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장의 가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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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이 364쪽까지인데 딱 여섯 문단으로 되어 있다. 이런 소설작품은 2014년에 읽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 이후 처음이다. <소멸>은 근 5백 쪽에 육박하는 작품이 딱 두 문단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케스의 <족장의 가을>이 읽기에 더 까다로웠다. 혹은 시간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상당히 낯선 문장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길이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지어 마지막 여섯 번째 문단은 70 페이지를 훌쩍 넘어서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한 문장 안에서도 화자가 수시로 변한다. 그러면서 리듬을 탄다. 모르긴 해도 원문 자체가 운율rhyme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역자 송병선은 운율을 효과적으로 번역해내기 위해 고심하다가, 전적으로 내 생각에, 우리말도 시조나 가사에서처럼 조調 또는 조성調聲이 있어 글자 수를 조절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감안한 것 같다. 눈으로 활자를 좇아가며 읽다가 나도 모르는 새, 실제 발음은 하지 않지만 성조를 따라 말하는 것처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길고 긴 문장이 어떤 수준인가 하면, 거의 대부분 완전한 복문complex sentence이다. 복합문 사이에 화자가 바뀌는 건 얘기했고, A 화자가 B 화자‘들’로 바뀌기도 하고, 한 문장 안에서 화자의 젠더가 바뀌기도 한다. 한 ‘문단’ 안에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상황이나 그림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특히 대화가 극도로 생략되어 있는 글에서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지만 유효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무대는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가상의 나라다. 족장, 이라고 하는 건 라틴 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가 경험했듯이, 19세기 초에 독립을 쟁취한 후 정권을 틀어쥐는데 성공한 군인 출신의 독재자를 일컫는다. 이들은 대개 상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권력을 향유하다가 뒤를 잇는 또 다른 대령에 의하여 실각하는 전철을 밟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족장은 젊은 시절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수면이 흔들리는 걸 보고 운명을 읽어주는 무꾸리로부터, 접견실 옆에 있는 집무실에서 잠을 자다가 자연사하고, 죽을 때 평생 매일 밤 자던 모습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누운 상태이며, 계급장 없는 리넨 군복을 입고, 각반을 하고, 황금 박차를 달고, 오른팔을 구부려 머리 밑에 놓아 베개로 삼고 있는 형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 죽느냐, 나이는 불명확하지만 107세에서 232세 사이였단다. 그렇다. 일단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한 번 생을 살았다 하면, 보통이 그냥 백년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족장이 권력을 잡고 백년이 되는 해를 기점으로 백년 이전까지가 다섯 번째 문단이고, 백년 이후가 72쪽 분량의 한 문장으로 된 마지막 여섯 번째 문단이다. 호세 이그나시오 사엔스 델라 바라라고 하는 대통령 비밀경찰이 마지막으로 하여튼 뭔가 힘 좀 있는 국민 거의 대부분한테 말로 하기 힘든 죄목을 뒤집어 씌워 다 몰살시킨 8월 12일, 장군님, 각하의 집권 100주년을 축하하는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운명인 벤디시온 알바라도에게, 벌써 백년이 되었답니다. 제기랄, 벌써 백년이래요,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가네요, 중얼거리며 거의 완전하게 뒷방으로 물러나가, 또다시 백년이 넘게 권좌에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나라가 완전히 거덜이 나서, 자신에게 테러를 가할 반역자들도, 테러할 이유도 없어져 다 허물어져가는 대통령관저에 암소들과 닭들이 거의 폐허로 만들어 놓은 속에서 백여 년 전에 무꾸리의 세숫대야에서 본 형태로 죽을 때까지다.

 

  독재자에 관해서 책을 쓰고 싶다면, 20세기를 살았던 라틴 아메리카의 소설가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을 것이다. 남북 아메리카를 통틀어 19세기, 20세기에 관해 말하자면 이렇다.


  “민주적 지도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민주적인 반면, 독재자는 거의 다 비슷한 방식으로 독재다.”


