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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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디스 워튼은, 흠, 유명세에 비해 나하고 그리 좋은 궁합이 아니다. 아무래도 세대차이, 젠더 차이, 그리고 계급차이 때문에 그런 거 같다. 워튼 스타일의 문장도 내 취향이 아니다. 작가와 독자인 내가 좀 차이가 있어도 문장만 합이 맞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텐데, 워튼과 나 사이엔 그게 제일 치명적이다. 말로만 재잘거리지 말고 예를 들어보자.

  게이트 옴과 데니스 페이턴은 두 달 전에 약혼한 사이다. 케이트는 이 약혼 때문에 한때 행복감에 흠뻑 빠져 있던 적도 있단다. 케이트가 직접 얘기한 건 아니고 이디스 워튼이 전지적 작가라서 그렇게 썼다. 근데 두 달이 흐르는 동안 뭔가가 바뀌긴 했겠지? 어떤 상태냐 하면:


  “(약혼) 이전에는 가볍게 날아다니는 날개들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반면 지금은 그 날개들이 그녀 위에 멈춰 있는 것 같았고, 그녀는 자신이 그 날개들의 은신처라고 믿을 수 있었다.” (p.10)


  틀림없이 케이트 아가씨의 심정 변화를 표현한 문장일 텐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가볍게 날아다니는 날개들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건 ‘공기’ 대신 ‘공간’을 넣으면 대강 무슨 의미인지 짐작이 가지만, “날개들이 그녀 위에 멈춰 있는 것”은 또 뭐야? 어떤 상태를 이렇게 말했을까? 그리고 케이트 아가씨가 이 날개들의 은신처라고? 어디 숨겨 놓았나 보지? 드레스에는 주머니가 없지 않나? 당시 귀한 댁 아가씨가 채신없이 주머니 달린 작업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초장부터, 이게 두번째 페이지인데, 나 한테 초를 치는 문장이 나와 버리니, 같은 말을 굳이 한 번 더하자면, 초장부터 김이 팍 새 버렸다. 같은 아가씨라도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술술 읽혔잖아? … 설마,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누군지 모르시는 건 아니지? 알퐁스 도데.

  이런 문장이 한 번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펑펑 터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읽기를 멈춘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이게 어떤 심리를 표현한 것일까? 나? 만날 독후감 올린다고 책도 쉽게 읽는 인간은 아니다. 이해 가지 않는 문장이 나오면 갑작스레 공황 비슷한 심정이 되어 읽고,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또다시 읽고, 한 일곱 번 읽은 다음에,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땐 그냥 넘어간다. 물론 속으로 욕은 한 바가지 하지. 점잖은 분들 앞에서 어떤 욕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서도. 이렇게 나 한테 만날 욕을 쳐 자시는데 어찌 나하고 합이 맞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 틀림없이 세대 차이, 성별 차이, 그리고 계급 차이와 성격 차이까지 온갖 차이가 날 작가-독자 사이다. 이디스 워튼, 일찍이 미국의 국가대표 소설가 네 명 안에 자기 이름을 올린 작가이지만, 그래서 눈에 이이의 책이 띄어도 선뜻 집어 들게 되지 않는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 <피난처>는 새삼스레 희망도서 신청을 해서 도서관에서 ‘첫빠따’로 읽었다는 거 아니냐.


  당연히 신부댁 옴 집안과 신랑댁 페이턴 집안은 미국 뉴욕 또는 뉴욕 인근의 부르주아 집안이다. 뉴욕이라 해도 지금의 뉴욕을 생각하지 마시라. 옴씨 댁 앞은 넓은 초원이 펼쳐 있고 큰 키의 나무들이 길을 따라 줄지어 있는 19세기의 도시 인근. 옴씨 댁에 데니스 페이턴씨가 온다.

  데니스 페이턴. 이 책은 김욱동 번역인데, 2025년 초판이라서 그런지 어째 잘 읽히지 않는다. 1부에서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데니스의 어머니를 이렇게 묘사한다.

  먼저 12페이지.

  “데니스의 어머니, 즉 페이턴 씨의 두 번째 아내보다 더 감상에 치우쳐 너그러운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16페이지.

  케이트가 묻기를 “어머니는 어떠셔요?”

  데니스가 대답한다. “내 친어머니는 아니잖아.”

  앞에서 데니스의 형제 아서가 죽는 바람에 아서의 재산 모두를 데니스가 상속받는다. 그래서 데니스의 어머니가 두번째 아내라니까 아서가 형, 데니스가 동생. 이리 결론을 내리고 읽었던 것이 탈. 어, 지금 엄마가 데니스의 엄마가 아니라고? 계속 읽어보면 그렇다. 두번째 아내가 데니스를 낳고 죽었는지 이혼해 버렸고, 2보다 큰 정수 n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 그러니까 데니스의 이복 동생이 아서. 아서는 좀 방랑기가 있고, 방랑기가 있는 사람이 바람기도 있는 법이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한 아가씨를 만나 야매인지 진짜인지 결혼을 해 아이도 하나 만들었다. 다만 가문의 족보에는 올리지 않았을 뿐. 근데 아서가 깊은 병이 들어 아내가 정성껏 치료를 했건만 결국 숟가락 놨다. 페이턴 가문은 아서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아, 아서의 재산을 가문 밖으로 유출하지 못하게 했다. 아서의 아내는 소송을 했지만, 다 이 통속이 저 통속인 19세기 미국 부르주아 사회에서 어떻게 일개 가난한 여성이 부르주아 집안과 겨루어 소송을 이겨? 당연히 패소했고, 아내는 남편의 돈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사생아로 키우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해, 엣다 드런 세상, 안 살고 만다, 아이를 안고 연못에 빠져 죽었다. 이날 아침 데니스가 보안관한테 시신 확인을 해주고 케이트를 찾아온 길이었다. 당시 동부에 살던 제멋대로 도련님들 가운데 아서 같은 경우가 제법 있었단다. 이런 도련님을 꼬드겨 어떻게 해서든지 결혼신고를 완료한 다음에 가문으로부터 상당한 보상을 받고 이혼해주는 전문직 여성이랄까? 그런 직업여성도 꽤 있었다고. 그런데 아서와 혼인해 아이까지 낳은 이 여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데니스가 이 모자를 불쌍히 여겨 소송에 이겼어도 금일봉을 전달하고자 했건만 절대 받지 않았다니까.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던 커플.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는 법이다. 데니스가 한참 떠들다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색을 하더니 자기는 동생 아서가 정식 결혼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니 계속 얼굴을 굳히고 있어서, 케이트도 얼굴색을 바꾸어 버렸다.

