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환상 - 개정판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기억 속의 오노레 드 발자크는, 불문과 여학생들이 품에 안고 다니던 <고리오 영감>을 떠올리게 한다. 발자크는 1799년에 태어난 전형적인 19세기 사람으로 청소년 시대에 그의 작품을 즐겁게 읽기는 쉽지 않다. 나도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야 <고리오 영감>을 통해 처음 읽어봤다. 갓 청년기에 접어든 젊은이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중년에 접어들어 다시 읽어보니 세월이 흘러 삶에 녹이 끼어서 그랬겠지만, 고리오 영감의 마음을 실감하게 되면서 발자크가 왜 자신의 작품을 La Comédie humaine, “인간희극” 또는 “인간극”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이제 여덟 번째 발자크로 <잃어버린 환상>을 골라 읽었다. 작가로서는 의례적으로 7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집필했는데, 그의 인간극 시리즈가 무려 백 편이 넘는다고 하니 보통 몇 달 만에 한 편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의 입장에선 많은 노력을 기울인 역작이라 하겠다. 그의 인간극은 풍속, 철학, 분석 연구, 이렇게 세 가지로 크게 구분한다고 하는데, <잃어버린 환상>은 아직까지 읽어본 그의 작품 가운데 적어도 풍속 연구에 관해서는 가히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풍속 연구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만만하지는 않다.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오는 책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빽빽한 조판에 본문만 761쪽에 달하는, 발자크 작품으로 드물게 긴 분량이며, 현대 작품에선 거의 시도하지 않는 세밀한 주변환경, 인물의 얼굴과 외모와 복장, 방안의 가구 배치와 모습, 당시 특정 계급이나 직업에서 볼 수 있던 특징 같은 것을 장황할 정도로 묘사하고 있어서 독자를 확 질리게도 만든다. 마음먹고 발자크의 장황한 묘사를 감상할 수만 있으면 이 발자크 표 세밀 묘사의 맛을 음미하고, 음미 수준을 넘어 감탄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한 두 번이어야지 장황 묘사가 무수하게 반복되는 바람에 책을 덮고 동네 한 바퀴 산보를 다녀와야 하는 일도 번번히 생긴다. 나도 본문만 겨우 760쪽 분량을 읽느라고 나흘을 가져다 바쳤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괜찮았다. 발자크의 세밀 묘사는 면역도 되지 않아 전에 읽은 책들의 장황함에 이미 빠져보았음에도, <잃어버린 환상> 역시 읽기 시작한 첫날이 가장 힘들었다. 점점 익숙해져 사흘, 나흘째는 거의 부담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책이 재미있었던 것은, 거의 최고 수준의 풍자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3부로 구성된 작품의 1부와 3부는 프랑스 샤랑트 주의 주도인 앙굴렘을, 절반 분량의 2부는 파리를 무대로 한다. 주요 등장인물은 거의 다 귀족, 부르주아, 상공인이나 몰락 귀족 출신의 교육 잘 받은 자제 등이다. 1부에서는 시골의 상류계급. 우리말로 하면 향반들의 허위와 속물성이 독자의 실소를 유발하고, 2부는 프랑스의 중앙, 파리 귀족과 부르주아의 의식을 깊게 침윤해버린 자본주의라는 바이러스의 추악한 날것을, 3부에서도 지방까지 파고든 돈의, 돈 만을 위한 계략과 배신 등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이 속에 당연히 연애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진실한 사랑 가운데 장미의 가시처럼 치명적 배신도 MSG처럼 첨가되어 있고, 허영과 몰락과 배금주의적 예술가들 속에서도 진지하게 자유와 예술을 탐구하는 파당도 존재한다. 이 파당 속에는 나중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등장하는 루이 랑베르도 가담한다. 한 작품에 등장했다가 후속작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것이 발자크의 “인간극”에서는 흔한 일이기는 하다.


