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프리즘 총서 29
조르주 캉길렘 지음, 여인석 옮김 / 그린비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올 연초에 존경하는 후배님한테 책 소개를 받았다. 과학사에 관심이 많은 그이는 줄곧 이 방면으로 독서를 하고 있다. 내가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걸 알고 있는 그이는 우정 전화를 해 프랑스 과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조르주 캉길렘의 저작 《캉길렘의 의학론》이 작년에 출판사 그린비에서 세브란스 출신의 여인석 번역으로 나왔으니 읽어보면 좋겠다고 권했다. 역자 여인석은 연세대에서 박사를 하고, 파리 7대학으로 유학해 서양고대의학에 관해 연구해서 과학사 인식론으로 박사 학위를 한 번 더 받은 인물이다.

캉길렘은 1904년에 태어난 프랑스인으로, 1924년 스무 살 때 고등사범에 입학해 사르트르 등과 동기생이 된다. 27년에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해 여러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지내기도 했는데, 이 시기부터 캉길렘은 다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철학자로서 작가는 1941년에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출강해 55년에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후임으로 소르본으로 옮겨 역사 인식론을 강의하다 나중엔 학과장까지 역임한다. 소르본에서 71년까지 16년간 후학을 가르치다 은퇴하고, 95년에 천국의 기쁨을 찾아 91세의 일기를 끝으로, 한 평생 잘 먹고 잘 살고, 라기 보다 후회없이 살다가 세상을 떴다. 의학자로의 캉길렘은 전시였던 1943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 때 논문이 오늘 소개하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었다. 사회적으로의 저자는 또한 비시 괴뢰정부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활약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40년 6월에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고부터 43년 의학박사 학위를 얻을 때까지는 한편으로는 저항군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의학생으로 연구에 몰두했을 것이다. 참 난 사람이다, 난 사람.

역자 여인석이 프랑스에 유학할 당시 캉길렘을 읽고 자신은 의학자이며 철학자, 저자는 철학자이며 의학자라는 우연의 조우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캉길렘은, 내게 전화를 해주었던 후배님은 프랑스 학파와 영미학파의 차이점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런 거 같지는 않고, 유럽의 학자 대부분과 달리 대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적은 저술만 남기고 갔다. 소개받은 《캉길렘의 의학론》은 작자가 잡지 이곳 저곳에 기고한 컬럼이나 소논문을 저자의 후배, 제자들이 추려 출간한 것으로 분량도 상대적으로 적고 이해하기도 수월한 편인 것 같다. 나는 캉길렘의 도서 목록을 화면에 올려놓고 어떤 것을 읽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소개받은 《캉길렘의 의학론》을 일단 책방 보관함에 저장을 한 후, 이왕 읽으려면 이이의 첫번째 저작, 그러니까 의학박사 학위논문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싶어서 바로 다음날 도서관에 희망도서신청을 하고 2월 들어 읽었다가, 코피났다. 기껏 소개를 해주었으면 소개받은 바로 그 책을 골라야지 내가 과학사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잘난 척을 해 겁도 없이 박사학위 논문을 읽느냐는 말이지. 논문에 얼마나 얻어 터졌는지 심지어 이 책 말고 다른 책에도 손도 대고 싶지 않아서 그냥 술만 마셔서 취하면 자고, 또 취하면 다시 또 자고, 한 삼사일 취생몽사했다.

내가 줄기차게 주장한 것 가운데 하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일반대중이 알아듣기 어렵게 서술할 수 있는지를 광고하는 공부”라는 거다. 아니라고? 좋다, 아니라고 치자. 그건 양보를 했다. 그럼 학위 논문이라는 거에 대하여. 학위 논문이라고 함은 ①같은 공부를 하고 있거나 ②이미 했거나, ③앞으로 할 예정으로 특정한 학문에 깊은 관심이 있는 심각한 딜레탕트, 이 세 부류를 위한 전문인만의 리그다. 이 리그 안에 들어 있거나 반쯤 발을 담근 사람들이 아니면 읽으면서 세종임금의 훈민정음 말씀대로 “제 뜨들 실어 펴디 못할 노미 하니라”. 아무리 철학과 의학과 역사를 합친 캉길렘의 논법이 되도록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되었다 하더라도. 이이의 책이 그나마 알기 쉽게 쓰였다는 건 이해하겠다. 근데 독자가 책을 읽으며 주장하는 것을 즉각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읽다가 죽을 똥을 쌌는데, 책의 결론을 소개해도, 정말 이 책을 읽을 미래의 독자는 거의 없을 거 같아서, 별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론부 일부를 소개한다. 조금 길더라도 양해해주기 바란다.

