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과 군상
하인리히 뵐 지음, 사지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71년에 <여인과 군상>을 발표한 하인리히 뵐은 197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노벨문학상이 특정한 작품을 보고 수상자를 선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수상에 큰 역할을 미쳤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읽은 우리말 번역서가 1958년생 역자 사지원의 초역, 초판이라고 판권지에 쓰여 있다. 사지원은 하인리히 뵐 재단의 장학생으로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하인리히 뵐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건국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지내면서 한국 하인리히 뵐 학회장, 사단법인 생명의 숲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건국대 교수 자리는 정년이 지났으니 명예교수일 터이다. 이이가 번역한 뵐의 작품이 꽤 있다. 뵐 연구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니 뵐의 작품은 될 수 있으면 사지원 번역을 찾는 것이 좋을 듯하다. <9시 반의 당구>, <열차는 정확했다>가 눈에 띈다.


  <여인과 군상>에서 여인은 레니 그루이텐 파이퍼. 결혼 전 이름이 레니 그루이텐이고 알로이스 파이퍼와 딱 3일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작품의 화자는 ‘저자’라고 일컫는 작가 자신. 저자는 레니 파이퍼의 현재 상황을 알기 위하여 레니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을 인터뷰해 677페이지에 이르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매체의 기자가 쓴 듯한 리포트 형식의 글은 저자가 만난 사람들에 따라 의견이 서로 같거나 다를 수 있어서 독자가 조금 헛갈릴 수도 있다. 그래도 끝까지 다 읽으면 저절로 정리가 되니 그저 편하게 읽어가면 된다.

  레니 파이퍼. 48세 독일여성. 171cm, 평상복 상태로 68.8kg. 검푸른 눈빛과 희끗거리는 숱 많은 머리카락. 32년간 노동의 과정이라 부르는 기이한 과정을 거쳤다. 5년 동안 아버지 사무실에서 훈련받지 않은 보조원으로 일하고, 27년간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화원 노동자로 지냈다. 화원? 규모가 큰 꽃집.

  레니의 아버지는 손재주가 뛰어난 건축가였다. 건물이나 집을 짓는 건축가가 아니라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어서, 프랑스에 마지노 방벽을 틀림없이 히틀러가 따라할 것이라고 짐작해 참호와 벙커 전문 회사를 차렸다. 독일이 먼저 침략할 계획인데 무슨 벙커가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건 그거고, 정말로 침략을 감행하기 전까지는 마지노선에 대항할, 아니면 그나마 버틸 수 있는 독일쪽 방어선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던 거였다. 처음에는 회사가 어려웠지만, 아니나 다를까 1930년대 중후반이 되자 회사는 날마다 번창하기 시작해 레니도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레니가 자동차운전면허를 딴 해가 1938년. 이후 자동차 운전을 열정적으로 즐겼지만 1943년에 독일의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 자신의 차 역시 군대에 징발당한 후 다시 차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사업도 정점에 달한 순간, 상태가 이상해진 아버지는 하지 않아도 지극히 무방한 서류회사를 만들어 사기 사업을 하다 들통이 나 한 방에 거덜이 나버렸다. 미리 자기 재산을 거의 정리해 여러 사람들에게 활수하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하여간 그랬다. 40년간 그루이텐 가의 충실한 가정부로 일한 마르야 판 도른 아주머니 한테도 많은, 많아도 많이 많은 퇴직금을 주어 그 돈으로 고향에 내려가서 땅도 구입하고, 보험연금을 받으며 편하게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을 정도이다. 마르야 판 도른 아주머니는 저자에게 레니에 관한 진술을 많이 해주는 중요한 보고자 가운데 한 명이며, 레니 주변의 가까운 친구 가운데 한 명이다.


  레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은 판 도른 아주머니와, 동갑내기 마르그레트 슐레머, 같은 집에서 살기도 한 로테 호이저. 이렇게 세 명이 레니와 거의 평생을 함께 했다. 마르그레트 슐레머도 레니처럼 전쟁과부. 마음이 여려 자신 몸이 특정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그걸 거절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창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작 돈을 목적으로 계산적인 관계를 가진 유일한 남자는 죽은 남편이 유일했다. 슐레머 집에서 결혼하면 몇 만 마르크인가를 지참금 비슷하게 준다고 해서. 전시에 군인 병원의 간호사로 일했고, 40대 후반 시점에는 독립병동의 병상에서 불치의 성병을 비롯한 온갖 나쁜 병에 걸려 스스로 ‘완전히 죽은 몸’이라 칭한다. 내분비 기관이 완전히 망가졌다.

