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이상화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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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 이시우李時雨라는 명문가 서방님이 숙녀 김신자 여사와 금슬이 좋아 아들 네 형제를 낳았는데, 첫째가 중국에서 장관급 대우를 받았던 독립투사 상정相定이요, 둘째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 탄압을 무릅쓰고 저항의 노래를 그치지 않았던 시인 상화相和요, 셋째가 사학자, 사회학자로 서울대 교수를 지내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까지 지낸 상백相伯이고, 막내가 문필가이자 수렵인으로 이름을 낸 상오相旿였으니 비록 이시우 선생이 네 살 먹은 막내 상오를 남기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 했다 하더라도 아들 농사 하나는 알뜰하게 하고 간 셈이다. 그러나 이 네 형제가 하나같이 고급한 공부를 마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은 물론이오, 나아가 해방을 위해 무력투쟁에까지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대구 일대의 큰 부자였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일우 선생은 조카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사숙을 시켰고, 경성 유학을 거쳐 일본 유학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었을 정도의 부와 혜안이 있었던 거였다. 심지어 둘째 상화는 더 나아가 프랑스 유학을 바라보고 일본의 대학 대신 아테네 프랑세라는 아카데미에 보냈는데, 그만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꿈을 접고 귀국선에 오를 수밖에 없었단다.
  이상화는 열일곱 살 당시에 벌서 현진건, 백기만 등과 동인지를 만드는 등의 문학 활동을 시작한 바 있고, 스물두 살 때 인 1923년엔 홍사용, 박종화, 박영희, 김기진 등 당대의 쟁쟁한 젊은 시인들과 함께 「백조」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1922년. 3.1운동의 실패를 당한 창백한 인텔리겐치아들이 좌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낭만 또는 퇴폐적인 경향의 시를 발표했을 때로, 일 년 후 발간한 「백조」 3호에 이상화도 <나의 침실로>를 게재하니 같은 동인지에 실린 시의 편편을 보자 하면,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 박종화의 <사의 예찬> 등이 있다. 훗날 대하역사소설 <금삼의 피>와 불멸의 <월탄 삼국지>를 쓴 월탄月灘도 처음엔 시로 시작한 것은 다들 아실 터. (<월탄 삼국지>하니까 저 먼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처음 읽은 삼국지가 바로 <월탄 삼국지>였다.) <나의 침실로>는 인용하기에 많이 길어서 비슷한 경향의 상화의 대표적 퇴폐 시 <말세의 희탄> 전문을 소개한다.



  말세의 희탄



  저녁의 피 묻은 동굴 속으로
  아, 밑 없는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꺼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다
  아, 꿈꾸는 미풍의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몸을 세우련다
  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전문)


  상화의 시 속에도 당시 창백한 지식인들의 허무의식이 숨어 있고, 또 스물세 살의 청년에게 이런 감각이 유난히 빨리 스며드는 경향이 있다. 「백조」 자체가 동인들이 특정한 문학적 취향이나 정치적 목적을 공유했던 동인지라기보다 훗날 소위 청록파처럼 그냥 얼굴을 알고 지내고 가끔 만나 술잔 깨나 기울이던 ‘자칭 문인’들이 모여 서로의 작품을 실어 폈던 것이니. 어쨌거나 한 집단, 정확하게 말하자면 식민지 조선에서도 문학이 발전하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승화되지 못한 거친 슬픔이나 죽음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피할 수는 없었을 터, 라고 넘어가면 될 듯하다. 솔직히 살면서 왕년에 이런 종류에 한 번, 물론 잠깐, 몰두해보지 않은 청춘 있으면 두 명만 손들어 보시라.
  도쿄에서 아테네 프랑셰라는 아카데미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 이상화는 다음 해인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다. 세상에나 가장 부르주아 적인 시인 이상화가 카프 발기인이라니. 당시에는 진짜 무산자 가운데 카프에 가입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당대의 천재로 일컫던 이용악 정도밖엔 없었을 것이니까 그것도 그냥 넘어가자. 애초부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희망하는 문학 장르가 그것이라는 말이니까. 이 당시 발표했음 직한 시 한 편을 읽어보자.



