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버지 펭귄클래식 114
도널드 바셀미 지음, 김선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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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나온 것이 1975년. 바셀미는 벌써 누천년 이어오는 오이디푸스 적 친부살해의 신화를 부여잡고 이를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해 소설을 썼으니 바로 <죽은 아버지>. 우리나라에서도 작가 한승원이 살부계에 관한 작품 <아버지와 아들>을 쓴 적 있으나 바셀미처럼 순수하게 친부살해의 모티브를 주제로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작품에서 친부살해는 과거와의 단절, 그리하여 진정한 새 시대를 여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쓰는 건 사실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잘난 척도 하는 거뿐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아들은(시대가 바뀌어 딸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자식들은) 아버지를(역시 시대가 바뀌어 어머니를 포함한 부모를) 타도하고 진정한 자아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는 아들만 둘 키웠다. 아이들이 머리통이 굵어져 이제 말을 알아들을 즈음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은, 너희들이 나를 존경한다는 거다.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아이들이나 부모를 존경한다.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 혹은 타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내 아이들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지나가는 말로도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시라. 우리나라에서도 존경할만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난 신채호 선생을 존경한다. 정치가 가운데는 전봉준. 작가 중에선 황순원. 군인은 안중근. 등등. 이런 이들을 놔두고 예를 들어 학교 교사가 아이에게 ‘너는 누구를 제일 존경하니?’라고 물을 때,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듯 ‘아버지요’, ‘어머니요’ 이러고 있는 꼴을 나는 도무지 못 봐 주겠더라는 말씀. 근데 아이들이 정작 누구를 존경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죽은 아버지>를 열면 처음 세 페이지에 걸쳐 이미 죽어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글 고딕체로 적어놓았다. 아버지는 키가 3,200 큐빗. 1큐빗이 45.72cm이니까, 미터법에 의하면 죽은 아버지의 키가 무려 1,463 미터에 이른다. 놀랍지? 대단히 크다. 이런 거인인줄 모르고 첫 페이지에 나오는 문장 “곱게 빚어진 섬세한 콧구멍이 달린 코끝에서 땅까지, 5미터 반이, 삼각측량법으로 얻은 숫자”라는 걸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바셀미가 이야기하고 있는 아버지, 그 중에서도 ‘죽은 아버지’가 무엇을 대신하는지 짐작이 가실 터. 더구나 이미 죽었지만 자신이 죽었음을 거부하고 시시때때로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찬 긴 칼을 번쩍 빼들고 무수한 생명들을 도륙하는 걸 취미로 삼으니, 더더욱 이 ‘죽은 아버지’의 의미를 눈치 채실 수 있을 터. 의미가 상실된 옛 규범일 수도 있고, 종교이기도 하고, 용도 폐기되었지만 권력층의 골방에서 아주 가끔 전가의 보도로 광휘를 휘날렸던 “전통”이란 이름의 똥 덩어리일 수도 있다.
 책은 몇 명의 남녀가 수많은 인원으로 편성된 연대를 이끌고 죽은 아버지를 땅에 묻기 위해 행진하는 장면으로 만들어졌다. 유일한 구성이 죽은 아버지를 무덤까지 끌고 가서 가는 도중에 몇 명을 만나고, 통행을 거부당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모종의 난관을 거쳐 기어이 땅을 파고, 그 속에 죽은 아버지, 그러나 자신이 죽었음을 거부한 채 여전히 날뛰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뉘인 다음, 그 위에 흙을 덮기 위해 불도저가 죽은 아버지의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이런 단순 구성과, 포스트모던 특유의 앞뒤를 종잡을 수 없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대화나 묘사 등으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독자는 독자의 권한으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해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위에서 내가 적어놓은 것들이라고 한정해서 읽는다면 결코 오리무중의 혼란은 벌어지지 않을 듯싶다.
 이런 단순구성 속에 바셀미는 절묘하게 한 편의 에세이를 삽입했다. <아들들을 위한 사용 설명서>. 이게 무엇인가 하면, 아직 죽지 않은 아버지, 옛 권위, 타도해버려야 할 대상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를 설명해놓은, 지극히 이해하기 쉬운 일상의 (재미있는)발견이다.