  마르그레트와 함께 레니가 어려울 때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를 머뭇거리지 않았던 친구 로테 호이저는 레니보다 아홉 살이 많아 쉰일곱 살. 입이 매섭다. 자기 두 아들을 빼앗은 시아버지 오토 호이저와 아들 35세 베르너와 34세 쿠르트를 악당이라고 부르길 서슴지 않는다. 레니가 비참하게 사는 이유가 그들 탓이란다. 호이저 가가 레니의 아버지 그루이텐 가와 무슨 악연이 있을까?


  로테 호이저의 시아버지 오토 호이저는 여든다섯 살이다. 이 나이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1차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었고, 간전기에 그루이텐 씨가 운영하는 건설회사의 경리 책임자로 20년간 빼어난 업무솜씨를 발휘한 능력자였다. 실력은 충분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사람 가운데 일종의 열등감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다. 그게 개인적 발전의 터보 엔진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오토 호이저가 그랬다. 다만 그루이텐 씨에게 인정을 받은 능력자였으니, 처음엔 충성을 하다가, 조금씩 나도 그루이텐 씨처럼, 그루이텐 씨 만큼, 이렇게 진행하고, 당현히 그루이텐 씨를 능가하는, 을 거쳐 급기야 그루이텐 씨를 깔아 뭉개는 수준의 부자가 되기로 작심을 하게 됐다. 처음부터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인리히 뵐도 작품을 쓰다가 마지막엔 결국 추하게 늙은 노인을 그리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아들 하인리히는 2차 세계대전에 나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죽고, 레니의 집에서 즐겁게 살고 있는 두 손자, 그냥 손자가 아니라 매우 총명해 하나를 가르치면 둘, 셋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똑똑한 두 손자 베르너와 쿠르트를 뺏어와 좋은 교육을 시켜 번호사와 기업가로 만든다.

  경제적 개념이 거의 없는 레니가 자기 사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느라 경제적으로 거덜이 날 때 쯤, 오토 호이저가 레니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집을 인플레이션이 왕성하게 진행하고 있던 시기에 사버렸다. 1960년대말 가치로 40만 마르크에 달하는 집을 정확하게 얼마에 사고 팔았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이후 레니가 헐값에 세를 들어 사는 조건이었던 건 맞다. 레니는 이 집에 포르투갈과 독일 부부, 튀르키예 남자 세 명 한테 다시 아주 싼 값에 다시 세를 주어 그 돈으로 생활한다. 포르투갈과 튀르키예에서 온 체류민들의 직업은 도시 청소원. 레니의 아들 레프와 같은 직업이다.

  레니의 아들 레프는 어음위조범으로 교도소에 수감중이다. 어음 위조가 네 번. 이 가운데 세 번은 레니와 주변인들 특히 로테 호이저가 나서서 막아주었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세 번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호이저 형제가 네 번째엔 드디어 고소를 해버린 것.

  레프? 재미있는 청년이다. 레프의 아버지는 어머니 레니가 유일하게 결혼한 알로이스 파이퍼의 남편이 아니다. 파이퍼가 전사한 후에 연합군의 폭격이 마치 폭풍우처럼 쏟아지던 밤, 공동묘지 묘혈로 대피한 와중에 만나 평생 사랑하는 사이가 된 소련인 보리스 류보비치의 아들이다. 보리스는 전쟁이 거의 끝날 즈음해서 레니와 친구들의 판단착오로 독일군증명서를 소지한 채 피신하던 중 연합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래서 레프 보리소비치는 ‘레프 보리소비치 그루이텐’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호이저 가문이 할아버지 후베르트 그루이텐의 마지막을 생으로 홀딱 떠 먹은 것에 분노한 것 같지만 레프는 기꺼이 시 청소부들과 같은 노동에 만족한 삶을 산다. 일을 조리있고 규모있게 해서 이주 청소 노동자들이 훨씬 많은 휴식 시간을 갖게 하는 효용을 만들어내 독일 시민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쉬는 꼴을 배 아파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를 눈여겨 본 관리자들이 레프에게 현장 말고 사무직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지만 그는 기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모전자전. 엄마 레니 역시 사회의 하층 계급들을 자기 집에 아주 저렴한, 저렴해도 너무 저렴한 가격의 월세만 받고 세를 들였으며, 스스로도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계약서에 쓰인 대로 내버려 둘 호이저 형제가 아니다. 할아버지를 닮아 똑똑하고 영리하지만 현명하지는 않은 천생 자본주의자인 형제들은 할아버지가 일군 거대한 자본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비스킷에 불과할 레니가 사는 집까지 몰수해버리고 싶어 한다. 레프가 교도소에 가 있는 동안.

