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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의 거울 ㅣ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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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참화 삼부작”이 <우리 슬픔의 거울>로 마무리한다. 1부 <오르부아르>는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18년 11월 2일에 시작하고, 2부 <화재의 색>은 대공황이 막바지 준비 단계에 이른 1927년, 3부 <우리 슬픔의 거울>은 2차 세계대전이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시작해 나치가 에펠탑 위에 하켄크로이츠를 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0년 6월 13일에 끝난다. 이 세 작품이 소위 삼부작이기 때문에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 물론 삼부작이란 체인을 생각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읽어도 재미가 떨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왕 읽는 것, 순서대로 읽는 편이 낫다. 1부의 주인공 에두아르 페리쿠르는 이미 종전협정이 마무리 단계에 이른 것을 알고 있던 악당 앙리 도네프라델 중위의 공명심, 출세를 위한 공훈 욕심 때문에 진격 명령을 받아 고지를 향해 진격하던 중, 위기에 처한 동료를 구하려다가 포탄 파편이 날아와 턱과 혀 전체가 떨어져 나가는 중상을 입는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와 앙리 도네프라델 중위에게 복수극을 펼치는 것이 1부 <오르부아르>. 이때 에두아르는 한 하숙집에서 꼬마 소녀, 자신의 흉한 상처에 크게 거부감을 갖지 않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루이즈와 친하게 지내는데, 루이즈가 1909년생이니 당시엔 한 열 살 정도였고, 이 아이가, 점점 자라 초등교원 사범학교를 졸업해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약혼을 하고, 파혼을 하고, 서른 살을 넘기는 1940년에 3부 <우리 슬픔의 거울>에서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줄은 몰랐다. 2부 <화재의 색>에서 1부의 악당 앙리 도네프라델 중위와 별로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던 에두아르 페리쿠르의 착한 누나 마들렌이 등장한다. 에두아르가 1부에서 성공적으로 복수에 성공해 이미 과부가 된 마들렌은 아버지 마르셀 페리쿠르가 자신의 은행 후계자로 점찍은 귀스타브 주베르를 재혼 상대자로 정혼 비슷하게 해 놓고 생을 마쳤지만 아들 폴의 가정교사 앙드레 델쿠르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버지 마르셀의 장례식날, 생각지도 못하게 페리쿠르 저택의 3층에서 외아들 폴이 할아버지의 관을 향해 자유낙하를 감행해 구만리 만큼 창창하게 남은 세월을 휠체어 위에서 보내야 하는 불행한 일을 당하며 활극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 책의 주인공 마들렌 역시 <우리 슬픔의 거울>에서도 다시 등장하는데, 세월이 흘러 중늙은가 된 마들렌이 진짜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주인공 루이즈가 전쟁 중에 거두어 나중의 의붓딸을 삼은 고아에게 마들렌이라는 이름이 지어준다. 그러니 이왕 읽을 거면 순서대로 읽는 게 좋다는 말씀.
1부와 2부에서는 프랑스에서도 최고 수준의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지만 르메트르는 3부 주인공들로 ① 하녀의 딸 쉬잔 아드리엔 루이즈 벨몽, ② 천하의 야바위꾼이자 양아치 라울 랑드라드, ③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디카프리오를 찜 쪄 먹을 그러나 선한 사기꾼 데지레 미고, ④ 건실하지만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절도를 감행하는 기동 헌병대 페르낭 상사 등을 골랐다. 1, 2부와 마찬가지로 6백 쪽이 넘어가는 장편소설의 스토리를 다 간추리는 것이 번거로울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아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루이즈를 소개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가름하려 한다.
쉬잔 아드리엔 루이즈 벨몽. 1940년 4월 6일에 일이 벌어진다. 전에 내력을 좀 보자. 아빠 아드리앵 벨몽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1916년에 비뉴 협곡 동쪽 사면에서 전사해 별로 루이즈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래도 1908년에 페르 가street에 집을 사둔 덕에 아내 잔과 외동딸 루이즈가 비싼 월세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이나 백년 전이나, 우리나라나 프랑스나 그저 돈 있으면 집 사두는 것이 장땡이다. 1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 어머니 잔 벨몽은 우울증이 발병해서 모든 일을 중단했고, 1939년 봄에 건강이 악화되더니 6월에 향년 52세로 생을 멈췄다. 삼촌 역시 전쟁통에 전사하는 바람에 루이즈는 하늘 아래 자신 혼자 신세다. 어머니로부터 약한 우울증 증상을 내리받아 그런 지는 몰라도 매우 예쁜 아가씨였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많은 구애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아르망과 약혼을 했으나, 루이즈는 자신이 임신을 한 다음에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여간해 아이가 생기지 않아 병원에 가서 진료를 했더니, 반복된 나팔관 염증의 결과로 난관에 이상이 생겨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3년의 약혼기간을 날린 커플이 입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의견차이가 심해 결국은 헤어지고 만다. 루이즈는 임신과 출산을 갈망해 혹시 산과 의사의 오진일 지도 몰라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남자들을 만나 여기저기서 동침을 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다음 번 생리일을 기다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결혼과 남자를 포기하고 말았다.