  소설가라면 ‘거의 다 비슷한 방식’ 말고 거기서 조금 다른 것들을 발굴해냈을 터이지만, 사실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독재정치를 다룬 소설가들 역시 거의 비슷하다. 마르케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독보적인 하나를 가지고 있으니 라틴 아메리카의 붐 문학적 요소.
  놀라지 마시라. 거의 미라처럼 늙은 독재자가 경비부대마저 도망쳐버려 거의 폐허가 된 대통령 관저에서 독수리와 콘도르에게 뜯어 먹혀 얼굴 반 너머가 유실된 채 발견된 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대통령의 사망을 여간해 믿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저 먼 예전에도 고독한 독재자는 지금과 똑같은 복장과 자세로 자연사한 것처럼 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죽은 것은 족장이 인생의 가을을 맞은 초기로 상당히 생동감 넘치는 나라의 지도자였으며 그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던 시절이었다. 첫 번째로 죽기 십 수 년 전에 가짜 대통령 마차를 타고 원주민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기를 치던 파트리시오 아라고네스라는 자가 있다는 보고를 듣고 잡아 오라 해서 만나보니, 이게 자신의 분신이라 할 정도의 도플갱어. 장군은 파트리시오를 보더니 모두 예상한 것과 달리 사지를 찢어 죽이는 대신 과감하게 채용을 해버린다. 대가는 월급 50 페소. 그래도 왕이 되는 재앙 없이 왕과 같은 삶을 누리는데 뭘 더 바랄까.
  장군은 대역을 자기가 누리는 모든 편의를 똑같이 누리라고 허락한다. 하렘에 있던 수많은 애첩들도 포함해서다. 그리하여 애첩들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이들을 무려 2천 명 가까이 생산해내는데, 단 한 명도 빼지 않고, 앞선 작품에선 돼지꼬리가 달리기도 했지만, 칠삭둥이들이다. 이렇게 장군이 모든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시켜나가는 와중에, 장군의 어머니가 사는 교외 저택에서 돌아오는 마차를 향해 탄압철폐, 독재자에게 죽음을, 등등의 전단이 수십만 장 뿌려지는 것을 본 얼마 후, 장군이 아니라 페트리시오가 장군 대신 독을 칠한 단도에 치명상을 입는다. 그리하여 죽음의 자리에 마지막으로 장군을 만나게 되는 페트리시오. 무꾸리가 일러준 대로 입히고 자세를 잡고 해서 결코 암살이 성공해서가 아니라 자연사로 죽은 것처럼 보이게 연출될 페트리시오는 장군, 대통령, 또는 족장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각하는 그 누구의 대통령도 아니며, 대포 덕분이 아니라 영국인들이 그 자리에 앉혔기 때문에 권좌에 있는 것이며, 미국놈들이 전함에서 두어 개의 포탄을 쏴서 각하가 그 자리를 지키도록 해주었습니다. 미국놈들이 흑인 갈봇집을 여기 두고 떠날 테니 우리 없이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두고보자 할 때, 각하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디서부터 명령을 내려야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때부터는 의자에서 내려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말하는데, 제가 죽어가는 이 순간을 이용해서 저와 함께 죽으십시오.”

 

