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연습 위픽
김지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83년생 김지연은 “거제도에서 조선노동자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대학은 (가족이 이사를 했는지 혼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애초 시를 쓰려다가 소설로 바꾸어 2008년에 단편 <작정기>로 등단,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그리고 70회 현대문학상을 받아 상금 천만원, 세금 제하고 989만원을 현금으로 받았다. 이 정도면 잘 나가는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데도, 오, 우리나라의 출판 문학이여, 아직 (지금부터 석 달 전까지) 집도 없고 차도 없었단다. 하기는, 적수공권으로 서울에서 시작했으면 마흔둘에 집 사기 쉽지 않지. 뭐 요즘 사는 게 다 그렇다. 마음 넓은 김지연 씨가 이해하고 지나가자.

  2008년 데뷔 치고는 출간한 책 권수가 적다. 그동안 소설집 두 권, 중편 한 권, 장편 한 권. 이렇게 네 권이다. 단편 꼴랑 하나 실은 <새해 연습>은 책으로 세지 않으면 그렇다. 나는 <새해 연습>이 처음 읽은 김지연이다. 근데 마음에 든다. 내가 좀 까다롭다. 특히 단편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차분해서 좋다. 튀려 하지 않는다. 웬만하면 쓸 거 같은 자극적인 장면도 없고 따라서 과장도 없다. 맛이 없어서 좋다. 아니, 맛이 약하고 순해서 좋다. 당연히 할 말은 다 한다. 새해면 제일 추운 겨울인데도 춥지 않아서 좋다. 날이 안 추운 게 아니고 글이 안 춥다.

  홍미의 부모는 일찌감치 갈라섰다. 그리고 각기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해 살았다. 홍미는 이쪽 저쪽을 오가며 살았다. 이쪽에 씨다른 형제, 저쪽엔 배다른 형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기숙사 있는 공장에 취직해 들어갔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어머니는 폐암으로 갔다. 홍미는 누구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가봤자 찬밥이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작가 김지연은 하지 않는다. 대신 거기 갔더라면 혹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을까, 라고 잠깐 생각한다. 싸구려 작가들의 경우, 장례식장에 나타난 전남편, 전처 소생이 찬밥이란 말을 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독자는 거기까지 염두에 둘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조금씩 김지연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다.

  할머니가 죽었다. 목을 맸고, 죽고 일주일이 지나 독거노인 관리 담당 공무원이 발견했다. 세상에 오롯이 홍미 혼자 남았다. 올 사람도 없어 빈소 없이 장례를 치뤘다. 할머니가 살던 집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낡은 집. 이제 그 집은 홍미 것이 될까? 아니다. 왜 아닌지는 나오지 않는다. 할머니 소유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집이 이제 자기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세상에 나서 뭔가 제대로 된 걸 가져본 적이 없으니 뭐 그런가 보다 했다. 외로우면 빨리 깨는 법이라서.

  할머니 이름은 ‘양지.’ 이름처럼 바닷가 언덕바라지라서 바람은 많아도 햇빛 또한 많은 곳에서 살다 갔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1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일기장 더미만 빼고. 18년치의 일기장이 이불장에 차곡차곡 재여 있었다.

  “그냥 버리셔도 돼요. 이제 전적으로 임홍미 님 소유니까요. 마음대로 하시면 돼요. 종이니까 그냥 밖에 내다 놔도 다 수거해 갈 거예요.”

  홍미는 그럴 수 없다. 누가 볼까봐. 일기니까. 그래서 담배도 한 대 피울 겸 옥상에 올라간 김에 조금 태워본다. 근데 유일한 친구 민석에게 전화가 온다. 이런저런 얘기하다 옥상에서 무엇을 태우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홍미는 불법을 저지르기 싫다.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고 싶은 홍미.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법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홍미는 발로 밟아 불을 끄고, 태우는 대신 조금씩, 한두 권씩 회사에 가지고 가 파쇄하기로 하고, 그렇게 한다. 순백의 파쇄지 사이에 누렇게 변색한 할머니의 일기. 그 작은 파편들.

  할머니 양지의 일기가 보통 수준을 넘는다.


  “덥지도 않은데 선풍기를 틀었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있으면 바람이 불어서 화장대 앞에 있는 휴지가 팔랑팔랑 움직인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으면 갑갑하다는 기분이 들어서 무언가라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느껴진다. (후략)”  (p.15)


  이처럼 쓰기 쉬울 것 같지? 결코. 홍미가 할머니를 닮았으면, 유전자 좀 물려받았으면 소설가가 될 뻔했는데, 엉뚱하게도 DNA는 홍미 대신 김지연에게 가버렸다.

  홍미는 유일한 친구 민석과 함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할머니 옛집에 들러본다. 철대문은 누가 떼어갔고 마당의 시멘트 갈라진 땅에서 잡초가 돋았다. 방과 부엌에는 갖은 쓰레기가 넘쳐있다. 이거나마 내 집이었으면. 잠깐 생각한다.

  할머니가 죽어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홍미가 법을 지켜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지금 경리로 일하는 작은 기념품 회사의 사장 경식은 홍미에게 터치하며 일종의 연애를 제안하고 홍미는 당연히 거절한다. 사장 경식은 유부남이며, 아내가 아닌 여자와 연애 경험이 있다. 홍미가 거절하고 며칠 후, 경식은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져 인원을 줄여야 하니 퇴사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하는 홍미. 하지만 곧 구인광고를 발견한다. 세상은 그렇게 흐른다. 여차하면 나올 거 같은 202X년의 성추행 장면을 김지연은 묘사하지 않는다. 경식의 차 안에서 홍미는 말을 듣지 못한 듯 “내일 뵐게요.”하고 내리는 것으로 마감한다. 세상을 둘러봐도 자기 혼자인 홍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생각할 때가 더 많았고 그날도 그랬다.” (p.60)

  반지하에 살고 있는 빌라도 경매에 넘어가 전세금 되돌려 받기가 쉽지는 않을 거 같다. 꼭 없는 사람들한테만 일은 엎친 데 덮친다. 홍미는 덤덤하다. 덤덤하게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 민석에게 말한다.

