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을
 지난 1월 1일. 서른 살이 된 큰 아이가 집에 들렀다. 어미가 끓여준 떡만둣국을 맛나게 먹더라. 소위 말하는 엄마 손 맛? 웃겨. 내 입엔 이게 떡만둣국이냐?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새해 벽두부터 쌍코피 터질 필요가 없어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하여간 잘 먹더니 시원하게 물 한 컵을 들이켠 다음 하는 말이, 아버지, 할 말이 있는데. 앞니를 빼고 인공 이를 심었더니 영 칠칠치 못하게 자꾸 음식을 흘린다. 아무래도 내 이가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다. 그래 휴지로 식탁 앞에 떨어진 떡국 찌꺼기를 닦고 있던 내가 무심하게 곧바로 이를 받았다. 물론 완전한 농담이었다. 왜, 임신했니?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응.’ 속으로는 염통이 뚝, 떨어지는 느낌. 그러나 쪽팔리게 그런 거 갖고 티 낼 수 있나. 그래 또 물었다. 몇 주? 이제 겨우 두 주 됐단다. 작년 8월에 청혼을 하고 승낙을 받고, 요새 아이들 영악해서 신부가 한 살 많아 지들 생각에 소위 노산인가 싶어 둘이 손잡고 산부인과 갔더니 의사 하는 말이 여자는 전혀 문제없는데, 남자 쪽 정자의 운동성이 정상 바로 아래쪽이라고, 이제부터라도 결혼할 관계라면 피임을 하지 말라고 권하더란다. 그래 넉 달 만에 아이가 생긴 것. 나는 계속 맛대가리 하나도 없는 떡만둣국을 입에 떠 넣으며 (아무리 유명한 주방장이 조리를 했더라도 그 상황에서 내가 맛을 알겠어?) 소주 한 잔을 꿀꺽 마셨다. 매년 1월 1일 아침 떡국을 먹을 때 아이들이 따라주는 소주 한 잔씩 마시는 건 벌써 이십년이 넘는 내가 만든 일종의 ‘아름다운’ 가풍이자 미풍양속이다. 혼인이 두 집안 사이의 행사에서 그냥 한 쌍의 삶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 그래라. 아이 이름은 내 벌써 지어놓은 거 알지? 아들이건 딸이건 관계없이 그냥 ‘하을’이라 해라. 노을 하, 새 을. 한문으로 쓰면 霞乙. 글씨가 작아 잘 안 보이시지? 크게 쓰면 이렇다.
 霞乙
 무슨 뜻이냐고? 그림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할아비 권한으로 첫 아이 이름은 내가 짓는다. 둘째는 외할아버지가 짓든지, 네가 직접 짓든지 그건 너 좋을 대로 해라. 맏이 이름은 양보 않겠다. 라고 도장 찍었다. 아, 무식한 마누라. 하필이면 이름으로 노을이 뭐냐, 새벽이면 새벽이지. 그리고 갑이 좋지, 왜 을이냐. 요 지랄을 한다. 그런 생각이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이 ‘귀복’이게? 귀할 귀, 복 복. 혹은 요샛말로 ‘대박’이? 왜, 아예 ‘예수’라고 하지. 그건 서른세 살까지밖에 못 살까봐 안 된단다. 하여튼 새해 아침에 난 손주가 생겼음을 알았고, 아이에게 ‘하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태까지 지내온 새해 첫날 가운데 제일 좋은 선물을 받았다. 그래 다른 해엔 소주 한 병이었는데 올해엔 두 병 마시고 아침부터 고꾸라져 잤다.




