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 미안.
일주일 치 방세를 빚지고 가는구나.
내 파를 잘 돌봐줘. 뿌리에 이끼가 끼지 않도록…
다케오 씨에게도 미안하다고 전해줘, 아니 철 좀 들라고 해.
여자를 귀찮게 하는 어린애 같은 남자는 질색이야.

우리 엄마는 그랬지. 남자는 다독이면서 구슬려야 한다고…
그래서 난 엄마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려고 새 아빠를 유혹했어.
정말 엄마는 잘도 이해하더군. 대신 나를 버렸지만…
새 아빠는, 내 사랑하는 소이치의 생물학적 아버지란 점을 빼고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지.
아! 내가 마음껏 바닷가 별장을 쓰게 해주는 것도 제외하고…

소이치와 나는 별과 달이 빚어내었어.
우리가 만들어낸 사랑의 멜로디는 주파수를 타고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지.
그 멜로디가 자기들을 향해 연주된 것으로 착각하고 나를 안아주던 사람들…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 침묵을 그들은 사랑으로 착각했나 봐.
난 그들의 품에서 소이치를 향한 사랑의 연주를 리허설 했을 뿐인데...
그저 안아주는 것으로만 끝을 낼 수 없었던 그들은 날 참으로 귀찮게 했지.
그래서 짜증으로 얼룩진 나의 신경들은
나의 사랑 소이치를 향한 아름다운 멜로디를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하게 된 거야.
쓸모가 없어진 거지. 그래서 나의 달로 돌아가려 해.
차가운 달의 기운으로 더욱 냉정해져서 누구의 품에도 안길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때 다시 연주하려 해.
리카, 너만은 내 연주를 들어도 좋아.
니가 좋아하는, 비 내리는 히뿌연 오후, 창가에서 만나.

안녕. 하나코로부터 > 낙하하는 저녁_ 에쿠니 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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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 아침, 월요일이니 당연히 주부들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일색이다.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역? 미스코리아들과 무슨 미용협회 회장, 대회 주최 신문사 직원 등이 찬성의 입장에 섰고, herstory 여 기자와 안티 미스코리아 진출자 등 찬성자들에 비해 조금 못생긴(^^) 여자들이 반대파였다.

'어디, 뭐라고 주장하나 한 번 들어보자'라는 생각으로 30여분을 보다가 화딱지가 나서 채널을 돌려버렸다. 그녀들은 논쟁 또는 토론의 아주 기초적인 방식조차 모르는 듯 했다.

상대가 찬성을 하는데 근거로 든 이유. 예로 "국제 대회에 진출할 대표를 뽑기 때문에 국제 대회의 기준을 좇아 수영복 심사를 하는 거고, 대표로 뽑힌 여성은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여자로 국제 무대에 선다"고 한다. 그러자 반론으로 이런 얘길 한다. "수영복 심사는 여성을 성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여자를 왜 몸으로만 판단하느냐? 나는 수영복 심사를 차치하고 미인대회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론은 계속 이런 식이었다. 상대가 주장을 하면, 그의 반대되는 내용이나 주장을 근거를 들어 설득을 시켜야 하는데 그냥 싫단다. 요즘 남성들 중심의 토론을 한 번 보자. 책상 위에 브리프들 잔뜩 쌓아놓고 상대가 발언을 하고 있는 동안 신나게 자료를 넘긴다. 너무 자료를 많이 준비해 시간 제한을 재차 촉구해도 할 말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토론자의 특성에 따라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지만, 서로 주장하는 바를 잘 드러내주고 수긍을 넘어서 설득적이다.

오늘 아침 그녀들의 공통 의견은 여성의 위상 강화였다. 한쪽은 수영복 입고 위상 강화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은 옷 입고 강화 하자는 것이었다. 여성 위상을 그렇게 운운하는 사람들이 어째 그리 준비가 안 돼 있을까? 

남자들은 미인대회 날이면 선술집에 삼삼오오 모여 1번이 이쁘네, 5번이 이쁘네 난리면서, 이런 여자들의 토론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무시한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러나 남자들이 벗은 여자들에게만 관심을 보인다고 하기 전에 눈뒤집히게 지성적이고 똑부러진 모습을 보여주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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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5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충분히 타당성을 갖춘 논리적 증거가 결여된 주장은 단순한 개소리에 불과하죠..
미스코리아 대회의 존폐 여부,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더이상 실시하지 않겠다고 한 걸 들은 것 같은데 맞나요?)의 실시.....
제발 사회적 이슈로만 반짝 !끝나질 않길 바랄 뿐이죠. 어설픈 페미니즘의 운운은 즉자적인 거부감만을 일으킬 뿐이라고 생각해요.....