  “민석아, 우리 결혼할래?”

  저번에 먼저 결혼하자고 했던 민석은 안 된다고 대답한다.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친구가 한 명은 결혼식에 와야 할 것 같아서. 너 말고는 친구가 없거든.”

  민석도 부모가 다 돌아가고 세상천지에 자기 혼자다. 사는 게 다 그렇다.

  그래도 이들은 꿀꿀하지 않다. 속으로 곪아도 겉으로만 그러는지, 아니면 속도 정작 얹힌 것이 별로 없는지 이들은 어쨌거나 나쁘지 않게 인사한다.

  “해피 뉴 이어!”

  물론 이게 끝은 아니다. 끝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은 새해가 되면 아주 잘 살아보고 싶다.

  이게 끝은 아니다.

  김지연의 책을 좀 더 찾아봐야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폴란드인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쿳시는 읽으면서 하여간 뭔가 좀 불편했다.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쓰는 사람이건만 어쩌면 그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하여간 뭔가 불편한지 거 참. 이게 나름대로 쿳시의 매력이고 한 번 쿳시를 좋아하면 빠져나오기 힘든 중독성일지 몰라도, 에잇, 나는 그게 불편했다는 말씀. 특히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장교가 어린 여자 아이의 눈동자, 홍채 가까이 뜨겁게 달군 쇠붙이를 가져가서 시력을 거의 상실하게 만드는 장면을 읽은 다음부터 꽤 오래 쿳시 작품을 멀리 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이런 종간나가 또 있을까 싶더라고. 근데 그의 자전적 소설 <서머타임>을 읽고 겨우 반년만에 또 쿳시를 골랐다. 이건 전적으로 도서관 신간 코너 올려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책 좀 읽는 사람은 전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책, 이른바 쌔삥인 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그랬다. 그래서 얼씨구나, 얼른 집어 들었더니, 편집도 참 널럴해 본문이 223 페이지까지인 것을 단숨에 읽어 치울 수 있었다.

  제목의 폴란드인이 누구냐 하면, 이름 비톨트 발치키예비치. 1943년생. 당시 72세. 작품은 이이가 죽어야 끝난다. 쇼팽 전문 연주자로 알려진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낭만적이지 않고 엄숙한 쇼팽으로 해석한다고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해 악보대로 친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쇼팽은 시대가 변하면서 여러 해석으로 교차 연주되었는데, 심지어 한 때는 피아노를 타악기로 규정해 (사실 햄머로 현을 때리는 타악기가 맞기는 맞잖아!) 강하고 힘차게, 마치 프로코피예프를 연주하는 것처럼 두드려 패던 시대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자들 가운데 아마도, 쇤네가 틀림없이 말씀드리는데, 아.마.도. 가장 인기가 없는 쇼팽이 이 비톨트 발치키예비치 스타일일 듯하다. 앗, 그러고 보니 프레데릭 쇼팽도 폴란드인이다. 그럼 뭔가 만들어지겠지?


​  쿳시가 서양 고전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건 알겠다. <서머타임>에서도 한 유부녀의 부부 침대 속에서 홀랑 벗고 줄리아 몸 위에 올라가더니 슈베르트의 현악오중주 D.956 2악장을 틀어놓고, 줄리아, 아다지오 속에서 섹스를 느껴봐, 이랬다는 거 아닌가 말이지. 말이 좋아 고전음악에 일가견이다. 솔직히 말해 이쯤이면 변태 아냐?

  변태 쿳시가 <폴란드인>에서 피아니스트를 호출한 것은 그래도 일견 타당하다. 차차 이야기하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부르주아 유한계급들이 서클, 동아리를 구성해 고딕 지구地區에 있는 연주홀 살라 몸푸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었다. 게다가 부르주아들의 가오가 있어서 그래도 세계 음악계에 이름이 난 연주자를 초빙해 당연히 입장료가 어마어마, 없는 사람들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고. 이 동아리 이사회 임원으로 1967년생, 사십대 후반의 베아트리스 여사가 있었으니 한 눈에 보이는 걸로 설명하자면 키가 크고 우아하지만 일반적 척도로 미녀는 아닌 한 남자의 아내요, 두 아들의 엄마이며, 몇 명의 손주를 둔 할머니였다. 이사회에서 비톨트를 초청했고, 연주회를 했으며, 뒤풀이는 원래 베아트리스의 친구인 마가리타 부부 전담이었는데 이 부부가 싸웠는지 어땠는지 몸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호소를 하는 바람에 여사가 대신 (나이 많은 레진스키 부부와 동행해) 비톨트의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호텔(당연히 로비)까지 동행하기로 했고, 그렇게 했다.

  독자는 슬그머니 눈치챈다. 나이 차이가 좀 있다. 1943년생과 67년생, 두 바퀴 돌아 띠동갑. 그럼에도 남녀가 만났으니 불꽃이 튀겠지? 튄다. 다만 예술을 하고, 예술을 업으로 하며, 예술에 목을 매는 비톨트가 일방적으로. 그는 책의 상당부분 진행될 때까지 끊임없이 넘어가지 않는 나무를 찍어댄다. 베아트리스 여사는 혼인 후에 한 번도 남편 외의 다른 남자에게 마음과 몸을 제공한 적이 없는 정숙한 여성. 눈치로 보아 남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며, 아내가 만일 바람을 피운다 해도 질투가 나서 속은 많이 상하겠지만 이제 와서 그것 가지고 죽네 사네 따따부따 하지 않고 아내의 사생활을 존중은 못하더라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의향이 있다. 독자가 보기에 의향이 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아직 50도 되지 않아 남편의 아랫도리 사정과 별개로 거의 섹스리스 부부로 지내고 당연하게 각방을 사용한다. 그게 편하거든. 특히 수면의 질 측면에서 훨씬 바람직하다.


​  다음 문제는 작품의 첫 문장에 힌트가 있다.

