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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와 맥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자칭 "최고의 2류" 작가. 이토록 적절하게 어울릴 수 있을까. "최고의 2류"를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셰익스피어는 모르겠고, 하여튼 그 다음엔 나다."
유감없이 이를 증거하는 통렬한 풍자가 만발한 소설.
감상 포인트를 두 가지로 볼 수 있으니, ① 영국 문단의 허위의식과 스타 작가 만들기, ② 한세상 신나게 살아치운 자유로운 영혼의 여성.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양심적이고, 예측가능하고,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화자 ‘나’ 윌리 어셴든 한 명이다. 어셴든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켄트 주 바닷가 소도시 터켄베리의 외곽 블랙스터블에서 교구목사인 숙부와, 가난하지만 신분이 대단히 높은 집안 출신인 숙모와 생활하고 있다. 터켄베리가 어디냐고? 서머싯 몸이 학창시절을 보낸 켄터베리를 의미하는 가상의 도시다. 즉 어셴든의 상당부분이 서머싯 몸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하여 ‘나’ 서머싯 몸은 작품 전편에 걸쳐 가장 우쭐대고 잘난 척하고 끝까지 귀엽게 거들먹거린다. 바지에 연결된 멜빵에 양쪽 엄지손가락만 걸쳐놓고 뒤꿈치를 한 번 올렸다 내리면서 씩 웃을 것만 같은 모습. 눈에 선하다.
작품에서 제일 먼저 소개하는 인물이 ‘나’ 어셴든의 동료 문인이자 당시에 가장 잘 나가던 소설가 앨로이 키어다. 립 서비스의 대가이며 죽여주는 처세술로, 성공하는 동료를 가장 진심으로 칭송하지만 그가 게으름이나 흥행실패, 타인의 성공 등으로 밀려나게 되면 제일 가차 없이 안면 몰수하는 인간이다. 자신에게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면 라면 국물 한 방울 양보하지 않을 것을 자신의 나아갈 지표로 삼았다. 문단에서도 승승장구해 쉰 살의 나이임에도 기적같이 벌써 서른 권의 책을 출간해냈다. 이런 (앨)로이 키어가 외출한 ‘나’의 숙소에 전화를 해 급한 일이 있으니 귀가 즉시 전화해달라고 했다 한다. 이런 전화요구는 거의 대부분 전화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전화를 건 사람이 급한 일이기 십상이라 ‘나’는 문단에서 뜨겁게 떠오른 옛 친구 로이의 요구를 거절해버린다. 시작부터 ‘나’의 포스가 심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나’ 윌리 어셴든은 서른 권에 달하는 책을 출간한 로이를 작가로서 품평하기를,
“동시대 작가 가운데 로이만큼 보잘것없는 재능으로 확고한 위치를 거머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나’는 결코 로이의 이런 처세술과 습관을 미워하지 않는다. 자기가 보기에 로이는 그냥 천성이 그럴 뿐이란다. 오히려 엘로이 키어의 가장 탁월한 특징은 진실함에 있다고 강변한다. 뭐에 대한 진실함? 독자여, ‘나’ 윌리 어셴든, 즉 상당부분이 작가 서머싯 몸일 주인공의 말에 혹해서 그가 쓴 대로 받아들이지 마시라. 로이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처세하는 것, 다방면으로 능숙하게 사람들과 친화하는 수단, 독자가 보기에 틀림없는 이기적 행위와 언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로이를, 진실해서 그렇다고 관용을 담아 품평하는 자의 아량일 수도 있으니. 몸의 다른 작품 <면도날>에서도 비슷한 시니컬한 관찰을 충분히 경험해보시지 않았는가. ‘나’의 시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빼지 않고 로이보다 한 수 위에 있다.