  그럼 내 약혼자가 거짓 증언을 해서, 여인과 아이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았다는 말이지? 명예롭지 못한 일을 뻔뻔하게 저지른 남자와 결혼해 살면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이런 결혼 자체가 명예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케이트는 데니스에게, 지금 청첩장을 쓰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 부치지 않았으니, 우리의 결혼을 조금 늦추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이 어떤 의미인 줄 아는 데니스. 반대할만한 타당한 핑계가 없다.

  오후 시간. 옴씨 댁 응접실에 다른 방문객이 도착한다. 데니스의 어머니 페이턴 부인. 아서를 낳은 엄마인지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데니스의 친엄마는 확실하게 아닌 어머니. 페이턴 부인은 자신이 여태 살아온 세월과 경험이 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지혜로 케이트를 설득한다. 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결혼해 버리라고. 인생사 뭐 별거 있는 줄 알아요? 그냥 좋으면 좋게, 편하게 살다 가는 게 장땡이랍니다, 아가씨. 왜 그래요, 옴씨 댁 모양 빠지게?

  에이, 설마 이렇게 말했으려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케이트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만 죽 늘어놓고 돌아선 페이턴 여사.

  케이트는 이 일을 오래,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엣다 모르겠다, 그냥 결혼하고 만다.


  이어서 1부의 두 배 정도 되는 분량의 2부. 케이트는 결혼을 했고, 잘 생기고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은 아들 딕을 낳았으며, 딕이 여섯 살 때, 에그머니, 과부가 되어버렸다. 이후엔 연애도 하지 않고 오직 아들 딕 하나를 후원하며 살아온 나이든 과부.

  딕이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아 이게 골치다. 즉, 뛰어난 한 방이 없는 사람. 예고 다닐 때는 음악을 전공했고, 하버드에 입학해서 미술. 그러더니 파리의 보자르로 유학 가서는 또 건축으로 전공을 바꾸고 각 단계별로 적어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딕 말고 케이트 페이턴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름을 낸 일은, 사교계의 별이라서가 아니라, 사교계엔 발걸음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딕, 딕, 파리 보자르까지 쫓아가서 한 집에 산 건 아니고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살며 딕의 불편함을 보살펴 주었다는 거. 미국 사회에서는 충분히 흉 떨릴 일이다. 다 큰 애새끼를 여전히 치마폭에 감싼다고.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현명한 케이트가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았으니까.

  다시 뉴욕 근방 집으로 돌아온 케이트와 딕. 딕은 뉴욕에서 건축 사무실을 냈고, 클레먼스 버니 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케이트가 보기에는 딕의 실력에 비해 자잘한 일만 의뢰받는 것 같은 기분. 솔직히 두각을 나타냈지만 세계의 총아들이 다 모인 뉴욕에서는 그저 오종종한 수준이란 것을, 부모는 여간해서 눈치채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딕이 자기의 이름을 크게 낼 수 있는 큰 공모전이 열리고, 딕도 이를 자신한테 주어진 최고의 기회라고 인식한다. 여기에서 당선만 하면, 물론 자신도 있었지만, 이름도 나고, 돈도 벌고, 버니 양과 결혼할 수도 있을 터, 이제 날밤을 새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딱 한 사람, 딕의 친구 ‘대로우’만 아니라면.

  아이쿠. 더 이상은 스토리를 얘기하기 힘들다. 다만 오랜 과거에 딕의 아버지 데니스가 겪은 곡절을 딕이 대를 이어서 겪어야 한다는 힌트만 줄 뿐. 그러면, 전에 시어머니 페이턴 여사가 했던 말을, 케이트 페이턴 여사가 아들 딕의 연인인 클래먼스 버니 양한테 똑같이 할 수 있을까? 이것도 궁금한 일이 되겠지?

  이쯤에서 끝내자. 뉴욕 건축가들의 만화경은 에인 랜드가 쓴 <파운틴 헤드>가 훨씬, 훨씬 더 재미있다는 말만 보탠다. 조금만 더 힌트를 주자면, 이 소설도 점점 <파운틴 헤드>와 비슷한 쪽으로 달려간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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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11-12 1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개가 행복감을 말하는거 아닐까요 약혼 전에는 행복감인 날개가 그냥 여기저기 가볍게 날아다니는 정도라면 지금은 행복감이 딱 그녀 위에 머물러서 결론적으로 안정적으로 행복하다....이런뜻 아닐까요? 어렵고 딱 와닿진 않는 문장이긴 한거 같아요🤣

Falstaff 2025-11-12 16:47   좋아요 1 | URL
그게 다 독자 마음 먹기에 달린.... ㅎㅎ... 거 아닌가 싶어요. 딱 그 자리에 다른 추상명사를 가져다두어도 어색하지 않는 거. 아휴, 저는 천생 이과 쪽이 모양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