서재
 내 취미는 책 읽고, 음악 듣고. 책 읽은 느낌을 독후감으로 쓰고, 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알라딘 서재에 업로드 하는 일. 근데 더 즐거운 취미, 내가 아는 최고의 취미여서, 이미 약한 중독 증상까지 보이는 건 바로 알코올 흡수하기. 예를 들어 2019년 1월, 나는 스무 권의 책을 읽었고, 서른 병의 소주를 마셨다. 위스키 한 병, 와인 한 병, 맥주가 글쎄 한 5천 밀리리터쯤, 중국 백주가 한 병. 이런 건 세지도 않는다. 오직 소주 서른 병. 그러니 내 일상생활이란 것이 책을 읽지 않으면 술에 취해 있다. 이쯤에서 서재 친구들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서재 운영, 또는 서재 생활을 잘 하고 있지 못해서. 나는 다른 분들의 서재에 자주 방문하지 못한다. 더구나 댓글을 다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읽다가 주둥이가 근지러워 참지 못할 정도가 돼야 그냥 한 마디 하는 수준이다.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로 벌써 몇 년을 버티는지 모르겠다. 서재 친구들을 자주 방문하고, 함께 웃고, 떠들고, 이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1월에 읽은 책 스무 권. 이렇게 세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얇은 책도 있고, 두꺼운 책도 있으니. 페이지 수로 한 달에 6,501쪽이다. 다른 해보다 한 800쪽 이상 적게 읽은 편이다. 해가 갈수록 책을 읽는 것도 알코올의 방해를 심하게 받는다. 서재 친구분들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정독하는 것 같은데 독서량도 어마어마하고, 그분들이 쓰는 건 나같이 독후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서평’이다. 하긴 책 읽고 느낌을 적는 수준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사는 내가 (훨씬)더 행복한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 능력으로는 읽고, 독후감 쓰고, 술 마시고, 기분나면 음악 듣고, 이런 몇 가지만 가지고도 다른 여유가 없다. 그러니 친구분들, 내가 자주 방문하지도 않고, 댓글도 없을 수밖에 없는 걸, 조금만 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상품권
 내 지갑 속엔 신세계 상품권과 SK 상품권이 합해서 50만원어치가 있다. 다 회사에서 받은 거다. 백만 원어치 상품권 한 장 사려면 얼마나 드는 줄 아시나? 딱 백만 원 든다. 안 깎아준다. 곧바로 현금만큼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유사)유가증권이니 깎아줄 이유가 없다. 그래 상품권은 협력회사가 발주회사에 가져다 바치는 뇌물로 작용한다. 현금 준 건 아니니까. 나도 한 때는 많이 받아봤다. 20세기에. 그땐 의례 명절마다 총력을 다해 상품권을 수집해서 팀장한테 가져다 바치면, 팀장이 이를 수거해 다른 부서에 할당을 하고, 우리 부서원들에겐 조금 더 많이 주고, 뭐 그래서 일종의 직장 에티켓 정도로 치부되고는 했다. 물론 이제 시대가 변해 그런 거 전혀 없다. (다른 회사는 모르겠다.) 문제는 (예를 들어) 신세계 상품권으로 뭐든지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난 상품권으로 책을 좀 더 사고 싶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신세계 상품권으로 인터넷 서점에선 단 한 권의 책을 살 수가 없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왜 상품권을 주지? 어차피 그것도 전 직원에게 일정 액수에 해당하는 금액의 복리후생비 계정과목으로 주기 때문에 소득세를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려면 차라리 돈을 주지 왜 상품권이냐고. 어제 집에 가서 지갑의 상품권 다섯 장을 뽑아 마누라 브래지어 속에 쑥 집어넣어 줬다. 에이그, 쭈그렁바가지 같으니라고. 상품권 50만 원어치 받고 헤헤 웃는 마누라 뽕 브라 속에 그럴 듯한 건 아무 것도 없더라.