2004-04-05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4-17 0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꺼~억”

“아휴, 과장님. 제발이요.”

 

김과장은 민망함을 애써 감추며 공기를 잔뜩 삼키고 ‘그~륵’ 소리를 또 한 번 낸다. 김과장은 몇 해 전부터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다. 식전에는 쓰려서 고통, 식후엔 거북함과 트림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른 중반에 얻은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건강은 챙겨야 하겠기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내시경 검사를 받았지만, 진단 결과는 증세 無. 습관적인 트림을 호소하자 의사는 음식물이 잘 삭지 않고 괴어서 생긴 가스가 복받쳐 오르거나, 공기가 위와 장에 차서 그런 것이니 공기를 삼키는 것을 자제하라고 한다. 특히 음식을 먹을 때 허겁지겁 먹지 말고 천천히, 물을 마실 때도 천천히, 숨을 쉴 때도 입을 벌리지 말고 코로 쉬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급적이면 담배와 커피, 탄산가스가 들어있는 음료는 피하고 기름기가 많은 음식은 멀리하는 생활을 해오던 김과장. 그래도 근무 중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꺼~억’소리는 계속되었다. 트림 소리를 낼 때마다 견딜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쥐고 흔드는 여직원에게 궁색하게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들며 동정표를 사보기도 하지만 김과장 자신도 원인 모를 트림 행진에 속만 탈 뿐이다.

 

김과장이 트림으로 고심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김과장의 생후 6개월 된 딸아이 ‘송이’ 때문이다. 송이는 수유 후에 트림을 못하고 자꾸 토해 아내의 육아일기를 우울함으로 도배하고 있었다. 신생아의 경우 트림을 못하고 구토로 이어지면 음식물이 폐로 들어가 폐렴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차라, 김과장 내외의 걱정은 태산만 같은데…

밖에서 아빠는 트림을 해서 고민이고, 안에서 아이는 트림을 못해서 걱정이다. 영화 스위치에서 남녀의 성이 바뀌는 것처럼 두 사람의 증세가 하루아침에 바뀌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황당한 기대를 갖는 김과장. 담배연기가 송이의 증세에 악영향을 미친다 하여 베란다에서 끽연을 하던 것도 아예 끊어버렸다.

 

돌 전까지는 식도 하단의 근육이 미숙하여 자주 게우게 되며 수유 후에 게우는 아기는 자세와 관련 있다는 말에 앉혀도 보고 뉘어도 본다. 이유식에 아직 적응이 안돼 그런가 싶어  이유식 종류도 줄이고, 아직 송이는 성에 안찼는데도 젖병을 빼서 양을 줄여보기도 했다. 이뿐인가, 엎드려 재우거나 오른쪽으로 눕히면 트림이 잘 나온다 하여, 두 부부가 나란히 송이 옆에 누워 트림을 해대는 밤이면 늑대 가족이 달밤에 목놓아 우는 광경과 같았으니. 그래도 아빠가 ‘꺼~억’, ‘그~륵’하는 소리에 송이도 따라 트림을 할 때면 두 부부의 눈가엔 기쁨의 눈물이 맺히는 것이었다.

김과장의 트림 연주(?)에 송이의 증세가 서서히 호전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김과장도 의식적으로 공기 삼킴을 주의한 덕에 트림 증세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급한 아내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흐른다.

“송이가 또 트림을 안해, 토하면 어쩌지 여보? 조금 먹였는데도 그래.”

 

아내는 모든 게 자기 탓인 양,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콩비지처럼 게워낸 음식물이 송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것을 상상하자, 김과장은 견딜 수가 없었다.

“송이 바꿔.”

“무슨 소리야, 송이가 무슨 말을 한다고…”

“아 글쎄 송이 귀에다 수화기 갖다 대.”

 

잠시 후 김과장은 전화기에 대고 연주를 시작한다.

~억 그~륵 그~륵 그~륵 그~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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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1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송이가 저 애달픈 아빠의 맘 좀 알아들었으면 좋으련만....
 


[인물과 사상]은 대학때부터 몇 년 간 꾸준히 정기구독하던 책이다.