  이야기는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는 앙굴렘의 수습 인쇄공이었던 제롬 니콜라 세샤르 씨로부터 시작한다. 18세기부터 인쇄공으로 일했던 세샤르 씨는 인쇄소 주인 루조 씨가 아이 없이 미망인만 두고 죽는 바람에 사업장을 넘겨받은 세샤르는 직공들에게 엄한 주인으로 변하면서 1793년, 쉰 살에 결혼해 슬하에 아들을 하나 생산한다. 이후 홀아비가 되고, 아들을 앙굴렘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파리에 유학을 보내 고급 인쇄술을 배우게 하지만,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종종 그렇듯이 아들 다비드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조금도 하지 않아서, 다비드는 파리 굴지의 디도 인쇄소에서 일을 하며 학업을 마친다. 이미 나이가 든 세샤르 씨는 다비드가 졸업을 하자마자 앙굴렘으로 불러들여 아들에게 어마어마하게 덤터기를 씌우고 자신의 사업체를 인수하게 한다. 자신은 앙굴렘에서 40리 거리에 있는 마을 마르사크의 포도원에 정착해 늘 포도주에 취해 있을 요량이다. 그는 정말로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숨이 넘어갈 때까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다비드에게 한 푼의 도움도 주지 않는다. 세상에 그런 아비도 있다.

  그런데 다비드가 인쇄소를 잘 운영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상술에 밝으면 애초에 소설이 되지도 않았겠지. 이때 나타나는 앙굴렘 고등학교 1년 후배가 있으니 앙굴렘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거덜난 집안의 외아들, 놀라운 미모의 청년 뤼시앙 샤르동. 고등학교 다니던 시기에는 다비드가 1년 전에 그랬듯이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는 월등한 전교 1등의 왕좌를 즐겼지만 이젠 몰락한 귀족 출신의 어머니는 신분을 숨긴 채 주로 부잣집 신부들을 위한 산파를 하고, 어여쁜 여동생 에브는 고급의류 세탁소 감독으로 일하는 집의 유일한 실업자다. 여기서 독자가 잘 파악을 했으면 좋겠다. 다비드는 뤼시앙을 보자마자 필요도 없는 월 40 프랑의 인쇄감독으로 그를 채용해 극단의 절망에서 구해주는데, 단지 고등학교 1년 후배를 위한 측은지심에 그랬을까, 아니면 나중에 자신의 아내가 되는 에브에게 마음이 있어 그랬을까? 발자크는 다비드의 품성을 매우 선하게 그리고 있어 그의 의도는 측은지심의 발로였겠지만, 그렇게 보려고 하면 다비드의 헌신이 너무 과하다.