 아버지는 죽여야 한다. 다만 직접 죽이지는 말라. 조금 기다리면 세월이 저절로 죽여줄 테니까. 그러고 나면 다음은 당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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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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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제목을 영어로 썼을까? <잡역부>라고 쓰면 촌스러워서? ‘잡역부雜役夫’도 외래어인데 왜 수선이냐고 한다면, <막일꾼>은 어때? 더구나 부코우스키의 소설에 영어 제목을 붙인다고, 아니, 슬로바키아어 또는 라틴어를 붙인다고 해도 하나도 우아해 보이지 않을 걸? 당신이 부코(우)스키의 소설책을 선택한 순간 일단 고상한 건 포기한 전제였을 테니. 내가 읽은 이 사람의 책은 공통적으로 술과 일시적 밥벌이, 싸움, 섹스의 난장판이었다. 게다가 20세기 중반의 미국남자답게 마초적이다. 이를테면,


 “잔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쳐든 그녀는 술집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보아도 꽤 핼쑥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등 바로 뒤로 걸어가서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에 가까이 섰다. ‘난 널 여자답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넌 그저 싸구려 창녀일 뿐이야.’ 나는 그녀를 손등으로 후려쳤고 얻어맞은 그녀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그녀의 술잔을 집어들고 단숨에 비웠다. 그런 다음 천천히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출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좋아, 형씨들 중에…… 내가 지금 막 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그렇다고 말해보시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짐작건대 모두들 지금 내가 한 행동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알바라도 가로 다시 걸어나왔다.” (164~165쪽)


 여성 ‘잔’은 나, 행크 치나스키보다 열 살 연상의 애인. 치나스키는 1920년생임에도 사회부적응 증이 있어 군 입대를 거절당해 2차 세계대전 참전 와중의 미국에서 희소가치가 있는 멀쩡한 젊은 남자의 자격을 취득한다. 말 그대로 사회부적응 적 성격으로 (내가 읽은 순서로 쳐서)전작에 보면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서 2년 동안 저널리즘을 공부하다 때려치우고 전국을 유랑하며 여러 잡일로 하루하루를 먹고 살았는데, 이 방랑벽과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고 순식간에 그만두고 하는 행위가 <팩토텀>에 와서 극을 달한다. 이이가 마흔아홉 살 때, 어느 출판사로부터 한 달에 100달러 씩 줄 테니까 책을 써보라고 했다는데, 정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찰스 부코(우)스키 씨는 어느 찌는 듯한 여름 밤 마이애미의 개천 옆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술에 잔뜩 취해 자고 있다가 졸지에 악어 밥이 됐든지, 한 겨울 시카고 골목길에서 꽝꽝 얼어 죽은 채 발견되지는 않았을까. 뭐 그렇다고 내가 부코스키의 책을 여러 권 읽은 건 아니다. 근데 뭐랄까, 위에 인용한 문단에서 볼 수 있듯, 이미 몇 세대 이상이 지나가버린 존 웨인 시절의 향수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이해하거나 용납하기 힘든 행동들을 스스럼도 죄의식도 없이 저질러버리는 전형적인 부랑자, 깡패, 양아치 기타 등등의 모습이, 희한하게도 그냥 넘어가지더라는 것.
 왜일까?
