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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법 ㅣ 김숙종 희곡집 1
김숙종 지음 / 연극과인간 / 2013년 3월
평점 :
김숙종. 스스로 자기 소개를 한다.
“충남 부여 거기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2005년 신춘문예 <싱싱 냉장고>로 등단했습니다. 서른 전까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작가의 길을 꿈인 듯 걷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죽은 순간까지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자 꿈입니다.”
이것만 가지고 작가를 아는 것이 좀 부족한 듯해서,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고졸 5년차 급여가 대졸 신입, 1년차 급여와 같은 걸 알고, 일을 잘 해서 그랬는지, 사장이 직접 아무데라도 좋으니 대학 졸업장 한 장 가져오라고 해 들어간 곳이 숭의여대 문예창작과였단다. 근데 또 알아보니까, 김숙종이 고졸 5년차, 대졸 신입에 관한 불평등을 자주 입에 올리는 모양이다. 회사 입장에서 대학에서 배운 기간 동안을 경력 처리해준 거 아닌가? 걔네들은 자기 돈 써가며 공부할 때, 얘네들은 돈 벌며 경력 쌓았으니, 이 정도면 그냥 퉁 칠 수 있는 수준 같은데. 즉, 비교적 평등하거나 고졸에 더 이로운 수준 아닐까 싶다. 아, 나는 논쟁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이런 주제로는 더 말을 잇고 싶지 않으니 얼른 본론으로 돌아가면, 정작 이이가 다니던 회사 사장은 일을 잘 해 아까워 대학을 가라고 했겠지만, 실제로 공부를 해보니까 자기한테 글 쓰는 재주가 좀 있는 것 같아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어떠셔? 사장한테 좀 미안했을 거 같다. 그지?
그런데, 희곡을 써서 신춘문예에 내기만 하면, 하여튼 최종심사, 이른바 short list까지 늘 올라가는데, 이게 김숙종에겐 희망고문이었나보다. 아예 예심에서 떨어지면 자기 재주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다시는 도전하지 않고 다니던 제약회사에서 열심히 약이나 만들겠지만, 이건 될 것도 같고, 당선 작품이 자기 것보다 좀 못한 것도 같고, 이렇게 깨끗하게 네 번이나 미역국을 먹었단다. 그러다가 2005년에 <싱싱냉장고>가 당선, 기어이 극작가 목록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 작품 역시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의 마지막 작품으로 실려 있다.
김숙종의 작품을 여섯 편 읽어보고 내린 결론은, 그로테스크하다는 것. 데뷔작인 <싱싱 냉장고>부터 절찬리에 공연했던 <콜라 소녀>,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은 물론이다. 제일 앞에 실린 <템프 파일>은 당연하고 두번째 실린 <배웅>과 <애플 혹은 사과> 모두 다 그렇다. 과거 또는 현재의 ‘나’가 또다른 과거 또는 현재의 ‘나’를 만나는 <애플 혹은 사과>를 제외하면, 물론 연출에 따라서 이것도 그럴 수 있겠지만, 모두 “실제로 무대 공연이 가능한 희곡”이란 것도 현대 극작품으로는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애플 혹은 사과>를 무대에 올리기 어려우리라 생각하는 건 숱한 발화성 물질을 모아 놓았을 쓰레기장에서 물건을 태우고 밟아서 끄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막과 무대장치 등 역시 발화성 물질 투성이인 실 공연 무대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이의 작품을 소개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이 어떤 이유로 그로테스크하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밝힐 것이 있으니,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글쎄 유령이었다는 거야!”를 말해야 한다는 것. 물론 첫 작품 <템프 파일>을 읽은 후면 <배웅>이나 <콜라 소녀>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대강 짐작이 가겠지만 전혀 모르는 채로 읽는 것이 당연히,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표제작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으로 말하자면,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을 만큼 대표작이고, 말 그대로 연일 만석과 셀 수 없는 앵콜공연을 기록할 정도로 성공작이라 따로 소개를 해야 마땅하다. 2008년 2인극 페스티벌 희곡 공모 당선작이기도 하다. 김숙종이 부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마을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소위 농촌봉사를 온 대학생들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주로 남학생들은 노동을 하고, 여학생들은 동네 아이들 학습지도와 (지긋지긋한 여성들의 세월이여!) 식사당번을 주로 했을 터이다. 아이들이 보기엔 구름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겋게 생기기도 잘 생긴 도시에서 온 언니 오빠들이 사실 알고 보면 어림없을 만큼 덜 성숙한 청년들이었음을 알 턱이 없어서, 이들이 함부로 표현한 ‘순수한’ 애정과 관심이 언제까지 지속될 줄 알았을 것이다. 김숙종 자신이 집으로 돌아간 이 도시 출신 언니 오빠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어서, 다시 편지를 보내도 여전히 답장을 받지 못하는 일종의 배신, 비록 그들이 현장에서 보여준 애정과 관심이 진심이었다는 건 나이가 든 지금도 믿고 있지만, 현장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아이들의 마음 속에 여지를 두고 떠난 건 잘못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맞다. 잘못된 거다. (나도 경험 있다. 반성한다. 그래도 난 답장은 해줬다.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믿기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예 가지 않은 것만 못했다.)