한라봉과 낑깡
 그제 일인데 아이들한테 카톡이 왔다. 큰 아이, 작은 아이 다. 엄마가 한라봉을 한 박스씩 보내줬는데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게 그리 맛이 있다고. 어미한테는 며느리(후보)한테도 카톡이 왔단다. 맛있다고, 잘 먹겠다고, 아기는 잘 크고 있다고. 어쨌거나. 아참. 이 이야기 나왔으니 상견례 얘기도 해볼까. 한식집에서 상견례를 했다. 사돈이 나보다 한 살 위인데, 내가 생일이 빨라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다. 이리저리 따져보니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단다. 딱 나만큼의 머리숱, 딱 나만큼의 흰 수염, 딱 나만큼의 덩지. 근데 모든 운동을 다 잘한단다. 그이는 덩지가 다 근육이고, 난 이 덩지가 전부 지방이다. 그거 하나 차이가 난다. 그래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예단은 무슨 예단, 우리 그런 거 없기로 합시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들 예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저희들 결혼반지 줬습니다. 그걸 다시 세팅을 하든지 그냥 쓰든지 지들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양식 결혼 하면서 폐백이란 것도 그거 웃긴 겁니다. 우린 폐백 안 할 겁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리저리 설왕설래, 하면서, 소주병을 기울였는데, 참이슬도 그냥 참이슬이 아니고 뚜껑 색깔이 빨간 진한 도수의 소주를 둘이서 여섯 병 깠다. 아, 그 영감. 술 참 장하게 하더라. 하마터면 골로 보내려다가 내가 골로 갈 뻔했다. 역시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세긴 세다. 한라봉으로 돌아와, 카톡을 보니 흠, 오늘 집에 가면 나도 한라봉 맛을 볼 수 있겠군. 이랬다. 그거 뭐 먹으나 마나 무슨 특별한 거 있나. 있으면 먹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그렇지? 근데, 아니더라. 집에 갔더니, 없다. 마누라가 아이들한테 한 박스씩 보내고, 나한텐 딱 두 개, 뭘 주느냐 하면, 낑깡 두 알을 주더라. 그림 한 번 보자.

 

 

왼쪽이 한라봉. 가운데가 귤. 오른쪽이 낑깡. 내가 가운데 ‘귤’ 수준이었으면 그래도 좀 덜 했을 텐데 (여기서, 정말? 이라고 묻지 마시라) 애들한텐 한라봉 먹으라 하고, 한라봉 사 줄 돈 벌어다준 나는 낑깡 두 알 먹으라고? 이게 마누라야, 웬수야. 이러니 내 알코올 섭취량이 늘겠어, 안 늘겠어. 생각들 해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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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설명절 잘 보내시고 손주가 생기신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하을이 이름 이쁘네요 ㅎㅎ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Falstaff 2019-02-01 10:4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벨루치 님도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 복도 많이 받으시고, 돈도 많이 버세요. ^^

카알벨루치 2019-02-01 10:5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2-01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을이 이름 참 예쁘네요. 딸, 아들 다 어울릴 이름이고요- 폴스타프 님 독후감도 재미나지만 이런 소소한 글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설연휴, 소주와 책과 함께 즐겁게 보내시고요.

Falstaff 2019-02-01 12:37   좋아요 0 | URL
하하하, 고맙습니다.
여기가 책 가게 서재라 이런 잡글 올리기가 부담이 되는 건 사실입지요. 그래도 이번엔 용감하게 한 번 써봤습니다.
연휴 잘 보내세요. 집에 계시지 말고, 일단 떠나셔요!!!! ㅋㅋㅋ

syo 2019-02-0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노을 사진보다 하을이가 훨씬 더 어여쁜 아이로 태어날거예요!! 축하드립니다 ㅎㅎㅎㅎ

Falstaff 2019-02-01 12:37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고맙습니다.
사이오님도 축하드릴 일이 곧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hnine 2019-02-01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이렇게 글을 재미있게 잘 쓰시는군요. 단숨에 읽었습니다.
하을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으셨는지 궁금해요.
사모님께서는 혹시 그나마 낑깡도 못드시고 다 가족들 주신건 아닐지.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여기서 또 사모님 편을 들고 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3=3=3

Falstaff 2019-02-01 12:39   좋아요 0 | URL
윽. 재미 있으셨습니까. 고맙습니다.
‘하을‘은 그냥 떠오른 겁니다. 어느 날 멍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떠오른 이름.
전에도 그런 이름이 하나 있었습니다. ‘담원‘ 딸 낳으면 담원이라고 지으려 했더니 둘째도 아들이 나와서 조카딸한테 준 이름입니다.
마누라는 타파 통에 낑깡 가득 담아 스카이 캐슬 보면서 그걸 한 통 다 먹던걸요!!! ㅋㅋ

coolcat329 2019-07-2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늦었지만 손주 축하드립니다. 이름도 참 좋구요... 이런 글도 쓰시는지 이제 알았는데 너무 재밌습니다. ㅋ야심한 밤이라 두 번 입을 틀어 막았네요.

Falstaff 2019-07-25 09:12   좋아요 1 | URL
잘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벌써 시간이 흘러 다음 달 말쯤엔 손녀딸이 나온다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