  구루마꾼


  ‘날마다 하는 남부끄런 이 짓을
  너희들은 예사롭게 보느냐?‘고
  웃통도 벗은 구루마꾼이
  눌 붉혀 든 얼굴에 땀을 흘리며
  아낙네의 아픔도 가리지 않고
  네거리 위에서 소 흉내를 낸다.  (전문)


  구루마는 요새는 보기 힘든데 양쪽에 고무타이어가 달린 바퀴 두 개가 달린 손수레로, 흔히 이야기하는 손수레보다는 크고, 전에 ‘리어카’로 불렸던 이송수단이다. 시장이나 역에서 사람들의 짐을 날라다 주고 삯을 받는 사람들을 구루마꾼, 나중엔 리어카꾼으로 불렀으며 거의 대부분 빈민으로 알았지만, 흠, 나중에 알고 보니 동대문 시장 리어카꾼은 30여 년 전 화폐가치로 권리금이 1억을 넘었다고 한다. 물론 1920년대엔 틀림없이 빈민이었을 거 같다.
  이렇게 살던 이상화에게 1926년은 기념비적인 한 해가 된다. 바로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에 발표하고, 이 시 때문에 개벽은 판매금지라는 불벼락을 맞는다. 이 시가 좀 길다. 소싯적에 시에 곡조를 붙인 노래 깨나 목이 터지라고 불렀던 거라, 길더라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작이기도 하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 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게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갑부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로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전문)



  이 시는 읽을 때마다 참 먹먹하다. 유신시대, 5공 시절에도 막걸리 한 잔에 빼놓을 수 없는 노래였기도 했다. 하여튼 이상화는 이 일이 있을 후에 본격적인 요시찰 인물이 되고, 다음 해인 1927년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테러가 벌어지자 또다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웬만하면 본격적인 룸펜 시대로 접어들어야 하건만, 백부 이일우 씨 일가가 워낙 막강해서 그랬는지 학교에서 교직을 맡기도 하고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서른여섯 살이 되던 1936년, 맏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기 위해 남경, 북경, 상해 등지를 유랑하고 돌아와 다시 한 번 일제에 의해 고초를 겪는 등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해방 두 해를 남겨둔 1943년, 위암으로 생을 접는다.
  이렇게 또 한 명의 강직한 저항 시인은 역사 뒤로 사라지고, 해방이 온다. 분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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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12-02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덕분에 까마득한 옛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를 다시 읽게 되었네요. 시인 이상화가 이렇게 강직한 분이셨음을 새삼 다시 느꼈습니다.

Falstaff 2020-12-03 09:17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솔직히.... 요새 시의 개별화, 파편화 현상에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어 옛 시를 다시 찾기 시작했답니다. ㅋㅋㅋ 다 인생입지요.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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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팀 오브라이언 스스로가 1968년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징집되어 1969년부터 70년까지 베트남전에 사병으로 참전한 전력이 있다. 1968년에 대학을 다녔으면서도 베트남으로 가야 했던 젊은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1968년의 들불 같은 반전 운동을 겪은 미국의 젊은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청년들은 약간의 돈과 대량의 대마초가 든 가방을 등에 지고 캐나다로 거주를 옮겨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에 옮겼으며, 훨씬 더 많은 청년들은 심각하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고민하다 베트남 전쟁에 휩싸이기 위한 군사교육을 받았고, 아주 적은 청년들은 미국 내에서 끝까지 참전을 거부하며 기꺼이 전과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하여 1968년 이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그 해를 기점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들은 전장으로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왔을 때 역시 미국 역사상 어느 전쟁과 비교해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반대하고, 그 전쟁에 참전했던 것을 자랑스레 이야기하지 않는/않았던 두 번의 전쟁이, 우연하게도 동(남)아시아에서 있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뿐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베트남에서 건국 역사상 최초로 패전의 멍에를 썼다.

  불명예스러웠던 베트남 전쟁을 다룬 많은 작품이 나와 있다. <디어 헌터>, <지옥의 묵시록>,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 <프래툰> 같은 영화부터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하얀 전쟁>으로 제목을 바꾼 안정효의 <시장과 전장>,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등의 우리나라 소설들이 떠오를 뿐, 놀랍게도 외국(특히 패전국인 미국) 문학에서 진지하게 베트남 전쟁을 그린 소설 작품은 생각나지 않는다. 장교여야 하지만 작품을 쓰기 위해 일부러 사병으로 지원해 경험한 것을 쓴 태평양 전쟁 소설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의 작가 노먼 메일러의 <밤의 군대들>은 위에서 얘기한 1968년 반전 운동을 현장 취재한 것이고, 알렉시 제니의 <프랑스식 전쟁술>은 미국과의 전쟁 이전 베트남에서 벌어진 독립투쟁으로의 인도차이나 전쟁을 부분적으로 다루었으니 그것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도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인들의 작품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팀 오브라이언의 다분히 자전적, 경험적인 소설 또는 이야기인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재미있게 읽었을 수밖에.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경험했던 베트남 전쟁에서의 여러 단편fragment들을 여러 매체를 통해 먼저 발표하고, 나중에 그것들을 모아 서로 연관 있게 배열하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말단 병사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책의 제목인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각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짊어지고, 들고, 몸에 부착하고 다닌 것들을 개별 장비, 무기, 보호구, 개인 지참물 등을 뜻하고, 작가는 이것들에 관해 무게, 길이 등을 독자에게 상세하게 보고한다.