  “여자가 먼저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이어서 곧 남자가 그렇게 한다.”

  딱 이 한 문장에서 “그”는 작가이자 화자인 J.M. 쿳시 본인이다. 이후에 나오는 ‘그’는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3인칭 대명사이며, 대부분은 비톨트 발치키예비치이다.

  뭐가 문제인가 하면, 여자, 즉 베아트리스는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는 바르셀로나 사람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프랑스어를 조금 할 줄 안다. 비톨트는 유럽의 변방, 변방 가운데 변방이며 말 그대로 시골 촌구석 취급을 당하는 폴란드 사람으로 당연히 폴란드어와 문자를 사용해 언어생활과 시를 짓는다. 외국어로 영어를 하지만 능숙하지는 않아서 단어 간의 미묘한 차이를 혼동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반면에 J.M. 쿳시는 아프리카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작가로 이 둘 간의 커뮤니케이션 사이에 끼어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는 뜻이다. 쿳시는 평소에 영어가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에 불만을 가져 이 <폴란드인>도 지역적 배경인 스페인에서 먼저 번역 출판한 다음에 영어판을 냈다고 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이런 작가를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 배가 불렀다. 여봐 쿳시 선생, 힘주지 마, 터진다.

  이리하여 베아트리스와 비톨트의 대화 또는 의사소통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뜰하게 삐걱거린다. 베아트리스 역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비톨트의 영어를 수정해주고, (normal과 ordinary 같은)단어의 뉘앙스 차이를 설명해주기도 하는데, 훗날 비톨트의 시 80여 편을 받아 이를 다시 카탈루냐어로 해석하느라 곤욕을 겪기도 한다. 비톨트는 자신의 구원의 여신, 단테한테 베아트리체가 있었듯이 자기한테 나타난 베아트리스에게 감정을 전하기 위하여 편지 대신 오직 단 한 명인 베아트리스를 위해 연주한 녹음을 전달하기도 한다. 문제는 베아트리스가 자기 하나 만을 위한 연주를 듣고 비톨트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다는 거.

  정말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책 속에 나오냐고? 적어도 인용은 한다. 그러나 인용하는 횟수는 덜할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비유는 폴란드인 프레데릭 쇼팽과 조르주 상드. 1838년 둘은 쇼팽의 건강이 나빠지자 사철 날씨가 온화하고 맑은 스페인 동쪽 발레아레스 제도의 마요르카 섬으로 가 1년을 보낸다. 작품 속에서 비톨트는 마요르카 섬의 쇼예르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고, 이 소식을 전하니 베아트리스는 마음에 별로 없는 것 같음에도 남편과 함께 마요르카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다. 남편은 업무 일정 때문에 일주일 후에 돌아가고, 가자마자 비톨트가 별장에 와, 한 지붕 아래 함께 묵는 건 아니고 별채 건물에서 따로 생활하는데, 결론만, 아니면 당신이 궁금한 것만 말씀드리자면, 결국에, 했다.

  이때 비톨트 나이가 아마 74세쯤 됐을 걸? 베아트리스는 50 정도. 베아트리스는 내가 모르겠고, 비톨트 선생은, 나 참. 사랑하는 여자 앞에 초라하고 늙은 몸을 드러내는 수치심을 견디면서까지 해야겠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 같으면 애초에 이런 가능성도 만들지 않았을 거 같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하여간 비톨트 선생은 베아트리스와 했고, 해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날 며칠을 했는데, 이제는 발기 유지에 당연히 문제가 있어서(잠깐이라도 딴 생각해도 그냥 죽고 말 걸?) 할 때마다 베아트리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며, 이 관계를 지속하다가는 나중에 큰일나겠다고 판단한 베아트리스는 그에게 이만 가라고 딱 부러지게 말한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이렇게 작품도, 둘의 인생도 끝나는 건 아니다. 세월은 계속 흐르고, 영어의 세계정복은 여전히 현재진행이고, 비톨트는 단지 속 하얀 뼛가루로 남기 바로 전까지 죽도록 베아트리스를 사랑하는 반면, 베아트리스는 머리 속에서 비톨트를 지워버린 거 같은데도 여전히 저 속에 명주실만큼 가느다랗고 질긴 끈이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은 의사소통이 안개처럼 막membrane을 이루고 있던 거였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5-05-09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좋게 읽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서로의 모국어가 다른채로 사랑하는 이야기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떤 불편함 같은 것들이 잘 나타나서 말이지요.
이 리뷰 읽으니 제가 아직 읽지 못한 변태 소설 서머타임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훗.

Falstaff 2025-05-09 16:22   좋아요 0 | URL
변태 소설 거 뭐라 말씀을 드리지 못할 거 같고 참 ㅎㅎㅎ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ㅋㅋ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재미있게 읽은 단편집 《퀴르발 남작의 성》 이후 어째 최제훈의 다른 책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을까?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은 도서관 서가를 서성거리다가 눈에 띄어 고른 책이 아니다. 잔뜩 술에 취해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에 오줌 마려워 깨기 바로 직전, 아마 비몽사몽 중이었던 거 같은데, 허연 수염이 배꼽 밑에까지 내려온 할배가 퀴르발 남작이라고 아느냐고, 혹시 기억하느냐고 물어보더니 펑 소리와 함께 흰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거 아니었느냐는 말이지. 안 믿기지? 맞다. 구라다. 그냥 갑자기 퀴르발 남작이 떠올라서 그래, 그래 최제훈이 있었어 싶어 잽싸게 검색해봤더니 동네 도서관에는 없어서 상호대차서비스 신청해 읽었다.


  제목부터 근사하잖아?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이라. 근데 한 가지 오류가 있다. 즉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하나 있다. ‘블러디메리’를 나는 ‘블러디 (한 칸 띄고) 메리’ 즉 헨리 튜더와 에스파냐의 공주 아라곤의 카탈리나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손이자 잉글랜드 역사상 사실상 최초의 여왕 메리 1세, 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성공회 사제들과 기타 개신교도들을 줄줄이 화형을 시켜 별칭 “피의 메리”로 불린 비운의 여성을 일컫는 말인 줄 알았다. 책에 다섯번 째로 실린 <토피아>에 ‘블러디메리’가 나온다. 변호사 우영우 말대로 기러기,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역삼역과 더불어 똑바로 해도 토마토, 거꾸로 해도 토마토에 관한 짧은 이야기.

