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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54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평점 :
울프는 이 책 <올랜도>를 쓰는 일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한테 감사를 표하는 ‘서문’을 제일 앞에 달았다. 사실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긴 한데, 본문 뒤편에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명단을 읽어나가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조카, 언니의 아들, 줄리언 벨. 그의 가혹하지만 예리한 비판이 책을 만드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인 버네사 벨의 남편, 그러니까 형부인 클라이브 벨과 눈빛이 마주치기만 하면 스스럼없이 동침을 감행했고,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버네사는 남편의 애인이기도 한 양성애자, 덩컨 그랜트를 평생의 남자친구로 삼았다. 한 발 더 나가서, 버지니아 울프가 고마움을 표한 조카 줄리언은 1937년에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 전사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생부가 엄마 버네사의 남편인 클라이브가 아니라 클라이브의 막역한 친구 로저 프라이 씨라고 굳게 믿었다. 줄리언의 여동생 퀜틴 역시 덩컨 그랜트 씨의 생물학적 딸이라고 했으니, 그것도 20세기 초반에, 이거 참, 대략 난감한 내력이다. 이런 내용은 지독하게 잘 생긴 청년 줄리언 벨의 열한 번째 애인 “K”양의 무척 야한 소설 <영국 연인>을 통해 알게 된 것에 불과하다. K가 알파벳의 열한 번째 철자다. 애초부터 이런 조금 덜 바람직한 가정에서 살아서 그랬는지 줄리언은 사랑과 연애에는 미친 듯이 몰두하되, 결코 결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자기가 어려서부터 봐 왔거든. 혼인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정은 이 책에서도 은근히 강조되는데, 그건 내가 설명하기보다 직접 읽어보시기 권하는 바이고,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버지니아 울프가 혼인제도에 대한 약한 네거티브 적 사고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당연하기도 한 것 같고 그렇다.
작품은 16세기가 끝나려면 몇 년 더 기다려야 하는 시기, 1580년대 말쯤에 열여섯 살인, 태생부터 귀족인 가문의 외아들 올랜도가 서까래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무어인들의 참수한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말기로 유명한 미남이자 무능한 장군이었던 로버트 데버루가 연속적으로 패전하기 바로 직전,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찔러 포도주를 퍼마시고는 자신의 애인이면서 절대왕권을 휘두르던 여왕의 치마 속 사정(브라질리언 왁싱에 대한 시청각 경험)을 함부로 떠들고 다녀 스스로 명을 재촉하던 시기. 데버루는 결국 괘씸죄에 걸려 죽지 않기 위해 반란을 꾀했다가 도마 위에 늘인 목에 망나니의 도끼를 얹었지만 그렇다고 여왕의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터. 그건 1601년 일이고, 이 시기는 데버루의 진심에 여왕이 의심을 품고 있던 때쯤으로 보인다. 이미 환갑 진갑을 넘긴 여왕의 늙은 마음이 공허할 때, 여왕은 올랜도 아버지의 성을 방문했고, 올랜도는 나무 아래서 스코틀랜드와 웨일 지역을 완상하다가 달음박질을 해 와 겨우 시간에 넘기지 않고 장미 향수가 가득 든 사발을 여왕에게 바칠 수 있었다. 근데 여왕이 보기에 열여섯 먹은 청년 올랜도가 근사했거나 귀여웠던 터. 평생 쉴 틈 없이 귀에서는 늘 대포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선 항상 독약 방울과 예리한 단도가 어른거리는 삶을 법적인 처녀 상태로 평생을 살아온 여왕이 젊은이를 간혹 옆에 둔다고 해서 어찌 큰 까탈이겠는가. 여왕은 올랜도를 런던의 왕궁에 불러 왕실 재무담당관이자 중신으로 임명하고 관직의 표지인 사슬과 발목에 가터 훈장까지 차려준다. 그리고 1588년, 영국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일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 불꽃놀이를 펼치던 날 밤, 당시 관습대로 삼십 일 동안 옷을 한 번도 갈아입지 않아 옷 무더기 상태인 여왕이 올랜도를 불러 얼굴을 자신의 가슴 속에 푹 파묻어 버렸다. 여왕이 올랜도에게 바라는 건 침대 위의 봉사가 아니라 노년의 아들로서 자신의 허약한 몸의 수족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 쇠락한 자신의 몸을 기댈 참나무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으나, 마음이 그랬다는 것뿐이고 진짜로 올랜도가 여왕의 방문 밖에서 어느 계집아이하고 키스하는 걸 발견하고는 왕의 칼로 거울을 내리쳐 단칼에 박살을 내버렸고, 남은 생이 끝날 때까지 남자의 배신에 대해 신음하며 온갖 한탄을 늘어놓았다고, 울프가 창작한 전기작가는 말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올랜도는 세 명의 영애들과 혼담이 오간다. 