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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숄트 어페어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평점 :
절판
앨런 홀링허스트는 그의 첫번째 장편소설 <수영장 도서관>을 출간하고 16년이 지난 2004년에 <아름다움의 선 Line of Beauty>으로 부커상을 받는다. 친애하는 서재 친구 잠자냥 님의 소개로 <아름다움의 선>을 통해 앨런 홀링허스트를 처음으로 읽었는데, 작중 주인공 닉은 옥스포드 영문과를 졸업하고 런던 대학교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의 문장으로 석사 논문을 준비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름다움의 선>은 21세기에도 제임스 식 방식, 제임스 식 문장으로 소설 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비록 번역문만 읽어본 주제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용서해준다면, 헨리 제임스의 문체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밀한 묘사로 주변을 탐색했던 제임스 당시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다른 작가들을 압도하는 치밀한 문장들의 집합으로의 문단paragraph. 이게 21세기에 살아난 것을 확인한 일 자체가 기적적이었다. 실제로 가장 최근에 읽은 헨리 제임스, <대사들>에서 사용하는 문장과 그것들의 소집단, 문단을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등장인물 군group 역시 스스로 노동하여 밥을 얻을 필요가 없는 부르주아 계급에,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지덕체를 완비한 반듯한 신사계급이면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극소수의 그리스 신 같은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주인공이 있거나, 가장 중요한 화자가 있다. 화자일 경우엔 부르주아들 옆에서 관찰하지만 결코 같은 계급이라 할 수 없는, 약간 처지는 빅토리아 시대의 젠트리 정도의 계급 출신도 포함한다. 이것 마저도 헨리 제임스와 비슷하다. <아름다움의 선>은 런던의 켄징턴파크 가든스의 페든 씨 가족의 장남이자 옥스포드 출신, 출중한 미모를 갖춘 조정 선수인 토비의 대학시절 친구 닉이 주인공이며, <수영장 도서관>의 화자이자 주인공 윌리엄은 할아버지로부터 거액의 현금을 유증받아 일찌감치 노동을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옥스포드 출신의 귀족에다가, 용모 근사한 청년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실제로 보면 참 재수없는 인간들이란 얘기.
홀링허스트가 부커상을 받을 때까지의 초기작 두 작품과 이번에 읽은 <스파숄트 어페어>의 주인공은 다 남성 동성애자, 게이다. 홀링허스트 본인이 옥스포드 모들린Magdalen 칼리지에서 포스터, 퍼뱅크, 하틀리, 3인의 동성애 작가를 연구해 석사를 받은 게이 작가여서 그랬을 확률이 높다.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들인데, 20세기 말, 21세기 초의 소설인 만큼 게이 섹스의 노골적인 장면도 등장하는 바, 특히 <수영장 도서관>에서는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아서 읽다가 난데없이 깜짝 놀랄 정도의 행위묘사에 나는 그만 질려버렸다. 그런 장면이 마땅하지 못하다는 뜻 보다 아직까지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의미다. 시간이 더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래서 비록 특이한, 지금 시대에 놀랄 만큼 전통에 기반한 유장한 문장, 헨리 제임스를 빼다 박은 문단과 구성이 매우 매혹적이었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만 읽겠노라, 이별을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이이의 다른 작품을 속속 번역해 출간했다는 소식과 함께 경끼를 일으킬 묘사는 더 이상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단박에 주문을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읽을 당시엔 독자를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없으나 그의 책이 눈에 보이면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많지 않은 작가 그룹 가운데 한 명이다.
앨런의 아버지 제임스 홀링허스트는 글로스터셔의 은행 지점장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으로 복무했다. 후에 2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는 <스파숄트 어페어>의 첫번째 주인공인 데이비드 스파숄트는 원래 브레이지노스 소속 공학 전공자로, 1940년에 옥스포드를 비롯한 많은 대학에서 학생들이 입대하는 바람에 정부에서 학생들을 징발해 옥스포드로 보낸 전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지금은 옥스포드의 조정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조정은 여덟 명이 노를 젓는다. 그래 이 팀을 에이트Eight라고 한다. 에이트는 하다못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먹을 정도다. 이게 다 팀웍을 증진하기 위한 전통이다. 모든 단체 운동이 그러하지만 특히 조정만큼 팀웍이 중요한 경기도 거의 없을 정도라서. 에이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특히 상체 근육의 발달이다. 그래 데이비드 역시 1940년에 18세를 몇 개월 앞 둔 시절, 창문가에서 몸에 착 달라붙는 런닝 셔츠만 입은 채 기구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맞은편 건물에서 자신의 몸을 유심히 관찰하던 학교 문화 클럽 멤버들의 시선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유명 작가들을 초빙해서 꽤 괜찮은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조건으로 옥스포드 학생들에게 강연과 최신작 낭독을 부탁하는 단체로 지금은 새로 클럽 총무를 맡은 3학년 프레디 그린(화자)의 방에, 화가 피터 코일, 찰리 파몽거, 에버트 닥스가 모여 있다. 이 가운데 피터 코일과 에버트 닥스는 확실하게 게이고, 찰리 파몽거는 이후에 한 번도 다시 거론되지 않으며, 이들보다 한 학년이 위인 프레디 그린은 게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지만, 당시로는 놀랍게도 게이에 대한 편견 역시 하나도 없고, 병역을 면제받은 청년이다.
이제 총아로 등장한 데이비드 스파숄트. 너니턴 출신으로 철강공장에서 관리자로 일하는 아버지와 고향지역 백화점의 프리먼 커튼 매장 직원인 어머니 사이의 외아들. 옥스포드의 문학 클럽 회원들에 비하지 못할 계급이기는 하지만, 옥스포드의 유일한 인도인 학생인 다스는 그를 보고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신을 보는 것 같다는 감상평을 남길 정도다. 아주 거만해 보이는. 이 말을 들은 프레디 그린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 역시 거만했을 거란 생각을 하고 만다. 아름다운 청년은 거만함도 매력이다.
