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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12
플뢰르 이애기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표제작과 <프롤레테르카 호>, 이렇게 두 편이 실린 작품집. ‘이애기’라는 작가 이름마저 처음 들어봤을 정도로 생소했지만, 수준 있는 작품으로 시리즈를 만들었던 민음사 모던 클래식의 타이틀을 달고 나온 책이라 기대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오, 괜찮다. 다만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 불호가 극적으로 갈릴 수 있을 것 같다. 아무쪼록 신중하게 선택하시기 바란다.
플뢰르 이애기는, 1940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나, 옮긴이 김은정의 해설에 의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재, 너무 이르게 찾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던 주변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스위스 산골 구석에 있는 외딴 수도원 기숙사 생활로 점철된 어린 시절은, 절제와 거부, 고립 그 자체였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소년기의 거의 대부분을 수도원을 전전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수도원의 기숙생 생활은 <아름다운 나날>을 쓸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고 봐도 좋겠다. 고독한 청소년기를 끝내고 드디어 열여덟 살이 된 이애기는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미국과 유럽을 무대로 모델 경력을 시작해 7년간 유지한다. 이후 1968년 로마에서 잉에보르크 바흐만, 토마스 베른하르트 등과 교류를 맺는다.
같은 해에 다시 밀라노로 가 아델피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작품생활을 하지만 그것보다는 로베르토 칼라소를 만나 결혼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해보인다. 계속 작가생활을 했으나, 1989년 마흔아홉 살에 발표한 오늘의 표제작 <아름다운 나날>이 이탈리아의 문학상인 프레미오 바구타 상을 받아 첫 번째 마스터피스로 꼽을 수 있단다. 이어서 예순세 살에 발표한 <프롤레테리카 호>는 영국의 문학주간지 Times Literary Supplement가 뽑은 2003년 최고의 작품 가운데 한 편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두 작품 다 일인칭 시점으로 썼다. 그런데 마치 <아름다운 나날>의 ‘나’가 <프롤레테리카 호>의 ‘나’이자 ‘요하네스의 딸’하고 같은 사람인 것처럼 읽힌다. 두 작품 사이의 터울이 14년이 나는데도, 화자가 십대 중반을 거치고 있으며 수도원의 기숙학생의 신분인 것으로 같고, 어머니는 브라질에서 두 번째 결혼생활을 하면서 수도원 부속학교에 재학중인 ‘나’를 원격조정 하는 것도 유사하며, 심지어 아버지와 더 친밀한 점도 일치한다.
수도원 또는 수녀원 기숙학교를 무대로 하는 작품의 경우, 남학교와 여학교 간의 차이점은 은하계의 이편과 저편 사이만큼 까마득하게 멀다. 남자 기숙학교의 풍경이 이리wolves떼끼리의 전투를 먼저 치루고, 이어서 이리들 간의 서열을 확실하게 정하는 결투와, 서열 간의 핍박과 폭력, 착취, 배고픔, 그리고 이후에 이루어지는 배반, 보복 등 어린 악마들이 펼쳐내는 피의 세례가 주종을 이루는 반면, 적어도 20세기 중후반까지의 여학교에서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 발산하는 풋풋한 젊음의 아름다움, 벗들 사이에 맺어지는 우정과 배신, 밤새 편지로 속삭이는 사랑과 꿈, 급우에게 끌리는 마음, 그리고 돋보이는 절대적 우상을 향한 경도 같은 것이 중요한 재료가 된다.
플뢰르 이애기는 처음부터 스위스 산골에 감추어진 비싼 수업료와 기숙사 비용을 요구할 것처럼 보이는 고급 수도원의 부속 아펜젤 학교 이야기 <아름다운 나날>에서 여덟 살부터 수도원 기숙학교를 전전한 결손가정의 외동딸 ‘나’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아펜젤 학교에 프레데리크라는 전학생이 도착하면서 ‘나’의 학교생활은 변하기 시작한다. ‘나’는 프레데리크와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친구의 필체까지 흉내 내 거의 완벽하게 모사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고, 공통의 흥미를 만들기 위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던 프랑스 문학까지 섭렵하는 스토리. 사실 이런 내용들은 그동안 숱하게 많은 작품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 전혀 참신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것도 그렇고, 이어지는 <프롤레테리카 호>도 그렇고 내가 초장에 말했듯, 오, 괜찮은 걸! 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플뢰르 이애기가 쓰고 김은정이 번역한 ‘문장의 힘’ 때문이다.
한 편이 백 쪽 내외의 짧은 작품 두 편. 결코 부드럽지 않다. 이미 누보로망을 경험해보아 이 정도를 ‘극도로’ 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누보로망을 읽을 때 눈알에 모래알이 드글드글 낀 것 같은 이물감, 그걸 느끼기 바로 전의 건조한 문장. 이 정도면 이해가 가실 터. 이런 드라이한 단어와 문장, 문단이라고 해서 작가가 자신의 감정을 풀어 전달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이런 경우, 독자에 따라 놀랍게도 신선함을 경험할 수도 있을 터인데, 다만 그러기 위하여 작가와 독자의, 이 사이에 역자까지 끼워서, 궁합이 맞아야 할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숱하게 벤치마킹해서 글을 쓰는 작가들도 많지만 그중에서 청출어람은 정말 찾기 어려운 것이 진실. 아서라. 문학에 벤치마킹이 어디 있는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지 못할 것 같으면 일찌감치 주산, 타자, 속기, 용접, 금형, 미장, 도배 같은 거 배워 다른 돈벌이를 찾는 게 빠르고 복장도 편하다는 걸 꼭 가르쳐줘야 알까. 이 센텐스는 독후감 쓰다가 괜히 다른 생각 조금 들어서 끼어든 푼수 없는 짓이었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흠.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9천원으로 가격도 착하고, 중단편 정도의 길이로 비록 명작의 반열은 생각하지 못하지만 고품질 작품이다. 이탈리아 언어로 조금 편하게 쓴 뒤라스를 읽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