  하여간 일을 하다가 하루는 앙굴렘 귀족 사교계에서 가장 큰 별의 위치에 있는 여주인공 바르즈통 부인이 집사를 보내 사교계 회원의 잠업에 관한 논문을 인쇄해오라고 주문하는 바람에 앙굴렘에서 거의 최고 수준으로 머리 좋고, 확실하게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뤼시앙이 바르즈통 부인을 만나는 영광을 맞는다. 이때 뤼시앙이 21세,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바르즈통 부인은 36세. 남편 바르즈통 씨는 연수입 2만 리브르 미만이지만 구도시 6대 부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58세의 늙은이로 1부에서는 젊은 30대와 결투에서 승리하고 3부에 들어가면 자연사한다. 왜 바르즈통 씨가 30대의 스타니슬라스 씨와 결투를 하게 되느냐 하면, 1부의 뒷부분에 가서 부인을 향한 사랑에 불타오르던 뤼시앙이 바르즈통 부인의 발 아래 꿇어앉아 부인의 무릎을 부여잡은 채 사랑한다고, 당신 없으면 이 목숨은 한 시라도 숨쉴 이유가 없으니 함께 도망하자고 눈물로 호소하는 장면을, 천하의 협잡꾼 식스트 뒤 샤틀레가 바람을 넣어준 수다쟁이 스타니슬라스 씨가 딱 목격을 해, 단 하루만에 바르즈통 부인과 뤼시앙이 뜨거운 사이라고 앙굴렘 사교계 뿐만 아니라 시민 전체가 다 오해하게 소문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연인은 유부녀와 숫총각 사이로 입술 한 번 마주친 적이 없으나, 일단 이렇게 소문이 난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나이든 남편으로 하여금 명예를 위하여 결투를 하게 만들어, 총알이 스타니슬라스의 목을 관통하는 바람에 그는 평생 고개를 45도 정도 비틀고 사는 신세가 된다. 추문에 이은 결투 스캔들로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된 바르즈통 부인은 남편을 백작인 친정아버지에게 보내기로 하고 홀로 파리로 향한다. 바로 이 날, 뤼시앙은 부인이 보낸 쪽지를 받는다. 자정에 먼저 조금 떨어진 역점에 가서 자신을 기다려 함께 파리로 가자는 제의. 원래 그런 거다. 딱히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문제가 한 번 발생하면 갑자기 파박, 불꽃이 튀는 것. 그게 사랑이다. 그래 뤼시앙은 이미 결혼 날짜를 잡은 다비드와 에브,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수중에 있는 모든 돈과 다비드가 발행한 2천프랑짜리 약속어음을 받아 파리로 향한다. 이 2천프랑 때문에 동생 부부는 시작부터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게 되는 것 따위는 애초 팔자가 일해서 벌어먹거나 손에 굳은 살 박힐 짓은 하지 않기로 운명지어진 뤼시앙에게는 촌각의 걱정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야밤에 사랑 하나만 싣고 파리로 향하는 낡은 마차의 뒤를 부인의 아름다움에 눈이 먼 식스트 뒤 샤틀레가 쫓으며 1부는 막을 내린다.


  여기까지가 1부 ”두 시인”이다. 2부는 “파리에 온 지방 위인”인데 여기서 말한 위인은 뤼시앙 샤르동을 말한다. 생각을 해보시라. 천생 귀족으로 태어나 평민은 사람 같이 여기지도 않고 살아온 부인께서 산파 일을 하는 엄마를 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쳐도, 정식 애인 또는 남편으로 둘 수 있는지. 시골인 앙굴렘에서는 혹시 모르지만 프랑스 말고 세계의 수도인 파리에서 자신마저 촌 귀족 티가 날 정도로 최고 정상의 대 귀족들이 넘쳐나는데 한낱 약제사와 산파의 아들 뤼시앙을 자유롭게 소개나마 할 수 있는지를. 이 사나운 정글의 도시 파리에 자신이 쓴 소설 <샤를 9세의 궁수>와 시집 <데이지 꽃>을 들고 도착해 온갖 영광과 혼돈과 사랑과 파멸을 경험하는 철없는 젊은이 뤼시앙을 보면서, 독자는 쉼없이 한숨을 쉬고 안타까워하고, 옆에 있으면 한 번 귀퉁백이를 쥐어박고 싶게 되리라

  정말 재미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발자크 표 상세 묘사가 장황하고 잦아서 그렇지 그것만 통과할 수 있으면 19세기 프랑스 소설의 진수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가히 디킨스를 능가하는 최고의 풍자 소설이다. 확실히 19세기는 프랑스 소설의 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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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3-18 05: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워 보이는 작품이군요. 찜해듭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일찍 일어나세요? 역시 늙으면 잠이 앖더던데 :p 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3-18 06:0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 이젠 시간에 관계없이 졸리면 자고, 깨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먹고.

coolcat329 2022-03-18 0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저 이 책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발자크 팬들이 이 책 가장 좋아하더라구요.
근데 책이 좀 안 예쁘고 오래되서 어디선가 좀 근사하게 나오면 꼭 사야지했는데 역시 골드문트님도 강추군요. 맞아요. 19세기는 프랑스 소설의 시대입니다~♡

Falstaff 2022-03-18 08:46   좋아요 2 | URL
아, 발자크 팬들이 좋아하는 책이군요!
전 <환멸>을 기대하고 있는데 느므느므 비싸서 말입죠. 민희식 선생 번역이라 좋을 거 같습니다만 열 권짜리에 무려 27만원. 으으으.....

