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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류 속의 섬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동훈 옮김 / 고유명사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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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천재인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 헤밍웨이는 굵은 스토리 라인 하나로 밀고 나가는 힘찬 전개 방식이 간결한 문장 속의 다중 함의와 더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소설 읽는 재미가 대단하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성향이 나하고 맞지 않는다. 현대 세계 소설사에서 큰 나무로 우뚝 선 존재감을 자랑하는 작품(들)에서 과도한 마초 성향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라고 해서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지 않는 바보 같은 짓을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들지 않는 것이라도, 좋은 작품은 좋은 작품이니까.
<해류 속의 섬들>, 이 책 뒷면에는 출판사 ‘고유명사’의 광고글이 쓰여 있다.
“#노인과바다와 함께_바다3부작의완성”
해시태그 형식으로 쓴 짧은 광고글을 읽는다면, <해류 속의 섬들>이 저 유명한 <노인과 바다>, 그리고 또 한 편의 바다를 주제로 한 작품과 더불어 헤밍웨이가 만년에 쓴 세 편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겠구나, 라고 여기게 만든다. 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니, 위키피디아에는 이 작품 <해류 속의 섬들 Islands in the Stream>이 “젊은 시절의 바다 Sea When Young”, “상실의 바다 Sea When Absent” 그리고 “존재의 바다 Sea in Being”으로 된 삼부작 <바다-추적>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삼부는 나중에, 헤밍웨이가 죽은 이후 네번째 아내 매리 헤밍웨이에 의하여 소제목을 각각 “비미니”, “쿠바”와 “바다에서”로 바꾼 <해류 속의 섬들>로 출판했다고 한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위키피디아가 사실이 아니겠는가 싶다. 출판사가 광고 글의 태그에도 <노인과 바다>와 “함께”라고 했다, 즉 “더불어 꼽는” 3부작이라고는 확실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도 없거니와. 게다가 본문만 506쪽 실려 있지 흔한 역자 해설이나 하다못해 작품론 같은 것도 첨부되어 있지 않아 그냥 소설만 읽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지.
궁금한 게 또 있는데, 이 작품은 헤밍웨이가 1950년에서 51년까지 1년에 걸쳐 작업을 했지만 출판하지 않고 엽총의 총구를 입에 문 다음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밀어 자살한 후, 1970년에야 첫 출판을 했는데(초판을 번역했다 쳐도 아직 저작권이 살아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한 <해류 속의 섬들>은 어떤 책을 번역의 원전으로 했는지 밝히지 않았으며, 어떤 회사에 저작권료를 지불하는지 역시 독자들은 알 수 없다. 물론 이런 것들을 책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불법이라 단정할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책에 저작권 등에 관한 정보가 없으면 독자들이 초장부터 왜가리 눈알을 해 째려보기 시작하는 것이 요즘 세태인 걸 정말 몰라서 밝히지 않았을까. 출판사 “고유명사”가 2021년에 시작한 신규 진입 회사라서 이렇게 모질게 이야기하기 미안하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다.
우리의 주인공 토머스 허드슨. 할아버지로부터 황무지만 유산으로 받은 가난한 화가지망생 시절, 아름다운 배우와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아이 톰을 낳고, 톰이 백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서 파리에 오래 머무른다. 톰은 유아기부터 영어가 아니라 불어에 익숙해 다시 미국으로 귀국할 당시엔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파리에서 배고픈 젊은 시절을 보내던 허드슨 부부는 너무 배가 고파 광장의 비둘기를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 이건 젊은 시절의 헤밍웨이가 진짜로 저지른 적이 있던 행위다. 그러다가 토머스는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하고, 이혼을 하고, 아들 톰과 지내다가 여전히 진심으로, 유일하게 사랑하는 전 아내와 다시 만날까 싶기도 했지만 세상살이, 특히 애정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서 다른 여성과 혼인을 하고 둘째 데이비드, 셋째이자 막내 앤드루를 낳는다. 아들 셋을 미국으로 데려와 키우다가 두번째 아내와 이혼하지만 이제 훌륭한 화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 아들들을 전처(두번째 아내)에게 보내 키우게 하고 자신은 플로리다에서 5백 마일 떨어진 비미니 제도에 박혀 작업에만 몰두하게 된다.
잘 되는 집은 비슷하게 잘 된다는 것이 톨스토이 백작이 주장한 진리인지라, 토머스 역시, 할아버지가 물려준 황무지에서 난데없이 석유가 콸콸 쏟아져 나와 석유채굴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토지만 판매해 매년 권리금으로 나오는 돈만 가지고도, 절반은 아내들의 위자료로 지불하고, 절반만 가지고도 평생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좋은 위스키와 디저트를 포함한 안주까지 포식할 수 있는 상태다. 사회적으로는 성공을 넘어 존경받는 화가로 인정받아서, 그림을 구입하기 위해 돈다발이 든 가방을 든 채 뉴욕의 대리인 현관 앞에 줄 서 있는 백만장자들이 정식간격 일렬종대로 화곡동에서 천호동까지 줄 서 있고, 자신은 걸프만의 비미니 제도에서 따뜻한 날씨와 거친 허리케인을 즐기면서도 섬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유대감을 이루며 살고 있으니,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상팔자다. 인격도 그리 까탈스럽지 않아서 선술집 폰세 데 레온의 주인장 바비 손더스가 투정을 겸해 토머스에게 용오름 현상을 맛있게 이야기해주고 용오름이 동시에 세 개가 솟는 그림을 크게 그려 달라고 부탁했더니 기꺼이 돈도 안 받고 그려주기도 했다는 거 아닌가. 이러니 이 작은 섬에서 누가 돈 많고, 정 많고, 술 잘 마시는 토머스 허드슨과 척을 지고 싶겠냐고.
