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왕모의 강림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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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헝가리 줄러에서 유대인 가문의 변호사 크러스너호르커이 기요르기와 팔린카스 율리어의 아들로 태어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몇 군데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헝가리 언어와 문학을 공부했다. 1985년에 <사탄탱고>로 화려하게 데뷔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이 책 한 권으로 디스토피아 소설의 최전방에 배치되는 영광을 얻는다. 무엇이 됐든지 간에 신인작가가 한 분야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해 “선두”에 섰다는 평가를 받았다면 실로 대단한 평가이리라. 더구나 그게 데뷔작이라니. <사탄탱고>를 읽어보면 첫 장면부터 우울한 첫 가을비가 내리는 날 저 호흐마이스 벌판에서 종소리가 들리며 시작하는데, 세상에나 이게 얼마나 환장하게 우울해서 좋은지는 정말 읽어봐야 안다. 게다가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난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 라는 이름의 두 남자는 무대가 되는 집단 농장에 새로운 희망, 그러나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조건을 지닌 열매라는 악마적 속성을 지녔다고 독자들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암울한 희망이 등장하면서부터 단박에 크러스너호르커이의 팬이 되고야 만다. 나처럼. 내 경우엔 그의 두 번째 작품 <저항의 멜랑콜리>를 먼저 읽었다. 이 작품은 한 겨울에 헝가리의 한 도시에 거대한 고래를 전시하겠다고 큰소리 치며 서커스단이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탄탱고>는 집단농장, <저항의 멜랑콜리>는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의식불명 상태를 조망함으로써 K나 측량사에 집중한 카프카를 더욱 확대한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이 두 편의 장편소설을 읽으면, 물론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이겠지만, 독자 개개인에게 맞음과 맞지 않음, 이렇게 두 극단의 평가를 내리지 않을까 싶다. 이이의 가망 없이 장황한 문장과, 수도 없이 난사하는 쉼표의 폭포, 이 속에 이이 특유의 음울한 디스토피아가 마음에 들었다 하면 몇 년 전의 나처럼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팬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여간 나는 이런 “짧은” 과정을 거쳐 그의 팬을 자청했다.


  세 번째 읽은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집 《라스트 울프》는 앞서 두 작품으로 작가에 대한 기대가 저 일곱 번째 하늘의 꼭대기에 올라 있어서 그랬는지, 작품이 함의하고 있는 늑대와 사냥터 관리인과 사냥꾼 이야기가 깊게 생각해볼 만함에도 불구하고 앞선 두 장편소설만큼 만족시켜주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번에 읽은 《서왕모의 강림》은 2008년에 발표한 그의 여섯 번째 책으로 모두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싣고 있는 작품집이다. 이 책은 2013년에 영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2015년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타 1만5천 파운드의 상금을 받는데 이이의 책 가운데 영어로 번역한 두 권, <저항의 멜랑콜리>와 《서왕모의 강림》이 수상작이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서왕모의 강림》이 아무리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고 해도, 나처럼 이틀 반에 걸쳐 모두 열일곱 편, 660페이지를 연달아, 단칼에 읽어치우는 무식한 포식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다.

  첫 작품이 <가모가와의 사냥꾼>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헝가리를 자주 비우고 세계 각지에 몇 달, 몇 년씩 체류하며 글을 쓰는 일을 자주 했는데 이 ‘세계각지’에 몽골도 있고 태국도 있고 일본의 교토도 있단다. 여기서 말하는 가모가와는 “무한한 예절의 도시, 올바르게 처신하지 못하는 자들을 심판하는 법정이며 올바른 몸가짐을 유지하는 자의 낙원인 반면, 법도를 지키지 않는 자를 위한 유형지인, 예절, 처신, 몸가짐의 미궁”인 교토 시를 흐르는 가모가와 강이며, ‘사냥꾼’은 “아름다움의 요정이지만 무지막지하게 정확하고 단단한 부리와 의지력을 지난 하얀 새로, 한 마리가 서서 수면 아래에 무언가 나타나길 기다리다가 부리를 내리꽂을 뿐인” 대백로를 말한다. 청계천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전국의 개울, 논, 밭, 심지어 더러운 하천에서도 볼 수 있는, 철새에서 텃새로 정착한 새로, 매우 강한 요산을 분비해 이 새들이 군집했다 하면 소나무들도 노랗게 말라 죽이는 독한 조류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교토와 백로를 대비시키면서 가히 에세이의 정점에 자리한 수필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아한 백로를 묘사하고 있다. 아주 인상적으로.