  전투를 위한 준비물과 무기 말고, 소대장인 지미 크로스 중위는 뉴저지 주의 마운트 서배스천 칼리지 3학년에 재학중인 ‘마사’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보낸 편지 뭉치와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과가 끝나면 참호를 파고 그 안에서 보는 습관을 들였는데 이때마다 뉴햄프셔 화이트산맥으로 낭만적인 캠핑을 떠나는 상상에 젖고는 한다. 헨리 도빈스는 덩치가 거구인지라 다른 건 빠뜨리더라도 여분의 식량은 꼭 가지고 다니고, 데이비드 젠슨은 야전 위생 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어서 칫솔과 치실을 항상 지참하고 여기다가 요양휴가 중에 훔쳐온 호텔용 크기의 비누 바를 배낭 옆구리에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4월 중순에 탄케 마을 수색 중 머리통에 총알이 박힐 예정인 테드 라벤더는 원래 겁이 많은 친구라서 이걸 보완하기 위해 진정제를 아침마다 서너 알씩 먹는 버릇이 있고 여기에 6~7 온스의 질 좋은 마리화나를 어딘가에 숨겨 다닌다. 밀림 속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콘돔은 무전병 미첼 센더스의 전투복 상의 주머니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일곱 개의 훈장을 받고 제대해 귀국하는 노먼 보커는 쓰지도 않는 일기장을, 랫 카일리는 만화책을, 인디언 출신 침례교도 카이오와는 아버지가 선물한 신약성경 없이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전쟁터는 진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있는 것이라 세상 어느 곳보다 징크스가 심하리라는 건 당연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만의 잡동사니를 마치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도 하는데, 카이오와는 신약성경과 더불어 발소리를 없애주는 사슴 가죽 모카 신발 한 켤레(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아무 작품 참조), 데이브 젠슨은 카로틴이 풍부한 야맹증 개선 비타민, 리 스트렁크는 최후의 무기라고 주장하는 새총, 랫 카일리는 브랜디와 M&M 초콜릿, 테드 라벤더는 6.3 파운드나 나가는 야간투시경을, 그리고 헨리 도빈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적으로 여자친구의 팬티스타킹을 목에 두르고 다닌다. 도빈스는 얼마후 여자친구로부터 결별 선언 편지를 받지만 잠깐 고민하다가, 그래도 팬티스타킹이 자신을 보호해주는 능력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 믿으며 계속 목에 감고 다닌 결과 책이 끝날 때까지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인간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상황을 우리는 전쟁이라 부른다. 애초에 세상에 정당한 전쟁은 없다고 믿는 나는 같은 맥락에서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그래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참상, 시신들이 함부로 훼손된 광경, 차라리 몸이 터져 하늘로 솟구치며 나뭇가지에 바로 전까지 함께 농담한 친구의 내장이 걸리고, 나무를 기어 올라가 그걸 수습하는 일. 끊임없이 폭우가 내리는 절정의 우기에 마을의 공동변소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던 곳을 하필이면 야영지로 골랐다가, 하필이면 박격포의 집중 포격을 받고, 하필이면 가장 진중하던 카이오와가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하필이면 똥의 늪 속으로 빠지는 걸 뻔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출해낼 수 없는, 참경들.