  아무리 돈과 권력이 막강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 어떻게 안 되는 일이 있는 지는 안 알려줌.

  이 외에도 레니가 사춘기 시절을 보낸 기숙학교 시절에 만난 라엘 수녀와의 관계도 매우 중요한 축이다.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독후감이 길어져 그걸 소개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레니가 라엘 수녀에게 배운 바가 매우 크다. 훗날 마르그레트의 집에서 작은 파티를 하던 중 변기가 막히는 일이 일어나자, 남자들도 변기를 뚫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시간만 끌고 있을 때, 레니는 변이 잔뜩 들어있는 변기 속으로 맨손을 쑥 넣어 배관을 막고 있는 사과 한 알을 꺼내 시원하게 분뇨를 배출시킨다.

  아마도 기꺼이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살기로 결정하게 영향을 끼친 것, 레프 역시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기로 만든 것도 선한 라엘 수녀의 삶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책 전반부는 많은 등장인물의 삶과 에피소드가, 하인리히 뵐 특유의 건조한 문장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읽기가 편하지 않지만, 후반부로 접어들어 스토리가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작품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고 지긋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로울 듯하다.


  오늘 독후감, 참 못 썼네.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도 모르겠네. 확 지워버리고 다시 쓸까?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 뭐, 아마추어 주제에. 그냥 냅두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쏘시개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

  집에 있는 책 가운데 안 읽은 거 없나 보다가 아이들 살던 방에 가봤더니 작은 아이방에 노통의 책이 열댓 권 꽂혀 있다. 맞아, 얘 군대 가기 전이니까 한 십여 년 전에 노통 책을 많이 모았어. 읽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는 노통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가운데 가장 얇은 책 한 권을 골라 후딱 읽었을 거 같지? 아니다. 역시 나하고 맞지 않아 본문이 80페이지에서 끝나는 진짜 얇은 책임에도 이틀 걸렸다.

  11년 전에 쓴 <적의 화장법> 독후감에서 한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내가 읽은 두 권의 노통, <적의 화장법>과 한 22년 전쯤에 읽은 <두려움과 떨림>이 지금은 완벽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 <적의 화장법>이 “거의 두 명의 화자가 엮어가는 대화로 되어”있단다. 이어서 “차라리 나 같으면 희곡을 썼겠지만 그건 필자 마음대로”라고 말함으로써, 사실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는 걸 증명했다. 겁나 웃기네.

  <불쏘시개>는 아멜리 노통이 이 책을 발표한 1994년까지 쓴 유일한 “희곡”이란다. 내가 희곡은 좀 읽어봤잖아? 만일 <불쏘시개>를 정말로 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면, 확실히 말하건대, 나는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희곡 스타일을 딴 소설이라 하는 편이 더 좋겠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뜻. 술 탄 물, 또는 물 탄 술. 이탈리아나 프랑스 사람이 한 모금 마신 물 탄 커피.


  등장인물은 50대 남자 교수와 서른 살 먹은 그의 조교 다니엘, 그리고 마지막 학기만 마치면 졸업하는 20대 여학생 마리나.

  다니엘은 조교로 있으면서 4학년 여학생들하고 만 연애한다. 그러면 1년 후에는 다른 도시의 직장으로 떠날 것이라 깔끔하게 이별할 수 있다. 이번 순서가 마리나인데 하필이면 전쟁이 터졌다. 진짜 있었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은 아니고 그렇게 작품의 환경을 설정했다. 게다가 겨울. 하필이면 아주 혹독한 추위가 몰아 닥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소는 어마어마하게 큰 서가가 있는 교수의 방. 서가 말고는 거대한 무쇠 난로와 나무의자 두 개가 있을 뿐이다. 나무의자여야 한다. 언젠가는 거대한 무쇠난로 안으로 던져져야 하니까. 무지하게 추운 날씨임에도 무쇠난로는 아무것도 태우고 있지 않다. 전시라서 장작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교수는 두꺼운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무릎 위에 서류 뭉치를 올려놓은 채 뭔가를 쓰고 있다. 직업 또는 직업병이라서.