클로린다는 흰 속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에 피를 쳐다보지 못하고, 식탁 위에 오른 산토끼 구이를 보자마자 졸도를 하는 데다가 혼인을 하면 남편을 개심시켜 악행을 고치겠는 말에 기겁을 해 파혼을 해버렸고, 얼마 후 천연두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 두 번째는 파빌라. 가난한 신사의 딸인데, 어느 날 자신의 스타킹을 찢어놓은 스패니얼을 올랜도의 창문 아래서 채찍으로 반쯤 죽여놓는 걸 보고 그날로 파혼을 해버렸다. 이어 마지막 세 번째가 다른 곳도 아니고 신생 식민지 아일랜드의 데즈먼드 가문의 딸인 유프로시니 양으로 잉글랜드 왕궁의 입장에서도 식민지 민심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혼인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으며 올랜도 역시 크게 이견이 없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있나? 때는 1608년, 영국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템스강조차 꽝꽝 얼어붙는 날씨가 연이어 계속될 때, 서민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할 시절, 귀족들은 얼어붙은 템스강 위에 천막을 마치 도시처럼 치고 날마다 무도회를 벌였던 터다. 이때 올랜도 앞에 헐렁헐렁한 러시아 식 바지를 입고 기막히게 스케이팅을 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으니 마르샤 스타니로브스카 다그마르 나타샤 일리아나 로마노비치 공주. 이 사샤 공주는 책이 끝날 때까지 자주 등장해 올랜도의 추억 속에서 기념하게 되는데, 이는 필연으로 반드시 결혼해주어야 하는 데즈먼드 가문의 딸 유프로시니 양과의 파혼을 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샤 공주와 올랜도는 야반도주하기로 뜻을 합쳤고, 자정에 만나기로 했으나 그날 밤새도록 뜻밖에 내리는 비만 철철 맞으면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사샤 공주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밤새 내린 비로 해동된 템스강에 여태 정박한 러시아 함선이 유유하게 조국을 향한 항해에 나서고.
책에서 올랜도는 7일에 달하는 잠을 두 번 잔다. 한 번은 자신이 써왔던 57편의 작품을, 짧은 시 <참나무> 한 편을 빼고, 모두 불태운 날. 당대의 시인 니컬러스 그린이란 자에게 3백 파운드의 연금을 분기별로 나누어 지급하겠다는 호의를 약속했으나 그린은 풍자시를 통해 올랜도의 작품을 더할 나위 없이 장황하며 과장된 허풍으로 일관한다고 혹평한바, 문제는 누가 그 풍자시를 읽어도 혹평을 받은 헤라클레스의 죽음에 관한 시를 올랜도가 썼다는 걸 저절로 알게 묘사를 했다는 점이다. 그래 이 풍자시의 팸플릿을 장원의 가장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두엄더미 속에 빠뜨려버리라고 명령을 하고, 이젠 인간들과의 관계가 끝났음을 선언한 날이다. 7일 후 잠에서 깬 올랜도는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 특사로 보내달라고 요구하여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해 바스 훈장을 받고 공작 작위를 얻게 된다. 공작의 대관을 받은 날 밤에 두 번째 잠에 빠져 또다시 7일 만에 깨어 눈을 뜬 다음 옷을 모두 벗고 거울 앞에 서니, 에그머니, 올랜도는 여자로 변신해버렸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 <올란도>를 보면 올랜도로 분장한 틸다 스윈톤이 나신으로 거울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까지 나는 스토리 중심으로 독후감을 썼다. 책 분량의 반도 오지 않았다. 틸다 스윈톤 주연의 영화 <올란도>도 말했는데, 이 소설은 결코 스토리를 따라가는 작품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를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그것을 엮어가며 읽는 사람 있으면 두 명만 손들어 보시라. <올랜도>의 주인공 올랜도는 대략 1570년생으로 그가 서른 살까지 남자로 살다가 갑자기 여성으로 변신해 서른여섯 살의 완숙한 여인, 아들 하나를 낳아 잉글랜드 특유의 한사상속의 한계를 피해 예전에 비하면 빈털터리가 됐으나 그래도 유유자적하게 남은 평생을 관조하면서, 시 <참나무>로 문학상을 타 상금 2백 기니를 받고 7쇄 이상을 찍는 유명 작가가 되는 1928년까지 근 360년의 대하 로망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문학과 양성, 여성과 남성에 대한 거대 에세이라고 읽는 것이 타당하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재능있는 여동생 매리가 아니라 유명 ‘남자’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닉 그린 씨도 자신이 오직 시작making poetry에만 몰두하기 위하여는 당시 화폐 기준으로 연 3백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게 나중엔 ‘여자’를 더 강조하여 <자기만의 방>으로 변화 또는 진화하는 것. 물론 문학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인간사 거의 모든 면에 여성과 남성을 측면에서 본 것들을 조망하기 위하여 울프는 올랜도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시키지 않았나 싶다. 참 다양한 측면에서 당대의 지식인이자 부르주아가 양성을 관찰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