시와 더불어 4대 고시라 칭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신세계백화점 옥상에서 돌 던지면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맞는다. 시인, 화가, 그리고 기자. 그래서 기자더러 기자라고 부르면 기분 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저널리스트라고 해야 씩 웃으며 콧김을 뿜고.
만일 살인 사건이 나면 튀르키예 신문엔 살해된 시신 사진을 그냥 싣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출간하자마자 데스크에서 기자들 집합시켜놓고 각종 험한 시체들 사진 가운데 실을 만한 사건을 추리는 중에 이브라힘의 눈에 오래 잊고 있던 저 먼 시절의 초등학교 동창의 죽은 모습이 들어왔다. 후세인. 수십년간 철권 통치를 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아니라 튀르키예 동쪽 시리아 국경 근처의 오래된 타운 마르딘에서 의사로 일하던 친구. 그가 죽었다.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두 친형 살림과 압둘라가 운영하는 피자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이 다 끝난 한밤중에 청소와 정리를 하느라 남아 있다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백인우월주의자이며 반무슬림집단인 깡패들에게 칼로 수십곳을 찔려 치명상을 입고, 앰뷸런스로 응급실로 옮겼지만 처치 중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는 외신과 사진. 후세인의 마지막을 지키던 사람은 응급의료전공의 인도인 의사였다. 환자가 죽기 전에 무어라 의사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마지막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을 한 것이 남아, 훗날 이브라힘 기자가 들을 수 있었으니, 이랬다.
“한때는, 난 사람이었다.”
튀르키예는 두터운 햄이 좌우로 누운 것처럼 생겼다. 왼쪽에는 스스로 유럽인이라고 여기거나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1천5백만 명이 밀집해 사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자유스럽고 분방하게 살고, 오른쪽으로 가면 갈수록 조지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과 국경을 맞대면서 아직도 20세기 이전의 지독한 이슬람 관습에 따라, 사막 비슷한 환경에서 그래도 꿋꿋하게 살고 있다. 이브라힘이 살던 마르딘으로 말하자면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향유했던 유서 깊은 곳이지만, 최근 불과 몇 십 년 만에 사랑과 자비와 친절의 종교인 무슬림이 급격하게 원리주의화 되면서 인근 국가에서 벌어진 이슬람대 이슬람, 과격 이슬람 ISIL에 의한 오랜 종교 에지디 신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사막과 산악을 넘어 밀려온 곳이다. 이브라힘은 이곳 마르딘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닌 후에, 더 좋은 교육을 위하여 부모가 이스탄불로 보내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것. 이브라힘의 부모는 세상을 떴고, 결혼은 파국을 맞아 전 재산 탈고 모자란 건 영끌해서 산 집을 전처에게 주고 이혼서류에 인감도장을 찍었으며, 신문사 스탭들간의 지옥 같은 경쟁 속에서 완전히 피폐해졌다, 라고 여기는, 이른바 위기 상황에 처한 상태.
반면에 후세인은 끝까지 마르딘에서 버텼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작은 키와 곱상한 피부에서 눈치챌 수 있다시피 힘도 없어서 친구들과 팔씨름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대신 모두 배워야 하는 꾸란에 관해서는 가장 뛰어났다. 공부 머리가 좋았다는 말이다. 집안에서도 부모 말씀에 복종하고, 하나 있는 누이동생한테 자상하며 온갖 집안일을 마다하지 않는 좋은 아들이었고, 때마침 (이브라힘이 이스탄불에서 공부하는 동안) 인근에 대학이 생겨 의과대학을 졸업해 지역 의사로 있었다.
전형적인 선한 무슬림인 후세인은 이슬람국가를 천명하는 극단적 이슬람 ISIL이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에서 내전을 일으켜 숱한 사람들이 난민촌에서 텐트 생활을 하기 시작하자, 두 손을 걷어 부치고 캠프에 들어가 이들 가운데 환자와 어린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난민 가운데서도 ISIL에 의하여 가장 난폭한 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이슬람과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대교보다 더 오래된 종교인 에지디 신자들이었다. ISIL 집단은 에지디 신자 가운데 15세 이상의 남자와 생리를 멈춘 나이든 여성이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참수, 목을 잘라 버렸고, 생리를 하는 모든 여성은 강간을 한 후 노예로 삼았으며, 아직 초경 전의 어린 여자 아이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동족 남자들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목이 댕거덩 잘려 모래땅 위로 떨어지고, 가까운 어디론가 지하실 비슷한 곳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집단으로 윤간을 당한 후, 담배 한 갑 가격으로 노예로 팔려간 어린 여자들은, 어쩌면 당연하게 정신을 놓아 버리는 일이 잦았다. 가끔은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적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기도 했을 수밖에. 더 가끔, 아주 간혹, ISIL로 위장한 에지디 신자가 한정된 돈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에지디 여성을 사서 국경 근처까지 데려가 튀르키예까지 사막과 산을 넘어 도망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후세인이 마르딘의 캠프에서 만난 여자들은 거의 모두 이런 경로를 따라왔던 것이고, 난민 속에는 적의 아이를 출산한 멜렉나즈라는 여자도 끼어 있었다.
매력적인 눈을 가진 미인이지만 후세인이 멜렉나즈의 외모에만 끌린 것은 아닐 듯하다. 이 여자 품에 안긴 갓난 여자 아이 네르기스는 눈동자를 하얀 막이 덮고 있어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으로 출생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멜렉나즈를 사랑하게 된 후세인. 끝까지 읽어보면 알게 되지만 후세인이 멜렉나즈를 동정한 것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선의가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확인한 멜렉나즈는 후세인의 청혼을 받아들여 함께 후세인의 집으로 가지만, 에지디의 율법으로도, 이슬람의 율법으로도 둘의 결합은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어느새 마르딘에도 과격 이슬람 ISIL의 분자가 생겨 어느 날 후세인에게 총을 난사해, 어깨와 왼쪽 팔에 총상을 입어 입원하게 된다. 이를 들은 미국의 두 형은 즉각 후세인을 설득하여 일단 미국으로 와서 재난을 피하고, 정식 서류를 갖춰 멜렉나즈와 아이도 데려가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9.11 이후 미국인들은 이슬람의 모든 종파를 과격 이슬람과 동일시하게 됐고, 무슬림 자체를 증오하는 집단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두 명의 큰 덩치 백인이 후세인을 칼로 난도질해 죽여버렸던 것.
작품의 중요한 내용이 ISIL이 에지디 교인들에게 가한 학살과 학대 등이다. 이런 지독한 고통을 당한 에지디 여성의 아픔을, 줄퓌 리바넬리는, 이스탄불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저널리스트로 생활하는 소부르주아 또는 상위 중산층의 괴로움, 직장에서의 무한 경쟁, 이혼으로 인한 자산의 탕진, 거대도시에서의 각박한 삶 등에 지친 이브라힘의 고뇌와 퉁치려 한다. 이게 날 극도로 언짢게 했다. 비교를 해도 비슷하게 해야지, 참수와 강간과 노예 상태의 에지디 사람들과 소부르주아의 일상적 고통을 수평비교 하려 하다니, 에잇!
그러나 문장의 힘은 무섭다. 아무 생각 없이 명문장을 자랑하는 리바넬리의 글을 좇다가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 어느 문장이 그런데 이리 난리냐고? 이렇게 묻지 마시라. 나도 인용하려고 메모를 하긴 했건만 약속시간 다 됐다. 당신 같으면 독후감이 중혀, 민어 백숙에 쐬주 각 2병이 중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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