루이즈는 성마른 성격과 은은한 분노를 품은 듯한 모습이었으며, 임신을 포기한 후부터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말라는 의미로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지만 오히려 그게 더 예쁘게 만들어버렸다는 걸,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모나리자라는 별명으로도 부른다는 걸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십대 때부터 거리 저 편 2백 미터 떨어진 카페(또는 레스토랑) 라 프티트 보엠, 우리말로 집시 아가씨라는 간판을 단 집에서 토요일마다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카페의 쥘 사장이 엄마 잔 벨몽을 연모했었다. 엄마는 카페가 보이지 않는 쪽의 방에서 하루 종일 창문을 연 채로 밖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줄도 몰랐다. 귓속에 정글처럼 털이 수북한 거구의 쥘 사장은 둥근 베레모를 쓴 대머리였는데 잔을 사랑했었기 때문인지 책이 끝날 때까지 루이즈를 마치 자신의 딸 같은 마음으로 보살피게 된다. 그러니까 그림이 그려지시지? 천하에 아무도 없고, 결혼과 임신의 희망을 접은 1940년대의 서른 살 무렵의 약한 우울증 증세가 있는 아름다운 미혼 여성. 그리고 루이즈의 엄마만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하게 사랑했던 거구의 순정파 늙은 남자.
루이즈가 일하는 카페에 20년 넘게 단골로 같은 자리에 앉아 늙어간 남자가 있다. 조지프 외젠 티리옹. 70세는 확실하게 넘은 노인이며 전직 의사. 뇌이쉬르센 구 오베르종 대로 67번지 저택에 살면서도 매주 토요일 지하철을 타고 먼 거리를 와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보고 차를 마시다 가는 늙은이. 하루는 이이가 루이즈에게 제안을 한다. 자신을 위해 옷을 벗어 달라고.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더 이상 원하는 게 없다고, 손 끝 하나도 대지 않겠다면서. 대가는 루이즈가 정하란다. 몇 주가 흐르고, 세 번째 대화 후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루이즈는 노인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인 만 프랑의 대가를 요구했지만 노인은 수긍하면서 금요일 저녁 여섯 시, 파리 14구의 아라공 호텔을 티리옹이라는 이름으로 예약을 해놓았단다. 금요일은 다가왔고, 루이즈는 혹시 몰라서, 토스카가 스카르피아를 죽일 때 썼던 고기 써는 나이프를 핸드백에 넣은 채, 결코 어머니 잔이나 자신이 드나들 만한 곳이 아닌, 호텔의 현관문을 밀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하루 전에 답사를 해 본 루이즈를 주인 여자는 알아보았고, 3층의 객실을 알려주었으며, 별로 장식이 없이 낡은, 그러나 깔끔한 방 안 침대 위에는 은퇴 의사가 쪼그라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의사는 얼굴과 존재 자체에서 무어라 말하기 힘들고 무한히 슬픈 무언가가 느껴질 뿐이었으며, 너무도 처절한 면이 있는 상황이었다. (이 문장은 본문에 나온 걸 줄여 쓴 것인데, ‘무어라’, ‘무언가’를 너무 남용해 읽기에 짜증이 났다. 명색이 공쿠르 상 수상 작가가 쓰는 ‘산문’이 무슨 이 따위야 그래. 혹시 역자가 대충 번역한 건 아니겠지?) 루이즈는 원피스 지퍼를 내리고 노인을 등지고 선 다음 브래지어도 벗고, 팬티를 아래로 내린 후,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려 노인을 향했으며, 눈을 마주친 노인은 잠깐 후,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빼들더니,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발사해버리고 말았다. 노인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로 (<오르부아르>의 주인공 에두아르 페리쿠르처럼) 얼굴의 반이 날아갔고, 작고 늙은 몸에서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피를 루이스를 향해 분사해버리는 바람에, 루이스는 경련을 일으키더니 피범벅이 된 몸으로 공포에 찬 눈을 하고 호텔 방에서 뛰쳐나가, 비틀비틀 갈지자로 몽파르나스 대로를 달렸다. 피칠갑을 한 알몸의 젊은 여성. 순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도 몰라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머리에 터번을 쓴 늙은 여자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루이즈의 어깨를 덮어주었으며, 이제 막 도착한 경찰은 상황으로 보아 루이즈를 범죄자로 체포했는데, 이 순간, 루이즈는 기절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게 다냐고? 웬걸. 아직 독일이 벨기에로 쳐들어가지도 않았다.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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