하여튼 로이는 자칭 잔챙이인 어셴든에게 밥을 사면서, 물론 ‘나’의 예상대로 칵테일은 권하지 않았지만, 최고급 백포도주를 따르더니, 당대 가장 위대한 소설가 가운데 하나이며 마지막 빅토리아기의 작가이며 걸출한 거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의 의견으로는 지루한 작품들을 주로 생산했던 고 에드워드 드리필드의 회고록을 집필해달라는 미망인의 당부를 전달한다. 물론 ‘나’가 거절할 것을 미리 짐작한 일이고, ‘나’가 쓰지 않겠다고 하니 로이가 쓰긴 하겠는데, ‘나’의 소년시절, 드리필드의 무명시절부터 관계를 맺어온 ‘나’에게 그와의 일화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드리필드의 첫 번째 아내, ‘나’의 기억으로는 매우 사랑스러운 여자, 황금빛 머리카락에 은빛 색조가 빛나고, 은빛 피부에 금빛 색조가 찬란한 로지 갠, 이었다가 로지 드리필드였으며, 책의 후반부로 가면 로지 이글던이 되는 여인에 대한 기억으로 접어든다. 블랙스터블 출신으로 ‘레일웨이 암스’에서 3년, 후에 하버샴의 ‘페더스’에서 결혼할 때까지 여급으로 일했으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듣던 여자.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드리필드의 회고록을 의뢰한 미망인이자 두 번째 아내 에이미 드리필드와, 자신보다 우위에 선 사람의 의견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기질에 충만한 당대 최고의 작가 로이가 생각하는 로지만 인용해보자.
─ 소름끼치게 천해 보이는 여자. 극성맞은 인상의 여자. 말하자면 젖 짜는 아낙 타입. 엄청 지저분한 여자. 색정광. 나는 항상 이 여자가 백인 검둥이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잠깐. 백인 검둥이. 넬라 라슨이 쓴 <패싱> 읽은 거 기억하시지? 여기서는 로지의 도톰한 입술과 넓적한 코를 꼬집는 멸칭이지만, 간단하게 멸칭,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고 인텔리 입장에서 쓸 수 있는 가장 모멸적인 욕이 아닐까 싶다. 로지에 대한 추억이 깊고, 인생을 이미 달관한 나이에 이른 현명한 ‘나’ 서머싯 몸, 아니, 윌리 어셴든은 이 멸칭 한 방에 팽, 돌아버려 드디어 말문을 연다.
“백인 검둥이는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새벽처럼 순수한 여자였어요. 청춘의 여신인 헤베 같은 여자, 월계화 같은 여자였어요.”
그러니까 사람을 보는 시각도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앞에서 여지없는 속물의 대명사 (앨)로이 키어의 가장 탁월한 특징은 진실함에 있다고 단언한 바와 같이, 여기서 ‘나’는 이미 십년 전에 죽은 로지 드리필드를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걸 좋아한, 사랑을 사랑한 여인”이었다고 선언한다. 그것도 틀림없이 턱없는 우월감에 차있을 두 번째 아내 앞에서 어쨌거나 경쟁상대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아내를 언어로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선의로 변호하는 ‘나.’
“천성일 뿐이죠. 태양이 햇빛을 발산하고 꽃들이 향기를 내뿜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어 준 거예요. 그녀 자신에게 기쁜 일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됨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는 늘 진실하고 예의 바르고 순박한 여자였어요.”
맞는 의견일까?
그렇다. ‘나’ 윌리 어셴든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이로움이 되는 방향으로만 행동하는 로이 키어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그 행동이 진실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래서 언어가 무섭다. 잘 쓴 글이 겁난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따라가다 보면, 다수 또는 보편이 가지고 있는 특정 행위나 생각, 심지어 이데올로기에 대한 평가를 폭파해버리고 정 반대의 생각과 평가에 동조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상식을 살해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문제는 작품을 제일 재미있게 읽으려면, 작가가 주장하는 대로, 유도하는 곧은길을 따라 똑바로 쪽 따라가야 한다는 것. 특히 서머싯 몸은 지루할 수 있는 곧은길 곳곳에 절묘한 비틀림과 왜곡과 풍자와 비웃음과 생각도 못한 웃음 코드를 심어놓았으니 말을 더 보태 뭐하나. 재미있는 작품이니 꼭 읽어보시기 권한다.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으시라. 그래야 여태 내가 풀어놓은 독후감이 맨 거짓말투성이란 것을 벼락같이 알고 푸짐하게 욕바가지를 쏟아버리실 수 있을 터이니.
서머싯 몸은 확실하게, 최고의 2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