여기에 한 가지 보태자면 앞에서 이야기한 네 번 신춘문예 최종심사까지 올라가 미역국 먹은 일. 김숙종은 회사 사장이 ‘아무’ 대학이라도 좋으니 졸업장을 따오라고 했을 때, 왜 문예창작과를 선택했을까. 나는 아무런 근거 없이, 십 수년 전, 부여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시골 동네 살 때, 도시에서 농촌봉사활동을 온 흰 피부의 도시 언니 오빠들 가운데 특히 정이 많이 들었던 누군가가 혹시 이이에게 글짓기를 지도했고, 넌 글짓기에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 작가가 되면 성공하겠다고 다분히 립 서비스를 펼쳐, 어린 마음에 꿈을 만들어주었던 것은 아닐까 추리해본다. 하여튼 작가는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하기도 전부터 극작을 시작했으며 무려 네 번 최종 심사까지 올라갔다가 바나나 껍질을 밟는다. 그러니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 어떻게 보면 최악의 상태다. 그러니, 인간이여, 섣불리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주지 말라. 아니,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
이런 심리상태에서 희곡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이 시작한다. 단 두 명만 출연하는 2인극이다. 먼저 김종태. 어려서 ‘사이나’ 즉 시안화칼륨, 또는 청산가리를 이용해 꿩을 잡아먹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서른여덟 살, 독신의 만화가. 만날 방안에 틀어박혀 만화만 그리기 때문에 운동부족으로 통통하고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같은 교회에 다니던 형이 스케치북을 사 주며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 만화가나 화가가 되면 성공하겠다는 믿음을 주어 그게 평생의 소명인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으나 세상일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여전히 거의 완전한 무명의 만화가로 겨우 밥만 먹고 산다.
양상호. 백과사전 외판원.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느라 하루 종일 돌아다녀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지금은 한 가족이라 가족끼리 동침을 삼가는 율법에 따라 가까이하지 않는 아내를 꼬드기기 위하여 한 시절 교회에 다녔고,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선하게 보이는 행위를 친절한 언어로 수행하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내를 맞이하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시 꾀죄죄한 몰골을 한 동네 꼬마가 그림을 곧잘 그리는 것을 알고, 꼬마에게 스케치북까지 선물하며 스케치북에 꽉 차게 만화를 그리면 자신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헛된 믿음을 준 것을 당연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만화만 잘 그리는 코찔찔이 소년이 서른여덟 살의 장년이 된 어느 여름날, 남의 집 현관문이 저절로 열리게 만드는 재주가 남다른 양상호가 화장실이 급하니 선처를 부탁한다는 애절한 호소를 해 김종태의 집에 들어오고, 능수능란한 영업력을 자랑하는 고수답게 52권에 달하는 백과사전을 195만원에 사고 팔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든다. 김종태. 시간이 흐르면서 양상호가 저 먼 기억 속에 만화가의 꿈을 심어준 채 다시 찾아오겠다는 허튼 약속을 날리고 사라져버린 교회 형인 것을 알아낸다. 만화가의 꿈은 그저 꿈이었음을, 허튼 희망을 주는 건 못할 짓이었다고 벌써 자각하고 있던 김종태는 이제 양상호를 벌주기로 결심을 하는데, 어떤 벌인지 내가 일러드리지 않을 건 벌써 짐작을 하고 계시리라.
재미있다. 내가 희곡을 읽은 내력이 보잘것없어 삼가고 있지만 속으로는 정말 탁월한 우리의 현대 희곡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쉽고 익숙하다. 희곡집 구입을 머뭇거리시는 분을 위한 추천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