  이렇게 죽은 적이 있어서 백년이 넘게 흐른 후 진짜 족장의 죽음을 앞두고도 남은 사람들은 섣불리 장군의 장사를 지내려 하지 않는다. 족장 암살미수 사건 이후 숱하게 많은 국무위원과 장교들이 잔인하게 처형된 전력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족장이 가짜 죽음을 연출했는지 누가 알 것인가 말이지.
  이건 무수한 에피소드 가운데 그저 간단한 한 장면이다. 기억하시라. 글쓴이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다. 그가 어디 한 가지 에피소드에 집중하는 사람인가. 족장만 해도 그렇다. 일찍이 시골의 매춘부 아들로 태어나 낳자마자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질병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운명이었으니, 지금이라면 외과 수술 한 번으로 고칠 수 있고, 혹시 재발한다 하더라도 정말 230세까지 살았다면 많아봐야 네 번만 재수술하면 그만일 질병인 탈장을 앓는 인물이다. 소장이 서혜부에서 중력방향으로 탈출해 고환의 위쪽으로 내려오는 질환으로 내려온 소장 때문에 책에서 불알이라고 표현하는 음낭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상태. 순우리말 토산불알과는 좀 다르지만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한다. 마르케스는 짓궂게도 시간 날 때마다 족장의 음낭을 거론하고는 한다. 이외에도 작가 특유의 과장법과 은유와 턱도 없는 망상과 상징의 해일이 밀려드는 걸 실감하실 수 있으나, 조심하시라. 길고, 길고 또 긴, 거의 유례가 없는 문장의 해일이 당신을 덮쳐버릴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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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27 09: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희망도서로 받아놓고 못읽고 그냥 반납하게 생겼어요 ㅠ
Falstaff 님 리뷰가 더 재미있어 보이네요.
문장의 해일 보다는...^^;;

Falstaff 2021-05-27 09:57   좋아요 4 | URL
아휴, 다른 작가라면 혹시, 정말 혹시 모르지만, 제가 아무리 잘 써도 어딜 감히 마르케스한테 비비적거리겠습니까. ㅋㅋㅋ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거 보면, 제가 속물 맞습니다. ㅋㅋㅋ

청아 2021-05-27 10: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까레니나법칙이 독재에도 통하네요! 어쩐지 읽기에 겁이나는 작품이지만 덕분에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ㅋㅋㅋㅋ

Falstaff 2021-05-27 10:53   좋아요 4 | URL
미미 님한텐 껌일 거 같습니다만... ㅋㅋㅋㅋ

까레리나 법칙은 제가 대충 만든 겁니다. 원래는 아시아 개발형 독재(이광요, 박정희), 라틴의 군부독재, 유럽 파시스트들의 다중의 힘에 의한 독재로 구분해보려다 에구, 귀찮아서 걍 까레니나한테 갔습죠. ^^;;

coolcat329 2021-05-27 14: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대단하네요. 백년의 고독에도 2페이지 걸친 하소연이 나와 깜놀했는데 이 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요...

Falstaff 2021-05-27 14:10   좋아요 3 | URL
ㅋㅋㅋ 저도 처음 경험해보는 경우예요. 단편소설 두 편 분량이 한 문장으로.. @@
근데 읽는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역자가 아주 고민을 한 듯하더라고요. 무지 힘들었을 거예요.

coolcat329 2021-05-27 15: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는 콜레라만 더 읽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 족장이 넘 끌리네요.ㅋㅋ

Falstaff 2021-05-27 16:05   좋아요 2 | URL
이젠 안 읽겠다고 마음 먹고는 다시 읽고, 진짜 읽나봐라 하고나서 또 읽고, 더 읽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해놓고 또다시 읽는 게, 이게 팔자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어쩔 수 없어요. 흑흑흑..... 저도 소설가 하나 있습니다. 흑흑흑흑흑.......

새파랑 2021-05-2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섯문단이 사실인가요? ㅡㅡ 70페이지의 문장이라니...이건 좀 무섭긴 한데... 문장의 해일을 경험해 보고 싶긴 하네요 ^^

Falstaff 2021-05-27 19:48   좋아요 2 | URL
옙!
한 문장이 72쪽입니다. 확인하고 자시고가 없습니다!
해일에 휩쓸리셔도 추호도 제 탓은 안 하시깁니다! ㅋㅋㅋㅋ

전 취미가 번지 점프예요.(요즘엔 비싸서 거의 안 하지만....) 그러니 한 번 도전해보심도 나쁘진 않을 듯합니다.

붕붕툐툐 2021-05-27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건 폴스타프님이기에 이렇게 읽어내신 거지, 저는 해일이 다가오기도 전 이미 저멀리 던져버렸을 거 같아요. 진정 존경합니다~~

Falstaff 2021-05-28 08:46   좋아요 1 | URL
아이고, 아닙니다. 국민교육헌장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걍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