 새벽 다섯 시에 뉴올리언스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팩토텀>은, 이후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 로스앤젤레스, 뉴욕, 다시 로스앤젤레스, 세인트루이스, 또다시 로스앤젤레스(이때 책에서 가장 오래 관계를 갖지만 결국 그녀로부터 사면발니에 감염이 되는 잔을 만난다), 플로리다, 마지막으로 다시 로스앤젤레스를 다니며 이러저러하게 참으로 다양한 잡역부의 삶과, 거대한 양의 위스키와 와인과 맥주 통 속으로 다이빙한다. 미국의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숱한 직업을 가졌다가 때려치우고, 그동안 번 돈으로 끝장을 볼 때까지 술에 취해 아무 여자하고나 섹스를 하는 거. 그러면서도 자잘한 싸움과 노숙 등. 행크 치나스키에게 여성이란 그냥 섹스의 상대자일 뿐. 어디서 본 거 같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뭐 대강 그럴 듯하네. 그럼 찰스 부코스키를 잭 케루악과 같이 비트 제너레이션으로 묶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듯하지만 뭐 하러 그런 짓을 해? 부코스키를 케루악하고 함께 묶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케루악이 50년대에 그의 특허품인 비트 제너레이션 작품들을 쏟아낸 반면, 진정한 비트 세대인 부코스키는 70년대에야 와서 자신의 젊었던 시절에 관해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한다. 때문일, 한 번 쉬고, 것이다. 짐작이라는 뜻. 다른 데서 인용하지 마시란 완곡한 표현이다.
 일반적인 뜻에서 ‘뭔가를 기대하고’ 책을 선택해 읽는 분들은 킥킥대고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가볍게 휴지통으로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별다른 스토리도, 플롯도 없고, 구성도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행크 치나스키가 벌이는 좌충우돌의 나열에 그치는 책. 사용하는 단어조차 신사 숙녀들이 즐기기에는 은어, 비어, 속어, 그리고 정상적인 단어이기는 하지만 의례상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것들이 그냥 일상다반사처럼 나열된다. 스스로 숙녀, 신사로 자칭하시는 분, 말로는 안 하지만 그런 계급에 속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사시는 분들은 이 책을 읽을 엄두도 내지 마시라. 인간은 뭔가를 하루에 세 번씩 입을 통해 소화기관으로 집어넣어야 하고, 섭취한 양과, 근육과 뼈의 운동량과 연관관계를 갖고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을 몸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 포유류임을 아는 인종들만이 즐길 수 있는 책. 행크는 일자리를 얻거나, 해고를 당하든지 스스로 그만 두든지 하거나, 섹스를 하거나, 말러의 교향곡이 흐르는 가운데 거구의 창녀로부터 억지로 섹스를 당하거나, 궤양이 생길 때까지 알코올을 섭취할 때, 구접스럽게 이것저것 재고 가리고 계산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사회부적응 형 인간. 그러나 이 인간을 바라보는 초점을 약간 달리하면, 불행하게도 20세기를 살아야 했던 천의무봉한 기인이랄 수 있을 것. 그러니 <팩토텀>을 읽는 일이 문명세계에 불시착한 싯다르타를 구경하는 것이란 주장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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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18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제가 부코스키 작품 중 처음 읽은 책이 바로 이 책인데요, 으악 ㅋㅋㅋ 읽고나선 으악! 찰스 부코스키 책 다시는 안 읽어! 했더랍죠. 근데 신기하게도 그 뒤로 나오는 족족 다 사봤어요;;; 나참 ㅋㅋㅋㅋㅋ 이젠 왜 부코스키 추종자들이 있는지 이해할 정도랄까요.

Falstaff 2019-04-18 11: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 사람은 극적으로 호오가 갈리는 거 같더라고요. 제 주변에도 딱 절반은 열광, 절반은 극혐이고요. ^^ 하여튼 뭔가가 극적인 인간입니다.
 
권력의 문제 창비세계문학 65
베시 헤드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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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극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 어머니가 흑인 하인과 정을 통해 아이가 태어났다면, 그것도 1937년이라면 보통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여자가 원래 신경증 증세가 있어서 정신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는 즉각 가톨릭 신자인 혼혈 유색인 부부에게 입양 시켜버렸다. 그러나 유전인자의 끌림이란 것 역시 쉽게 끊어질 성질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할머니는 종종 아이를 찾아보기도 했단다. 아이가 열네 살이 되던 해의 크리스마스에 학교는 아이를 양부모에게 보내는 대신 법원으로 끌고 가, 백인 어머니와 원주민 흑인 아버지 사이의 출생임을 처음으로 알렸으니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얼마나 기겁을 했을까. 이후 남아프리카의 정치적 소요에 관심을 갖고, 힌두교인으로 개종을 했으며, 교사 생활을 조금 하다가 때려치우고 유색인 대상 신문기자 생활을 잠깐 한다.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정치활동을 하다 체포되기도 하고, 유명 예술가에게 성폭행을 당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젊어서 겪은 많은 우여곡절엔 결혼과 출산도 포함되며, 아들과 둘이서 보츠와나로 이주해 겪는 신산한 삶으로 정점을 찍는다. 보츠와나의 작은 마을에서 중학교 선생을 하다 교장과의 갈등으로 학교를 그만두면서 지역산업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어머니로부터 유전형질을 물려받았는지, 아니면 유난한 삶의 우여곡절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신경증이 심하게 도져 정신병원에 몇 차례 입원하게 되니, 이게 작가 베시 헤드의 30대 시절이며, 작가가 쓴 장편소설 <권력의 문제>의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겪어야 했던 당시의 고통이었다.