  팀 오브라이언은 참경과, 그걸 목도했던 병사들이 훗날 무력감과 후유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이런 것들 ‘만’ 쓰고 있지 않다. 그는 과거 베트남에서 겪었던 일들과 이에 관한 트라우마와 치유라기보다는 그것, 기억들, 후유증과 함께 살아내기를 말하고 있는데, 이의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의 “이야기”, 이야기를 만드는 것,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 그것을 통해 전쟁, 궁극적으로 죽음과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다. 이것이 오브라이언이 글을 쓰는 목적이라고, 단순히 이 책만 읽으면 결론을 낼 것 같다. 그래서 작가의 경험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단편의 모음을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 다 빼고, 전쟁터에서 수컷들의 일상적인 욕설도 빼고, 빼어난 문장을 중심으로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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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개예술가의 초상
딜런 토머스 지음, 이나경 옮김 / 아도니스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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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어찌 고르지 않고 배길 수 있었을까. 글쓴이가 딜런 토머스이잖은가 말이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미국의 유명 가수 밥 짐머만이 딜런 토머스를 숭배한 나머지 이름을 밥 딜런으로 고쳤다니. 이름까지 고친 그는 몇 십 년 후에 가사lyrics가 예술이라고 노벨 문학상까지 거머쥐어 버렸단다, 으악.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딜런 토마스의 시는 한 편도 읽어본 적이 없다. 물론 번역시는 읽지 않는다, 라고 작정을 하기도 했고 영시를 즐길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 딜런 토마스라는 웨일스 출신의 시인. 이이가 쓴 소설집이, 외국 작가가 쓴 단편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별 부담 없이 읽는 연작 형태의 성장소설이라니. 그리고 단편집의 저 도발적인 제목을 보시라. ‘젊은 개예술가의 초상.’ 당연히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생각나게 하는 제목인데 거기다가 젊은이의 삐딱한 시선까지 곁들여 그냥 예술가가 아니라 ‘개예술가artist as a young dog'라고 했다. 제목으로 진짜 개쩐다.
  그러나 모두 열 편이 실린 이 단편집이 쩌는 작품들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작가 자신이 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스완지의 농촌과 작은 도시와 해변에서 자라는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파노라마라기보다는 시간별로 열 점의 수채화를 전시해놓은 것 같다. 자신의 리얼한 체험이라고 믿는 독자는 없겠지? 소년이었을 때, 사춘기 시절,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각 단계에서 작가가 상상했던 여러 가지 것들을 묘사했는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정당한 변주 기법이 들어갔을 터. 변주를 하지 않았다면 ‘개예술가의 회고록’ 쯤으로 제목을 달았겠지.
  그래. 수채화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극단적 은유의 나열로 골이 지끈지끈한 바로 다음에 담백한 수채화 구경을 하니 좀 개운해지는 것 같기는 한데, 다분히 도회적 취향인 나하고는 찰떡궁합까지 가지는 못해, 뒤로 갈수록 점점 곤란한 지경 근처까지 가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선 책의 편집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각주와 더불어 후주를 단 것까지는 좋다. 근데 후주가 무려 서른아홉 페이지에 달한다. 주석註釋 특유의 작은 활자로. 이미 서른세 페이지에 달하는 연표를 달고도 시시콜콜 작가가 왜 이런 ‘주석이 달릴 만한 단어나 문장’을 사용했는지 극히 세밀한 설명을 일반 독자에게 해줄 필요가 있을까? 이 작가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해봤자 내 인생에 더 이상 수능시험을 치를 일은 없을 텐데. 주석이 있는 페이지로 건너가서 주석을 해독하는 일이 정작 본문을 읽는 것보다 더 까다로우면 어떻게 하냐고.
  이런 수준의 단편을 모아놓았으면, 그것이 불과 240쪽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적당한 분량의 해설, 연표, 주석을 붙여 좀 얇은 책으로 해도 충분히 좋을 것을. 암만 생각해도 편집자의 의욕이 과했다. 솔직히 말해, “친절한 의도는 고맙다.” 근데 과했다.
  수채화 같은 단편들. 그건 보장. 수채화 좋아하시는 독자들에겐 후회 없는 선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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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11-1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가 특별히 제임스 조이스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죠?
소설을 수채화처럼 쓰는거 저도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상하게 팔스타프님 이 리뷰 읽으니 저도 읽어보고 싶어진단 말이죠. 장바구니 담았습니다.

Falstaff 2020-11-11 14:02   좋아요 0 | URL
옙. 제임스 조이스 작품들하고 유사점은 특별하게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지금 읽고 있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완전 조이스인 걸요. 지금 연속해서 깜짝 놀라는 중입니다.
아이구, 전 완전 아마추업니다. 읽으신 다음은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

em 2021-09-0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기하게 위 댓글처럼 저도 더블린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딜런 토마스 작품은 시 몇 편과 편지 몇 통, 희곡 등 영어로만 접한 바 있는데 쉽지는 않더라고요. 번역본 중 재미있는 작품이 있을지 찾아보다가 리뷰 잘 읽었습니다.ㅎㅎ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Falstaff 2021-09-07 19:25   좋아요 0 | URL
더블린 사람들을 생각하시게 제가 독후감을 쓴 모양입니다. 하하하.... 하긴 아일랜드에서 가장 가까운 영국 땅이 웨일스이군요!
영어권 독자들은 이 딜런 토마스한테 껌뻑 넘어가는 모양이더라고요. 저야 뭐 극동의 변방 독자로 그것까지는 알지 못해도, 그래도 뭔가가 있어서 그렇겠거니, 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셔요!
 