“생리적 상태는 정상 상태라기보다는 건강한 상태이다. 이것은 새로운 규범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한다. 환경의 변동에 대해 규범을 정할 수 있는 한 인간은 건강하다. 생리적 상수들은 생명체에 가능한 다른 모든 상수들 가운데에서 추진적인 가치를 지닌다. 반대로 병리적 상태는 생명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생명 규범의 폭이 감소했음을, 즉 이미 성립된 정산이 질병에 의해 불안정해짐을 나타낸다. 병리적 항상성은 반발적이고 엄격하게 보수적인 가치를 지닌다.”

위 인용문은 이해하기 쉽다는 캉길렘답게 정말 이해할 수 있다. 단, 문장을 천천히, 여러 번 읽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그게 맞다. “규범”과 “생리적 상수”, “추진적인 가치”, “이미 성립된 정산” 이런 단어나 구句의 정의는 이미 앞에 나와 있는 것들이지만 그걸 다, 온전히 정의해 머리속에 보관하고 있어야 인용문을 읽으면서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평소에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정체를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는 독자가, 과학사라는 벌판에 처음 서서, 감히 한 위대한 철학자이며 의학자가 쓴 박사학위 논문을 읽겠다고 덤볐으니, 꼴 좋게 됐다. 그저 추천해주면 추천해준 책을 읽지 뭐 잘났다고 책을 고르고 자시고 해서 말이지.

지금 책을 옆에 놓고 독후감을 쓰고 있으면서, 어떻게 사서에게 반납을 해야 할지 답답하다. 언제나 반납하면서 “잘 읽었어요.”라고 인사를 했는데, 이 책에 관해서라면 감히 그렇게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그렇다. 에휴, 이 책도 다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산 거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3-03-02 0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고생하셨습니다.ㅎㅎ
저는 저 인용문장도 와닿질 않네요.
철학에 대한 골드문트님 생각 정말 ㅋㅋ 맞네요. 넘 어려워요.
그래도 골드문트님 정도 되시니 이런 책도 도전하시고 역시 짱이세요!

Falstaff 2023-03-02 07:37   좋아요 1 | URL
아이그... 무슨 말씀을.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 걸요. 철학은 넘 어려워요.

다락방 2023-03-02 0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골드문트 님 ㅋㅋ 글 너무 재미있어요. 골드문트 님이 읽으셨다는 논문은 재미없을 것 같지만, 그 논문 읽은 골드문트 님의 리뷰는 재미있습니다 ㅎㅎ

Falstaff 2023-03-02 11:22   좋아요 0 | URL
앗, 그러셨습니까! ㅎㅎㅎ 기분 좋습니다. 어깨가 으쓱으쓱.

바람돌이 2023-03-02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소개해준다고 이런 책도 읽어주는 골드문트님의 우정에 눈물이 납니다. 역시 골드문트님은 훌륭한 분이세요. 저는 얼마전에 소설 한권을 사랑하는 후배에게 소개받았는데 3분의 1 읽다가 취향 아니라고 집어던져버리고 말았는데 말입니다. 앞으로 골드문트님 살신성인의 자세를 본받도록 노력해야겠슴다. ^^

Falstaff 2023-03-02 12:49   좋아요 1 | URL
아휴, 살신성인이니 본받으시겠다니, 말씀이 무거워 어깨를 누릅니다. 흑흑....

잠자냥 2023-03-02 1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 친구는 나르치스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3-02 12:50   좋아요 2 | URL
무지하게 진지한 사람입지요.
대단한 술꾼이었습니다만 한 방에 술도 딱 끊어버린 놀라운 의지의 한국인입니다. ㅎㅎ
그러고보니 나르치스와 비슷한 족이겠네요.

그레이스 2023-03-02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골드문트님 글 오랜간만에 읽는 것 같은데, 이 책 때문인가요?
아님 제가 못본 글이 있는지도...^^
암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도 약간은 취기가 느껴지네요^^

Falstaff 2023-03-03 05:44   좋아요 1 | URL
앗, 이 독후감은 대낮에 도서관에서 쓴 건데 취기가... 아무래도 알코올 의존증이 점점 심각해지는 거 같습니다. 지금도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서리 어질어질한데....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