 책은 지역산업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쓰니 여성, 흑백 혼혈, 아파르트헤이트, 가난한 지식인, 소외, 백인과 원주민의 갈등 등 존 쿳시가 주로 다루는 소재로 별다른 무리 없이 읽힐 것 같으나, 절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읽기가 만만하지 않으며, 만만하기는커녕 심지어 어렵다. 나도 한 60쪽까지 읽다가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막막해 책을 덮고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었다. 그랬더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꽤 괜찮은 책을 읽지도 않고 던져버릴 뻔했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사서 읽는다면, 먼저 읽은 자의 선의로 말씀드리니, 한 50쪽까지 읽어도 오리무중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책 뒤에 달려있는 “작품해설” 2장章 ‘쎌로와 댄’(306쪽)의 첫 문단만 미리 봐도 책을 이해하는데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쎌로와 댄, 그리고 그들의 부속 장치인 메두사와 이상한 여인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고, 그리하여 어려움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는 걸 보장한다.
 아니다, 지금 가르쳐드리지.
 작중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소설의 처음부터 거의 끝부분까지 신경증 증세, 즉 미친 상태에 있다. 그래 그이는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듣는데, 애초에 공부한 것이 많은 지식인 계급으로 여러 불평등을 경험한 바 있어, 환상과 환청을, 독자는 (거칠게 말하자면)정신계의 최고 권력자인 선한 신과 악마로 규정해서 읽을 수도 있다. 즉 주인공의 정신세계가 거의 대부분의 독자 같은 정상 상태가 아니라는 것, 그이가 보고 듣고, 이의 영향을 받아 번민하고 결심하고 행위 하는 일체의 것이 자신의 에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것을 빨리 이해하면 무척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런데 신경증에 걸린 여인의 뇌 속에서 벌어진 일이 고통스럽게 표현되고 있는 가운데 가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삽화처럼 끼어들어, 작품을 쓴 1970년대 초반 남부 아프리카 보츠와나를 그리고 있다. 교장선생과의 갈등에 이은 해고, 지역산업 프로젝트에 기꺼이 합류시켜주는 인정 많은 백인 유진, 자신이 맡은 농사일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원주민 여인 케노시, 미국 출신 젊은 농업운동가 톰 등의 선한 인간들. 흑인 엘리자베스한테 귀싸대기를 얻어맞았으면서도 그 때 이이가 정상이 아니었음을 알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던 선량한 백인 존스 부인 등.
 그렇다. 제목이 노골적이다.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불평등은 근본적으로 권력의 문제라는 것. 그리하여 권력이 단 하나로 같아질 때 세상은 화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작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단 하나의 신만이 존재하니 그 이름은 인간이라. 그리고 영숙이와 창식이가 그의 예언자이니.” (300쪽)


 결론이 좀 과하게 단순하지 않나? 정말? 확인해 보시라. 안 알려드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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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01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처음에 진짜 읽기 힘들더라고요. ㅋㅋㅋㅋ 사실 읽다 보면 저까지 미칠 지경? ㅋㅋㅋㅋㅋㅋ 암튼 베시 헤드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려고 사뒀어요.