  “토마토는 거꾸로 해도 토마토라는 사실이 토마토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토마토는 자신이 토마토라는 걸 모르니 상관없을 것이다. 아는지도 모른다. 토마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케첩과 카프레제와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 토마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건 토마토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 (p.169)

  카프레제는 “신선함이 가득한 토마토 요리”라고 ‘만 개의 레시피’라는 홈페이지 http://www.10000recipe.com에 나온다. 안 먹어봐서 모르겠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자. 여기까지 왔으면 ‘블러디메리’도 이 비슷한 먹거리겠지? 우습게도 블러디메리는 토마토주스를 왕창 때려 넣은 보드카 베이스 칵테일이다. 술에 관해서는 신뢰할만한 나무위키가 설명하기를, “서구권에서는 해장술로 사랑받는 칵테일”이라고 한다. 붉은 색의 토마토주스가 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럼 이 책이 만약 이 세상에 해장술이 없었더라면, 하는 수준일까? 천만의 말씀. 내가 전에 읽은 《퀴르발…》의 단편들을 생각해보면 그럴 턱이 없다. 남작의 젊음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인근 동네의 어린아이를 잡아와 산삼, 황기, 감초 등을 넣고 폭 고아 먹는 이야기를 쓴 작가가 설마 해장술에 관해 썼을까? 진실은 다음으로 하고, 여왕이 차마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수백명을 불에 그슬려 죽인 엽기적 사실에서 나온 ‘피의 여왕’이란 이미지가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아, “화형”이라고 해서 정말로 펄떡펄떡 살아있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형집행인이 사형수를 거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아니면 죽은 상태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불을 붙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물론 집행인에게 이런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어느 정도 사례를 해야 했지만 전설 속 오를레앙의 처녀 잔다르크처럼 발끝부터 몸이 차근차근 타올라오는데도 뜨거운 줄도 모르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한 예는, 아이 씨, 있었겠지, 정말 있었겠지만 거의 없었다는 거다. 형 집행인도 사람이고 게다가 당시엔 천주의 어린 양 가운데 한 마리였음에야.


  단편소설 여덟 편을 모아 책 한 권을 만들었다. 근데 문제가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토요일 오후. 세 편을 읽고 다음날은 일요일. 가족 총출동해 안성 팜랜드로 봄나들이 가서 잘 놀고 왔다. 해를 받아 양쪽 뺨이 발갛게 탈 정도로 하루 종일 놀았다. 모자 쓰고 고글도 써서 다행이지 가뜩이나 숱 없는 대가리 껍데기 홀랑 까질 뻔했다. 첫째 월요일은 도서관 휴관일. 이렇게 이틀 놀고 나흘째 되는 화요일에 마저 읽었는데, 그날부터 내리 며칠동안 또 쐬주를 장하게 비우는 바람에 독후감 쓰는 맥이 탁 끊겨버렸다는 거.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은 미래 소설이다. 가깝거나 가깝지 않거나 하여간 미래인데 흥미롭다. 물론 디스토피아 적 세계관에 입각했더라도 공감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인정하게 되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갈채할 만하다. 예를 들어 <애프터서비스>라는 단편을 보자.

  정말 머지않은 미래가 시간적 공간이다. 원자력과 화석연료, 실리콘 폐기물을 생성하는 태양열 발전 등은 전부 불가능한 시대가 왔다. 그래도 인간은 전기를 사용해야 한다. 필요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법. 사람이 꿈을 꿀 때 대뇌 측두엽 깊숙한 곳에 해마 모양을 한 기관인 시상하부에서 특수한 뇌파를 발생시키는데, 이것을 특수 컨버터를 이용해 전기 에너지로 바꾸는 시대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기억을 하든 말든 매일 꿈을 꾼다. 즉 전기를 발생시킨다. 이걸 중앙집중 관리센터인 D-컨버터에 모아 사용하고, 만일 개인이 꿈에 의한 전기 발생을 거부하면 개인이 사용하는 전기 요금에 할증이 붙는다. 할증이래봐야 그까짓 것이 얼마나 할까 싶지? 이미 4인 가족 생활비의 60퍼센트 이상이 전기요금으로 지출되는 세상이다. 내가 언젠가 그랬다. 비싼 청정에너지만 사용한다면 죽어나는 건 빈곤한 사회의 약자뿐이라고. 뭐 그렇다는 거다.

  근데 미혼모 한은별 씨는 1년 전에 아들 한서현 군을 조수석에 태우고 제2 자유로를 씽씽 달리다가 트럭에 충돌해서 자기는 살았지만 서현 군이 현장에서 즉사한 일이 벌어졌다.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는 한은별 씨는 날마다 꿈에 서현 군을 만나는 것에 기대 사는데 ‘드림캐처’에 꿈을 축적시키면 아들 나오는 꿈을 이어서 꿀 수 없어서, 꿈에서나마 아들 얼굴 보는 재미로 사는 은별 씨는 은별 씨와 비슷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는 불법 장비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꿈을 꿀 때 뇌파를 전기에너지로 변환한다는 건 과하게 엉뚱한 상상이긴 한데 소설이잖은가. 여기에 자기가 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엄마의 개인사가 보태면 당연히 따듯한 소설 한 편이 될 수 있다.


