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바지
카를 슈테른하임 지음, 김기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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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테른하임. 이름만 딱 봐도 유대인 집안이다. 유대인 은행가 카를 율리우스 슈테른하임 씨하고 눈이 맞은 루터교 신자 집안의 어머니 로사 마리가 카를을 낳고 2년 후에 혼인신고를 했다.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한 모양이다. 어머니 쪽이 루터교에, 가난한 노동자 계급이라서. 어쨌거나 아들 카를은 부잣집 자제 답게 뮌헨대학, 괴팅겐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각 철학, 심리학, 법학을 공부했지만,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흔한 학사 학위도 못 따고 졸업도 하지 못했다. 22세 때인 1900년에 바이마르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시작해 첫번째 결혼을 했고, 6년 후에는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온 테아 뢰벤슈타인과 두번째 결혼을 해 인생이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했다. 한 방에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의 백배 이상을 확보한 슈테른하임은 ‘울프의 공식’에 의거해 자기 마음대로 작가들과 어울려가며 자신도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것 보라니까?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를 갖지 못하면, 쉽지는 않겠지만 그걸 제공해 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라고 내가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 인생은 한 방이여.

  흥미로운 건, 이들의 딸 도로테아가 적어도 1/4이 유대인, 뢰벤슈타인도 유대인 가문이라면 최대 3/4이 유대인일 터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전사의 일원으로 활약하다 독일군에 체포되어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거기서 죽었는지 살아 남았는지는 위키피디아도 모르는 모양이다. 카를 슈테른하임은 1차 세계대전은 여유자금이 넘쳐 흐를 당시가 되어 스위스로 피신해 징집을 피했지만, 2차 세계대전은 그러하지 못해 벨기에에서 숨어 살다가 다행히 나치에 잡히지 않고 1942년에 죽어 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슈테른하임의 장기는 독일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 시절을 일컫는 “빌헬미네 시대에 신흥 독일 중산층의 도덕적 감성을 풍자”하는 거였다고 위키피디아 첫 칸에 나온다. 오늘 독후감을 쓰는 <속바지>도 확실하게 그렇다. 이이는 1912년 이후에 비극을 전혀 쓰지 않았다는데, 책 뒤편 “지은이에 대하여”에 재미있는 내력이 있어서 소개한다.


  “1912년 몰리에르의 <동 쥐앙(Don Juan)>이 베를린의 독일 극장에서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연출로 무대에 올려졌을 때의 일이다. 필립왕 역을 맡은 배우가 신하에게 “이 바보 같은 건 누가 썼지?”하고 묻는 장면에서 누군가 객석에서 ‘슈테른하임요!’하자 극장 안은 온통 웃음바다로 변했고 ‘브라보!’를 외치는 소리가 끊일 줄 몰랐다고 한다. 슈테른하임은 이 스캔들에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다시는 비극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의 작품에서는 낭만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극단적인 야유와 빈정거림으로 가득 차 있는 희극이었다. 희극은 시민 사회를 향한 슈테른하임의 조소를 효과적으로 퍼붓게 해 부르주아의 약점을 폭로하는 수단이 된다.” (p.189)


  위에 따온 글은 슈테른하임의 <속바지>를 이해하는데 꽤 큰 도움을 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은유나 상징, 문학적 호소 같은 건 얄짤없이 그냥 고속도로로 직진해, 하고 싶은 말을 극단적으로 야유하고 빈정거린다는 거. 그걸 통해 현대 독일 중산층의 찌질함을 폭로하고 있다는 거다.

  작품의 남자 주인공이 테오발트 마스케. 여자 주인공은 루이제 마스케. 부부다. 이 ‘마스케’ 선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여 소위 ‘마스케 삼부작’이라고도 하는가 본데, 굳이 외울 필요 없다. 시험에 안 나온다. 테오발트가 바로 현대 독일의 중산층이다. 연수 700탈러를 버는 중∙하급 공무원.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과 속바지가 무슨 관련이 있어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느냐고?

  속바지. 때는 1909년 이전의 베를린. 당시 유럽에는 팬티가 없었다. 삼각팬티는 1954년에 일본의 ‘사쿠라이’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손자를 위하여 디자인해 입혔던 것을 특허출원,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전에는 전 세계에서 다 헐렁한 형태의 ‘고쟁이’ 비슷한 걸 입었는데 이걸 총칭해 “속바지”라 부른다. 20세기 초반에는 합성 고무가 없어서 고무는 저 아프리카의 콩고 같은 오지 중의 오지에서 수입해와 상당히 비싼 재료라, 그걸 가공해 팬티 끈, 그러니까 속바지 끈으로 사용하는 사치를 부릴 수 없었다. 대신 천으로 끈을 만들어 죄어 묶어 썼겠지.

