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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 단편선 2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3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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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에 《서머싯 몸 단편선 1》을 읽고 아홉 달 만에 《서머싯 몸 단편선 2》를 집어 들었다. 서머싯 몸은 참, 다른 건 몰라도 소설 하나는 정말 재미있게 쓴다. 등장인물이나 특정 사건의 배후, 또는 이면이랄까, 하는 것을 들쳐내는 솜씨가 놀랄 만하고, 주로 ‘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인칭 소설에서 거침없이 드러내는 시니컬한 잘난 척 같은 게 귀엽다. 물론 이런 식, 그러니까 1인칭 작품에서 작가 자신임을 노골적으로 암시하지만 엄연히 허구 글이라 누군가가 혹시 작가 스스로를 염두에 두지 않았느냐고 물을 때면 시치미 뚝 떼는 건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이런 숱한 작가들 가운데 서머싯 M 만큼 능청스럽게 세상만사 다 통달한 것처럼 노골적인 잘난 척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겠는가 말이지. 이런 모습은 일찍이 <면도날>과 <케이크와 맥주>에서 알아봤고, 《서머싯 몸 단편선 1》에서 충분히 즐겼으며, 《서머싯 몸 단편선 2》로 넘어와도 마찬가지다.
<루이즈>라는 단편이 있다. 이것도 M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장편으로 늘려 쓸 만한 줄거리와 시간적 배경을 가졌는데, 단편으로 만들어서 세월의 진행이 말 그대로 쏜 살 같다. 루이즈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병약한 소녀였다. 얼마나 병약한가 하면,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어떤 의사라도 그리 오랜 삶을 즐길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루이즈 스스로도 곧, 길면 몇 년 안에, 빠르면 몇 달 만에 마지막 숨을 들이켜고 내쉬지 못하리라고 매사 조심하면서 살았다. 부유하고 건장한 청년 톰 메이틀랜드는 틀림없이 측은지심에서 출발했을 청혼, 어여쁜데다 병약한 루이즈가 숨을 거둘 때까지 전심전력을 다 해 돌볼 것을 맹세하고 결혼을 한다. 이후 성실하고 튼튼한 톰이 자신이 좋아하는 골프를 치러 가거나 사냥을 하러 갈 때면 루이즈는 상냥하게 잘 다녀오라고 말한 다음에 심장 발작을 일으킨다. 반면에 자신이 좋아하는 댄스 파티가 있을 경우, 새벽 다섯 시까지 별로 지치지 않고 춤을 추며 즐긴다. 이렇게 살다가 크루즈 여행 도중에 루이즈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려고 자신의 이불이란 이불은 몽땅 아내에게 양보했다가 밤새 독감에 걸려 황천길로 먼저 떠나버린 톰. 루이즈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이 모습을 본 모든 이를 장님으로 만들어버렸다. 다들 눈물이 앞을 가렸거든. 그러나 딱 한 명, 굳이 M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는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기어코 루이즈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해버리고 만다.
“난 당신이 이십오 년 동안 거대한 사기를 쳐 왔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내가 아는 어떤 여자보다 이기적이고 가증스럽소. 불쌍한 두 남자의 인생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 딸의 인생까지 파괴하려 드는군요.”
물론 이게 단편, 이중에서도 짧은 단편 <루이즈>의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25년 동안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심지어 눈치채지 못한 진실, 이라기 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는 솔직한 비아냥을 M만큼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내기는 그리 수월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안 그런가?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머싯 몸 단편선 2》은 《서머싯 몸 단편선 1》 보다는 덜 재미있다. 많은 독자들이 단편선 1을 읽고 흥미를 느껴 단편선 2를 읽겠다고 마음 먹은 다음에 정말로 읽는 사람도 있고,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책 만들어 팔아먹는 입장에서 당연히 1권에 재미있는 작품을 더 많이 실을 수밖에 없고, 이걸 시비하는 건 독자로서 쫀쫀한 일이다. 그리고 사실 그리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하여간 차이가 있기는 있는데, 또 그게 아주 살짝이라 하기엔 좀 면목이 없어지기도 하고 뭐 그렇다. 이 정도면 대강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아시겠지.
하여튼 친애하는 서재친구 *자*님 말씀, 책 읽다가 슬럼프에 빠져 도무지 읽히지 않을 때가 생기면 슬럼프 탈출을 위한 가장 좋은 작가가 M이라는 건 진리거나 진리에 무척 가깝다.
독후감을 여기까지 쓰고 며칠이 지난 오후다. 아시다시피 난 은퇴자다. 아직 연금생활자까지는 아니다. 하여튼 그렇다. 그러니 오후에 맥주 한 캔과 견과류 한 종지 옆에 놓고 이미 독후감 쓴 책 갖고 두 번 얘기한다고 타박하지 마시라.
잊히지 않는 등장인물이 있다. <행복한 남자>의 주인공 스티븐스. 그가 세상 도처에 안 가본 곳이 없는 의사 출신인 ‘나’를 찾아와 조언을 청한다. M도 의과대학 졸업한 의사 출신인 건 아실 듯하다. 아이는 없지만 결혼한지 6년이 지났고 런던 캠버웰 병원의 의사로 있는데 진이 빠져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스페인으로 가 의사 개업을 하면 어떨까 하고 묻는다. M이 스페인이라고 다 <카르멘> 같지 않다고 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지만 햇살이 좋지 않습니까. 좋은 와인도 있고요. 색깔이 있고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있죠. 터놓고 말씀드리죠. 세비야에 영국인 의사가 없다는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M은 위험부담이 크다고 조언한다. 잉글랜드에서 그냥 의사로 일하면 쁘띠 부르주아로 살 수 있지만 돈 욕심 부리지 않고 세비야로 간다면 그저 먹고사는 것에 만족한다고. 대신 멋진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정말로 아내와 함께 세비야로 떠났다. 이런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M은 15년이 흐른 후 세비야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만 가벼운 병증이 일었고, 동네에 영국인 의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불렀더니 바로 스티븐스, 그가 왕진을 왔다.
어땠을까? 꾀죄죄한 옷을 입은 채 방문을 열고 들어와 M을 만난 스티븐스의 말씀이. 문학적 성취와 관계없이 아오, 내 마음을 콕 찔러버린 짧은 작품이었다. 결론을 알고 싶으면 책을 읽어보셔야 하리라. 절대 알려드리지 않을 터이니.
명작이 별거냐, 독자 가슴에 정확하게 바늘을 콕, 찌를 수 있으면 그게 그 독자한테는 명작이리라. 안 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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