  앞에서 얘기한 블러디메리가 나오는 단편 <토피아>의 주인공은 임현우이다. 오랜 마취상태에서 깨어나니 한 여성이 앞에 있다. 민주아. 흠. 연애소설은 아닐지언정 둘 사이에 애정이 꽃피우겠군. 이렇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임현우가 깨어난 곳은 해발 2천미터에 인공적으로 가설된 직경 5킬로미터짜리 거대한 돔. 말 그대로 땅 위의 낙원을 뜻하는 “지상낙원”이다. 그래서 제목이 유토피아에서 ‘유’를 뺀 <토피아>. 이곳에서는 노동할 필요가 없다. 뭐든지 원하면 무상제공. 의식주는 물론이고 자기가 원하고, 환경이 허용하면 취미생활까지. 환경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하다못해 놀랄만큼 발달한 VR로 실제보다 더 실감나게. 물론 일하고 싶은 사람은 초로의 최무태 씨처럼 텃밭을 가꾸어 토마토와 싱싱한 채소를 기를 수도 있다. 음식은 셰프봇이 해주고, 천명으로 한정하는 거주인들은 온갖 고상한 취미생활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보니 어떻겠어? 그렇다.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초짜 입주민이지만, 주인공 임현우처럼 정말로 목을 매는 사람도 가끔 생긴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건강을 위하여 혈관에 심은 미세한 크기의 치료봇이 심장과 혈관, 기타 기관을 늘 점검하고 있고, 데이터가 중앙 관리실에 집중해 있어 사고 즉시 발견되어 스스로 죽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죽으려면 순식간에 팍 터져 죽는 방법 말고는 아마도 없을 듯.

  임현우는 환장하겠다. 누가 나를 여기로 보냈을까?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홀로그램 관리자가 설명해준다. 임현우 스스로 자기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해발 2천미터의 지상낙원으로 이주하겠다고 홍체 서명한 동영상을 보여준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몽땅 삭제하는 데 동의했을까? 얼마나 지긋지긋한 삶을 살았을까? 얼핏 보면 임현우와 일부 동조자가 뜻을 합하여 이 천하의 지상낙원에서 탈출작전을 펼 거 같지? 그건 당신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

  하여간 재미있다. 최제훈, 이 사람, 미쳤다.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요정 2025-05-08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 듯 합니다. 리뷰만 읽어도 재밌어요!! 제 스타일이에요!! 토마토의 향연이라니 맛있겠습니다. ㅋㅋㅋ 저희집 고양이 카프가 카프레제의 카프입니다. ㅋㅋ

Falstaff 2025-05-08 16:16   좋아요 1 | URL
재미있습니다. 글고 보니 요정 님 취향에 맞을 거 같네요. ㅎㅎㅎ
근데 위에 제가 쓴 것처럼 발랄하지 않고요 대개 우울 모드랍니다.

독서괭 2025-05-08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퀴르발 남작 저 예전에 읽었는데, 표제작 재밌게 읽다가 단편이라 빨리 끝나버려 아쉬웠던 기억이 희미하게 나네요 ㅎ 이 책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5-05-08 20:00   좋아요 1 | URL
옙. 이 책 재미납니다. 조금 우울 모드라서 그렇지만 말씀입죠.
 
레슨 인 케미스트리 1 - 개정판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57년 닭띠 여사님 보니 가머스는 시애틀 출생으로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에서 창작과 미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직업으로 했다는데 뭐 그냥 광고업으로 돈벌이를 했다고 여기면 맞겠지? 또 아니면 어때, 다시 보지도 않을 거 같은 걸. 지금은 영국에서 그레이하운드 종으로 보이고 이름이 ‘99’인 개 엄마로 살고 있으면서 조정rowing을 한다고. 어쩐지 책 속에서 조정에 관해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설명을 하더라니까. 출연하시는 개도 대형견에다가 이름이 “6시 30분”이고.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가머스가 써놓고 아흔여덟 군데 출판사에 책 내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원고를 보내 전부 물을 먹었고, 99번째에 가서 출판 계약을 맺어, 가머스의 나이 예순넷에 작가로 데뷔하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로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면 이이의 작품은 <레슨 인 케미스트리> 딱 한 작품만 나온다. 근데 이 책이 서양권에서 대박을 친 모양이다. 영국도서상, 워터스톤 올해의 작가상, 반스앤노블 올해의 책 상, 오스트레일리아 ABIA의 올해의 국제도서상, 리더스어워드 무슨무슨 상 등을 휩쓸었다. 아멘.


  책은 1961년 11월에 시작한다. 물론 첫 장면의 시간적 배경이 이때라는 말이다. 여자들이 오후마다 셔츠웨이스트 원피스 차림으로 이웃의 정원에 모여 수다 떨던 시절. 메들린, 정식 이름은 매드, 맞다, 미쳤어 글쎄, 할 때의 매드 MAD가 호적에 오른 진짜 이름이고, 이걸 그대로 썼다가는 세상의 으뜸가는 놀림감이 되리라 싶어 메들린이라고 부르기로 한 건데, 이 메들린의 엄마 엘리자베스 조트는 새롭게 또는 새삼스럽게 “내 인생은 끝났어.”라는 비관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 서른 살 먹은 여사님이었다. 리즈로 말할 것 같으면 기가 막힌 음식솜씨를 가지고 있어서 매일 메드의 도시락을 싸주며 도시락 통에 쪽지를 써 딸에게 주는데 오늘의 쪽지는 특별히 두 장이었고, 이렇게 쓰여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운동 하면서 놀아. 하지만 남자애들이 이기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돼.”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못됐어. 그렇다는 생각이 들면 네 생각이 맞아.”

  문제는 매드가 무척 똑똑하다는 거. 지금 다섯 살이지만 한 살을 올려 여섯 살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다. 여섯 살을 먹었어도 서양 아이들은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ABC도 모르는 게 정상 수준임에 반하여 매드는 이미 동몽선습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거쳐 지금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를 반쯤 읽었을 정도다. 에이, 뭐,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구라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해 지금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대부분 독파했다. 아이가 워낙 똑똑해 학교에서는 자기도 마치 글을 읽지 못하는 것처럼 갖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러니 위의 쪽지 같은 걸 학교에 가지고 가겠느냐고. 매드는 도시락 통에서 엄마 모르게 슬쩍 쪽지를 꺼내 읽어보고 자기 찬장 위에 놓인 신발상자에 쏙 넣은 다음에 학교에 간다. 진짜 똑똑하지? 얘보다 좀 덜 똑똑한 아이들이 학교가서 아이들 앞에서 책 읽고, 그것도 소리 내서 읽은 다음에 왕따 당하는 거다.