Falstaff 2019-10-01 10:55   좋아요 0 | URL
오죽했으면 읽다가, 때려 치워? 말어? 고민하다 아 씨, 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으려고요. ㅋㅋㅋ
 
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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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가 이륙을 감행할 때, “손가락은(그리고 발가락은) 얼음장으로 변하고 위는 흉곽 사이로 뛰어오르고 코끝 온도는 손끝 온도와 똑같이 급강하하고 젖꼭지는 브래지어 속에서(이 경우엔 드레스 속에서라고 해야 옳으리라.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으니까)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고, 짧은 굉음의 순간, 나의 심장과 기체의 엔진이 힘을 합쳐 공기 역학의 법칙이 결코 허망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려 애쓰지만 그게 허망한 미신이란 걸 가슴속 깊이 알고”(16쪽)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하는 공포. 이것이 책의 제목 ‘비행공포’의 정체다. 교대역 바로 옆에서 농사를 짓다가 끝까지 땅을 팔지 않아 벼락부자가 된 이모부도 이놈의 비행공포 때문에 넘쳐흐르는 현금에도 불구하고 해외여행 한 번 못 갔다. 그래 어떤 증세인지 안다. 어쨌건, 중국계 미국인이자 정신과 전문의 베넷 웡의 유대인 아내 이사도라 젤다 웡이 일인칭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며, 이제 부부동반으로 천재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 이륙하는 순간 소설은 시작한다. 작가 에리카 종이 중국계 미국인 정신과 전문의 아랑 종의 법적 아내 에리카 ‘종’이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은 맞다. 그렇다고 독자가 꼭 이 책을 작가의 자전적 서술이라 단정할 필요는 없다. 작품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지 않는 작가가 별로 없지만 오직 자신의 경우만 가지고 작품을 쓰는 소설가는 더욱 없을 것이니까. 나는 그냥 페미니즘 소설, 그것도 초기 페미니즘 소설로 읽었다. ‘초기’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하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실 수 있지만, 천만의 말씀. 우리나라에서는 21세기가 열리면서야 이브 엔슬러의 희곡에 의한 연극 제목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부산에서 열린 페미니즘 축제, “버자이너 페스티벌” 등으로 표현이 가능했던 단어가 아주 우습게 등장한다. 속어도, 비어도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날 것으로 그냥 꺼내 쓰기에는 쑥스럽다고 여기는 단어. 나도 굳이 독후감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겠다. 여성이 자신의 외음부를 총칭하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쓰는 것, 그것 하나 가지고도 이제 여성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선언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페미니즘 소설들과 비교를 해보면(굳이 비교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읽으면서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대한민국 페미니즘 소설 다수에서는 집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밖에선 성폭력에 가차 없이 유린당하는 여성이 나타나는 반면, 이 소설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① 주인공 이사도라를 약 한 달 동안 성적 파트너로 이용하는 남성과 ② 밤기차 안에서 성폭행을 ‘시도’하려는 남자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페미 작품과 비교하면 이도 나지 않은 정도.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973년. 미국에서도 여성의 권리가 충분히 확장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없었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작가는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가장 큰 것이 경제적 종속이고 그 다음이 아직 변하지 않은 사회적 가치관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사도라 웡은 시집을 한 권 낸 등단시인이며, 대학에서 간간히 강의도 하면서 잡지에 기고도 한다. 정신분석 학회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전문의의 부인이란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학회를 취재하여 기사로 내기 위해서였다. 수입이 있다고 하더라도 50분에 40달러를 내고 정기적으로 정신분석을 받는 돈은 거의 전부 남편이 충당해왔다. 진료비로 1970년대 초반 기준 일 년에 수천달러라는 돈은 시집의 인세와 쥐꼬리만 한 강의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거다. 여기에 이사도라의 유대인 가족 문화도 한 자리 한다. 언니 랜디는 본인이 유대인이면서 아랍인과 결혼해 모로코에 살며 언제나 임신 중이거나 수유중인 상태로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두 여동생 역시 마찬가지로 각각 다른 인종과 결혼해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그때까지의 사회 규범인 결혼과 자녀 양육을 당연한 것으로 따르고 있다. 결혼과 이에 따르는 출산, 수유, 육아, 그리고 하우스키핑은 당연히 여자와 여자의 일과 여자의 독립과 여자의 발전에 극적인 장애물로 기능할 것으로, 아직 두 번밖에 결혼하지 않았지만 이런 사회적 보편가치는 임신을 해본 경험이 없는 이사도라를 수시로 압박하고 있는 것.
