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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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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은 내게 좀 특이한 작가다. <기쁨의 집>을 불만족스럽게 읽고, <순수의 시대>를 읽은 다음에 다시는 워튼을 찾지 않겠다고 작심을 했다. 아니다, 거꾸로다. <순수의 시대>를 3년 반 전에 먼저 읽었구나. 하여간 그런데 이후에 <이선 프롬>과 <여름>, 이 완벽한 두 권의 뽕짝을 어떻게 하다가 그것도 내돈내산으로 읽으면서 전근대적이긴 하지만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가, <암초>까지 와서는 이것 참,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작가로 여기게 됐다. 그렇다는 말이다. 기껏해야 딜레탕트, 아니면 한 아마추어 독자가 이렇게 생각이 변해온 것뿐이다. 처음 <순수의 시대>와 <기쁨의 집>에선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히는 계급의식을 극복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디스 워튼 표 섬세한 심리 묘사를 놓치고 아메리칸 청교도 부르주아의 잘난 척에 심하게 반발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다시 그것들을 읽어보지는 않겠지만 하여간 그랬다. <이선 프롬>과 <여름>은 읽을 때는 재미나게 읽어 놓고,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그게 생각만큼 인상깊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은 앞에 읽은 장편 두 편이 뒤에 읽은 짧은 장편 또는 긴 중편보다 더 윗길이지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다섯 번째 읽은 <암초>로 말끔하게 정리가 된다. 긴박한 스토리를 꾸려나가면서도 심리소설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이제서야 이디스 워튼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을유문화사에서 낸 작품집 《버너 자매》가 시중에 풀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단 관심 집중, 그럼에도 이제야 읽었으니 만시지탄이랄 밖에.
표제작 <버너 자매>는 좀 긴 중편, 또는 짧은 장편으로 분류할 수 있을 터인데, 그건 작품의 길이 측면에서 본 것이고, 구조상으로는 중(단)편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버너 자매, 앤 엘리자와 에블리나 버너에 관한 시선만 유지하는 시각으로 쓰였다는 말이다. 함께 실린 <징구>와 <로마열熱>도 단편이니까 이 책은 단편집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당연히 여성들이 이야기의 주가 되고, 세 편 다 워튼 표 심리묘사가 아주 탁월하다. 세상의 모든 수작은 심리소설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디스 워튼 만큼 섬세한 심리와 탁월한 반전을 독자에게 즐기게 해주는 작가는 별로 없지 싶다. 단편집 또는 작품집을 읽을 때 흔히 즐겁게 읽은 작품도 있는 반면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다고 독후감을 쓰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세 작품 다 마음에 들었고, 마음에 든 이유는, 글쎄 이렇게 이야기하면 젠더 차별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남성들이라면 쓰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바늘같이 섬세한 심리소설을 만들어 냈기 때문 아닐까? 하여간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턱뼈에 약한 통증이 왔다. 턱이 턱, 하고 떨어져버려서. 거 참. 워튼을 며느리가 집 나갔다가 돌아온 시에미 보듯 했으면서 어느 순간에 이렇게 찬사를 늘어놓고 있는지, 사람 마음이 간사하기가 짝이 없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는데, 번역을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세계문학 시리즈로 찍은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와 똑같이 홍정아, 김욱동 공역이란 것. 해설 역시 <맥티그>하고 판박이로 김욱동이 썼다. 다만 다른 건, 《버너 자매》는 홍정아, 김욱동 공역이고, <맥티그>는 김욱동, 홍정아 공역이라는 거 하나. 어떤 형태의 번역을 공역이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초벌 변역은 홍(또는 김)이 하고, 재벌 번역을 김(또는 홍)이 했다는 거야, 아니면 <버너 자매>는 홍이 하고 <징구>와 <로마열>은 김이 했다는 말이야? 책원고지 밥 먹은 내력으로 봐서 원고료는 똑같이 배분… 했겠지. 왜 내가 이거 가지고 유난을 떠느냐 하면, 두 명의 공역자 가운데 한 명은요, 제가 무지 안 좋아하거든요. 그이 때문에 이 책 선택에 시간이 들었는지도 모르거든요. 누구냐고요? 절대 안 알려드립니다.