  다니엘이 들어온다. 여태까지 도서관에 있었다. 전쟁중이라도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 벽에 연결된 보일러 관의 열기에 등을 대고 있으면 뜨듯하니 그렇게 좋아서. 교수는 책상까지 벌써 두드려 패 장작으로 써버렸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책뿐. 맨바닥에 앉으면 더 추울 것이라 의자 두 개만 남겨 놓은 처지.

  이제 책을 불태우는 일만 남았다. 많고 많은 책을 결국 다 태우게 되겠지만, 무수한 노작 가운데 태워 버려도 될 만한 책을 먼저 태우는 것이 마땅한 일. 책장에서 딱 한 권의 소위 “무인도 책”을 고르는 일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일을 교수와, 다니엘과, 조금 후에 도착할 4학년 여학생 마리나가 해야 한다. 그러니 적지 않은 날이 필요하다. 곧 세 명이 방 두개, 침대 두개인 이 집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다니엘과 마리나가 함께 같은 침대를 공유하기로 한다. 섹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둘이 자면 체온을 유지하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점이다.


  명색이 교수, 조교, 학생으로 되어 있고, 책들은 이들이 가르치고, 연구하고, 배운 책들이라서 세 명이 책과 내용에 관한 토론과 다툼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가 당연히 다니엘-마리나 커플이 아니라 50대 남자인 교수와 20대 여학생 마리나가 관계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묘한 암시도 등장한다. 다니엘이 열폭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럼에도 이야기는 사랑 또는 사랑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책을 끝까지 가지고 있는지, 대화로 치고 받는 데 초점을 맞춘다. 픽션이니까 서양것들이 워낙 야만스러워 장유유서라는 공맹의 도를 모르는 건 그렇다 쳐도, 남의 집에 들어와 얹혀 사는 것들이 집주인한테 바락바락 기어오르기도 한다. 아니, 드러우면 지들이 나가면 될 거 아냐. 나가지 못하겠으면 국으로 죽은 척하고 살든지.

  노통이 하고 싶은 말은, 책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하는 것. 온기를 얻기 위해 책을 태우는 행위. 즉 마지막에 사람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주장과 철학과 이야기로 인류를 덥혀주는 것이 책이라는 말이겠지.

  그래서 전쟁 중이라 길거리에 나가면 점령군에 의하여 무차별 학살을 당할 수도 있는 처지라도 배고파 죽겠다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춥다는 말만 한다. 애초 책을 태우는 행위로 만 가게 디자인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성 마리나가 과하게 의존적이다. 마리나가 교수한테 말한다.

  “(마리나가 추워한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알고 있다면 추운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다면, 사람들이 이미 저를 따뜻하게 해주러 왔어야 해요. 만일 선생님이 제가 어떻게 참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짐작했다면, 갖고 계신 책을 몽땅 당장에 불태웠을 거라고요. 선생님은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죠. 누구든 알리가 없죠. 내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안다면 어느 누구도 그렇게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p.41~p,42)

  내가 여성이라면 기분 나빴을 거 같은데, 그러지 않아 뭐라 말하기 어렵다. 하여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마리나는 자기가 나서서 어려움을 해결하지 않고 누군가 와서 자신을 돕기를 바라는 반면, 남자인 다니엘은 도서관 벽을 통과하는 보일러 관이라도 찾아 나선다. 뒤로 가면 한술 더 뜬다.

  “나는 젊고 예뻐. 내가 늙고 추하다면 나를 따뜻하게 할 어떤 방법도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어. 나와 마주한 육체를 갖는다는 것은 내 생존 조건의 하나가 된 거야.” (p.75~p.76)

  작품을 쓴 시점이 1994년. 당시 노통 보다 한 세대 정도 과거의 작품이라면 그 당시 사람들의 여성관이 이랬다, 할 수 있겠지만. 토론하자는 거 아니다. 뭐 그렇다는 거다.