올랜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4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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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프는 이 책 <올랜도>를 쓰는 일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한테 감사를 표하는 ‘서문’을 제일 앞에 달았다. 사실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긴 한데, 본문 뒤편에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명단을 읽어나가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조카, 언니의 아들, 줄리언 벨. 그의 가혹하지만 예리한 비판이 책을 만드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인 버네사 벨의 남편, 그러니까 형부인 클라이브 벨과 눈빛이 마주치기만 하면 스스럼없이 동침을 감행했고,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버네사는 남편의 애인이기도 한 양성애자, 덩컨 그랜트를 평생의 남자친구로 삼았다. 한 발 더 나가서, 버지니아 울프가 고마움을 표한 조카 줄리언은 1937년에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 전사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생부가 엄마 버네사의 남편인 클라이브가 아니라 클라이브의 막역한 친구 로저 프라이 씨라고 굳게 믿었다. 줄리언의 여동생 퀜틴 역시 덩컨 그랜트 씨의 생물학적 딸이라고 했으니, 그것도 20세기 초반에, 이거 참, 대략 난감한 내력이다. 이런 내용은 지독하게 잘 생긴 청년 줄리언 벨의 열한 번째 애인 “K”양의 무척 야한 소설 <영국 연인>을 통해 알게 된 것에 불과하다. K가 알파벳의 열한 번째 철자다. 애초부터 이런 조금 덜 바람직한 가정에서 살아서 그랬는지 줄리언은 사랑과 연애에는 미친 듯이 몰두하되, 결코 결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자기가 어려서부터 봐 왔거든. 혼인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정은 이 책에서도 은근히 강조되는데, 그건 내가 설명하기보다 직접 읽어보시기 권하는 바이고,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버지니아 울프가 혼인제도에 대한 약한 네거티브 적 사고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당연하기도 한 것 같고 그렇다.

