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탑의 살인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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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연히 읽게 된 치넨 미키토 작가님의 ‘병동 시리즈’(가면 병동 2017, 시한병동 2018)는 미국의 슬래셔 영화를 연상 시키는 킬링 타임으로 적당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큰 감흥이 없었기에 이후  작가님과 연이 닿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데뷔 10년 차에 출간 한 『유리탑의 살인』이 일본 대표 추리작가들에게 극찬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현직 의사 겸 작가로 그간 의학을 토대로 미스터리/서스펜스/감동 장르의 소설을 쓰던 분이 갑자기 본격 추리소설을 썼다기에 반신반의 했다. 
《설원 위에 우뚝 솟은 유리탑. 미스터리 애호가이자 성공한 의사는 명탐정, 형사, 미스터리 잡지 편집자, 영능력자, 미스터리 작가에게 세상을 놀래킬 깜작 발표가 있다며 이들을 초대했다. 그런데 그는 발표를 앞두고 살해 당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살인사건. 고립 된 유리탑에서 과연 명탐정은 범인을 찾아 낼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이런 장르에 익숙한 독자일수록 식상한 요소다.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반성했다. 선입견의 무서움을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은 추리소설 팬을 위한 요소가 가득함과 동시에 충격의 반전을 선사하는 걸작이었다.


<클리셰를 극한까지 다듬어 완성한 소설>
본격 추리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한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중, 고등학교 시절 셜록 홈즈, 아르센 뤼팽 시리즈,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 등을 탐독하며 추리/미스터리 소설에 입문한 뒤 자연스럽게 일본 추리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본격 추리 소설이라 불리는 ‘지적, 논리 추리게임’은 무료함을 달래는 최적의 장르였다.
하지만 반복 되는 배경, 황당한 설정, 트릭을 위해 무시되는 개연성과 황당함 때문에 언젠가부터 멀리하게 되었다. 『유리탑의 살인』도 그러한 분위기가 연상되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관 시리즈’를 오마주 한 ‘유리탑’이란 명칭부터 추리 소설의 정석과도 같은 직업의 등장인물, 눈사태로 마비 된 도로와 통신(클로즈드 서클) 그리고 암호 미스터리는 반가움과 동시에 따분함을 불러 일으켰다. 전개 또한 범인이 서두에 공개하는 도서倒敍 추리소설로 시작해, 연속 밀실 살인사건이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이어진다. 트릭 자체도 크게 어렵지 않아 일부 독자는 충분히 알아챌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클리셰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다듬어 인물과 배경에 매력을 더하고 다음장을 넘기게 하는 필력에 여러모로 감탄했다. 그리고 이러한 클리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본격 추리 소설 매니아를 위한 테마파크>
『유리탑의 살인』에서 인용 된 작품 43편이다.(리드비 출판사 링크, 개인 체크) 전부 열거 할 수 없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점성술 살인사건』, <관 시리즈>, 『Y의 비극』, 『용의자 X의 헌신』, 『리라장 살인사건』 등 동서양 추리 소설 역사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작품이 소개 된다. 단순히 언급 되는 작품도 있지만, <관 시리즈>처럼 주요 배경의 오마주와 트릭으로 사용되는 소설도 있다. 이중 미번역 된 9작품을 제외하고 34편 중 내가 보유한 책은 31권이다. 대부분을 읽었다는 말이다. 
예쁜 표현은 아니지만, 쉽게 말해 나 같은 추리 쓉.덕.들이 환장할 떡밥이 가득했다. 끊임 없이 제시되는 복선과 반전에 대한 힌트는 덕후들로 하여금 한 문장도 놓칠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본격 추리 소설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반대로 이런 요소에 익숙해지면 지루함을 느끼는 요소이다. 그러한 식상함을 이겨내고 일본 추리 소설 대가들의 극찬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해결 파트이다. 
200X년(스포 방지)개봉하여 영화계의 한 획을 그은 어떤 작품이 생각나는 반전을 가진 후반부를 읽고 전율하지 않을 독자가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작가가 직조해낸 설정 그리고 메타 소설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서 파생된 결과물에 감탄이 나온다. 한마디로 본격 추리 소설의 극한을 표현해냈다.

 



먼저 이 서평을 쓰기 위해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써서 이정도라는 점 양해 바란다. 아마 읽자 마자 썼다면 여러모로 심각했을게 분명하다. 3번 정도 읽으니 조금 진정되어 키보드에 손을 올릴 수 있었다.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12층이나 되는 유리탑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설정, 등장인물의 과장 된 만화적 개성은 독자에 따라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단언컨데 최근 몇 년 동안 읽은 최고의 본격 추리 소설이었다. 아니 일본 본격 추리 소설 역사를 통틀어도 TOP5 안에 들어간다.(리드비 출판사로 부터 책을 지원 받았지만, 재미없는 책은 반려하는 B블리오다. 믿으셔도 좋다)
그렇다면 조금 예민한 문제. 이 책을 사도 될까? 개인적으론 추리/미스터리 소설의 팬이라면 살포시 권해본다. 지금 읽어도 좋지만, 몇 년 뒤 추리 내공이 쌓여 다시 읽으면 분명 또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 매니악해서 입문자에겐 선뜻 권하기 어렵지만, 동서양 추리/미스터리 소설을 찍먹 해본 분이라면 강력히 독서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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