  여기까지 왔으면 작품의 주인공은 당연히 매드 같다. 나도 매드가 주인공이겠거니 했다. 근데 오산이다. 주인공은 매드의 엄마 엘리자베스 조트. 매드는 메드 조트. 엄마와 딸이, 1961년에 성이 같다? 혹시 사촌간 혼인인가? 아니다. 혼외 출산이다. 당시 말로 하자면, 물론 지금 이렇게 발음하는 건 실례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1960년대 초에 일컫는 말로는 ‘사생아’이다.

  이쯤에서 한 마디. 우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Zott 양. 이이의 이름을 짧고 강하게 발음하지 말기로 하자.


  1961년 11월. 엘리자베스 조트 양의 직업은 처음엔 캘리포니아 지방방송에서 송출하다가 이제는 U.S.A. 전국에 방송하는 저녁시간대 TV 프로그램 “6시의 저녁식사”의 진행자로 자타공인 이 쇼의 스타이며, 조트 양 본인은 상당히 불쾌하게 듣는 애칭 ‘맛 좋은 리지’로 불린다. UCLA 화학 석사학위 소지자이며, 1952년 1월에 대학원을 졸업 후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중 지도교수이자 학과장이며 DNA 연구에 관해 별로 실력도 없으면서 우연히 권위를 얻은 마이어스 교수한테 성폭행을 당한다. 조트 양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큰 키에 탁월한 외모, 총명한 지능을 겸비한 양은 늘 HB연필을 귓가에 끼고 다니는 버릇이 있는데, 난생 처음 이 연필을 본능적으로 오른손에 쥐고 피부를 노출한 마이어스 교수의 옆구리에 가져다 박아버렸다. 얼마나 세고 깊게 박았는지 약 12cm 길이의 얇은 나무 부분이 다 들어가 대장과 소장 일부에 박혀 버렸으며 피부 밖으로는 지우개와 지우개를 둘러싼 금속만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조트 양은 당했다. 하지만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마이어스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박사과정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실력이 모자란 조트 양이 마이어스 교수를 성적으로 유혹했고, 이를 거절하자 폭행을 저질렀지만 스승님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더 이상의 법적 조치는 취하지 않고 조트 양이 학교를 떠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마이어스 이 개자식이 그래도 뒤가 켕기기는 했는지 캘리포니아의 헤이스팅스 연구소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자베스 조트 양이 주인공이라서 독자는 당연히 그리고 전적으로 주인공의 입장, 주인공의 시각으로 책을 읽을 터인데, 사실 조트 양은 막무가내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연구소에 진짜 스타 연구원이 한 명 있다. 캘빈 에번스. 양친 부모가 교통사고로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서 고모네 집에서 자랐는데 고모 역시 고속도로를 가다가 차선 이탈로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천주교가 운영하는 소년의 집에서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아주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탁월하게 총명해 거의 천재급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고 싶은 하버드에서 입학 허가를 내주지 않아 대서양 건너 케임브리지에 조정특기생으로 입학해 과학을 공부했다. 이후 눈부신 업적을 쌓아 아마도 서른 앞뒤의 나이로 보이는데, 최근 5년 동안 노벨화학상 수상 후보자로 세 번이나 거론되었을 만큼 전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과 연구소에서 캘빈을 교수로 모시고자 했으나 애초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하버드는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었고, 어디로 갈까요, 알아 맞춰 보세요, 궁리를 하다가 세상에서 가장 날씨가 좋다는 캘리포니아의 헤이스팅스 연구소에 최악의 박봉을 대신해 연구소에서 가장 큰 연구실을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들어온 거였다. 날씨가 좋으면 뭐 하려고? 조정. 보니 거머스 여사의 취미가 조정이잖여?

  조트 양은 석사 출신이다. 돌 던지면 박사학위 소지자 대가리에 떨어지는 연구소에서 누가 석사를 사람 취급이나 하나? 게다가 1950년대 초중반에 여성이 무엇을 요구하거나 신청을 하면 말이지. 그래 조트 양이 실험용 비이커를 사달라고 수십장의 신청서를 써도 그 하찮은 물품이 들어오지 않아 열폭하고 있을 즈음, 캘빈 에번스의 연구실엔 비이커가 남아돈다는 걸 알고 무작정 연구실에 쳐들어 갔다. 문 앞에 “절대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조트 양이 선택한 것은 연구실 주인이랄 수 있는 캘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비이커를 얻어온 것이 아니라 대판 말싸움을 하고 선반에 놓인 비이커 케이스를 무작정 통째로 들고 나온 거였다. 이쯤 되면 사실 조트 양이 사회부적응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사실은 다음으로 하자. 주인공이니까. 1950년대 초반이니, 캘빈이 어엿한 연구원인 조트 자신을 사무행정 보조원 정도로 알고 대우한 것이 극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 다음날 조트 양이 연구원이었던 걸 알고 사과하러 온 캘빈을 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모난 돌이었던 것. 캘빈 역시 과학에 관해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 비슷한 면이 있어서, 캘빈과 조트 양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아 얼마 후 둘은 각본에 의하여 연애를 하고, 경제논리에 입각하여 함께 사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동거생활로 들어가며, 당시 미혼 남녀의 동거란 불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음에도 워낙 캘빈이 유명한 학자라서 눈꼴이 시어도 뭐라 하는 인간이 없었다. 이 커플은 혼인제도와 출산에 관해 부정적이었는데 조트 양이 훨씬 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콘돔을 두 겹으로 둘러쳐보아라, 빠져나올 놈은 다 빠져나오게 되어 있어서 조트 양은 임신을 했다. 이 좋은 세월에 캘빈은 양친부모와 고모처럼 개 ‘6시 30분’과 함께 노닐다가 경찰차에 치어 죽어버린다.