신문방송을 전공한 탓에,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진실(truth)을 절대 팩트(fact)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웩더독'이란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기득 계층은 자신의 잇권을 지키기 위해 이슈를 생산해 낸다. 이를 의제 설정이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의제 설정은 시민들에 의해 도출되어 사회 전반의 관심을 끌고 나아가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북풍이, 기득세력이 셋팅한 의제의 좋은 예이다. 김현희가 일으킨 칼기 폭격 역시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조작된 사건이라는 의혹이 있다. 아니, 증거만 없을 뿐 조작이라는 여론이 크다.

그런저런 얘기들을 [인물과 사상]에서 많이 접했다. 그러나 사회활동을 하면서 '내가 너무나 비판적이고, 매사에 의심하는 사람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는 선의의 경쟁이라는 무드를 타고 원활한 인간 관계와 업무 수행을 해야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작은 몸부림으로, 이 책을 끊었다. 잠시 금단 현상이 뒤따랐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도 멀리 했다. 가급적이면 비판도 환호도 아닌 중립의 자세를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TV나 신문 등을 통해 정치판을 주시해 온건 사실이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내가 도대체 이 사안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탄핵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강준만과 유시민을 좋아한다. 솔직히 그들의 논조와 사고방식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마음이 좀 다급해져서 급하게 4월호 [인물과 사상]을 알라딘에서 주문했다. 이 책을 읽어보니, 강준만과 유시민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문득 과거 내 비판적 성향도 어찌보면 그들의 의제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제는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 내는 능력을 기를 것이지, 무조건 비판을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보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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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1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셨군요........
저 같은 경우는 저 자신의 미디어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그것 또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있어 관건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만....
저도 한 번 자문해 보지요. "나는 진보한 것인가?".....
 

 

 

"넌 꼭 명이 긴 남자와 결혼해라."

"아니다. 남자는 자고로 다정해야지."

"아무것도 볼 거 없다. 남자는 성실하기만 하면 돼."

 

남편과 15년을 살다가 저 세상에 보내고, 15년째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살고 있는 엄마는 존재하지도 않는 딸의 결혼 상대를 향해 요구사항이 많다. 딸과 쇼핑을 나선 길에서도 뭇 남자들을 가리키며, 키가 좀 작네, 얼굴은 동안인데 배가 나왔네, 손이 거친걸 보니 고상한 직종은 아닌 듯 하다느니, 모든 남자를 사윗감 심사에 올리곤 하는 것이다.

올해로 서른을 맞는 딸은 외로움을 벗삼아 15년을 살아온 엄마를 보고 자라서인지 결혼엔 전혀 관심이 없다. 바람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엄마가 재혼을 해서 자식들을 향한 집착을 거두는 것이다. 노후에 며느리 덕도 못 볼, 딸만 셋인 박복한 엄마를 거두어줄 누군가가 나타났으면 하는 대책 없는 기대만 가득한 나날...

 

엄마는 시계추처럼 사는 사람이다. 한 달에 한번 계모임, 일주일에 한 번 알 수 없는 친구와의 외식을 빼곤 새벽 6시 출근, 저녁 7시 퇴근이 뿌리 박힌 일상이다. 그렇게 15년을 살아오면서도 지겹다는 푸념 한 마디 없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한 두 정거장은 걸어도 자식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은 절대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큰 딸이 첫 월급을 타서 용돈을 드려도 큰 딸 이름으로 다시 적금을 드는 사람, 탈수밖에 안 되는 애물단지 세탁기를 치우려고 일년이 넘게 모은 돈으로 두말 없이 컴퓨터를 사는 사람, 주차 문제로 밤마다 거친 남자들과 싸우는 딸이 안쓰러워 융자를 터 주차장이 넓은 집으로 옮기는 사람, 엄마에겐 오로지 자식들 뿐이다. 딸 자식이 아무리 잘 돼도 친정엄마에겐 그다지 득이 될 일이 없다고 실소하면서도, 아빠 없이 홀로 잘 키웠다는 주변의 소리 한 마디에 어깨가 들썩인다.

 

"언니, 일어나봐. 엄마가 안 들어왔어."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엄마 주변의 연락처라고 해봐야 몇 친구들 뿐이었고,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는 것도 실례가 된다 싶어 딸 셋이 동그랗게 앉아 형광등만 밝히고 있었다. 쓸데 없이 기본 요금만 나간다고 생일 선물로 하겠다는 핸드폰을 극구 거절하던 엄마에게 끝까지 우기지 못했던 것이 후회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이 밀려왔다.