  작품은 16세기가 끝나려면 몇 년 더 기다려야 하는 시기, 1580년대 말쯤에 열여섯 살인, 태생부터 귀족인 가문의 외아들 올랜도가 서까래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무어인들의 참수한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말기로 유명한 미남이자 무능한 장군이었던 로버트 데버루가 연속적으로 패전하기 바로 직전,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찔러 포도주를 퍼마시고는 자신의 애인이면서 절대왕권을 휘두르던 여왕의 치마 속 사정(브라질리언 왁싱에 대한 시청각 경험)을 함부로 떠들고 다녀 스스로 명을 재촉하던 시기. 데버루는 결국 괘씸죄에 걸려 죽지 않기 위해 반란을 꾀했다가 도마 위에 늘인 목에 망나니의 도끼를 얹었지만 그렇다고 여왕의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터. 그건 1601년 일이고, 이 시기는 데버루의 진심에 여왕이 의심을 품고 있던 때쯤으로 보인다. 이미 환갑 진갑을 넘긴 여왕의 늙은 마음이 공허할 때, 여왕은 올랜도 아버지의 성을 방문했고, 올랜도는 나무 아래서 스코틀랜드와 웨일 지역을 완상하다가 달음박질을 해 와 겨우 시간에 넘기지 않고 장미 향수가 가득 든 사발을 여왕에게 바칠 수 있었다. 근데 여왕이 보기에 열여섯 먹은 청년 올랜도가 근사했거나 귀여웠던 터. 평생 쉴 틈 없이 귀에서는 늘 대포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선 항상 독약 방울과 예리한 단도가 어른거리는 삶을 법적인 처녀 상태로 평생을 살아온 여왕이 젊은이를 간혹 옆에 둔다고 해서 어찌 큰 까탈이겠는가. 여왕은 올랜도를 런던의 왕궁에 불러 왕실 재무담당관이자 중신으로 임명하고 관직의 표지인 사슬과 발목에 가터 훈장까지 차려준다. 그리고 1588년, 영국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일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 불꽃놀이를 펼치던 날 밤, 당시 관습대로 삼십 일 동안 옷을 한 번도 갈아입지 않아 옷 무더기 상태인 여왕이 올랜도를 불러 얼굴을 자신의 가슴 속에 푹 파묻어 버렸다. 여왕이 올랜도에게 바라는 건 침대 위의 봉사가 아니라 노년의 아들로서 자신의 허약한 몸의 수족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 쇠락한 자신의 몸을 기댈 참나무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으나, 마음이 그랬다는 것뿐이고 진짜로 올랜도가 여왕의 방문 밖에서 어느 계집아이하고 키스하는 걸 발견하고는 왕의 칼로 거울을 내리쳐 단칼에 박살을 내버렸고, 남은 생이 끝날 때까지 남자의 배신에 대해 신음하며 온갖 한탄을 늘어놓았다고, 울프가 창작한 전기작가는 말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올랜도는 세 명의 영애들과 혼담이 오간다. 클로린다는 흰 속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에 피를 쳐다보지 못하고, 식탁 위에 오른 산토끼 구이를 보자마자 졸도를 하는 데다가 혼인을 하면 남편을 개심시켜 악행을 고치겠는 말에 기겁을 해 파혼을 해버렸고, 얼마 후 천연두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 두 번째는 파빌라. 가난한 신사의 딸인데, 어느 날 자신의 스타킹을 찢어놓은 스패니얼을 올랜도의 창문 아래서 채찍으로 반쯤 죽여놓는 걸 보고 그날로 파혼을 해버렸다. 이어 마지막 세 번째가 다른 곳도 아니고 신생 식민지 아일랜드의 데즈먼드 가문의 딸인 유프로시니 양으로 잉글랜드 왕궁의 입장에서도 식민지 민심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혼인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으며 올랜도 역시 크게 이견이 없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있나? 때는 1608년, 영국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템스강조차 꽝꽝 얼어붙는 날씨가 연이어 계속될 때, 서민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할 시절, 귀족들은 얼어붙은 템스강 위에 천막을 마치 도시처럼 치고 날마다 무도회를 벌였던 터다. 이때 올랜도 앞에 헐렁헐렁한 러시아 식 바지를 입고 기막히게 스케이팅을 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으니 마르샤 스타니로브스카 다그마르 나타샤 일리아나 로마노비치 공주. 이 사샤 공주는 책이 끝날 때까지 자주 등장해 올랜도의 추억 속에서 기념하게 되는데, 이는 필연으로 반드시 결혼해주어야 하는 데즈먼드 가문의 딸 유프로시니 양과의 파혼을 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샤 공주와 올랜도는 야반도주하기로 뜻을 합쳤고, 자정에 만나기로 했으나 그날 밤새도록 뜻밖에 내리는 비만 철철 맞으면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사샤 공주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밤새 내린 비로 해동된 템스강에 여태 정박한 러시아 함선이 유유하게 조국을 향한 항해에 나서고.