이런 스파숄트의 누드 초상을 그리겠다고 제일 먼저 접촉한 인물은 1942년, 전쟁중 선박 위장 업무를 수행하다가 전사할 예정인 피터 코일. 보디빌더 같은 가슴과 복근, 교묘하게 잘라낸 목덜미와 무릎, 희미하게 처리한 음경과 고환을 그린 ‘벌거벗은 남자의 붉은색 초크화’. 심미안을 가진 몇몇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소품은 피터가 징집되기 전에 프레디에게 넘어가고, 프레디로부터 스파숄트를 소유하기 위해 애가 닳는 에버트 닥스, 당대의 위대한 작가이자 다음 번에 옥스포드에서 강연과 낭송회를 부탁할 A.V. 닥스의 아들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저 먼 훗날, 동성애자 에버트가 자손 없이 죽을 때, 그림의 모델인 데이비드의 아들이자 성공한 초상화가 조너선 스파숄트에게로.
에버트 닥스는 데이비드 스파숄트를 너무도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스파숄트는 벌써 애인 콘스탄스, 코니가 있으며 가장 바라는 바는 아들을 얻는 것이다. 내년 1월에 18세가 되는 남자애가. 즉,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에버트 닥스가 지독히 시골스럽고 전근대적이지만 아름다운 조정선수인 스파숄트를 소유할 수 없을 터. 겨우 세 번 홀링허스트를 읽고 이렇게 얘기하면 많이 무리겠지만 작가는 이를 위하여, 스파숄트로 하여금 상위 부르주아인 에버트 닥스가 다음달에 스탠리 고일의 추상화 한 점을 구입할 돈에 약간 미치지 못할 금액을 당장 마련하지 못하면 퇴학당할 위험에 떨어뜨린다. 이를 알게 된 에버트는 기꺼이 스파숄트가 필요한 돈을 빌려주고, 어쨌거나 겉으로 보기엔 대가로 데이비드를 소유하게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동성간 성 결합 하나만 가지고 작품의 제목을 “스파숄트 어페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2부로 넘어가면 1966년. 어느 새 26년의 세월이 지나갔는데, 데이비드와 코니 사이에 데이비드가 바라던 아들 조너선 스파숄트, 조니가 열네 살의 사춘기 소년이 된다. 공학을 전공했던 데이비드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종전 시점에 23세의 최연소 비행 중대장이란 기록을 세우고, 공군십자훈장까지 받은 전쟁영웅이 된다. 이런 경력을 가지고 새삼스레 옥스포드에 가서 공부를 계속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제대 후 고향 너니턴에 가서 “D.D 스파숄트 엔지니어링”이란 회사를 설립해 성공적으로 성장한다. 나이 들어 아들이 회사를 잇고자 하지 않자 팔아 평생 쓰고도 남을 현금을 손에 쥘 때까지.
하여간 자신의 회사가 절정기에 달할 때, 스파숄트 사장은 아내 코니, 아들 조니, 아들의 프랑스인 친구 바스티앙, 그리고 시의회 소속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핵스비 부부와 함께 콘월에 있는 레슬리 스티븐스 의원의 별장에서 일주일 간의 휴가를 즐긴다. 의원이 소유한 25피트짜리 보트 가니메데스 호를 무상으로 즐기면서.
글쎄.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데이비드 스파숄트를 적극적인 동성애자로 보지 않는다. 처음 옥스포드에서 곤란을 겪을 때, 빠른 시간 안에 필요한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잣집 아들 에버트 닥스가 제공하는 돈을 위하여 동성애자가 자신을 소유하는 것을 허락한 것과 같이, 사업상 필요에 의하여 특정인의 힘을 빌려야 했을 때, 부패한(이라고 평가를 받는) 의원 레슬리 스티븐스와 그의 졸병 클리퍼드 핵스비가 요구하는, 여전히 강건하고 매력적인 몸을 동성애에 관한 의식 없이 그저 뇌물처럼 제공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조너선의 친모 코니와 20년이 넘는 혼인을 지속했고, 스티븐스 의원과 핵스비 씨와의 집단 행위가 사회적으로 발각이 나 유죄판결을 받아 이혼을 당하고는 자신의 비서 준과 또 40년의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 터. 어쨌거나 1966년에 동성애를 했다는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스파숄트 어페어, 또는 스파숄트 스캔들이 성립이 되었을 뿐이다. 불과 서너달 후에 만해도 무죄였을 테니 얼마나 땅을 쳤겠는지.
그러나 아들 조너선, 조니 스파숄트는 태생이 동성애자다. 그리고 결혼 외로 딸을 하나 두었다. 나중에 팻이라는 남자와 법적 결혼을 한다. 딸 때문에 양성애라고 판단하면 오해다.
작품의 2/3 이상이 바로 아들, 조니 스파숄트의 이야기. 이것까지 차마 독후감에서 떠들어댈 수 없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분량만 보고 주저할 필요 없이 잘 읽힌다. 이 작품에서는 홀링허스트 안에서 헨리 제임스의 그림자를 추적하는 일이 별로 의미가 없다. 물론 영문학자에겐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 독자인 내가 읽기에는 헨리 제임스의 그늘에서 기꺼이 빠져나온 것 같다. <스파숄트 어페어>. 여태까지도 좋았지만 이제 더 좋아진 홀링허스트를 읽는 기회가 되겠기에 독자들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