  아멜리 노통을 또 읽는다면, 아마도 무지하게 심심해서일 거 같다. 그러나 세상 일 모르는 거라서 꼭 그렇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한 20년 전에 매스컴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서 화르륵 인기를 얻었다가, 한 순간의 별들이 늘 그렇듯이 이젠 스르륵 잊힌 작가. 물론 내가 관심이 없어서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전적으로 오직 내 생각이란 걸 전제로 이야기하자면, 출판사 열린책들이 다른 건 모르겠고 마케팅은 참 잘해. 한 번 책 찍고, 조금 있다가 개정판, 조금 더 있다가 한정판, 아주 조금 더 있다가 다시 재개정판. 근데 초판에 맞춤법 틀린 건, 비문非文까지도 끝까지, 개정판, 한정판, 다시 재개정판에도 여전히 맞춤법 틀리고 비문인 거는 뭐야? 뭐 그렇다는 거다. 시비하고 싶지 않다. 이이들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5-12-02 1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한 번 책 찍고, 조금 있다가 개정판, 조금 더 있다가 한정판, 아주 조금 더 있다가 다시 재개정판. 근데 초판에 맞춤법 틀린 건, 비문非文까지도 끝까지, 개정판, 한정판, 다시 재개정판에도 여전히 맞춤법 틀리고 비문인 거는 뭐야?˝ ㅋㅋㅋㅋㅋㅋㅋ 공감합니다.
열린책들은 심지어 세계문학에 있던 작품 막 쪼개고 나누고 해서 또 내고 이런 것도 잘하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5-12-02 19:24   좋아요 0 | URL
마케팅 쪽으로 생각하면 열린책들 만한 곳이 없어요! 개정판, 한정판, 재개정판도 모자라서 특별판, 염가판... ㅎㅎㅎ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장사 좀 하자는데 뭐 시비할 수도 없고 말입죠. ㅋㅋㅋ

yamoo 2025-12-0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멜리 노통 책은 읽다가 못 읽겠더라구요...1권 읽다가 닾고 빠이빠이~~
근데 이 사람 거의 모든 책이 당시 번역된 듯 하더라구요..당시 수요층이 분명히 있었긴 합니다. 베스트셀러였고..ㅎㅎ 노통 읽느니 <몽유병자들>을 다시 읽겠습니다..ㅎㅎ

Falstaff 2025-12-02 19:27   좋아요 0 | URL
노통만큼 매스컴의 각광을 한꺼번에 왕창 받았던 신예도 없었을 겁니다. 아마 그랬을 거예요. <몽유병자들>... 흠. 저는 생각해봐야겠는 걸요? 적어도 읽기 편한 것만 따진다면 몽유병보다는 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ㅋㅋㅋㅋ
 
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의 칠레. 드디어 피노체트는 자신의 집권연장 여부의 찬반에 관한 국민투표를 시행하겠다고 꼬리를 내린다. 15년간의 통치 동안 숱한 반대자들을 고문 학살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재자들이 그러했듯 그동안 열광적인 지지자들도 무수하게 만들어내 국민투표에서 피노체트의 퇴진은 겨우 54%의 찬성에 불과했지만 어찌됐든 피노체트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조용히 막 뒤로 사라질 인간이 아니었다. 피노체트는 1998년까지 군통수권자의 권한을 유지하고, 종신 상원의원으로 면책권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이걸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행정부와 입법부보다 더 권한이 큰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존속시키고 상원의원 47명 가운데 9명을 자신이 지명할 수 있었으며, 70년대 쿠데타 당시 저지른 학살과 고문에 대한 사면법을 제정해 자신과 추종자들에 대해 형사상 기소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1980년대 들어 시민들이 목숨을 걸어가며 이룩한 민주화는 결국 피노체트의 손바닥 위에서 근두운을 타고 세상 끝까지 날아간 원숭이 한 마리의 노력에 불과했다.

  1989년 말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기독민주당의 파트리시오 아일윈도 군부독재 시절에 있었던 각종, 각색의 인권탄압 사례를 조사하여 발표했을 뿐, 여전히 남아 있는 군부의 불법적 폭력행위에 관해서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여전히 칠레는 피노체트의 군벌 자식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거대 거짓 국가였으며, 이들은 당시 칠레를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행복한 국민으로 치장해 발표하는 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인민은 생각보다 우둔한 법. 많은 사람은 정부 또는 권력기관의 헛소리를 헛소리로 알아들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서 사는 줄 알았다.