  속바지도 그나마 조금이라도 있는 집구석에서나 입었다. 서민 계급은 요즘 말로 노팬티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래 여름날 모시 바지를 입은 할배들은 축 늘어진 부랄이 흔들흔들 또는 달랑거리는 걸 맨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고,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들었다. 여자들은? 보일 것이 없잖아? 당연히 안 보이지. 흔하게 보이면 그땐 흉도 아닌 거니까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람.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사람이 좀 털털했던 모양이지? 하루는 황제께서 행차를 하시는데, 황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베를린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경을 하는 중에 하필이면 마스케 부인, 루이제 한테 한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지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뿔싸, 하늘도 무심하시지, 딱 이 시간을 맞추어 루이제의 속바지 끈이 스르르 풀려버렸고, 그래서 당연히 루이제의 속바지도 중력의 법칙에 의해 다리를 따라 또 스스륵 미끄러져 발목에 척, 걸쳐버린 걸, 글쎄, 빌헬름 2세가 봤는지 못 봤는지, 보긴 봤는데 황제 체면이 있어서 못 본 척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거다.

  봤겠어? 못 봤겠어? 나는 못 봤다는 데 만원 건다.

  근데 남편 테오발트는 그게 아니다. 서방이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여 자만심이 상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의처증이 도져 그런 것도 아니다. 만일 황제가 자기 마누라의 속바지가 흘러내린 꼴을 보았다면, 저런 칠칠치 못한 여편네를 둔 남자가 공직을 맡았다는 걸 용서하지 않아, 아마도 근일 내에 해고당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테오발트는 자기 마누라 루이제가 무지 예쁘게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사는 진짜 찌질이. 그리하여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야단치고, 두드려 패기 시작한다. 연수 700탈러 타령을 하면서.


  이제 동네방네 이웃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게 됐단 말이야. 마스케 부인 속바지가 벗겨졌다고! 그것도 국왕폐하 면전에서 말이야. 나 같은 말단 공무원이. 나도 죄가 있지. 이런 여편네를 둔 죄 말이야. 이런 칠칠치 못한 쌍것. (그대로 머리를 휘어잡아 테이블에 대고 내리친다.)

  700탈러를! 그걸로 우린 방 몇 칸을 지탱할 수 있고 잘 먹고 옷 사 입고 겨울에는 난방을 할 수 있단 말이다. 희극 구경 갈 수 있게 표를 살 수 있고, 의사나 약사에게 가지 않아도 되게 건강이 우릴 보살펴주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즉, 황제가 루이제의 속바지를 봤다면 자기가 해고당해 700탈러를 벌지 못할 거여서 열을 받은 거다. 진짜 웃긴 건, 이 부부가 결혼한 지 1년이 넘었는데, 겨우 일년 밖에 안 되긴 했지만, 아직 아이도 없고, 루이제의 배도 비어 있다는 거다. 왜냐하면, 700탈러 수입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너무 힘이 드니 벌이가 조금 나아질 때까지 임신을 하지 말자고 남편 테오발트가 일방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근데 1909년 이전에 어떻게 피임을 해? 완전한 방법이 있지. 아무렴. 이보다 더 완전할 수 없는 피임법. 그냥 손만 잡고 자는 거. 하기는 뭐.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런 찌질이니까 아내 루이제가 남다른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루이제의 속바지가 치마 아래로 흐른 장면을 여러 사람이 보기는 봤다. 여기서 끝나면 연극이 안 되잖아? 그래서 시작할 때부터 마스케 집의 남는 방 두 개를 임대한다고 창문에 써 붙여 놓았던 것. 여태까지 한 사람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더니, 속바지가 흘러내린 바로 당일, 두 명의 남자가 방을 빌겠다고 들이닥쳤다. 한 명은 부르주아인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자기는 학자 겸 작가라고, 자기 일터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고 싶어 여기까지 와서 방을 빌리려 한다는 스카론 선생. 다른 한 명은 옆에 있는 이발소도 아니고 서너 블록 떨어진 이발소의 수석 이발사인 만델슈탐. 둘 다 속내는 루이제를 어떻게 한 번 자빠뜨려볼까 싶어 덤벼든 거다.

  웃기게도 남편 테오발트는 이들로부터 받을 임대료, 특히 예상보다 높은 월세를 제시한 스카론 씨 때문에 다른 건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두 남자는 결혼은 했지만 (결혼 전엔 모르겠고) 결혼한 다음에는 한 번도 즐기지 못해서 생각보다 쉬운 먹잇감이기도한 루이제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공하느냐고? 그건 안 알려드리고, 남자들의 대시를 상담해주던 옆집 아가씨 게르트루드 도이터 양이 루이제와 어울리다가 독자 또는 관객이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남자, 테오발트 씨를 자빠뜨리는 데 성공한다.

  재미있다. 루이제는 암만해도 이발사 만델슈탐보다는 작가 스카론에게 더 관심이 가겠지? 스카론은 며칠 만에 계약과 관계없이 1년치 월세를 몽땅 지불하고 집에서 나가버리고, 다른 남자가 스카론 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가격으로 그 방에 다시 들어오니, 테오발트 마스케 선생은 돌 한 번 던져 새 세 마리를 잡았겠네? 그리하여 이제 제법 돈을 만진 테오발트. 루이제에게 은근히 다가와서 하는 말이:

  “이제 우리도 아이 한 번 만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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