 웡 부부가 빈에 도착해 학회에 참석하면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에이드리언. 영국 출신의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프로이트 학회의 폐막 연설을 할 정도로 이름은 낸 의사인데, 현재 아내와 별거 중으로 아이 때문에 이혼은 하지 않되 각기 타인의 사생활엔 간섭하지 않고 살기로 약정을 맺었다는 인간이다. 이사도라가 학회 취재를 위한 행사장 입장을 두고 관련자와 다투고 있을 때 이를 유심히 바라보다 그날로 이사도라의 엉덩이를 양 손으로 꽉 쥐어 잡는 인물. 잘 생기고 자연스러운 복장에 더러운 발가락이 드러나는 샌들을 신은 영국인에게 엉덩이가 한 아름 쥐어 잡히자 이사도라는 단박에 놀라운 감흥으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것. 이 장면이 불쾌했다. 잘 생기고(돈 많고) 키 큰 남자는 만만해 보이는 여자의 엉덩이를 더듬어도, 더듬는 정도를 넘어 꽉 쥐어도 죄가 안 되는 컷. 저 뒤로 가면 친절하지만 별 볼일 없는 남자가 여자를 (지극히 간단한 접촉으로)밀어 뒤로 눕히는 건 절대 안 되는 컷. 그러나 그만 한다. 처음 본 남자에게 엉덩이가 잡히자 곧바로 성적 감흥이 오게 만들기 위해 작가는 첫 장章의 제목을 “꿈의 학회 또는 ‘지퍼 터지는 섹스Zipless Fuck’로 가는 길”이라 해놓고 처음 본 외판원이나 배추장수, 우체부와 섹스를 꿈꾸었다고 장치를 해둔 터이다. 친절하지만 별 볼일 없는 남자에 의해 일어날 수 있었던 ‘지퍼 터지는 섹스’는 이미 환상이 다 깬 상태였으니까. 섹스는 섹스이되 지퍼 터지는 섹스조차 상대를 가려서 가능한 법. 기준은? 기준 말고, 문제는 권력이다, 권력. 돈과 지위와 전망과 학식과 위트가 있는 별거남이 한낱 친절하기만 한 열차 검표원하고 같아? 하여간 갑자기 에이드리언을 사랑하게 된 이사도라. 어떻게 될까? 말 없고 진지하고 틀에 꽉 짜인 듯 빈틈없으면서도,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몇 번의 불륜을 저지른 것은 잠시 동안의 일탈로 여기는(아, 남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같은 건 절대 이사도라와 에리카 종의 관심사가 아니다) 웡 박사를 좇아 안정된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자신의 욕망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따라 에이드리언을 따라 내일 따위는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오늘을 즐기며 유럽 전역을 유랑할 것인가. 답은 가르쳐 드린다. 이사도라는 당연히, 갑작스럽게 찾아온 열정을 좇는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이라는 사내와 좋은 결말을 지으면 페미니즘 소설이 될 자격이 없겠지? 그렇겠지? 신뢰할 만한 남자가 여러 명 등장하면 여성주의 소설로는 안 될 터이니. 여기까지는 다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럼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사도라는 무소의 뿔처럼 고개를 발딱 세우고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까? 자, 1973년에 초판이 나온 작품임을 감안하시고, 직접 읽어서 확인하시라. 이사도라가 에이드리언을 따라 그의 고물 승용차에 오를 때, 이사도라의 핸드백 속엔 현재 호적상 남편 베넷 웡의 통장과 연계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와 여행자 수표책이 있었다는 거.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시대가 1970년대 초니까.

 이 시대에 페미니즘 소설에 관해 독후감, 즉 감상문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다. 진정한 페미니스트께선 이 감상문을 읽고 허튼 소리라고 크게 화 낼 소지가 다분히 있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용서하시라. 에리카 종도 작품 속에서 나 같은 남자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써 놓았으니.