  작품은 3천킬로미터의 해안선을 가진 칠레의 남부, 파타고니아 아이센 협만에서 시작한다. 칠레 저 위쪽, 산티아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별로 관심 없이 남극을 면한 추운 산악지역에서 가축 절도로 대표하는 지역 범죄 수사에 몰두하고 있는 마푸체족 출신의 시골형사가 주인공이다.

  권력이나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거나, 돈이 많은 하이 클래스 사람들이 아니라, 쇠똥이 범벅이 된 가죽부츠를 신고 다니며, 짐승처럼 유별난 후각을 지닌 이 형사처럼 그저 보통 사는 사람 가운데 조금 유별난 이웃을 세풀베다는 즐거이 주인공으로 삼아 작품을 쓴다. 우리 이웃 같지만 아주 단단한 사람. 이 마푸체족 시골 형사가 그렇다. 170 정도의 키에 옹골찬 옹이 같이 단단한 남자. 형제 가운데 1번. 이이의 아버지가 1번에게 붙여준 이름이 조지 워싱턴. 2번은 토마스 제퍼슨. 그래서 주인공은 시골형사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이다.

  카우카만은 지금 가축 절도사건의 범인을 잡으러 가는 것이 이 파나고니아 지방에서의 마지막 활동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애마 팜페로를 타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깊숙한 골짜기의 건초 저장소에 접근했다. 탄알 열네 발이 장전된 레임턴 엽총을 손에 묵직하게 든 형사는 하늘을 향해 먼저 몇 발을 발사하고 힘차게 외쳤다.

  “모두 손은 머리 뒤로 얹어!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엉덩이를 날려 버리겠다.”

  다 합해 세 명. 두 명은 카우카만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기도 하고, 타고 도망할 말에 안장도 얹지 않은 상태라 고분고분했지만, 한 명이 문제였다. 시골이라도 군부의 막강한 실력자의 친척 끄나풀이 없는 곳이 별로 없다. 파타고니아도 마찬가지라서 산티아고에 사는 칸테라스 장군의 친아들이 이 악당 도둑들을 끌고 가축을 훔쳐냈던 거였다. 키가 크고 야위었지만 꽤 고급스러운 판초를 어깨에 두른 남자. 이 남자가 도둑은 아니다. 결코 비루하게 훔치는 일까지 하지는 않으니까. 그가 판초를 어깨 위로 젖히자 옆구리에 우지 기관총이 보였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러나 남자가 기관총의 총구를 시골형사 쪽으로 돌리기도 전에 형사는 땅에 엎드리면서 레밍턴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남자의 엉덩이에 제대로 박혀 아마도 엉덩이 근육의 절반쯤 날려 버렸을 듯하다.

  죽지 않은 남자가 자빠져 내려다보는 카우카만 형사에게 이들 득득 갈며 한 말씀 쾅.

  “네 놈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네놈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맹세하마.”


  기관총을 들이대며 위협한 범죄자의 엉덩이를 향해 총을 발사한 시골 형사. 경찰서는 난리가 났다. 다음날 신문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경찰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시민 마누엘 칸테라스가 둔부에 탄피 열네 발을 맞아 크게 다쳤고 오른쪽 엉덩이의 70퍼센트가 떨어져나갔다….”

  수사 서류를 포함한 모든 기록에는 “젊은이가 트레스 몬테라스 목장에서 홀스타인 젖소들을 훔쳐 달아난 질 나쁜 가축 도둑들을 지휘했다는 대목은 빠져 있었다. 그리고 우지 기관단총을 우리에게 갈기려 했다는 대목도 빠져 있었다.”고 항변했지만 이제 시골 형사한테 남은 건, ①경찰복을 벗고 초야에 묻혀 칸테라스가 보낸 암살범을 기다리는 것, ②과도한 수사업무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잠깐 헤까닥한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핑계대고 다른 곳으로 전출해 계속 근무하는 것. 두 가지 선택만 남았다.