  두 번째 작품 <추방당한 왕후>는 또 난데없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전쟁 발발자, 페르시아 왕국의 전성기를 꽃피웠으나 동시에 왕국을 쇠퇴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첫 번째 아내, 바빌로니아 출신 ‘와스디’에 대한 작품이다. 신하들이 운집한 가운데 남편이자 페르시아 대제국의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왕비 와스디에게 명령을 하니, 가장 진정한 모습으로, 그러니까 나체의 몸에 왕후의 관만 쓰고 파티에 출석하라는데,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미의 척도를 넘어선 아름다움을 가진 왕후는 대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대가로 판결과 관례에 따라 보석을 빼앗긴 채 수행원 하나 없이 궁정의 거처를 홀로 떠나 왕후의 뜰을 지나 북문을 향해 홀로, 재의 땅으로 가, 왕후보다 세 배 정도의 몸집을 가진 거구의 망나니에 의하여 목이 부러져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은 그렇지만 소설이란 특징상 매혹적인 이야기이다.


  매혹적이고 인상적인 것도 좋다. 그러나 내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꽃노래도 삼세번”이다. 이후에는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예술품 복원에 관한 것이 아주 재미있게 나오고, 또 몇 번 뒤엔 이번엔 일본의 절에서 아미타여래좌상의 복원에 관한 것이 이어져 흥미를 자아내지만, 염천 복중에 더위를 피하느라 에어컨 빵빵한 도서관에 앉아 콧물 잴잴 흘리며 하루 종일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중증 객담환자의 가래침 줄기처럼, 도무지 끊어지지 않는 문장을 이틀 반 동안 오직 이 책만, 한 권 《서왕모의 강림》만, 읽어보시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안다, 알아. 각각으로 뜯어 읽어보면 근래에 쉽게 읽을 수 없었던 근사한 단편들이 빼곡한 것은. 하지만 결코 읽기에 편하지 않은 크러스너호르커이 특유의 문체를, 쉼없이, 역자 해설에 의하면 교정 중에 3천 개를 생략해 최종적으로 남은 1만5천 개의 쉼표를, 쉼표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자기가 등장할 때마다 새삼스레 뽀짝, 주위를 환기시켜달라는 은근한 압력을, 무려 1만5천 번 당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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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8-12 07: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이거 저도 사뒀는데, 명심하겠습니다. 몰아서 읽지 않기! 근데 단편은 하나씩 띄엄띄엄 읽으면 나중엔 잘 기억도 안 나더라고요…. 그것도 제 팔자죠 네네 ㅋㅋㅋㅋ

Falstaff 2022-08-12 13:52   좋아요 1 | URL
넹. 세상살이 마음대로 되는 게 몇 가지나 있습니까. 다 팔자죠, 팔자. ㅋㅋㅋㅋ

mini74 2022-08-12 0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노래도 삼세번, 1만 5천번의 압력 ㅎㅎㅎ 고생많으셨습니다 골드문트님 *^^

Falstaff 2022-08-12 13:53   좋아요 1 | URL
사탄 탱고 함 읽어보셔요. 도서관에서 대출해도 좋은데요, 모 아니면 돈데, 마음에 드시면 얼른 새 책 사겠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럼 곧바로 크러스너호르커이 (이름도 드럽게 길어요) 팬이 되는 겁니다. ^^

moonnight 2022-08-12 1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탄탱고 사놓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핫핫-_-;;;;;;;
1만5천번의 은근한 압력@_@;;; 그나마 3천개 생략@_@;;;;;;;;;;;;; 더더욱 엄두를 못 내겠@_@;;;;;

Falstaff 2022-08-13 05:47   좋아요 1 | URL
일단 시작을 하세요!
<사탄 탱고>에 맛을 들이면, 하이고, 대책이 없답니다. 정말 괜찮아요!

coolcat329 2022-08-21 13:02   좋아요 1 | URL
저도 멋진 빨간 책 <사탄 탱고> 골드문트님 리뷰읽고 바로 사놨는데 겁나서 못 읽고 있습니다. 책제목, 작가 이름, 책 디자인 모두가 너무 셉니다.🥺

Falstaff 2022-08-21 13: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쿨캣 님은 심지어 매우 몰두해서 읽으실 수 있을 듯합니다!
읽어보시면 그렇게 세지 않아요!
아참, 헝가리 작가 중에 서보 머그더도 있네요. 이이의 <도어>보다 덜 세거나 비슷한 수준입니다. ^^

coolcat329 2022-08-21 13:28   좋아요 1 | URL
앗! <도어>는 어렵지 않았는데 그 정도라니~~올 가을 도전해보겠습니다.
환장할 정도로 좋은 우울이라니~~저도 느껴보고 싶어요!

Falstaff 2022-08-21 16:1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전 ˝어렵지 않다˝거나 ˝쉽다˝라고 안 했습니다.
˝쎄지 않다˝고 했지요.
그래도 올 가을, 도전해보셔요! 화이팅팅팅...티잉!!!!

바람돌이 2022-08-12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고문당한 느낌이군요. 골드문트님 고생하셨어요. 맛난거 드시고 기운 내세요. 근데 왠지 책은 재밌을듯.... 하루에 한편씩 읽으면 되나요? ㅎㅎ

Falstaff 2022-08-13 05:48   좋아요 2 | URL
어제 맛난 것 너무 많이 먹어 대낮부터 꽐라.... 이제야 댓글을 쓴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