새벽녘에 울린 전화벨, 엄마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와 드라이브 중에 사고가 생겨서 병원이라는 것, 엄마는 괜찮고 친구만 조금 다쳤다는 것, 응급처방하고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새벽이라는 등 밤새 엄마 걱정에 잠을 설친 딸들에게 미안한 엄마는 목소리가 잦아든다. 딸은 엄마의 안녕에 안심을 했지만, 그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껏 남자라곤 돌아가신 아빠밖에 모르던 엄마에게 푼돈이나 노리는 졸부가 들러붙은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일었다.

 

딸은 엄마의 일분 일초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수요일마다 저녁을 먹는 친구, 평생 첫 외박이 되었던 교통 사고 당일 함께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그 존재를 알아내기 위해 딸은 흥신소 직원이 되기도 하고 전화 도청자가 되기도 했다. 엄마는 딸의 의심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라는 씨도 안 먹히는 얘기가 부쩍 늘었을 뿐이다.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마음만 졸이던 나날들, 뒷조사에 지친 딸은 어느날 술에 만취해 들어와 엄마에게 퍼부어 댔다. 다 늙어서 웬 바람이냐, 딸 자식들 시집 보낸다는 사람이 행실이 그래서 시집 잘도 보내겠다, 시집 같은 거 아예 포기했으니 엄마나 실컷 즐기고 다니라고...

 

쓰린 속보다 더 헤집어진 마음을 다 잡으며 딸은 보따리를 쌌다. 딸을 데리고 혼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잠시 얹혀 살아도 되겠느냐는 전화를 넣고 막 일어나는 참, 전화벨이 울린다.

"엄만데, 오후에 신촌으로 나와."

엄마의 목소리는 술 주정한 딸을 책망하는 것도, 엄마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김치 맛있게 담가 놨으니 저녁은 집에 와서 먹으라는 예의 사랑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뭔가 잘못되어가는 일을 제 힘으로는 어쩌지 못해 베개에 얼굴을 묻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답답함을 울음으로 삭이는 것이었다.

 

"엄마 친구야."

맘 좋게 생긴 남자는 풍채도 커서 해를 등지고 서면 엄마에게 큰 그늘이 드리웠다. 엄마보다 5, 6년 연상은 될 듯한 까까머리에 개구리 군복을 입은 남자, 작은 엄마의 소개로 만나 가족들 몰래 10년을 사귀어(?) 온 엄마의 연인이었다. 딸들 다 시집 보내고 같이 살기로 약속한지 10년. 서른이 되어도 시집갈 생각을 안 하는 큰 딸, 대학원 마치고 유학 간다는 둘째 딸, 이제 갓 스물이 된 늦둥이 막내 딸까지, 두 사람의 결합은 멀고 먼 바람에 지나친 것이었다. 처연한 엄마와 엄마의 남자를 보며 딸은 지난 세월이 너무나 아쉽고 미안했다. 세월만으로도 대죄를 지은 것인데, 엄마를 형편없는 여자로 취급했으니 죽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10년 가까이 그래왔듯이 연신 엄마의 그릇 위로 고깃점을 올려주었다. 말썽 많은 큰딸의 눈치가 보였는지 많이 먹으라고 한 마디 건넨다. 그 동안 속여서 미안하다며 그을은 손으로 까까 머리를 쓸어 넘기는 수줍은 남자를 보며, 딸은 밥알과 함께 짭짤한 콧물을 넘겨야 했다. 어쩌면 엄마가 딸에게 늘 얘기한 명이 긴 남자, 자상한 남자, 성실한 남자는 바로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딸의 입에선 울음과 웃음이 섞인 한 마디가 튀어 나왔다.

 

"엄마 먼저 시집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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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1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뭐라 말해야 할 지.......
한 편의 훈훈한 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입니다. 어머님과 어머님의 연인의 사랑, 님의 마음...다 아름답습니다.

별점에의미안둠 2004-04-1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니눈물이조금씩나오네요...

panggui 2004-04-17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세이 한 편을 써야 하는데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였지요. 제 어머니 얘기를 쓰면서 참 송구스럽고 괴로웠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하면서 말이죠.
엄마를 포함해 모든 분들이 좋았노라 용기를 주셔서, 이렇게 뻔뻔하게 살고 있습니다. 헤헤