  여태까지는 캘빈의 유명세 덕분에 연구소에서 버틸 수 있었지만, 조트 양 역시 천재는 아니더라도 수재급 인재라서 놀라운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연구소에서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애를 밴 여성 연구원을 내친 화학과장 도나티 박사는, 조트 양의 화학진화에 관한 연구를 자기 이름으로 출판하는 파렴치한 일을 벌이고, 우리의 엘리자베스는 혼자 딸 매드를 키우며 어렵게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맛난 점심 도시락과 쪽지 쓰기를 멈추지 않고.

  이때 나타난 홀아비 TV 연출자와 그의 딸. 매드가 연출자의 딸 어맨다의 도시락이 형편없는 것을 보고 기꺼이 자기 도시락을 함께 먹자고 했다가, 매드는 집에서 얼마든지 먹으니 거의 다 어맨다 입 속으로 들어가게 됐고, 이를 알게 된 조트 양이 꼭대기까지 열을 받아 어맨다의 아빠인 월터 파인 씨 사무실로 쳐들어가 무턱대고, 조트 양 특유의 사회부적응적 항의를 퍼붓는다. 월터 파인 씨가 조트 양을 보기에, 난리 피우는 건 난리를 피우는 것이고, 외모가 지극히 훌륭하고 말빨 역시 좋아 저녁 시간대 TV 프로그램을 새롭게 만들어보자고 했고, 명색이 과학자인 조트 양이 단칼에 거절하자 그녀 입장에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높은 보수를 제의하는 터라 그렇게 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매드를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고 국영수 과외도 시켜야 했으니. 다만 요리쇼가 아니라 철저하게 화학과 생물학에 입각한 요리법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이때가 1960년대 초반으로 보인다. 미국의 가정주부들 역시 자존감의 싹이 트기 시작하던 무렵. 조트 양의 프로그램은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그래서 성공하는 것보다 더한 놀라운 행운이 이 모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적 행운. 뭐긴 뭐야? 미국적 행운이면 돈이지. 이상무 화백이 그린 만화 시리즈 가운데 독고탁이란 주인공이 있어서, 고생고생해가며 어린 시절과 소년시절을 겪어 조금 이름이 알려지자 어린 시절에 어쩔 수 없이 또는 사고가 생겨 잃어버린 재벌급 아버지가 나타나 한 방에 인생 역전하는 드라마를 연이어 그린 적이 있다. 그래, 그래. 이게 힌트다. 미국적 기적. 너무 유치한 클리셰. 재미있게 읽다가 한 번에 폭망하는 기분. 뭐 미국 소설에서 그리 드물지 않기는 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마르코폴로 / 2025년 2월
평점 :
일시품절


.

  1924년 도쿄에서 태어난 소설가, 극작가, 연출가인 아베 코보는, 성姓 아베安部가 말해주듯이 일본의 그럴싸한 가문 출신이다. 맞다. 총맞아 죽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 같은 성씨다. 의사 아버지와 작가 어머니는 아베가 어린 시절에 만주로 진출한 소위 “개척자” 가족의 일원이었는데, 만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도쿄에서 의과대학을 다녔다. 의대생 시절이었던 1944년에 문과생들은 모두 징집을 당하고 이제 이과생 차례라는 말이 돌자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만주로 돌아가 아버지를 돕다가 징집영장을 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소집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삶을 접었다. 패전 후 일본인들이 만주에서 사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 아베는 만주에서 사이다를 만들어 팔아 살다가 가족과 함께 귀국선을 탔다. 가족을 홋카이도의 조부모 댁으로 옮긴 후 다시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아베는 (나도 이런 제도가 있는지 처음 알았는데) 의사가 되지 않겠다는 전제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으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가 뭘 하겠는가? 당연히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49년부터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전후 가난하다 못해 비참한 생활을 하던 작가 아베 코보. 피를 팔아 아베 코보 매혈기를 쓸 정도였던 그가 많고 많은 장르 가운데 초현실주의 문학을 했다니, 거 참. 하여간 이후 아베는 장르는 다르지만 미시마 유키오와 함께 전후 문학의 기수로 알려졌다고 한다. 미시마? 에휴, 그러거나 말거나.


  작품집 《벽》은 아베 코보의 대표작인 모양이다. 2000년에 위덕대학 출판부에서 정가 7천원에 팔던 책을 사반세기만에 마르코폴로에서 정가 2만원으로 새단장해 나왔다고 한다.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이 여섯 편 가운데 제목을 <벽>이라 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두 이 “벽”이 특별한 상징으로 등장하니 작품집의 제목을 《벽》이라 한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나는 아베 코보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 처음이 <모래의 여자>이고 두번째가 <불타버린 지도>이다. <불타버린 지도>가 생각나지 않고 머리속에서 “용의자의…” 어쩌고저쩌고가 뱅뱅 돌아 결국 검색까지 해봤다. 두 작품 다 흥미롭게 읽었음에도. 이 책들도 읽으면서 뇌 좀 써야 하는 것들이었지만 그리 낯설거나 어리둥절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기억하는데, 《벽》은 완전히 초현실주의 작품 자체이다. 초현실주의는 내가 제일 경원하는 장르라서 만일 이 책도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작품들만 실은 책이란 걸 알았으면 과연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을까 의심스럽지만, 정작 읽어보니 이 정도면 뭐 그냥저냥 읽을 만했다. 아, 이건 내 생각이다. 이런 장르 좋아하시는 분한테는 최상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금도 망설일 필요 없다.

  여섯 편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고, 위키피디아 보니까 제일 중요한 작품으로 삼는 <S. 카르마 씨의 범죄>만 보기로 하자.