  책에서 올랜도는 7일에 달하는 잠을 두 번 잔다. 한 번은 자신이 써왔던 57편의 작품을, 짧은 시 <참나무> 한 편을 빼고, 모두 불태운 날. 당대의 시인 니컬러스 그린이란 자에게 3백 파운드의 연금을 분기별로 나누어 지급하겠다는 호의를 약속했으나 그린은 풍자시를 통해 올랜도의 작품을 더할 나위 없이 장황하며 과장된 허풍으로 일관한다고 혹평한바, 문제는 누가 그 풍자시를 읽어도 혹평을 받은 헤라클레스의 죽음에 관한 시를 올랜도가 썼다는 걸 저절로 알게 묘사를 했다는 점이다. 그래 이 풍자시의 팸플릿을 장원의 가장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두엄더미 속에 빠뜨려버리라고 명령을 하고, 이젠 인간들과의 관계가 끝났음을 선언한 날이다. 7일 후 잠에서 깬 올랜도는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 특사로 보내달라고 요구하여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해 바스 훈장을 받고 공작 작위를 얻게 된다. 공작의 대관을 받은 날 밤에 두 번째 잠에 빠져 또다시 7일 만에 깨어 눈을 뜬 다음 옷을 모두 벗고 거울 앞에 서니, 에그머니, 올랜도는 여자로 변신해버렸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 <올란도>를 보면 올랜도로 분장한 틸다 스윈톤이 나신으로 거울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까지 나는 스토리 중심으로 독후감을 썼다. 책 분량의 반도 오지 않았다. 틸다 스윈톤 주연의 영화 <올란도>도 말했는데, 이 소설은 결코 스토리를 따라가는 작품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를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그것을 엮어가며 읽는 사람 있으면 두 명만 손들어 보시라. <올랜도>의 주인공 올랜도는 대략 1570년생으로 그가 서른 살까지 남자로 살다가 갑자기 여성으로 변신해 서른여섯 살의 완숙한 여인, 아들 하나를 낳아 잉글랜드 특유의 한사상속의 한계를 피해 예전에 비하면 빈털터리가 됐으나 그래도 유유자적하게 남은 평생을 관조하면서, 시 <참나무>로 문학상을 타 상금 2백 기니를 받고 7쇄 이상을 찍는 유명 작가가 되는 1928년까지 근 360년의 대하 로망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문학과 양성, 여성과 남성에 대한 거대 에세이라고 읽는 것이 타당하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재능있는 여동생 매리가 아니라 유명 ‘남자’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닉 그린 씨도 자신이 오직 시작making poetry에만 몰두하기 위하여는 당시 화폐 기준으로 연 3백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게 나중엔 ‘여자’를 더 강조하여 <자기만의 방>으로 변화 또는 진화하는 것. 물론 문학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인간사 거의 모든 면에 여성과 남성을 측면에서 본 것들을 조망하기 위하여 울프는 올랜도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시키지 않았나 싶다. 참 다양한 측면에서 당대의 지식인이자 부르주아가 양성을 관찰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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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스터 렌 - 어느 신사의 낭만적 모험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김경숙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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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클레어 루이스의 작품은 <배빗>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렇게 두 권만 읽었으니 결코 그에 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없는 처지렸다. 게다가 <배빗>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두 작품은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같은 작가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완전히 상이한 작품이라 좀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던 바, 이번에 <...미스터 렌>을 읽고서야, 역시 싱클레어 루이스는 20세기 초반 소시민의 삶에 천착하는 모습이 훨씬 어울린다고 결론을 냈다. 그렇게 결론을 내버렸다. 실제로 루이스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많은 미국 독자들이 서슴없이 <배빗>을 꼽는다고 한다.
  전에 제임스 A. 미치너의 역작 <소설>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토론 광경을 목도한 적이 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 작가 네 명으로 허먼 멜빌, 스티븐 크레인, 이디스 워튼, 윌리엄 포크너를 꼽은 반면, 반드시 평가절하 되어야 할 작가 네 명의 명단으로 싱클레어 루이스,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을 나열한 적이 있다. 위대한 소설 작가 명단엔 그리 크게 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평가절하 해야 할 작가 가운데 (당시까지만 해도 읽어본 책이라곤 <배빗> 하나밖에 없었음에도) 루이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불만을 품어, 오히려 나로 하여금 이후 그의 작품이 눈에 띄는 대로 읽어보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그렇지 뭐여? 스타인벡을 이 명단에 포함시킨 거엔 거의 분노를 했던 바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작품들, 이라기보다, <배빗>이나 <...미스터 렌> 같은 자잘한 소시민의 허위의식이나 속물성, 또는 그저 날 것의 사는 모습을 스케치한 것들이, 소위 서사성의 부족이라든가 철학이나 역사적 소명을 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싱클레어 루이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 이변이나 된다는 듯이, 이이를 ‘반드시’ 평가절하 해야 할 작가라고 단정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중후장대한 것은 중후장대한 것대로, 경박단소한 것은 또 경박단소한 대로의 멋이 있고 맛이 있는 법. 쉽사리 중후장대를 무기로 휘둘러 경박단소를 윽박지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의미로 경박단소,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것들은 그것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를 충분히 심각하게 지고 평생을 살지 아니한가 말이지. 지금 당신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좌우, 앞뒤를 돌아보라. 거기 누가 있어 중후장대하다고 할 수 있는지. 거개가 다 그만그만하고 고만고만한, 경박단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우리네 세상살이일지어니.