다락방 2022-03-18 08: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ㅋㅋ

이 리뷰 읽으니까 오래전에 본 드라마 <가십걸> 생각이 나네요. 제가 채널 돌리다 우연히 보게된건데요, 고등학교 여자 선생님이 고등학생 남자 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라고 소문이 나요. 아시다시피 그런데 교사가 학생하고 부적절한 관계가 되면 안되니까 학교에선 그 선생을 해고하고요. 그런데 그 둘은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었거든요. 저도 이 드라마를 원래 보던 사람이 아니고 처음부터 본것도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음모나 모략으로 누명을 씌웠던 것 같아요. 여하튼 교사는 너무 억울한겁니다. 자기는 진짜 아닌데 남고생과 부적절한 관계라 소문나 학교를 관두게 되니.
그러자 이 선생님이 학교에서 짐을 싸가지고 학교를 나오고, 그후에는 이 남고생을 찾아가지요. 어차피 부적절한 관계로 소문난거 진짜 부적절해지자고... 그러면서 남고생 집의 문이 닫히는..

제가 그 때 너무 충격을 받아가지고. 이게 뭐여? 했는데, 오늘 골드문트 님의 리뷰를 읽으니 똭 그 드라마의 그 장면이 생각나네요. 크-

Falstaff 2022-03-18 08:56   좋아요 6 | URL
아, 그런 드라마가 다 있군요.
근데 사실 그런 경우 당하면 정말 억울할 거 같아요. 평소 속으로 연모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정말로 불이 붙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ㅋㅋㅋ
그래서 발자크, 이 할배가 죽여주는 것입지요. 같은 내용이라도 에밀 졸라가 썼으면 적어도 다섯 명은 칼부림으로 죽어 자빠졌을 소설입니다. 사실 차마 쓸 수 없어 그냥 넘어갔는데, 저는 결말이 좋았습니다. 정말 인간극 자체입니다.

다락방 2022-03-18 08: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 32,000 원에 800 페이지네요?!?!

Falstaff 2022-03-18 09:01   좋아요 2 | URL
게다가 할인율 0%. 빽빽한 글자가 맘에 드는 편집입니다. 진도 무척 안 나가지요. ㅋㅋ

저는 지금 발자크의 <환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로 작정했습지요.

coolcat329 2022-03-18 12: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환멸 10권 27만원이네요!
와 이 책은 도서관에도 없을거 같아요. 있어도 골드문트님이 처음이자 마지막 독자가 아닐까요?

Falstaff 2022-03-18 15:48   좋아요 1 | URL
ㅎㅎㅎ 먼저 있는지 없는지 알아봐야지요. 책꽂이에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있어서 도서관은 여름이나 되어야 갈 거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2-03-18 1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발자크 읽을 예정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Falstaff 2022-03-18 15:49   좋아요 2 | URL
재미있는 걸로 고르셔야 할 텐데요. 발자크, 여차하면 골 흔들리는 작품들도 도처에 숨어 있어서요. 그런 거 걸리면 ㅎㅎㅎ 하기는, 인생은 복불복입니다. ^^;;;

수다맨 2022-03-19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작품 중에서 아무래도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고리오 영감˝일 것입니다.
하지만 발자크의 최고작이자, 대가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은 역시나 ˝잃어버린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이 작품을 모르거나, 알아도 언급하지 않는 분들이 상당하던데 이렇게 독후감까지 쓰시면서 상찬하는 분을 만나면 저절로 반가움이 듭니다.

Falstaff 2022-03-19 21:23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을 ˝구경˝하면서 책 값이 비싸구나, 읽기를 계속 미루어왔다가 겨우 읽었습니다. 서울대 출판부의 출간은 고맙지만 독자들의 접근성 측면에선 좀 아쉽습니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책값은 언제나 무지하게 중요하거든요.
그래도 늦게나마 읽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참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별 거 없는 독후감을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고마울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