  그리하여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 형사는 평생 가고 싶지 않았던 부패와 더러움과 대기오염과 쓰레기 냄새가 넘실거리는 대도시 산티아고 경찰서의 성범죄 수사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카우카만이 도착한 산티아고. 칸테라스의 홈그라운드에 제대로 들어온 셈이다. 아무리 형사라도 전직 또는 현직 군인의 무리에 당할 수는 없던 시절. 산티아고에 왔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카우카만의 목숨은 말 그대로 경각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카우카만 역시 만만한 사내가 아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철제 책상을 놓고 그래도 공무원이니 전화와 문방구 같은 것을 비치해주지만, 카우카만이 수사할 사건이 있을 지는 모르겠다. 산티아고 경찰서 내에서도 이미 카우카만의 처리에 대한 모종의 암묵적 지시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내 말 잘 들어. 이 빌어먹을 인디오. 우리는 마누엘 칸테라스의 친구들이고, 너를 고자로 만들 생각이야.” 근처 음식점에 가 혼자 점심을 먹고 있는데 건장한 놈들이 세 명 몰려와 하나가 맞은편에 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카우카만은 자기가 먹던 포크를 번쩍 들더니 눈 깜짝 할 새에 그의 손등을 찍어 버리면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손으로는 아니야”라고 응수했다. 첫날부터 피곤하게 됐다.

  그러나 모두 칸테라스의 친구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파타고니아에서 마누엘의 엉덩이에 총알을 박은 것이 산티아고 신문에도 카우카만의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려, 그는 이미 군벌에 반대하는 옛 반쿠데타 진영에 스타가 되어 있었던 것. 이 가운데 시골 형사와 제일 먼저, 제일 가까워진 사람은 대학 재학 당시 연인과 함께 피노체트 일당에 잡혀 악명높은 비야 그리말디를 다녀온 여성 택시 운전자 아니타 레데스마. 그리고 아니타와 친분이 있는 여성 방송국의 모든 사람들.

  마누엘 칸테라스 일당은 카우카만을 없애기 위하여 권총과 기관총을 든 세 명을 아니타의 아파트 앞에 매복을 시켰으나, 밀림에서 생존법을 완벽하게 익힌 카우카만이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과감하고 신속하게 세 명의 암살자를 제압한 카우카만은 드디어 거대한 군부 권력의 찌끄러기 잔재인 마누엘 칸테라스와 정식으로 맞짱을 뜨게 되는데….

  재미있게 읽은 폭력, 수사 소설. 정치적 함의가 푹 들어 있어 절대로 가볍지 않은 경장편이랄까 중편.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5-12-0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풀베다의 <핫라인>이네요...저도 재밌게 읽었던 작품....간혹 뽈님 서제에 올라오는 세풀베다 리뷰! 무척 반갑습니다..ㅎㅎ 근데 별5개는 없네요...세품베다 작품들 중 어떤 작품이 5개가 될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개인적인 생각인데 대개가 4점에서 끝날 거 같습니다.ㅎㅎ

Falstaff 2025-12-01 11:25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세풀베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별점 주려면 아무래도 다섯 개엔 손이 가지 않더라고요. 좀 더 읽어봐야지요, 이제 겨우 세 권 읽었는 걸요. ㅎㅎ
 
무의미의 제국
캐시 애커 지음, 장한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에 사달라고 했다가 이런 답변을 받았는데요, 좀 야~한 모양이죠?
˝해당 도서는 19세도서로 도서관에 비치하기 어려운 도서이므로 희망도서 신청이 취소되었습니다˝
이런 줄 몰랐다가 사서 읽은 다음에 책꽂이 꽂아 놓으면, 그걸 집에서 눈 밝은 애새끼들이 읽을까요, 안 읽을까요? ㅋㅋ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5-11-30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읽습니다. 적어도 폴 님 자제분들은 🤣

저 이 책 미리보기로 좀 봤는데 그냥 안 야하던데 말입니다?! 100자평 보니 폴 님 말고도 도서관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분 또 있더라고요!

Falstaff 2025-11-30 15:34   좋아요 1 | URL
작은 아이 미취학일 때 철없는 애비가 책장 꼭대기에 숨겨놓은 허슬러를, 기어코 거기까지 기어 올라가 찾아내 보고 뒤집어졌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 당시 큰 아이가 일곱살? 그 정도였는데, 엄마, 큰일 났어, 이 새끼 앞으로 변태 될 거 같아! 뭐 다 그렇게 사는 거죠. 쇤네도 어린 시절 비슷한 경험이 있고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5-12-02 11:03   좋아요 1 | URL
될성부른 나무였군요. 일곱살에 허슬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헛간, 불태우다 쏜살 문고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역자의 성의없는(것처럼 보이는) 우리말 문장이 거슬려서 그렇지, 포크너 이 양반 도무지 까탈을 잡을 수가 없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