<버너 자매>의 무대는 미국의 뉴욕이다. 발표는 전쟁중이던 1916년에 했지만 작품의 시대는 전쟁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시절, 그러니까 늦어도 1910년대 초반, 부르주아 전성기 시절. 하지만 화려한 뉴욕의 번화가가 아닌 뒷골목에 자리잡은 작지만 깔끔한 가게 “버너 자매”. 주로 여성용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그게 그것인 보닛 하나를 팔아도 미세하게 눈에 돋보여 여성들이 좋아해 즐겨 찾고 좋아하는 상점이다. 실과 천을 비롯해 옷핀, 바늘, 뜨개실 같은 것들과 삯바느질도 한다. 언니는 결혼하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앤 엘리자로, 동생 에블리나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희생할 수 있는 독실한 기독교도 정도로 보면 된다. 에블리나 역시 착한 마음씨와 눈썰미, 그리고 놀라운 손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가게를 열어 조금씩 저축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스테이크도 구워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살림을 꾸려나가게 하는 살림꾼이다. 이렇게 모자란 것 없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던 버너 자매. 아참, 모자란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남자. 하필 막이 오르면 동생 에블리나 버너의 생일이다. 언니는 동생에게 줄 생일선물로 탁상시계를 골랐다. 집에 시계가 없어 동생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대충 옷을 걸치고 밖에 나가 저 멀리 서 있는 교회의 시계탑을 보고 시간을 아는 일이라서 벌써부터 시계를 선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길 건너 시계점에 가서 탁상시계를 하나 사온 거다. 문제는 독일 출신으로 보이는 시계포 사장 허먼 래미가 한 서른 살 정도이고 그리 인물이 빠지는 것도 아닌데다가, 건강이 조금 안 좋아 보이긴 하지만 원래 여자와 남자 사이에 애정이 싹트려면 별 게 다 좋아 보이는 법이라서 그것도 매력적이었다. 원래는 귀금속과 사치품 전문점인 티파니(오드리 헵번 나오는 <티파니의 아침>에서 그 ‘티파니’가 맞다!)의 관리자였다가 건강 때문에 사직을 했다고 한다.
시계에 문제가 생겨 다시 허먼 래미와 연결이 되고, 저녁 식사에 래미 사장을 초대해가며 우정을 돈독히 하다가 자연스럽게 허먼 래미는 언니 앤 엘리자에게 청혼을 한다. 하지만 앤 엘리자는 동생 에블리나가 허먼 래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확신해서 래미의 청혼을 거절하고, 래미는 꿩 대신 닭이라고 동생 에블리나한테 또 청혼을 한다. 에블리나는 당연히 좋아서 죽지, 좋아서. 여태까지는 그리도 돈독한 자매 사이가 한 남자가 등장하면서 미세 균열이 일어나고, 언니한테 거절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동생한테 청혼을 한 남자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자매들도 한심하기는 한데, 빠지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생기지도 않았으며, 건강까지 좋지 않은 남자와 선뜻 결혼하겠다는 건 또 뭔지. 하여간 소설에 나오는 연애는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어요. 작품을 생산한지 백년이 훌쩍 넘은 오늘날, <버너 자매>를 읽는 독자는 둘 가운데 하나로 결말이 나겠구나, 하고 짐작을 한다. 첫째는 래미 사장이 에블리나에게 청혼을 해서 승낙을 받기는 하지만 결국엔 언니 앤 엘리자하고 혼인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래미 사장이 하는 짓을 보니 이 결혼은 초장부터 깨진 쪽박이거나 중혼일 수 있겠다, 하는 것.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갈 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그러나 나는 <버너 자매>보다 단편 <징구>와 <로마열>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 심지어 빼어난 워튼 표 심리묘사가 흥미진진하기까지 했다. 두 단편 모두 미국의 상류층 여성들이 출연진이고 심지어 남자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징구>는 상류층 여성들의 위선과 속물성을 사정없이 까발리는 통쾌한 작품이며, <로마열>은 어려서부터 친구 사이인 앤슬리 부인과 슬레이드 부인의 숨막히는 신경전, 그것도 오래 전에 로마에서 있었던 한 남자에 관한 신경전인데 진짜 재미있게 읽었다. 단편소설인 만큼 스토리를 더 이야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읽어보시라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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