 "실제로 문학을 좋아하는 남자는 종종 개자식으로 판명되곤 한다. 아니면 한심한 놈이거나."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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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16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이 70년대는 몰라도 지금 읽기에는 그리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당시로서는 놀라웠을 것 같지만 지금 읽기엔 글쎄요... 지퍼 터지는 섹스 및, 여성의 성기를 시도때도 없이 자연스럽게 언급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여성 해방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암튼 이 책은 뭐랄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었던 느낌이었습니다...

Falstaff 2019-04-16 10:42   좋아요 1 | URL
옙. 마지막 장면이 실망이었거든요. 1970년대 당시 기준으로도 페미 소설을 빙자한 그냥 대중 소설 같았습니다. 대중 소설이나 장르 소설을 무시하지 않는데, 대의를 빙자한 건 좋아할 수 없어요.
저도 에리카 종은 쫑 쳤습니다! ^^
 
진 리스 - 한잠 자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부인 외 5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2
진 리스 지음, 정소영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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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의 작품을 보면 <제인 에어>를 비틀어 20세기 감각에 맞게 재구성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통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 서인도제도에서 4분의 3 백인, 같은 말로 4분의 1 흑인으로 태어나 식민지 시민으로 성장하다 런던으로 유학 중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갑자기 들이닥친 피부색, 식민지 출신, 여성, 가난이라는 굴레로 좌절하고, 방황하는 자포자기의 모습이 작품 안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그래봤자 <한밤이여, 안녕>, <어둠 속의 항해>와 이번에 읽은 단편집에 불과하니 섣부른 결론일 확률이 높지만.
 이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공교롭게도, 또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삶과 매우 유사한 환경에 처해 있다. 그리하여 이 책에 수록된 51편의 단편소설은 전반적으로 우울한 안개 속을 정처 없이 걷는 것 같다. <한밤이여, 안녕>의 무대는 프랑스 파리. 영국에서의 삶에 지쳐 도피하듯 파리의 삼류호텔에 세 들어 사는 여인 소피아를 등장시켜, 자신을 고독의 심연에 그냥 내버려 두라고 절규함으로써 오히려 지독한 고독에 빠진 자신을 구해달라고 SOS를 타전하는 광경을 절절하게 그려냈듯이, 단편집의 앞부분에선 무대를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로 설정한 작품들이 일군을 이룬다. 말이 51편의 단편소설이지 그렇게 많은 작품들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소개할 기억력은 내게 없어서, 그저 작품의 무대는 앞에서 얘기했듯 파리, 런던 및 (실제로 리스가 한 시절 몸담았던 전국 순회극단의 배우노릇을 하느라 다녀본)영국의 지방도시, 오스트리아 빈, 그리고 당연하게 서인도제도, 이렇게 다섯 곳에 국한한다.
 장소에 관계없이 작중 중심인물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 당시 기준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던 인간 마네킹, 순회극단 삼류배우, 살롱에서 노래하는 가수, 환자, (간혹 남자나 친구에게 신세를 지는)실업자, 노인, 서인도제도의 소녀 등이다. 한 번에 많은 단편을 읽어, 이 가운데 좋은 작품도 많고, 너무 짧거나 중복되는 것들도 있는데 그걸 다 이야기할 기운이 없다. 그래 좋은 책의 감상문을 제대로 적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그렇다고 쓸데없이 길게 늘여 쓰는 것도 헛된 일일 것.
 편편이 가슴을 적시는 것들이다. 사셔서 나처럼 무식하게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마시고, 두었다가 생각나면 한두 편씩 음미해가며 읽는다면 진짜 제대로 된 감상을 하실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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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15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아직 절반 정도까지만 읽었습니다! 하하하. 현대문학단편선은 한꺼번에 몰아 읽는 것보다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하루에 한두편씩 읽는 게 더 좋더라고요.

Falstaff 2019-04-15 10:04   좋아요 0 | URL
정말 탁월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