  이 작품의 주인공 윌리엄 렌 씨도 ‘기념품과 장식 소품 컴퍼니’에서 월급 19 달러를 받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독신이라 업무가 끝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월세 집에 가느니 검표원의 친절한 인사를 받는 즐거움을 누리러 5센트 극장에 가기를 더 좋아하는 서른네 살의 영업사원. 영업사원은 영업사원이지만 필드를 누비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매출 체크하고 서류를 관장하는 내근 영업직원. 그리고 아마도 숫총각이리라. 렌 씨에게도 꿈이 있다. 증기선을 타고 세상 곳곳을 여행해보는 것. 언젠가 이룰 자신의 꿈을 위해 박봉을 쪼개 조금씩 저축을 하고 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관광안내 책자들을 수집해 산처럼 쌓아놓고 그 속에서 세상 각지의 모든 문물과 문명과 자연을 익혀 나간다. 오직 그것 하나, 여행. 자바 섬의 정글, 스칸디나비아의 백야, 런던 대성당, 파리 박물관 등등, 세상 각지를 순회하는 상상으로 늘 꿈속에 살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회사의 신경질적인 관리자 모티머 길포글 씨의 호출 벨 소리만 들렸다하면 총알 같이 길포글 씨의 책상 앞으로 뛰어가 무수한 질타와 함께 새로운 업무지시를 받아야 하는 형편. 그림이 훤하게 그려지시지? 맞다, 지금 당신 옆에 앉아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 친척, 이웃이다.
  말 그대로 쥐꼬리만 한 봉급이라도 미스터 렌은 언제나 해고의 위협을 안고 있어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그리 드물지 않은 빈도로 자진해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는데, 노상 이렇게 지질한 일상이 계속된다면 어디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씨는 우리의 미스터 렌에게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종의 돈벼락을 쏟아 부으니, 오래 전에 돌아간 아버지가 남긴 파르테논(뉴욕의 가난한 동네 이름) 집이 팔려 940달러가 국립은행 통장에 입금 되는 일이 벌어진다. 한 방에 자신의 4년 연봉보다 더 많은 돈이 생긴 것. 요즘 우리나라 로또 복권이라야 1등 해봤자 실 수령액이 10억 안팎밖에 안 되지만, 전엔 한 번 터지면 4십억, 5십억도 일상 다반사였는데, 평소 지겨운 봉급쟁이한테 한 번에 5십억 원의 거금이 생기면, 그것 가지고 ‘아더매치’,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한 봉급쟁이를 계속 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스터 렌 씨도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아, 상습 신경질꾼 모티머 길포글 씨가 어제와 다름없이 신경질을 부리면서 하기 싫으면 관두시든지, 짜증을 부리자, 뭐 그러지요, 마침 일신상의 이유로 하산하기로 결심을 할까 했던 바입니다, 하고 사표를 써버렸다.
  문제는 이 소심한 미스터 렌이 진짜로 유럽 여행을 하려고 하니, 말은 쉬운데 갈까 말까, 망설임이 가볍지 않은 것. 렌 씨가 가장 신경 쓴 것은 940달러를 함부로 낭비할 수 없다는, 거의 강박적인 조바심. 그러던 어느 날, 렌 씨의 눈에 신문광고 구인란에서, 아주 작은 돈을 벌면서도 영국으로 갈 수 있는 경우를 발견하는데,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란 망상에 시달리는 영국인들을 위해 식육용으로 키운 소를 싣고 리버풀로 향하는 배 메리언 호를 타고, 뱃삯대신 소에게 여물을 먹이는 노동을 해주면 된다는 국제 대서양 인력 센터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그래 선뜻 인력 센터를 찾아가 소개비 5달러를 내고 배에 오르게 되는데, 평생 소심하고 착한 심성으로 오직 펜대만 잡아 본 미스터 렌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은 억센 공장 노동자 출신의 피트, 모자 팔던 빈털터리 팀, 모리스 패거리의 부두목 맥가버, 이들의 ‘두목 사탄’ 등의 악당들과, 7년간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서 근무하다 3개월의 휴가를 받은 선량한 모튼, 그리고 유대인 늙은이들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항해를 시작한 것인데, 드디어 터질 것이 터져 두목 사탄의 지휘로 미스터 렌은 피트와 결투를 벌이게 되고, 놀랍게도 마구 휘두른 미스터 렌의 주먹이 적재적소에 꽂히는 바람에 KO 승을 거두는 일이 벌어진다. 이제부터 윌리엄 렌은 앞으로 간혹 자신 속에 숨어 있던 싸움꾼의 본성이 튀어나올 때가 생기기 시작한 것. 미스터 렌이 약간 거친 모습으로 변할 때마다 싱클레어 루이스는 그를 ‘빌렌’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어째 발음이 악당 villain과 비슷한 것도 같고.
  그리하여 선한 심성과 순진한 마음을 그대로 가진 윌리엄 렌 씨가 런던에 도착하는데, 평생소원을 이룰 첫 발을 뗀 미스터 렌이 영국 곳곳, 옥스퍼드, 런던의 펍, 대동물원 등등을 전전하면서 누구를 만나고, 런던 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것을 바라게 됐을까? 좋다 가르쳐드린다. 영국에서 미스터 렌은 자신의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두 가지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이 두 가지만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지리라고. 당신의 경우와 다른지 한 번 보시라. 첫째가 저녁에 집에 함께 갈 사람, 둘째가 동고동락하며 함께 일 할 동료. 결국을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데, 미스터 렌은 영국에서 이것을 이룰 수 있을까? 혹시 미국으로 내빼는 건 아냐? 그건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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