그러다가, 1930년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여름을 맞아 아이들이 방학을 해서 각처에서 공부를 하던 형제들이 뉴욕에서 만나 기차로 며칠에 걸쳐 남쪽으로 달려와 플로리다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섬에 와서 5주 동안 지내기로 결정이 났다. 이래서 벌어지는 5주간의 이야기가 책의 1부인 “비미니 제도”.
1부에서는 독자를 흥분시키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아, 잠깐. 걸프해, 걸프만에 관하여. 헤밍웨이 또는 이 책에서 말하는 걸프해 또는 걸프만은 플로리다반도와 미국 남부 사이의 바다로 우리가 “멕시코만”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던 걸프만 아니다. 헤밍웨이 시대엔 걸프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멕시코만으로 부르니 참고하실 사.
클라이맥스는 둘째아들 데이비드가 1천 파운드, 그러니까 454kg이 넘는 초대형 황새치를 낚아 필생의 사투를 하는 장면이고, 이 전에 비록 조스 백상아리는 아닐지언정 그에 못지않게 난폭한 성질을 자랑하는 귀상어, 일명 망치상어가 잠수해서 작살 낚시를 즐기던 아이들을 공격하는 순간이다.
(이 책은 외국어, 특히 불어의 오식에 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다. 스펠링 틀린 것을 귀신같이 찾아서 그대로 내놓고 팔기 쪽팔리니까 새로 단어를 인쇄해 오식부분에 잘라 다시 붙인 경우가 두 번인가 세 번 있다. 근데 우리말 오식에 관해서는 또 완전히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하나 둘 정도면 내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조스> 1편에서 나중에 살인 백상아리가 어떻게 죽나? 주인공 로이 샤이더가 가스통을 입에 물고 돌진하는 조스한테 소총으로 총을 쏴 정확하게 가스통을 맞혀 터뜨려 죽인다. <해류 속의 섬들>에서는? 여기서는 그냥 몸통을 소총으로 쏴서 죽인다. 근데 문제는 누가 죽였는지, 몇 번을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거다. 한 번 보시라.
먼저 96 페이지.
“허드슨은 숨을 죽이고 침착하게 상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최후의 일발을 명중시킬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놈의 아랫배 부분이 조금 전 제1탄을 맞았을 때보다 더욱 심하게 요동했다. 그러곤 ‘꾸루룩’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물길이 쭉 솟아올랐다. 허드슨이 마지막 한 발을 쏘자 이번에는 그놈의 뱃속에서 아까보다 더 세차게 ‘꾸루룩’ 소리가 나더니 지느러미가 서서시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서서시”는 오타 아니다. 진짜 책에 그렇게 박여 있다.
당연하지 상어 주제에 감히 인간 청소년으로 점심식사를 꾀했으니 총맞아 죽어 마땅하다. 그런데 멀리도 아니고 바로 다음 97 페이지를 보면 이렇다. 허드슨과 그의 하인 에디와의 대화다.
“잘 쏘더군.”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놈한테 던져 줄 고기를 얌전하게 들고 있는 우리 데이비드 도련님을 향해 녀석이 외람스럽게 덤벼드는 걸 보고 누군들 총을 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있겠습니까? 상어가 쫓아오는 것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이에요. 젠장, 제가 살면서 다른 빌어먹을 것들을 보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만은 반드시 봐야 한다니까요.”
즉 상어를 쏴죽인 사람은 토머스 허드슨이 아니라 그의 하인 에디로 돌변했다. 아직 나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분명히 총은 허드슨 화백이 쐈는데 불과 한 페이지 넘어가니까, 애초에 총을 가지고 있지도 않던 그의 충실한 하인 에디가 사격의 주인공이고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에러인데 나는 이게 헤밍웨이의 에러인지, 아니면 번역을 한 이동훈의 에러인지 모르겠다.
만일 헤밍웨이의 에러라면 그건 글이 예전 같지 않아서 전혀 호평을 받지 못하던 알코올 의존증 시절이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역자의 에러라면 아이고 이걸 어쩌나. 필자의 에러이건 역자의 에러이건 간에 어떻게 이게 데스크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 참. 내가 십년만 더 젊었어도 침을 뽈뽈 튀기겠는데, 참겠다. 세상에 완벽한 작가나 역자가 있나? 그걸 보완하라고 편집부가 있고 교정도 보고 그러는 건데 말이지. 에휴, 이 정도만 하자.
2부, 3부는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1부에 대하여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내보여야 하니 소개할 수 없다. 2부는 쿠바에서 첫 번째 아내를 다시 만나 침대에까지 끌어들인다는 것으로 변죽을 울리고, 3부는 전형적으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헤밍웨이라고 소개하고 독후감을 끝내겠다.
* 51년에 끝낸 소설을 발표도 하지 않았고, 죽은 다음인 70년에 출간했다. 작가는 작품을 아직 완성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런 에러가 아직 고쳐지지 않았을지도. 그랬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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