  화자 ‘나’와 ‘나’의 도플갱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

  ‘나’ S. 카르마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아침에 이야기는 시작한다.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가서 수프 두 그릇과 빵 한 조각 반을 먹었는데, 먹다보니 ‘나’가 평소에 먹던 양이 아니다. 하여간 먹어 치우고 외상 장부에 서명을 하려는데, 아뿔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거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방법이 있지. 서둘지 않고 지갑을 꺼냈다. 어, 이름이 쓰여 있는 명함이 이날 따라 한 장도 없다. 신분증을 찾아봐도 흑백 사진까지 다 들어 있는데 이름이 적힌 부분만 지워져 있다. 주머니에 아버지가 보낸 편지가 있어 그걸 펴 봐도 이름을 쓴 곳만 잉크가 번져 알아볼 수 없다. 재킷 안주머니에 금실로 수를 놓은 이름도 실이 다 풀려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날 아침 밥값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왔다. 방에 들어와 봐도 이름이 새겨진 모든 장소와 물건에서 아무 흔적을 찾지 못한다. 창 밖에서 속절없이 출근 사이렌이 울렸다. 근데 보니까 책상 위에 있을 가방도 없다. 며칠 전에 3개월 할부로 산 소가죽 가방. 가방 속엔 중요한 서류가 잔뜩 들어 있는데 이걸 어쩌나? 할 수 없지.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은 구두도 어딘가로 가고 없어 허름한 검은 신을 신은 채 걸어서 출근했다.

  현관에 들어가서, 당시에 일본 회사는 현관에 들어가면 벽에 커다란 이름표가 있어서 특정인의 이름을 적어둔 모양인데, 이 이름표의 세번째 줄 왼쪽에서 두번째 적힌 S. 카르마가 ‘나’의 이름일까 잠시 궁금해한다. ‘나’의 책상이 있는 곳은 건물의 2층 3호실. 방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어라, 내 의자에는 내가 아닌 또다른 내가 앉아 있다. ‘나’는 소름이 끼치고 수치심이 들어 문 뒤로 몸을 숨긴다.

  타이피스트 Y양에게 보고서를 설명해주고 있는 또다른 나. 그의 책상 위에는 ‘나’가 아침에 찾았던 소가죽 가방이 놓여있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왼손으로는 Y양의 무릎을 더듬는 것을 보니까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역시 틀림없는 ‘나’이다. 음. 내가 나 자신이 아닌가?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당연히 또다른 나와 ‘나’의 눈이 마주친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나도 그를 알아본다. 틀림없는 ‘나’이다. 근데 한쪽 눈을 가리고 보니까 ‘또 다른 나’의 정체가 보인다. 그건 ‘나’의 명함이었다.

  “N 화재보험. 자료과. S. 카르마”

  명함은 ‘나’에게 주장한다. 처음부터 이곳은 나의 영역이오. 솔직히 말해 난 당신 같은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소!

  ‘나’는 도망치듯이 사무실을 빠져나와 집으로 간다. 방에 혼자 있자니 외로움과 공허함이 밀려든다. 명함이 돌아오면 나는 이 방에서도 쫓겨날까? 이름을 잃어버렸으니 명함과 비교해보면 만사가 불리하다. 가슴에 뻑뻑한 통증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까, 에구머니, 가슴이 정말로 뻥 뚫렸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나’는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 접수창구에서 건장한 사무 주임이 또 이름을 묻는다. 이름을 말하면 나중에 명함이 어떤 까탈을 잡을 지 몰라 가짜 이름을 대기로 한다. 카르테. 아닌 거 같다. 아르테. 조금 어색하다. 그래서 아르마. 이것도 아냐. 아쿠마. 좋다, 아쿠마는 근데 악마惡魔라는 뜻이다. 사무주임이 대기실에서 기다리라 한다. ‘나’는 잡지를 편다. 잡지 속에 레이몽 라디게의 초상화가 있다. 허 참. 민음사세계문학전집 321번. 레이몽 라디게의 <육체의 악마>. 무진장 잘 어울린다. 페이지를 더 넘겨보니 황량한 광야 사진이 나온다. 왼쪽 중앙에 사구砂丘가 있고 사구 기슭에 띠 모양의 황사 소용돌이가 있는. 근데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까 내가 사진 속에 실제로 들어가 있다. 조금 더 오래 보고 있으니, 그건 아니고, 사진이 내 뚫려 비어버린 가슴 속으로 들어와버렸다. 가슴이 비었다는 건, 흉곽이 진공상태가 되었다는 것이고, 상당한 수준의 음압이 발생해서 잡지의 사진이 통째로, 종이라는 물질을 제외한 사진의 형상만 ‘나’의 가슴 속으로 쏙 들어와 버린 것. 정말로 얼굴이 새카맣고 키가 큰 의사가 가슴의 흉압을 측정하자 단위는 나오지 않지만 하여간 130, 끔찍한 저압이란다. 의사와 사무주임은 ‘나’가 자신들마저 흡수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둘이서 ‘나’를 번쩍 들어 2층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2층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고, 다치지도 않고 비척거리며 일어난 ‘나’. 이번엔 동물원으로 향한다. 많고 많은 동물 가운데 사자가 ‘나’의 눈을 보더니 애수에 찬 모습으로 발발 긴다. 그러더니 사라져버렸다. 다른 동물은 안 그러는데 이번엔 또 낙타가 ‘나’한테 설설 긴다. 왜 그럴까? 아하, ‘나’의 가슴 속 황야 사진, 넓고 넓은 초원지대에 사는 동물인 사자와 낙타만 ‘나’한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다.

  어떠셔? 더 할까? ‘나’ S. 카르마 씨는 이렇게 왔다리 갔다리,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놀라지 마시라, 바벨탑까지 간다. 거기 누가 있느냐고? 별 인간 다 있다. 당연히 여호와를 비롯해서 수 세기 동안 연옥을 팔아먹은 단테, 놀랍게도 힛솔리니, 그리고 명색이 초현실주의 소설이니까 앙드레 브르통까지. 사람이 이 바벨탑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벽.” 벽을 통과하는 방법은? 아마 유일하게 말 그대로 대가리 박치기를 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나올 때는? 안 알려줌. 그러면 S, 카르마 씨는 어떤 범죄를 저지른 거냐고? 마찬가지로 안 알려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