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의 언어 - 죽음의 진실을 연구하는 법의인류학자의 시체농장 이야기
윌리엄 배스.존 제퍼슨 지음, 김성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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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20대 시절, 책만큼은 아니지만 영화와 드라마도 많이 봤다.


그중 나의 인생 작품 중 하나가 미드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이다. 그전까지 '범죄 장르 = 범인을 잡는 이야기'로 여겼는데 CSI는 현대 과학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자연스럽게 법의학 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추리 · 미스터리 장르는 '흥미'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범죄와 죽음은 오락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마주하는 가장 진지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다룬다는 것은 곧 생명을 다루는 일이고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존엄을 회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부패의 언어(Death’s Acre)』는 세계 최초의 시체 부패 연구소인 '시체농장(Body Farm)'을 설립한 법의인류학자 배스 박사의 이야기이자, 썩어가는 육체 속에서도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한 한 사람의 회고록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연민의 과학이며, 공포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경청의 기록이다.


<죽음을 해부한 과학의 시작>

시체농장의 시작은 한 과학자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윌리엄 배스 박사는 1977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장교 샤이 대령의 시신을 '사망한 지 몇 달'이라 판단했으나 실제로는 100년이 넘은 시신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방부 처리와 밀폐된 주철 관이 부패를 늦춘 탓에 계산이 틀린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저자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인간의 부패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죽음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렇게 탄생한 곳이 바로 테네시 주에 위치한 '시체농장(Body Farm)'이다.


1980년 설립된 이 연구소에서 저자는 다양한 환경 속에서 인체가 어떻게 부패하는지를 관찰, 연구했다. 온도, 습도, 곤충의 활동, 뼈의 변화를 기록하며 '사망 후 경과시간(Time Since Death)'을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이 연구는 수많은 살인사건 해결의 토대가 되었고 실제로 미시시피 살인사건에서는 구더기의 껍질 하나로 사망 시점을 밝혀내 범인의 알리바이를 무너뜨렸다.


<결코 혐오스러운 일이 아니다>

부패라는 단어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이 또한 인간 생의 일부다. 『부패의 언어』를 내가 뽑은 올해의 책 후보로 생각하는 이유는 냉정한 과학 기록 속에서 따뜻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신을 연구 재료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손님'이라 불렀고, 이름 없는 이들의 삶에 존경을 보냈다. 살해된 메리 루이스의 경우가 그 예다. 그녀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지만, 그녀의 유해를 연구한 덕분에 다른 수많은 살인사건이 해결되었다. 배스는 그녀를 '법의학의 영웅'이라 치켜세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저자의 태도다. 오류를 숨기지 않고 실수를 통해 방향을 바로잡았다. 그는 구더기와 파리를 혐오의 상징이 아니라 생태의 일부로 보았고, 부패를 파괴가 아닌 변환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부패의 언어』는 죽음을 통해 생명의 존엄을 탐구한 기록이며 인간이 남긴 마지막 흔적을 과학의 언어로 되살려낸 이야기다. 만약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허무한 죽음이 더 많았을 것이고 어쩌면 범죄자가 날뛰는 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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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시체를 도구화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야말로 누구보다 시체에 대한 예우를 보이고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가 있었기에 법의학이 발전하고 미국의 우수한 검시관, FBI 요원, 경찰 등이 정의를 구현할 수 있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를 구하는 희망의 빛이 된 것이다.


원서 기준, 2004년 나온 책임에도 여전히 미국 아마존과 굿리즈에서 높은 평점을 유지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하고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끝으로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의 저자이자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수는 『부패의 언어』 한국판 추천글을 전한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그 행위는 두려움을 넘어선 연민이며, 과학을 넘어선 윤리다. 내가 매주 시신을 만나며 마음속으로 되뇌는 그 문장을, 이 책은 섬세하고도 강인하게 써 내려간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판단이 아니라 경청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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